관법수행과 팔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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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법수행과 팔괘장

최근 몇년간 무술에 관해 공부하던 여러 테마중에서,

2년전쯤에 간단히 쓰다 말았던 어떤 글을 올립니다.

저 역시 무공을 완성한 사람이 아니니까,

서울팔괘장연구회에서 수련하시는 분 들은 참고자료로만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 글을 퍼갈 경우에는 출처를 반드시 밝혀주시기 바라고,

출처 밝히지 않고 퍼가거나, 자신이 이 글을 썼다고 하시는 분이 등장할 경우, 법적 책임을 묻겠습니다.


觀法수행과 八卦掌

● 내가권과 외가권

 

그동안 내가권과 외가권을 구분하기 위한 수많은 논쟁이 있어왔다. 소림권으로 대표되는 외가권은 근육과 뼈, 피부를 단련하기 때문에 학습진도가 빠르고 파워풀하다고 알려져 있고, 태극권, 팔괘장등의 내가권은 내장과 감각을 단련하여 내공을 쌓기 때문에, 진도는 느리지만 내공을 완성한 이후에는 외가권보다 강력하다고들 흔히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소림권법에 있는 여러 가지 기공적인 수련법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 것인가? 또한 팔괘장에서도 내공 단련 뿐 아니라, 기격을 위해 반복적인 권법수련을 하는데, 이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외공이 아닌 내공단련법이 있다고 해서 내가권이라고 볼 수는 없는 것이며, 대부분의 무술은 외가적 단련법과 내가적 단련법이 있게 마련이다. 요컨대, 내가권과 외가권의 구분을 위한 그간의 논의는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현재 존재하는 무술의 외형적인 형태로 내가권과 외가권을 구별할 수 없다면, 진정한 외가와 내가의 구별은 그 무술이 가진 ‘구조’와 ‘맥락’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모든 무술은 자신들만의 공력 단련법이 있게 마련이며, 무술을 해석학적 시각으로 분석하다보면 이것은 마치 유전자와 같이 쉽게 변화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왜냐하면 이것이 바로 그 무술의 원리이자 철학이기 때문이다.

철학은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며, 따라서 모든 무술은 세상을 바라보는 그들만의 시각, 즉 철학을 지닌다. 마음은 철학에 의해 움직이고, 몸은 마음에 따라 움직인다. 무술마다 저마다의 무술철학이 다르니, 그 동작과 원리, 운동방식과 해석도 달라질 수 밖에 없다.

무술은 사변적 논쟁이 아니며, 행동 철학이다. 바로 ‘어떻게 움직일 것인가’가 무술철학의 근본 원리인 것이다. 동양의 수많은 명상과 정신수련 체계를 일별하면, 수십 수백개의 방편이 존재한다. 그러나 그 수많은 방편들은 크게 두가지로 대별할 수 있다.


● 사마타(samatha, 止)와 위빠사나(vipassana, 觀) 수행의 정의와 차이점

명상을 수행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불교의 수행법만 하더라도 크게 사념처(四念處), 사정단(四正斷), 사여의족(四如意足), 오근(五根), 오력(五力), 칠각지(七覺支), 팔정도(八正道)와 같이 37가지로 통칭되는 삼십칠 조도품(三十七 助道品)이 알려져 있다.

이 많은 수행방법은 크게 두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감각을 그치는 ‘사마타(samatha, 止)’ 수행법과, 감각을 그치지 않고 그냥 바라보는 ‘위빠사나(vipassana, 觀)’의 수행법이 그것이다.

이 수행법들은 초기 불교에서 크게 융성하여 지금까지 전해내려오는 오래된 수행법이지만, 비단 불교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감각을 그치는 사마타(samatha)는 원시불교 이전에도 있었고, 중국 도교에서도 발견할 수 있었던 전통적이고 효과적인 수행법이다. 선(禪)으로 불리는 수행법이 바로 그것인데, 인도 불교는 중국에 이르러서 도교와 접목되면서 ‘선(禪)’을 불교의 수행체계에 편입시켰다. 대승(大乘)에서 선(禪)은 중국에서 발달한 것이며, ‘직지인심 견성성불(直指人心 見性成佛)’하는 전통을 가리킨다.

모든 수행의 공동목표는 깨달음에 이르는 것이다. 다만 그 방법에 있어서 선(禪)은 직관적이며, 위빠사나는 보다 분석적이고 점진적으로 접근한다.

중국에서 선(禪)으로 불리는 ‘사마타(samatha)’는 집중명상으로써, 어떤 하나의 특정 대상에 의식을 집중시키는데, 주로 시각적, 청각적 감각이 그것이다. 이 방법은 불교뿐 아니라 요가수행에서도 흔히 사용되며, ‘옴’, ‘훔’, ‘옴마니반메훔’ 등의 특정 낱말과 같은 만트라(mantra)를 반복하여 염송하거나, 시각적으로 보이는 촛불등에 의식을 집중해 나가는 수련이며, 흔히 지법(止法)으로 불린다.

사마타(samatha)는 즉 ‘마음을 단련하여 일체의 외경(外境)과 난상(亂想)에 의해 움직이는 일이 없이 마음을 특정한 대상에 집중하는것’을 말한다. 따라서 사마타(samatha)를 수행하게 되면 마음을 닦게 되며, 선정(禪定)에 들게 되고, 심해탈(心解脫)을 이루게 된다.

사마타(samatha)로 표현되는 선(禪)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자기 존재의 속알맹이를 똑바로 꿰뚫어보는 내적인 자각을 강조하는데에 있다.

한자의 선(禪)은 원래 산스크리트어의 ‘Dhyana(禪那)’의 음역이기는 하지만, 의미상 양자는 크게 다르다. ‘Dhyana(禪那)’가 일종의 집중적이고 일정한 방법에 의한 명상을 의미하는데 비해서, 중국의 선사(禪師)들이 이해한 바에 의하면 선(禪)은 본체에 대한 돈오(頓悟), 자성(自性)에 대한 직관적인 지각(知覺)의 증득(證得)을 본질로 한다. 그래서 선(禪)에서는 ‘교외별전(敎外別傳)․불립문자(不立文字)․직지인심(直指人心)․견성성불(見性成佛)’을 주장한다.

인식론적으로 선(禪)은 직관에 의한 무분별의 분별을 강조하며, 어느 곳에도 얽매이지 않는 마음, 무심(無心)을 주장한다. 이 무심(無心)의 경지가 바로 삼매(三昧, samadhi)인데, 이 말의 어원은 사마타(samatha, 止)에서 왔다.

인도의 불교는 중국땅으로 와서 묵조선(黙照禪), 간화선(看話禪), 염불선(念佛禪)으로 발전하였다. 간화선의 ‘화(話)’는 깨달음의 세계를 총체적으로 드러내는 본래의 모습이고, 간(看)은 ‘본다’는 뜻으로, 선(禪)의 공안(公案)을 보고 열심히 공부하여 마침내 대오(大悟)하기에 이르도록 좌선(坐禪)하는 방법이다. 한․중․일 3국은 간화선(看話禪)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데, 이는 중국의 임제종(臨濟宗)에서 주창되어 대혜(大慧)에 이르러 번성하였다. 그는 묵조선(黙照禪)과 이전의 선행(禪行)에 비판을 가하고 간화선을 주창했으며, 이를 조주(趙州)의 ‘무(無)’자 화두를 통해 가르쳤다. 한국의 선(禪)의 맥락은 대혜의 간화선을 받아들인 고려의 지눌(知訥)에게서 그 원류를 찾을 수 있다. 그는 《간화결의론(着話決疑論)》을 통해 간화선 사상을 천명하였고, 그의 사상은 제자 혜심(慧諶)-지엄(智嚴)-휴정(休靜)-경허(鏡虛)-만공(滿空)으로 이어져 오늘날의 한국 불교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렇다면 선(禪)의 영향을 받은 무술은 어떤 모습으로 변화 발전하였을까? 선불교(禪佛敎)의 본산이라는 중국 소림사에서는 무술도 함께 발흥하였고, 소림무술이 ‘사마타(止)’를 수행체계로 삼은 것은 우연한 것이 아니다. 소림무술은 철저하게 감각을 그치며, 무술을 통해 선정(禪定)에 이르는 것을 그 목표로 한다. 그래서 소림무술은 정신과 힘의 집중을 위해 근골과 피부를 단련하며, 기격시에 근골의 힘을 이용한다. 이것은 바로 외가권의 대표적인 특징이다. 중국 선불교(禪佛敎)는 한국을 거쳐 일본으로 전파되었는데, 일본에서도 역시 이와 동일한 선(禪)의 전통이 무술에서 나타났다.

일본의 전통무술은 검도, 유도등으로 대표되는데, 일본 무도에서의 최고의 경지는 바로 부동심(不動心)이다.

어떠한 외물(外物)에서도 마음이 굳건하게 흔들리지 않는 경지, 이것이 바로 부동심(不動心), 제불부동지(諸佛不動智)이며, 일본의 무도가 추구하는 가장 고양된 차원으로 생각되었다.

무심(無心)에 대해 일본의 다꾸앙 선사(澤庵禪師)가 야규우 다지마노가미 무네노리(柳生但馬守宗矩)에게 내려준 부동지신묘록(不動智神妙錄)에서 말한 내용에 의하면,

‘무심(無心)의 마음이란(中略) 본디 어떤 일정한 지향 같은 것도 없고, 분별도 사념(思念)도 아무 것도 없을 때의 마음, 온 몸에 퍼져 속속들이 미치는 마음이다. 어떤 것에도 매이지 않는 마음이다. 돌이나 나무와는 달리 머무르는 데 없음을 무심이라 한다. 어딘가에 머무르면 마음속에 무엇이 있는 것이고, 머무르는 데가 없으면 마음속에 아무것도 없는 것이니, 이렇게 마음에 아무것도 없는 경지를 무심의 마음, 또는 무심, 무념(無念)이라 한다.’ 라고 하면서, ‘검을 잡고 상대를 마주 대할 때 마음을 특정한 한 곳 즉 예를 들면 상대의 눈이라든가 칼에 두지 말고 상대의 전체에 두라고 하고 이러한 마음의 상태를 무심(無心)’ 이라고 설파했다.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다꾸앙 선사의 말을 두고, 부동심은 한곳에 집중하는 ‘지(止)’가 아니라고 생각할 수 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결국 ‘무(無)’에 집중하는것이며, 사마타 수행에서 얻어지는 삼매(三昧, samadhi)의 경지라고 볼 수 있다.

위빠사나(vipassana), 즉 관(觀)에 의한 수행은 사마타(samatha)와는 조금 다르다. 위빠사나(vipassana)는 붓다조차도 ‘깨달음에 이르는 유일한 길’로 설했던, 불교 특유의 수행방법이다.

위빠사나는 사마타와는 달리 의식을 어떤 특정 대상에 고착함이 없이 경험하는 세계를 그대로 관찰하기 위해 의식을 열어가는 통찰명상을 하는데, 어느 한 대상에 집중하지 않으며 그 대신 순간순간 접하는 사건들을 특정한 개입이나 판단없이 가만히 지켜볼 것을 강조한다.

위빠사나는 생각의 대상인 신․수․심․법(身受心法)을 관(觀)하는데, 4가지를 관(觀)한다고 해서 ‘사념처법(四念處法)’이라고 한다.

우리 인간은 항상 외물에 정신을 팔려 나 자신에 관해서는 잘 알지 못한채 살아가게 된다. 그래서 밖에 대해서는 잘 알지만,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나의 실상(實相)에 눈뜨기 위해 현재 여기에서 내가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가를 관(觀)하는 것이 위빠사나이다. 그래서 우리는 호흡이나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아야 한다. 이런 연유로, 서양에서는 위빠사나를 Insight Meditation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내부적으로 자신을 관(觀)하는 명상이기 때문이다.

위빠사나 수행중, 내가권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것은 신(身)에 대한 관찰이다.

몸(身)에 대한 관찰에는 ① 호흡에 대한 관찰, ② 몸의 움직임에 대한 관찰, ③ 몸을 구성하는 사지와 32부분에 대한 관찰, ④ 공동묘지의 시체가 변해가는 구상관(九想觀)이 포함된다.

그러면 이러한 것을 어떻게 관찰(觀察)하라는 것인가? 그것은 매우 단순하게도 ‘그저 바라보라’는 것이다. 이 수행의 핵심은 바로 여기에 있다.

위빠사나의 수행방법 중, 행선(行禪)의 내용은 아래와 같은데, 팔괘장 주권의 요결과 극히 흡사하다.


위빠사나의 행선(걷는 수행)

1단계

․초보자들은 너무 빨리 걷거나 너무 느리게 걷지 말고 천천히 조금 느린 속도로 걷는다.

․적당한 거리를 걷는다.

․처음에 걸으려고 하는 의도에서 시작하여 주요 동작들에 마음을 챙긴다.

2단계

․ 시작할 때, 처음의 5분 정도는 굳어 있는 다리를 풀어 주기 위해서 보통의 걸음으로 걸으며, ‘왼발’,‘오른발’하며 각 걸음을 의식한다

3단계

․다리의 근육이 풀리면 걷는 속도를 느리게 하며, 움직이고 있는 다리 동작의 각 단계를 ‘들음’, ‘나아감’, ‘놓음’이라는 3단계의 동작으로 나누어 인식한다.

․행선이 향상됨에 따라 걷는 동작의 각 단계가 더욱 세분된다. 발전하면서 순간 순간의 움직이는 동작에 마음을 집중시켜 알아차린다.

4단계

이처럼 걸으면서 알아차려야 하는 현상은 발바닥에서 무릎 아랫부분의 다리의 감각들이다.

5단계

걷는 동작에 수반되어 일어나는 제반 감각들을 면밀하게 관찰하여 어느 순간에 어떤 감각들이 생겨나고 사라지는가를 알아차릴것.

팔괘장의 수행자들은 이미 깨달았겠지만, 이것은 팔괘장 주권과 거의 똑같은 것이다. 그렇다면 왜 팔괘장에서는 관법수행의 행선을 기본 단련법으로 채용하였을까?

팔괘장은 본래 중국 안휘성 구화산(九華山)에서 발원하였다.

구화산(九華山)은 중국 중국 동남부에 있는 안휘성(安徽省) 청양현(靑陽縣) 남서쪽에 있는 지장보살(地藏菩薩)의 영지(靈地)이며, 관음보살(觀音菩薩)의 보타락산(普陀洛山), 보현보살(普賢菩薩)의 아미산(峨眉山), 문수보살(文殊菩薩)의 오대산(五台山)과 함께 4대명산의 하나이며, 도교와 불교의 성지이다. 옛날에는 구자산(九子山)이라고 했으나 당(唐)나라 때의 시인 이백(李白)이 구화산(九華山)이라고 개칭했다. 그래서 산 속에 이백서당(李白書堂)의 자리가 있었다고 하며, 9개의 봉우리가 우뚝 서 있고, 계곡의 경치가 빼어난 산 이다.

팔괘장의 창시자 동해천은 남방 도교의 수행법인 전천존(轉天尊)의 주권 운동을 도입하여 팔괘의 역학을 기반으로 팔괘장을 창시하였다고 한다. 당시 남방 도교의 수행법인 전천존(轉天尊)이 구체적으로 어떤 수행체계였는지는 지금 확실하게 알기 어려우나, 현재 팔괘장 안에 남아있는 주권의 수행방법과 수행요결로 미루어 볼 때, 남방 불교에서 수행하고 있는 위빠사나 관법 수행과 거의 똑같다는 것은 분명하다.

관(觀)을 중시하는 남방 불교의 수행과 마찬가지로, 팔괘장도 감각을 그치지(止) 않으며, 현상을 바라보는(觀)하는 방식을 채택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신체는 긴장되지 않아야 하며, 온몸의 관절은 송(松) 되어야 하고, 기격시에 근육의 힘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의(意)로써 기(氣)를 이끌게 되는 것이다. 태극권의 ‘용의불용력(用意不用力)’ 개념 역시, 지(止)가 아닌 관(觀)의 전통하에서 성립한 것이다. 태극권과 팔괘장은 수련시에는 매우 천천히 동작을 하는데, 이 역시 위빠사나 관법수행의 한 방편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몸의 내부를 관찰하려면 빨리 움직여서는 가능하지 않다. 팔괘장은 기격시에는 힘있고 빠르게 하지만, 내공 단련을 위해 주권을 돌 때는 매우 천천히 수련한다. 천천히 주권을 돌면서 자신의 다리, 발목, 발바닥의 근육, 발가락 하나 하나를 의식하며, 정해진 각각의 손 동작에 따라서 주어진 의념을 연상하게 된다. 이렇게 팔괘장의 수련은 외가권과는 판이하게 다르며, 더구나 간화선(看話禪)의 기반하에 성립한 일본무술과는 전혀 다르다.

위빠사나 관법수행에 근거한 팔괘장의 수행 요결은 태극권, 형의권과도 서로 통하는 바가 있으며, 그래서 이 세가지 권법을 일러 내가권이라고 한다.

내가권과 외가권의 구분은 기격방식이나 형태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무술이 가지고 있는 수행철학에 근거하는 것이다. 간화선의 세례를 받은 일본무술과 중국 외가권법은 철저하게 사마타(止) 수행에 의한 명상체계를 고수하고 있으며, 반대로 남방불교와 남방도교의 영향을 받은 팔괘장은 위빠사나(觀)의 명상법을 체화하고 있다.

흔히 무술인들은 외가권은 단련된 육체에서 나오는 근력으로 기술을 구사하는 권법이고, 내가권은 근력에 관계없이 내장이나 감각, 정신 등 내면적인 것을 단련하여 기술을 발휘하는 권법이기 때문에, 내공을 이루고 나면 외가권을 능가한다고들 하지만, 이것은 내가권과 외가권의 근본을 잘못 인식한 결론이다. 또한 남파권법은 외가권, 북파권법은 내가권이라는 식으로, 지리적으로 분류하는것도 정확한 분류는 아니다.

외가권과 내가권은 근본 철학이 다르고, 정신과 육체의 단련방법이 다를 뿐이지, 어느 한쪽이 더 우월하거나 무술적으로 강력하다고는 볼 수 없다. 더구나 후대에 성립한 지관법(止觀法)같은 중도사상은 지(止)와 관(觀)을 함께 닦기 때문에, 어느 한쪽에 편향되지도 않는다. 마찬가지로 현대의 무술들은 외가적 장점과 내가적 장점을 상호 흡수하면서 발전했으므로, 순수한 내가권과 순수한 외가권을 구별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일은 아니다. 그러나 성립 초기부터의 갖고 있는 고유한 구조는 마치 유전자와 같아서 쉽게 변화하는 것이 아니므로, 외가권과 내가권의 판단은 구조와 맥락을 파악하여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강유류 가라테에 기를 끌어올리는 호흡법이 있다고 해서 가라테가 내가권이라고 말 할 수는 없는것과 마찬가지이다.

팔괘장은 세상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매우 독특한 무술이며, 상승(上乘)의 공부이다. 더구나 석가모니 붓다 조차도 ‘깨달음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라고 강조했던 관법(觀法)에 의한 수행체계를 갖고 있는, 마음과 몸의 양쪽을 골고루 닦을 수 있는 훌륭한 명상 수행법이자 효과적인 실전 무술이다.

그래서 팔괘장은 세상 어느 무술보다도 건강에 좋으며, 양생과 기공의 효과가 탁월하다. 또한 외가권과는 달리 몸에 무리가 없어서 늙어서도 수련할 수 있고, 노년에 이르러서도 무술로써의 기격능력이 별로 떨어지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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