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수전 전기-한국에 중국무술을 전한 원로

다음은 인천광역시공무원문학동우회 기관지 『文鶴山』 제 30집(2011년)에 실린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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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술계에서 내려오는 명언 중에 인천을 ‘중국무술 쿵푸의 고향’이라는 말이 있다. 잊혀져 가는 인천 무형의 자산인 중국무술사를 재음미하고 내일을 사는 정신적인 밑거름이 된다면, 그리고 인천 화교의 일부분인 중국무술사의 자료확대와 여러 분야 연구에 도움이 된다면 퍽 영광스러 운일이라 생각한다. 본 내용은 과거 중국무술을 배우면서 화교들의 구술한 내용과 자료 등을 근거로 nonfiction 과 fiction을 넘나들면서 수필로 작성한 글이다.

중국무술 쿵후의 고향 인천 중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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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여 년 전, 1930년은 대한제국이 일제 강점하의 식민통치 시기로 이때에는 더욱더 민족말살 통치를 위하여 병참기지화 정책, 민족 문화의 말살, 인적 • 물적 자원을 약탈하는 시기였다.

일본은 대륙침략의 출발점을 모색하고자 1931년 9월 이타가키 세이시로(板埋征四郞) 대좌 등이 이끄는 관동군이 1931년 9월 18일 유조호 사건(柳条湖事件)으로 시작된 만주전쟁을 시작하고 있었다.

해가 산마루를 넘어가고 어느새 땅 위에는 황혼이 짙게 깔리기 시작했다. 서쪽 하늘을 붉게 물들이며 지는 저녁노을이 하나의 장관을 이루고 있었는데, 응봉산 서공원(西公園)중턱의 제물포 구락부 인근의 넓은 공터 한가운데 아까부터 옆이 터진 남의(蓋衣)색 치파오(旗袍)를 걸친 한 중년의 사나이가 몹시 초조한 표정으로 서성거리고 있었다. 귀가 크고 얼핏 보기에도 매우 영민해 보이는 그 남자는 이따금 얼굴을 들어 응봉산과 선린동 사이에서 월미도를 번갈아 쳐다보며, 무엇인가 근심스런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1931년 7월 2일에 중국 만주 길림성 장춘현(長春縣) 삼성보(三姓堡) 만보산(萬寶山)지역에서 일본의 술책으로 중국인 농민과 조선족 농민 사이에 수로(水路) 문제가 일어나 충돌 및 유혈사태로 폭동이 일어났었다.

이 때문에 한국에서는 인천을 필두로 경성 • 원산 • 평양 등 각지에서 중국인 배척운동이 일어났으며 중국인 상점과 가옥을 파괴하고 구타, 살상, 약탈, 파괴하는 사건이 확산되었다.

그러나 만보산 사건은 언론통제를 책임진 조선총독부가 고의적으로 방관 또는 사주에 의한 것이었기 때문에 그 하수인인 일본경찰은 이 사태를 방관시 하는 등 극히 소극적이었으며, 화교들이 많이 모이는 인천 공관과 중화회관 등 인근에서는 한국인들과 화교들의 접촉하는 횟수도 날로 많아지면서 두 나라 국민간의 충돌도 점점 많아졌다.

수천 명의 화교들은 충돌이 무서워 배로 인천을 떠나고, 서울 주재 중화민국 총영사관에는 1만6천여 명의 화교들이 피신해 인신보호를 요구하는 긴박한 상황이 었다. 인천 응봉산 밑에 있었던 현 선린동 청국 조계지의 구릉지대에 화교들은 문을 닫고 스스로 보호에(自衛隊 결성) 임하게 되었다.

노수전 무술을 배우다

남의(蓋衣)를 걸친 중년인은 다름 아닌 노수전 이었다. 1894년 중국 산동 영성현 석도시 노가촌(中國山東榮成縣石島鎭盧家村)에서 출생한 그는 어려서부터 무술에 남다른 조예와 취미가 있어 무술을 즐겨 연마하기 시작하였다.

18세인 1912년 중국 산동성 연대 복산 남소촌에 미관말직인 보안대 무술(청조궁내대도호위) 총교관인 이경무(敬武 李文應, 1863年〜1932年 7月 21日)라는 목숨만큼이나 무술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각종 권법과 병기에 정통하며 소림권, 팔괘장 등 중국 북쪽에 전해지는 무술에 능하며 성격이 호방하고 의협심이 강하다는 소문을 듣고, 노수전은 그를 찾아가 몇 년 동안 가르침을 받아 밤낮으로 연습을 하였다. 어느 날 이경무가 말하기 “나의 무술은 전장(轉掌)을 체(體)로 하고, 권계(拳械, 권법과 병기)를 용(用)으로 하니, 배우고 연습함에 참고한다면 공부가 지극하여 천하무적이 될 수 있으며 독보적인 경지에 이를 수 있느니라.” 라고 가르쳤다.

노수전은 이러한 모든 것을 배워 강호를 유랑하고 다녔으나 하늘 밖에 하늘이 또 있음을 알아 각지의 명사를 찾아 사방을 주유하여 자신만의 무공완성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동 시대에 중국에는 외가권인 소림권을 비롯하여 내가권의 태극권, 형의권, 팔괘장이 유명하였으며, 특히 팔괘장은 많은 사람들이 배우고 싶어 하는 고급 무술 중에 하나였다.

중국 산동성 팔괘장 고수들 중에는 유명한 삼협(三俠)이 있었는데 이 삼협은 임복당(任福堂)의 제자 전자건(田子乾), 윤복(尹福)제자 궁보전(宮寶田). 정정화(程廷華)의 제자 왕두(王斗)가 유명하였다.

노수전은 이중에 유신팔괘연환장(遊身八卦連環掌) 정정화의 제자 인 왕선생을 무척이나 흠모하고 있었다. 왕 선생은 농촌에 묻혀 지내면서 제자들을 가르쳤고, 문파에 대한 편견 등을 갖지 않았기에 왕선생을 처음 만난 자리에서 몇 마디 나누고는 곧 탄복 하여 제자가 된 사람도 있을 정도였다.

29세때 1923년 연태로 가서 두 번째 스승이며, 정정화의 제자인 왕두(王宗慶, 1863-1932)의 정식제자로 들어가 팔괘장의 가르침을 받은 뒤로는 마음으로 깨우치고 몸으로 힘써 행하며 아침 저녁으로 연마하였다.

왕두선생이 수법을 가르치려 두 사람이 손을 맞댈 적이면 눈 깜짝할 사이에 밖으로 나가 떨어졌다. 팔괘뚜장이라고 알려진 손바닥으로 치는 기술은 매우 유명하였으며,장법의 기법이 무궁무진하여 그 깊이를 알수 없을 정도였다.

한번은 노수전의 수련을 한참 동안 보다가 돌연히 말하기를 “속담에 무술수련의 진정한 비결이 있다”면서 그가 말하길 “팔괘장은 맷돌을 밀어나가는 연경(碾勁)이 있어야 하고 팔괘장은 한번 발걸음을 내디디면 두 가지 경(勁)이 있어야 하며, 수시로 전환하여 변화하는데 이 두 가지 경의 도리를 이해하면 곧 팔괘장의 초식 동작이 무엇때문에 변화가 무궁하다”고 설명하였다.

노수전은 왕두 스승에게서 팔괘장을 수련하여 신묘한 기술을 얻고,권술과 도 • 검 • 창술의 정교함에 이르기까지 가르침을 받은 뒤 배사하여 무예의 배움이 대성을 이루어 하산한 후에는 1928년 무술 교관을 하다 북한 원산에서 무술 도장을 잠시 개설 운영 하였다.

1898년 전후 그 시절 중국은 무술가들의 의화단(義和團) 북청사변(北淸事變)으로 산동성 일대가 전란에 휘말리자, 이 일대 중국인들이 피난차 가까운 한국으로 대거 건너오기 시작하였는데, 이들은 주로 인천을 자신들의 집결지로 삼았기 때문에 인천은 부지불식간에 화교들의 근거지가 되었으며 서울과 함께 화교들의 양대 세력권이 되었다.

자료에 의하면 1884년 35척의 청조 선박이 인천과 마포항을 왕래하였으며 13천톤의 화물을 운반하였다고 한다. 노수전은 1930년 안동(현 단동)과 대련, 신의주 등을 왕래하며 소규모 무역사업을 하다 1931년 인천으로 사업차 방문하였다.

그 시절 중국은 중화민국 탄생과 산동지방에 크고 작은 많은 소요사건이 빈발하자 피난차 나오는 사람과 쿨리(苦方/coolie)라 부르는 하급노동자가 전형적인 중국 재래선인 정크선(中國帆船, 戎克船)을 타고 많은 중국인 선객들을 인천 제물포로 나르고 있었다.

이들은 일단 청관에 모였다가 서울 • 부산 등 전국 각처로 흩어져 나가고 있었다. 인천의 청국지계라는 청관을 중심으로 중국인들은 노동시장과 여관, 잡화상, 중국음식점 등에 종사하고 있었다. 특히 화교들 중에는 농업경영에 앞장서는 인물들이 등장하여 정착과 더불어 화교농민들은 무 • 배추 • 양파 • 토마토 • 배 • 복숭아 • 마늘 • 고추 등을 거래하였고 고향인 산동성 연대 등에서 채소 씨앗을 가져와 현재 주안과 도화동 • 승의동 일대에서 농사를 지어 중구 신포동 시장의 전신인 푸성귀전(야채시장)에서 채소가게를 운영하며 내다 팔았다.

청나라 외교관 출신인 오례당(吳禮堂) 농원은 그중 가장 규모가 컸다. 공교롭게도 대부분의 화교들은 산동성 출신이 많았다. 배를 타고 산동에서 직접 인천항으로 오거나 만주 안동(현 단동)을 거쳐 육로로 이주해 온 사람들이 많았고, 이때를 전후하여 산동인들이 절대 다수를 차지하면서 산동농민들이 인천에 많이 정착하였다.

그러나 처음부터 산동성 출신이 많았던 것은 아니었다. 개항초기에는 1883년 상해〜인천을 오가는 정기항로가 있어 대부분 광동(廣東), 절강성(折江省) 사람들을 중심으로 구성된 청국인들이 인천을 출입하기 시작하였다. 때문에 개항초기에는 산동인들보다 지리적으로 상해에서 활동이 많았던 광동 절강성 사람들이 주축이 되어 인천에 들어오게 되었다.

나중에 인천, 연태,천진을 잇는 정기노선이 열리게 되었고 이에 따라 산동성 사람들의 이주가 이전에 비해 늘어나는 추세가 되었다. 노선생이 1931년 소규모 무역업 때문에 인천에 방문한 당시는 일본 군부가 한국인과 중국인을 이간하려고 꾸민 정치공작인 만보산 사건이 일어났던 시기였다.

시위대들의 악명이 높아서 화교들의 재산을 빼앗고 남자들을 구타하고 여자에게는 폭행을 가하는 등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인천의 화교들은 노수전이 유명한 대륙의 무술가인 것을 알고 협조를 부탁하였다.

이것을 들은 노수전은 정의감과 의협심에 불타 혼쾌히 승낙하였다. 강호의 호걸들로부터 노수전 무술이 뛰어나 상대가 없다는 얘기와 그의 애국애족의 열정을 중국인들은 항상 존경하고 있었다. 노수전의 무술은 평생을 통해 연마한 무공으로 손바닥으로 치는 절기는 누구도 막아낼 수 없는 강력한 힘이 담겨 있었다. 당대 무술계에서 감히 그를 대적할 사람이 없었다.

노수전 무술을 뽐내다.

50684268888 3078f8a847 z d그 시기 인천은 1890년 처음으로 인천항에서 조선 쌀이 일본으로 수출된 이래 수년간 일본상인들에 의해 쌀 거래 이루어지고 개항이 후 정미업은 인천의 산업발전을 이끈 원동력이었으며, 1930년대에 이르러 지역공산품 총 생산액의 80-90%를 차지할 만큼 독보적인 위치 였다.

당시 인천은 일본인 미곡상들의 결집지로,그리고 전국의 미곡을 일본으로 반출하는 항구로서 풍부하고 저렴한 노동력을 갖추고 있었다. 항구도시 인천은 새로운 노동의 현장으로 떠오르면서 많은 사람들이 일거리를 찾기위해 인천으로 모여들고 또 하루살이일만정 다른 도회지에 비해 쉽게 일거리를 찾을 수 있는 곳이었다.

조선의 관문항으로 황해도,충청도,경기도의 물자가 이곳으로 모여 집산을 거듭할 뿐만 아니라 일본, 중국까지 그 상권이 뻗쳐 있었다.

그러다 보니 만보산 사건시 전국 23곳에서 폭동이 발생하였으며 화교들이 많고 전국 각지의 노동자들이 모여든 인천은 특히 심하였다.인천 등지에서도 곤봉,칼,도끼,돌 등의 흉기를 들고 만나는 사람마다 화교를 공격하여 두들겨 패어 그 참혹함의 예를 다른 곳에 찾을수 없을 정도였다고 하며,경찰 등은 제대로 막을 수 없었다고 한다.

최종적으로 인천항 부두 노무자와 정미소 일꾼들이 일본 경찰당국의 은밀한 정치공작으로 중국 화교 상인들의 점포를 습격한 후 마지막으로 청관을 습격하려고 준비하고 있었다. 화교들은 무술가들을 중심으로 스스로 보호에 들어갔다.

하루는 자위대들이 노수전을 중심으로 청국지계를 순찰 돌면서, 선린동 구릉지역의 저잣거리를 지나가고 있을 때였다. 일부의 시위대들이 하나 둘씩 나타나서 가는 길을 막아서는 것이 었다.

그때 노수전의 손에는 봉을 가지고 있었다. 「무슨 일인가?」하고 물으니 「너희들의 목숨을 원한다」고 대답하며 주변에 있던 다른 무리들은 함성을 지르며 일제히 곤봉, 칼 등을 휘두르며 공격을 하였다. 노수전의 눈빛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그가 ‘앞으로’를 외치며 오른팔을 들어 올리자 뒤따르던 화교 자위대들이 ‘와’ 하고 함성을 지르며 뛰어나갔다.

정의감과 의협심에 불타는 노수전은 가운데 둘러싸여 있다가 전장(轉掌)과 팔괘연환봉을 시연하면서 천화타류(穿花打柳)의 수법으로 십여 명의 사람들을 순식간에 제압하였다. 몸이 용과 같고,뒤집음은 독수리와 같으며,몸의 돌림은 원숭이같았고 부드러우면서도 민첩하고 변화무쌍하였다 .

선린동에서 시작하여 구름다리라 칭하는 내방 굴다리(홍예문)에서 마지막으로 1〜2척을 뛰어 올라 팔보릉공(八步陵空)으로 가볍게 넘어 보여주자 잠시 침묵이 흘렀다. 시위대중의 한사람이 입을 열었다. 「그것은 가라테(空手道)냐고?」

노수전은 방금 시범보인 기술을 묻는 것에 대해서

「이것은 중국무술 팔괘장 같은 것이지」

「팔괘장?…」

일부 시위대들은 한결같이 갈채를 보내며 저분의 공력은 정말 대단하다고 말하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나중에는 인천 부둣가에서 시멘트 속에 박힌 거대한 못을 엄지와 검지로 뽑아 보였고,다시 그것을 손끝으로 한 자 이상 박아 보여 주기도 하였다.

시위대들은 지금까지 보지 못한 괴이한 경공법과 민첩한 무술에 혀를 내두르게 만들었으며 노수전의 무술실력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그와의 싸움을 원치 않았으며,충돌을 막을 수 있었다. 나중에 노수전의 명성을 알고 그와 겨루고자 찾아온 사람이 많았으나 노선생의 손에 패하지 않은 자가 없었다.

그 이후 1932년 단동을 거쳐 고향으로 돌아가 영성현 석도진에 교장을 개설하고 다음해인 1933년 장남 노수덕 이 출생하자 가족과 자신을 위하여 무술가의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였다. 하루는 고향에서 저녁에 노수전이 길을 가던 중 뒤에서 심상치 않은 발자국 소리가 나기에 뒤돌아보니 손에 번쩍이는 대도를 잡은 도적이 막 노선생의 머리를 내려치는 중이었다. 선생이 바로 몸을 아래로 오그리고는 5〜6척을 훌쩍 뛰어올랐다. 그리고는 몸을 돌려 허공을 때린 도를 빼앗고 상대방을 발로 차서 넘어뜨린 후 칼은 던져 버렸다.

그러나 세상은 그를 가만 내버려 두지 않았다. 43세가 되던 1937년 7월 7일 20세기 아시아에서 최대 규모의 전쟁인 중일전쟁이 반발하였다.

이때 노수전은 1940년대부터 국민당원으로 장개석 장군의 휘하에서 항일 민단 유격대원으로 위해(威海), 대수박(大水拍)등 지역에서 활동하였다. 특히 팔괘연청도를 들고 많은 일본군과 백병전을 전개하거나, 막사를 야간 습격하여 총 • 수류탄 등의 무기를 탈취하였다.

그렇게 노수전은 전장을 자유로이 누볐고,일본군과의 싸움을 승리로 이끌었다. 이 사건은 당시 신문에 보도되어, 그의 목에 현상금이 걸렸고, 노수전은 이름을 숨기고 만보산 사건의 인연이 있었던 인천으로 1943년 피난을 나와 은신하였다. 이후 자유중국 국민당 소속의 원로 유공자로 등록되었다.

한국에서 제2의 삶을 보내다.

1943년 서울 서소문 소곡동에 중국약재상 창고인 우풍덕에서 중국인들은 화교들에게 경극과 국술을 가르치고 있었으며, 당시 노수전은 국술을 담당하였다.

1950년대 6.25전쟁 이전에 화교들이 많이 사는 인천 중구 자유공원 주변에서 노수전, 필서 익, 강경방, 임품장, 고 노사 등 대륙의 무술가들이 모여 떠나온 고향과 중일 전쟁 이야기를 안주삼아 이야기와 서로 기예를 연구하고 토론하였다.

노수전은 이후 한국전쟁이 끝나고 나서 1953년 인천으로 내려와 정착하였다. 처음에 지역 주민들은 그의 존재를 모르고 있었다. 무술을 모르는 척 가장하였기 때문이었다. 화교들도 노수전의 무술 깊이와 당대의 기협인 것을 눈치채지 못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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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순화 노사

나중에 인천 중구 차이나타운내 우리나라 유일의 중국사찰인 의선당에서 아들 노수덕(1933〜2006. 11), 유순화(劉順華, 1939.〜2011. 1.15, 유창인(劉昌仁). 강학문(姜學文),딸 노숙금(盧淑琴) 등 몇 명의 화교들에게 중국무술을 지도하였다

노수전은 제자들에게 지금까지 수련해온 무술들을 지켜보며 틀린 부분은 교정해 주었으며 특히 주권(走圈)을 도는 법을 전수하였다. 노수전선생이 전한 투로는 많지는 않지만 중국 산동성 무술의 특징인 뻗음과 유연성,경쾌함, 탄력성 등이 잘 포함되어 있으며, 기초공법으로 기본공훈련,수법(斗掌 등),단수기본팔장과 권법으로 팔괘척퇴(八卦踢腿), 적요(摘要), 이로벽괘권, 십로벽괘권, 팔대장(八大掌), 팔괘유신장(八卦遊身掌), 구궁보법(九宮步法)과 마지막 병기 술로 팔괘연환곤(八卦連環棍), 오호군양도(五虎群羊刀), 연청도(燕靑刀), 팔선검(八仙劍), 십이 연창(十二連槍), 행자봉, 호두쌍구(虎頭雙鉤) 등을 전하면서, 이치에 맞지 않는 부분을 수정시켜 정확하게 하도록 지도하였다. 노수전은 ‘拳如逆水行舟 不進以卽退’(무술수련은 흐르는 강물을 거슬러 노를 젓는 배와 같아서 멈추면 바로 퇴보한다)는 오의를 전하기도 하였다.

노수전의 무명이 높아지자 그 무덕에 흠모하여 입문을 원하는 사람들이 많았으나, 좀처럼 한국 사람들에게 무술을 가르쳐 주지 않거나 전수를 꺼렸다. 따라서 그 당시 무술을 하는 화교한테 배운 한국사람 있으면 어떤 자격증보다도 아주 귀하게 여겼기 때문에 중국무술이 한국에 전래과 정에서 왜곡된 부분이 많았다.

아들 노수덕이 1967년 현재 신포시장내 신포우리만두(양조장: 萬居東酒) 자리에서 잠시 중국 무술관을 개관하였다. 요식업에 종사하는 또 다른 제자 유순화가 1972년 무당팔괘 제1관 도장을 열어 인천에 팔괘장을 전파하기 시작하였다.

1960년과 1970년 대에 화교들에게 중국무술을 배운 한국인들이 직접 체육관을 개관하기 시 작하였다. 이때를 전후하여 중국무술이 18기나 국술, 쿵푸, 십팔계 등의 이름으로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였다. 1970년 대 이소룡 주연의 정무문이란 영화가 우리를 사로잡던 시절이 있었고, 이때가 한국 내 중국무술의 전성기 였다.

1978년 8월 15일(음력 6월) 어느 날 날이 궂어 갑자기 기온이 떨어진 날이었다. 그 시절은 구공탄이라 부르는 연탄가스 사고가 워낙 흔하다 보니 하룻밤 사망자의 절반이 연탄가스 희생자였다고 하기도 하였다. 연탄가스는 국적을 가리지 않았다.

언제나 가난하고 소박하게 살았던 노수전은 주안 석바위 근처에서 말년을 보내다가 안타깝게 소리 없는 죽음의 그림자인 연탄가스 중독 사고를 당하고 깨어나지 못해 쓸쓸하게 생을 마감했다.

노수전 선생 사망시 인천 중구 차이나타운에는 일말의 석양과 찬란한 노을이 어두워지는 하늘에 수놓고 있었다. 다만 애끊는 곡조만이 바람에 실려 멀리 멀리 하늘 높이 퍼져가는 가운데…

2011년 5월 응봉산 산자락 밑에서
남아당자강(男兒當自强)을 들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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