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괘장과 형의권을 퓨전한, 장점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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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점괴張占魁 (1865년-1938년), 자는 조동兆東이다. 1865년 8월, 하북성 하간현 후홍안촌에서 태어났다. 1938년 7월, 식도암으로 천진에서 7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형의권과 팔괘장의 명사로 학생이 수 천명에 달하며 유명한 자는 한모협韓慕俠, 왕준신王俊臣, 유진경劉晉卿, 구치화裘稚和, 이검추李劍秋, 조도신趙道新, 강용초薑容樵, 전수초錢樹樵, 장우정張雨亭 등이 있다. 후대의 형의권, 팔괘장의 발전과 전파에 큰 기여를 하였다.

생애

장점괴는 장파 팔괘장을 만든 인물이다. 유년 시절 고향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왕 씨 성을 가진 권사를 따라 대홍권을 배웠는데 왕 권사는 철신고鐵身靠로 동네에서 잘 알려진 인물이었다. 장점괴는 천성적으로 불의에 맞서 싸우는 것을 좋아하고 천성이 뛰어나 고향에서 다툼과 싸움을 중재하기 위해 자주 나섰다.

그는 천성이 온화하고 기예가 뛰어나 ‘섬전수閃電手’라는 칭호를 얻었다. 원래 그는 소림 무술에 입문하였고 후에 형의권의 명가 유기란의 문하에 입문했다. 장점괴는 천진 제1국술관 관장을 맡았고 풍국장馮國璋의 경호대장을 맡았다. 풍국장은 단기서段祺瑞 등과 북양군벌에서 유명한 사람이었고 민국시절 베이징 정부군 상장군, 중화민국 부통령, 대통령 대리 등을 역임하였다.

장점괴는 친구를 사귀는 것을 좋아해서 베이징에 가서 동해천에게 배사를 하였지만 아쉽게 동해천이 바로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정정화는 장점괴와 의형제를 맺고 그에게 팔괘장을 가르쳤다. 장파 팔괘장의 특징은 팔괘장에 형의권을 융합시킨 것이다.

장점괴는 주역의 8가지 괘를 8종의 짐승에 대응시켜 새로운 팔괘장의 형식을 만들었고 장점괴가 융합시킨 형의팔괘장은 민간에 전해진다.

경력

1877년 가을, 화북의 가뭄으로 장점괴는 천진에 들어가 과일과 채소를 판매하는 것을 업으로 삼았다. 하북성 심현에서 형의권 대사 이존의를 사귀었는데 이존의 소개로 그의 은사인 형의권 제5대 적전 유기란의 문하에 배사하였다. 유기란과 곽운심은 중국 형의권 전성기의 대표 인물로 곽운심은 유랑을 좋아해 “반보 붕권으로 천하를 다 때렸다”는 말을 들을 정도였지만 유기란은 반대로 시골에 은거하면서 제자를 양성하는 것을 낙으로 삼았다. 그의 유명한 제자는 이존의李存義 외에 주명태周明泰, 경계선耿繼善, 유전침劉殿琛 등이 있다. 장점괴는 유기란과 이존의의 세심한 지도로 진보하여 이존의와 함께 하북파 형의문 제6대의 “두 기둥”으로 불리웠다.

1881년 여름, 장점괴가 수박을 팔고 있었는데 당시 시장 패거리의 위협을 받았다. 처음에는 말다툼을 벌이다가 주먹다짐을 하고, 화가 나서 손을 써서 여러 사람을 다치게 하여 관청의 수배를 받았다. 다행히 한 사람의 주선으로 보석으로 석방되고 장점괴는 팔괘장의 시조 동해천에게 추천되었다. 동해천이 늙었을 때라 사실상 장점괴는 동해천의 제자인 정정화에게 팔괘장을 배웠다. 얼마 후 동해천이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동해천의 무덤 앞에서 제자첩을 받고 정정화는 스승을 대신하여 장점괴를 제자로 받았다. 결국 장점괴도 윤복尹福, 정정화程廷華, 유봉춘劉鳳春, 마귀馬貴, 마유기馬維祺, 송세영宋世榮, 유덕관劉德寬과 함께 팔괘장 2대의 ‘8대 제자’로 불린다. 사실상 정정화의 제자지만 동해천의 생전에 입문한 탓에 운 좋게 동해천의 제자로 인정받은 셈이다.

1900년, 8개국 연합군이 북경을 점령하자 정정화는 총격을 받고 사망했다. 장점괴는 천진으로 돌아왔다. 하루는 천진 구도심의 북문에 불이 났다. 성루에는 대량의 병기와 화약이 있어 큰 피해가 예상되었다. 장점괴는 홀몸으로 건물에 올라 인화성 폭발물을 잇달아 성 아래로 던졌다. 마지막에 사람과 물건까지 함께 3장 5척 높이의 성루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후에 천진 지현 완국정阮國禎은 이에 감동하여 장점괴를 천진현 관아의 마쾌馬快로 특별초빙했다. 마쾌는 미국의 바운티헌터(Bounty Hunter)처럼 정부의 인가를 받아 체포업에 종사하는 사람이다. 장점괴는 이 일을 꽤 잘해 공로를 많이 세웠으며 천진시에 위명이 잘 알려졌다.

한 번은 한 거리에서 흉기를 들고 패싸움이 일어났는데, 그중 한 쪽은 적수가 되지 않아 패했고, 다른 한쪽은 끝까지 쫓아왔다. 장점괴는 백랍간을 거리에 놓고 넘어가지 못하게 했는데 아무도 감히 백랍간을 못 넘었다고 한다.

또 한 사건으로 장점괴와 사이드킥 주옥상周玉祥은 여관에서 진상이 났다는 이야기를 듣고 조사 중 갑자기 실내에서 총을 장전하는 소리를 들었다. 장점괴는 즉시 결단을 내려 실내로 뛰어들어가 눈 깜짝할 사이에 5명의 총을 든 사람을 전부 쓰러뜨렸다. 이로부터 장점괴는 마쾌의 팀장으로 승진되었다,

1918년 러시아의 차력사 칸텔(Kantel)은 상하이 명흥극장과 천진 천화병원에서 차력 프로그램을 연달아 선보였다. 인기가 대단하여 각종 신문에서 “세계제일 강자”, “46개국을 순회한 무적의 전사”라는 기사를 실었다. 북경으로 옮기니 중국 각지의 권사들이 수도로 집결했다. 이때 장점괴의 제자 한모협이 주동하여 싸움을 요청했고 첫 번째 경기로 한모협과 칸텔의 대결이 결정되었다.

이존의, 장점괴, 류진경劉晉卿, 왕준신王俊臣 등이 상경하였고 장점괴는 자신의 제자들의 안위와 승리에 대해 자신이 없었다. 러시아인이 쇠사슬을 끊는 차력의 비밀을 알아내기 위해 호텔에 가서 칸텔을 방문하고 대결을 요구했다. 처음에 칸텔은 대결에 동의하지 않고, 경기장에서 결판을 내겠다고 공언했다. 장점괴는 나의 공력은 한모협에 미치지 못한다고 궤변을 부리며 만약 자신을 이길 수 없다면 한모협과 대결하지 말아야 한다고 억지를 부렸다. 대결이 시작하자마자 장점괴의 손바닥이 칸텔의 왼쪽 옆구리를 때려 경련을 일으키고 구토가 멈추지 않았다. 장점괴의 꼼수는 이미 성공하였으니 ‘어 미안!’ 살짝 사과만 하고 황급히 호텔을 떠났다.

전날 장점괴의 빌드업 덕분에, 다음 날 칸텔의 경기는 연무 대회로 변모했고, 군중은 분노하며 칸텔에게 싸움을 촉구했다. 모든 무술가들이 돌아가며 링에서 시범을 보였지만 칸텔은 어쩔 수 없이 사과 편지를 보낸 후 자리를 떠났다. 이 사건은 중국 전역에 충격을 주었고 베이징의 여러 신문에 보도되었다. 이를 통해 한모협은 국내외에서 유명해졌다.

민국 8년, 중화무사회는 문파간 악습으로 인심이 산만해졌다. 게다가 한모협은 구화산에서 동해천의 선배 응문천에게 배웠다는 “반팔괘反八卦(掌)” 로 장점괴의 불만을 자아냈다. 아마 ‘팔괘장을 배워봤자 반팔괘한테는 안돼’라고 했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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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차례의 토론을 빙자한 시비에서 한모협과 장점괴는 서로 양보하지 않았다. 한모협이 다가가자 장점괴는 한 손으로 한모협의 가슴을 가격하여 선혈을 토하게 했다. 이후 한모협은 무사회를 떠나 무술관을 따로 차렸다. 이때 갈라진 사이는 1931년 일본이 중국을 침략하였을 때 장점괴가 무관을 폐쇄하고 한모협을 찾아가 군벌들을 멀리하여 살신의 화를 면할 것을 권고하면서 회복하게 된다.

장점괴는 천진으로 돌아와 제자들을 가르쳤다. 이때 장점괴는 이미 형의권과 팔괘권의 융합을 완성했다. 형의권의 힘, 팔괘권의 변화와 비전의 간법은 삼위일체가 되어 형의팔괘문으로 독립한다.그리고 전통적인 형의권을 대가식으로 고쳤다.

형의팔괘권이 전성기에 이르렀다. 화북을 포괄하고 천진을 독점하였다. 그때 현지에서 무술에 관한 활동을 하려면 모두 장점괴의 허락을 받아야 했다. 어떤 사람은 자강‘일천‘ “賽天霸새천패”라고 지칭했는데 사실 장점괴는 세력을 뽐내려는 마음은 없었다. 항상 사심 없는 관용으로 위로부터 아래까지 강호를 떠도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고 비호하였다. 예를 들면 의권의 창시자 왕향재가 천진에 “곽운심의 제자”라는 명의로 장점괴를 방문하였다. 장점괴의 초기 문인 류조해劉潮海, 류계경劉繼卿, 한모협韓慕俠 등은 그를 인정하지 않았다. 장점괴는 나이 차이가 났지만 왕향재와 형제로 어울리는 것을 꺼리지 않았다. 또한 자신의 말기문인 구치화裘稚和, 묘춘여苗春佘, 고소치顧小癡와 조도신趙道新에게 왕향재 사숙에게 참장과 추수를 배우게 했고 각지의 권술 대회에 참가하게 했다.

1929년의 항주국서 유예대회, 1930년의 상해시 운동회, 1933년의 청도 제17회 화북운동회, 남경 제5회 전국운동회, 제2회 국술국시, 1934년의 천진 제18회 화북운동회에서 중앙국술관 관장 장지강의 초청으로 장점괴는 총심판장 또는 평판위원 등 직책을 맡았으며 매번 경기마다 장지강을 직접 마중하였다.

국술관 부관장 이경림의 추천을 거쳐 장점괴의 말년제자 조도신과 장전경은 기술을 집대성하여 여러 차례 우승을 따냈다. 그후 조도신은 북경과 천진, 상해에서 장점괴의 이름을 알렸다. 항저우의 기예대회에서 회장 장정강張靜江은 북방의 선수들이 너무 많이 상을 받을 것을 싫어하여 “절강성 사람들은 메달을 쉽게 항저우에서 가져가지 못하게 할 것”이라고 공언했다. 남북 의 권사들은 대규모의 장외 싸움을 준비했다. 하지만 대회 조직자 장점괴가 조정하고 설득했다. 그는 장정감을 찾아 찾았고, “누구라도 승복하지 않으면 직접 나를 찾아와라”고 공언하도록 했다. 더 이상 소동은 없었다.

무충신武藎臣을 제자로 받은 후 장점괴는 조도신의 건의에 따라 “산문을 닫았다”며 가족과 함께 만년을 편안히 보내려 했다. 나중에 그는 늘 입맛이 불편하고 삼키기가 힘들어 처음에는 소화불량인 줄 알았다. 병세가 심해지자 또 장티푸스에 걸린 것으로 여겼다. 그 후 통증이 심해 국물도 못 마시자 식도암으로 판명되었다.

1938년 7월, 무술계의 풍운아는 세상을 떠났다. 천진 각계와 형의팔괘장문은 침통하게 그를 위해 그의 성대한 의식을 거행하고 그의 관을 천진 이원묘지怡園墓地에 안장했다.

제자로는 한모협과 강용초가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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