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례격투와 올림픽, 글래디에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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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에 개봉한 영화 ‘글래디에이터’는 1963년의 ‘클레오파트라’ 이후 거의 40여 년 만에 제작된 로마 제국 시대를 다룬 영화다. 글래디에이터(gladiator)는 원래 고대 로마의 직업검투사를 말하는 것이며 검(剣)을 뜻하는 라틴어 글라디우스(gla-dius)에서 온 것이다.

50556700553 e12b58789a o d글래디에이터는 오락 게임에 자주 등장하는 명칭이기 때문에 이미 귀에 낯설지 않은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영화적인 기교는 생략 하더라도 이 영화는 몇 가지 의문을 남긴다. 우선 포악한 황제 콤모두스 가 콜로세움에서 막시무스와 싸우는 장면, 이것은 영화의 극적인 연출을 위해 그런 것이 아니라 사실이다. 콤모두스 자신이 진짜로 뛰어난 검투사였다.

『명상록』으로 유명한 철학자인 아우렐리우스가 황제로 즉위했을 때 로마의 철학자들은 이것을 자신들의 승리로 여겼으며 황제를 유토피아의 실현자로 환호하였다. 그러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실제로는 현명한 통치자는 아니었다. 특히 경제에 무지하여 예산문제에서는 항상 오판하기가 일쑤였다. 아우렐리우스는 네 명의 자식을 두었는데 딸 둘과 아들 둘 중 딸 하나는 먼저 죽었고 아들 2명은 쌍둥이였지만 하나는 태어나면서 사망했다.

나머지 하나가 콤모두스다. 하지만 로마의 시민들은 이 쌍둥이의 진짜 아버지가 검투사라고 생각하였다. 아우렐리우스의 아내 파우스티나는 미모뿐만 아니라 염문으로도 유명했다. 아우렐리우스만이 로마 내에서 파우스티나의 불륜을 모르거나 무관심하게 흘려보냈다. 아우렐리우스는 『명상록』에서 자기에게 그처럼 성실하고 부드럽고 검소한 아내를 내려주신 신에게 감사한다고 쓰고 있다.

50556700588 05525c41ff o d콤모두스는 뛰어난 용모와 훌륭한 체격을 가지고 있었지만 공부는 싫어하고 경기장에 출입하면서 짐승들과 사투를 벌이는데 열중해서 사람들은 한결같이 ‘피는 못 속이지.’라고 말하였다. 아우렐리우스가 콤모두스를 후계자로 선포하자 황제의 군인들은 부친보다 더 전쟁에 적극적이라는 이유로 찬성했다. 황제가 된 콤모두스는 전쟁보다는 검투사나 사나운 짐승과의 사투에 더 몰두하였고 아침에 일어나 매일같이 호랑이와 사투를 벌여 이들을 죽이기 전에는 아침식사를 하지 않았다.

어느 날 콤모두스가 원형경기장에 있을 때 한 자객이 ‘원로원이 너에게 칼을 보내노라.’고 외치며 달려드는 일이 벌어졌다. 자객은 곧 체포되었는데. 배후는 황제의 누이(부친의 동생, 즉 숙모라는 설도 있음)인 루킬라였다.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콤모두스는 원로원에 대한 증오심이 커진 나머지 원로원 내의 불평분자와 모반자를 색출하여 처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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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동선수의 장례식 부조

이 무고한 희생자중 영화 글래디에이터의 주인공 막시무스가 등장한다. 퀸틸리아누스 집안의 형제였던 막시무스와 콘디아누스는 지극한 형제 애 때문에 후세에까지 이름이 전해오고 있는 사람이다. 두 사람은 학문도, 직업도, 관심도, 취미까지도 같았다. 안토니우스 황제는 이들의 덕망을 높이 평가하여 형제를 같은 해 집정관에 임명하였으며 나중에 아우렐리우스는 두 사람이 공동으로 그리스의 민정을 맡도록 하는 한편 군사지휘권까지 주어 이들은 게르마니아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다. 하지만 콤모두스는 이 형제들을 함께 죽였다.

어려서부터 합리적인 것과 교양을 쌓는 일을 싫어한 콤모두스는 아우렐리우스가 초청한 학자들에게는 냉대하였으나 그에게 투창술과 궁술을 가르쳐 준 파르티아인과 무어인들은 아주 훌륭한 제자를 두게 된 셈 이었다.

당시 로마 주변에는 맹수들이 없었기 때문에 맹수들을 외부께서 노획하여 로마로 운반하여야 했으며 로마의 헤라클레스로 자처한 콤모두스는 공개적으로 경기를 진행하기에 이른다. 콤모두스는 끝을 뾰족하게 깎은 화살로 질주하는 타조를 명중시켰으며 표범 한 마리를 풀어놓아 떨고 있는 죄수에게 달려들기를 기다렸다가 활을 쏘기도 했다. 원형경기장의 우리에서 100마리의 사자가 한꺼번에 쏟아져 나와 돌아다니면 콤모두스가 100개의 단창으로 명중시켜 사자들을 죽였다. 하지만 평민들은 황제가 검투사의 명부에 올라 비천한 직업을 자랑하는 모습을 보며 수치심과 분노를 느꼈다.

콤모두스는 짐승뿐만이 아닌 사람과 검투경기를 755회나 벌였으며 이것이 로마의 공식행사기록으로 게재되었다. 이러한 시합에서 콤모두스는 항상 이겼다. 콤모두스는 상대에게는 납으로 만든 무기를 사용하도록 했는데 그것은 아마 상대방이 황제의 위엄을 몰라보고 결사적으로 덤빌 것을 염려한 탓일 것이다. 결국 콤모두스는 부하 라이투스에게 독살 당해 죽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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꼴레무덤 벽화의 사본. 기원전 475년-450년 경. 업어치기 후의 모습처럼 보인다.

로마의 많은 오락거리중 검투사들의 경기는 매우 인기가 있었다. 이것은 짐승과 짐승. 인간과 짐승. 인간과 인간의 결투로 이루어져 있었다.

검투사들의 경기장은 호수 분지처럼 지면을 낮추고 물을 채울 수도 있었고 반대로 지면을 높여 사막의 우물이나 정글의 효과를 연출할 수도 있었다. 경기장에서의 첫 번째 순서는 로마인들이 보지 못했던 신기한 동물들의 행진이었다. 짐승들은 사자, 코끼리, 호랑이, 표범, 곰, 늑대, 하마 등 1만여 마리가 동원되었다. 행렬을 마친 동물들은 원형경기장의 지하로 사라지고 이어 사투가 시작되었다. 모든 대결이 끝나면 1만 마리의 동물 중 절반가량이 살아남았으며 죽은 동물의 시체가 식사로 제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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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숭이 무덤 벽화의 사본

검투사들은 주로 노예와 죄수 중에서 선택되었으며 신화에 등장하는 인물로 분장하며 그들의 운명을 그대로 재현하기도 했다. 어느 검투사는 헤라클레스로 분장을 하여 화장용 장작더미에 던져져 산 채로 불에 태워지거나 리라를 연주하면서 갈기갈기 찢겨 죽은 오르페우스의 최후를 재현하여야 했다.

검투사들에게는 다양한 등급이 있었으며 검과 격투형식에 따라 나뉘었다. 삼니움 검투사들은 그들 고유의 무기, 즉 크고 길게 늘어진 방패, 얼굴가리개, 깃 달린 투구, 단검을 사용하였고 트라키아 검투사들은 작고 둥근 방패와 큰 낫처럼 구부러진 단도를 사용하였다.

레티아리우스(그물을 든)검투사는 짧은 웃옷이나 앞가리개만 입고 오른손에 든 그물로 완전무장한 세쿠토르(추적자)를 옭아매려 하고 추적자를 잡는데 성공하면 왼손에 가지고 있던 삼지창으로 찔러 죽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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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트루리아의 흑회식 디노스. 기원전 6세기 말

또 안다바타이 검투사들은 말을 타고서 완전히 막힌 얼굴가리개를 쓰고 아무 것도 볼 수 없는 상태에서 싸움을 했다. 그밖에도 여러 형태의 검투사들이 있었는데 두 손에 짧은 단검은 들고 싸운 제국 후기 시대의 디마카리이(쌍칼잡이), 고대브리튼인처럼 전차를 타고 싸운 에세다리이(전차몰이), 갑옷을 완전히 입고 싸움을 한 호플로마키(갑옷 입은 용사), 적을 올가미로 씌우는 라케아리이를 들 수 있다.

운동경기는 원래 고대에는 다양한 제례와 연관이 되는데 풍요를 기원하는 형태가 있는 반면 장례식에서 죽은 이의 영혼을 달래주는 이른바 장례경기(funeral game)가 있다. 이 중 우리가 관심이 있는 것은 장례 경기중 격투, 즉 장례격투이다.

검투사들의 에트루리아인 장례식 때 검술을 선보인 기록이 있는데, 이 의식은 죽은 사람에게 내세에도 무장한 호위병을 붙여주려는데 목적이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격투는 보통 한쪽이 죽을 때까지 계속 되었다.

로마에서는 이런 시합들이 큰 인기를 끌었으며 규모도 컸다. 역사상 처음으로 나오는 시합은 기원전 264년 브루투스의 장례식 때 있었고 여기서는 3쌍이 겨루었으며 율리우스 카이사르(기원전 44년 사망)때에는 300쌍이 한꺼번에 겨루었다. 티투스 황제 때는 당일에 끝나는 격투에서 부터 100일간 벌어진 격투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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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아나의 잔. 심판은 지팡이를 들고 자세히 관찰하기 위해 몸을 숙이고 있다. 기원전 560년 작품.

에트루리아인들은 이탈리아 에트루리아(아펜니노 산맥의 서쪽과 남쪽에 있는 테베레강과 아르노강 사이의 지방)에 살던 고대 민족이다. 이들의 도시문명은 BC 6세기에 절정에 이르렀다. 이들의 뒤를 이어 이탈리아 반도에서 세력을 잡은 로마인들은 에트루리아 문화의 많은 장점을 자신들의 것으로 받아들였다. 따라서 로마인들에게는 에트루리아에서 물려받은 유산이 많았다.

에트루리아인들의 스포츠 경기에 대한 자세는 신앙심과 깊은 연관이 있었으며 죽은 이에 대한 숭배에도 관계되어 있었다. 그리스 문화권과는 달리 에트루리아 시대의 시합은 사람들이 참여하지 않고 관람만 하는 일종의 종교적인 제전이라고 생각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에트루리아 문화의 중심지중 하나였던 체르베테리(Cerveteri)에서 만큼은 그리스 올림픽의 전통이 뿌리를 내렸다.

이들은 당시 퍼진 흑사병이, 기원전 540년경에 그들이 그리스 해군을 대학살한 것에 기인한다고 여겨서 이들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그리스식 방식의 경기를 정기적으로 열도록 당시 제사장이 명한 결과를 따라 경기를 행하게 되었다.

이 장례격투가 재미있게 묘사된 문학작품이 있다. 바로 호머의 『일리아드』이다. 『일리아드』에는 파트로클로스의 죽음을 애도하며 벌이는 경기장면이 나온다. 먼저 전차경기가 벌어지고 권투경기, 레슬링, 활쏘기 시합이 연이어진다. 그 중에 한 장면.

‘…곧 훌륭한 권투선수인 파노페우스의 아들 에페이오스가 나타나 나귀에 손을 얹고 말했다. 「이 나귀는 누구에게도 양보하지 않겠소이다. 권투에서는 나를 당할 자가 없을 것이오. 전투에서는 부족한 점도 있었으나 한 사람이 매사에 뛰어날 수는 없는 일이 아니겠소. 누구든 끝난 다음에 들 것에 실려나가게 만들겠소이다」 이 말에 죽은 둣이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오이디푸스의 장례식에 갔다가 카드모스 사람들을 모두 물리친 에우리알로스가 나섰다. 디오메네스가 띠를 들러주고 튼튼한 쇠장갑도 주고 격려하며 행운을 빌었다. 두 사람이 준비를 마치고 경기장에 들어가 격렬한 권투를 시작하였다. 온 몸에 땀이 비오듯하여 서로 때리고 피했다. 서로 상대방을 견제하다가 에페이오스가 에우리알로스의 턱을 강타하니 크게 뛰어오르며 넘어져 일어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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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장례격투의 전통은 동아시아에서도 발견된다. 고구려시대의 고분인 각저총을 보면 두 사람이 맑은 날 큰 나무 아래서 서로 씨름을 하는 벽화가 있다. 고분에 씨름도가 그려져 있는 것이 장례격투의 존재를 시사한다고 단언할 수는 없지만 죽음과 씨름과의 관계를 나타내는 자료로 주의해 볼 만하다. 이 각저도에 서 중요한 부분은 커다란 나무 밑에서 격투기가 행해 졌다는 것과 그 나무에 네 마리의 새가 그려져 있는 것이다.

기마민족들이 사는 땅은 평지초원이며 그 곳에는 나무가 귀하다. 따라서 기마민족은 나무를 귀하게 여겼으며 숭배의 대상으로 생각하였다. 이런 전통은 우주목(宇宙木), 세계수(世界樹)라는 관념으로 발전하였으며 지금까지 농촌마을 어귀에 서있는 당신목의 잔재로 남아있다.

새 토템과 관해서는, 고대 삼한중 변진이 장례식때 큰 새의 날개를 다는 독특한 풍습을 가졌다고 하며 솟대 외 맨 위에는 새가 앉아있다.

중국 서쪽의 신중에 소호(少昊)가 있다. 소호는 후에 동쪽의 바다 밖으로 가서 소호국을 세웠는데 소호국의 신하는 각종 새였다.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소호는 중국출신이 아니라 서쪽에서 동쪽으로 이주했다는 것이다. 소호국은 여러 새들로 상징되는 신하들이 각종 업무를 담당했다고 하는 신조사상으로 가득한 사회집단이었던 것 같다. 소호가 서방에서 동방으로 이동했다는 내용은 신조사상을 지닌 주민들의 이민을 암시하는 것이다.

시베리아 원주민의 사유세계에는 인간의 생명은 새가 하늘로부터 가져와 지상의 인간에게 주는 것이라는 믿음이 있으며, 또 죽음과도 관련이 있다. 일본 고분시대 벽화에는 죽은 사람의 영혼을 천계로 옮겨가는 배에 새 한 마리가 앉아있다.

티베트지역에서 행해지는 조장(鳥葬)도 새 숭배 풍습의 일환이다. 물론 티베트지역은 화장을 하기에 충분한 나무가 생산되지도 않고 기후가 서늘하여 매장을 한들 시채가 부패하지 않는다는 풍토적인 특성이 있지만 하필 새에게 시체를 제공한다는 것은 죽은 자의 영혼이 새와 함께 하늘로 날아가기를 염원하는 것이다.

장례격투는 태양숭배사상이 짙게 남아있는 지역에서 행해진다고 한다. 중앙아시아의 여러 민족이 즉은 자의 제사에 즈음하여 씨름을 하는 것은 일찍이 스위스 바젤 대학의 모리(Meuli, K)가 민족지롤 통해 지적하고 있다. 모리에 따르면 킬리스, 바스킬, 톨크멘, 츌크, 할카, 칼우크,브리야트,츄쿠찌, 코리야크,기리야크, 유라크, 제미레스,모르도빈, 오세트, 아브하즈, 첼케스의 제 민족 사이에 장례격투가 행해졌다는 기록 이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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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마노케하야와 노미노스쿠네의 씨름 상상도

일본스모의 기원으로 종종 근거로 삼는 『일본서기』의 스이닌왕(垂仁天皇) 7년 타이마노케하야(当麻蹴速) 과 노미노스쿠네(野見宿禰)의 격투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이 두 사람의 직업이다. 타이마노케하야은 분묘지인 이상산(二上山)외 동쪽 기슭에 살며 도회에서 운반된 귀인의 관에 최후의 중요한 진혼의식을 배푸는 것을 생업으로 하고 있다. 또 노미노스쿠네도 장례식과 관련이 있는 사람이다. 결국 이 두 사람 모두 장례식과 관계된 직업집단이며 여기서 격투와 죽음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일본서기』의 기록에 코오교(皇極)왕 원년 7월 21일, 왕이 교기(翹岐-백제왕의 조카로 일본에 정치 망명)를 궁중으로 불러 자신을 위해 건장한 남자들로 하여금 스모를 하게 했다. 『일본서기』의 기록에는 동년 5월 21일 교기의 하인 한 사람이. 그리고 다음 날 22일에는 교기의 아이가 죽었다. 그러므로 7월 21일의 스모는 교기의 아들과 하인의 죽음과 강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장례격투가 고대일본에 한하지 않고 백제에서도 행해졌던 지배계급의 예법인 것을 감지하게 한다. 또 일본의 5세기와 6세기에 걸친 여러 고분에서 씨름꾼 상이 발견되고 있다. 언뜻 보기에 전혀 관련이 없을 것 감은 고대의 올림픽과 한국의 씨름이 연관된다는 것은 매우 흥미롭다.

새 숭배. 그리고 신라시대의 금관과 유사한 형태들이 남아있는 곳, 황금숭배가 있었던 지역을 조사해보면 중앙아시아 쪽이며 이곳에는 장례격투의 풍습이 있고 씨름 경기가 있다. 이 지역을 ‘씨름벨트’라고 명명해도 될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민족의 정체성과 관련하여 재미있는 암시를 준다. 의외로 한국에는 몽골을 비롯한 중앙아시아에서 유래한 풍습이 많기 때문이다. 한국이 올림픽 경기 중 레슬링과 유도에서 강세를 보이는 것은 이런 피가 아직 우리에게 남아있어서는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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