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의 전통무예 추적기 (1)
어려서 한국 고유의 전통무예를 동경하지 않은 사람은 없을터. 무술을 하지 않는 사람일 지라도 뭔가 신비한 산중무예가 있지 않을까 꿈꾸었을 것이다. 하물며 무술을 업으로 삼은 사람들에게는 두말할 나위도 없다.
나도 그랬다.
사실 나는 어려서 꽤나 바보였었기 때문에, 장풍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고, 공중부양도 있다고 생각했고, 먼 옛날 엄청난 문명을 가진 환국문화가 있는줄 알았다. 자꾸 서적과 기사에서 장풍과 공중부양이 있다고 하니까 궁금해서 찾아다니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다들 그렇지 않으셨던가? 단학을 수련한 도사들과 공중부양이 언론기사에 가끔 오르락 내리락 했지만, 이제와서 그 기자들을 기레기라고 욕할 마음은 없다. 기자는 그 사회의 집단욕구를 대리만족 시켜줄 뿐이니까.
장편선도소설 ‘丹’이 출판되자마자 지금은 없어진 종로서적 매대에 서서 다 읽어버렸다. 도무지 집까지 갖고 올 수가 없었다. 물론 다 읽고 한권 샀다.
그 책을 보고는 곧바로 봉우 권태훈 선생님을 찾아나섰다. 그때 신생 출판사였던 정신세계사가 세종문화회관 뒤편 어딘가에 있었던 것으로 기억난다. 출판사에 갔더니 편집장이 봉우 선생님의 주소를 알려주지 않았다. 하도 졸라대니, ‘스카이웨이 올라가는 입구에 한의원’이라고만 알려줬다. 이 단서 하나 쥐고서 효자동/북촌/세검정/정릉 일대를 열흘쯤 걸어다녔다. 그때는 인터넷이 없었고, 전화번호부를 뒤져야 했던 시절이다. 추운 겨울날 열흘쯤 효자동과 세검정을 헤매고 있는데, 적선동 어딘가 길가의 교통순경이 만수한의원을 찾아가라고 알려줬다. 그 순경은 봉우선생님 소문을 알고 있었던가보다. 알고 봤더니, 봉우선생님의 손자는 나의 사촌형님과 죽마고우였고, 우리 형 장가갈 때 함을 졌을 정도로 친한 분 이셨다.
어찌어찌 해서 만수한의원을 찾아갔다. 그리고 우여곡절 끝에 봉우선생님 자택의 뒷방에서 단학수련을 시작하게 되었다.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건방졌던가 보다. 단학 배우러 왔다면서 관등성명도 안 밝힌다며, 버르장머리 없는 놈이라고 욕을 먹은후에, 눈이 녹아 질척거리는 흙탕물에서 큰절을 하고서야 봉우 선생님의 자택안에 들어갈 허락을 받았다. 그때 나의 수련을 돌봐주신 분은 봉우선생님의 제자이셨던 하동인 선생님 이셨다.
이때까지만 해도 나는 장풍/축지/비월/공중부양 등등이 세상에 존재한다고 철썩같이 믿을때였으니, 남이 무슨 말을 해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나에게 바보라고 손가락질 해도 괜찮지만, 그때는 나도 얼굴 하얀 스무살이었던 것을 참작해 주시라.
대학다니며 태권도와 검도를 열심히 했다. 아침이면 태권도장 새벽반에 나가 운동했고, 낮에는 학교 검도부 생활을 했고, 저녁에는 헬스클럽에 갔다. 내가 하루에 체육관 세군데 다닌놈이다. 우리 대학은 체육학과가 없어서 전문선수가 없었는데, 내가 유일한 태권도 선수1호 였다. 학생처에서도 개교이래로 태권도 선수등록을 처음 해본다고 했었다.
그때 나의 무술 스승님중의 한분이신 故 박성권 선생님을 만났다.
– 나의 전통무예 추적기 (2)
이 양반은 부인이 봉제공장 사업을 크게 하셔서 집안이 부유했는데, 경찰관의 봉급은 집에 한번도 안 갖다주고 오롯이 자신의 무술연구를 위해 쓰셨다고, 초상 치른후에 사모님이 말씀해 주셨다. 사모님은 평생 남편이 월급봉투 갖다 주는걸 받아본적이 없노라 하셨다.
나는 경찰과 인연이 많은가 보다. 우리 할아버지가 6.25때 경찰관 신분으로 전쟁에 나가셨다 들었고, 나의 무술 스승님들도 경찰 출신이 한두명이 아니었으니. 사실 나의 사주에는 경찰/군인이 천직이라 나온다고도 들었다. 내 사주가 경찰인데, 경찰을 안해서 인생이 이렇게 꼬였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