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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경과 발경,전사경: 현대 스포츠과학으로 풀어보는 고대의 지혜
- 2025-0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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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도 日本刀
- 2025-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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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학권의 여정: 복건성에서 오키나와 가라테로
- 2025-0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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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배권, 전통과 창작의 경계에서 중국 무술의 한 갈래인 통배권(通背拳)은 기원을 알 수 없는 오래 전부터 하북성 창주인근에 퍼져있었고 근대에 들어 체계화하고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통배권은 그 과정에서 다양한 유파와 명인들을 배출했다. 그러나 통배권의 기원과 발전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단순한 역사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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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도검의 분류는 서양인들에게 큰 도전 과제가 되어왔으며, 중국인들 자신에게도 마찬가지로 혼란스러운 주제였다. 이는 중국의 검들이 기존의 분류 체계에 쉽게 들어맞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중국은 오크숏 분류법과 같은 권위있고 체계적인 도검 분류 체계가 부재했다는 점도 이러한 어려움을 가중시켰다. 이 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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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진포(梁振蒲), 자는 조정(照庭)이며, 하북성 기현河北省 冀县 北郝家冢村 출신이다. 청나라 동치 2년(계해년) 5월 20일(1863년)에 태어났으며, 1932년 8월 13일 사망하였다. 어린 시절 북경 전문외 동대시 신점로 북쪽의 만흥고의점에서 점원으로 일했는데, 이 가게는 그의 아버지가 창업한 것이었다. 아버지의 사업을 이어받아 생계를 꾸려나갔기에 사람들은 그를 '고의양(估衣梁)'이라 불렀다. 선생은 성품이 강직하고 선량하며 활달했고, 어려운 사람을 돕기를 좋아하여 협객의 기질이 있었다. 어릴 때 마을의 진봉의 선생에게서 담퇴 등의 권법을 배워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북경에 온 후 16세에 동해천 선생 문하에 들어가 팔괘유신연환장을 배웠다. 선생은 부지런히 학습을 멈추지 않아 무예가 빠르게 진보했다(선생은 동해천 조사의 묘비에 40번째로 이름이 새겨져 있다). 광서 25년 4월 20일, 양진포 선생이 27세 때, 마가보에서 조육과 다투어, 조육의 부자와 사제 20여 명을 죽이는 사건이 있었다. 처음에 북경의 기차는 마가보(馬家堡)까지 밖에 운영하지 않았다.역에는「각주인(脚走人」이 대기하고 있어 승객들의 화물을 날라주고 돈을 받았다.각주인중에는 질이 나쁜 사람이 있어 부탁할 필요가 없는 작은 화물까지 빼앗다시피 하며 운반해주거나 요금을 비싸게 받기도 하였다. 이 살인사건으로 인해 청나라 형부의 투옥 처벌을 받았으나, 후에 큰 제자 이동태의 구명으로 다행히 사형은 면했다. 이 사건은 당시 신문에도 보도되었다. 광서 26년 7월 20일 8개국 연합군이 북경에 들어오자, 감옥의 간수들이 도망가 수감자들이 서로 쇠사슬을 부수고 탈옥했다. 선생은 출옥 후 고향으로 돌아가 은거했는데, 원수들의 해코지를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이후 하북 기현에서 덕승표국을 열어 많은 제자들을 가르치며 말년을 즐겁게 보냈다. 선생은 민국 21년 8월 13일(1932년)에 세상을 떠났다. 양진포 은사의 원배 부인은 기현성 서북쪽 손정리장 출신이다. 이씨는 자식을 낳지 못해 둘째 동생의 아들 추원을 양자로 들였으나, 조카(양자)는 결혼 후 얼마 되지 않아 병으로 죽었다. 양진포 선생의 원배 부인 이씨도 세상을 떠나자, 다시 현성 서북쪽 사가장의 유씨를 부인으로 맞이했다. 양진포 선생은 유씨 부인과의 사이에서 두 딸을 두었는데, 큰딸은 16세에 죽었고 둘째 딸은 8세에 죽었다. 1919년 유씨 부인은 또 한 아들을 낳았는데 이름이 보염이고 양띠였다. 보염은 팔괘장을 배우지 않았고 1979년 정월 초육일에 병으로 죽었다. 보염에게는 딸이 하나 있었는데, 이름이 양준경이며 현재 56세로 기현성 서북쪽 양가장의 조쌍겸의 아내가 되어 두 아들을 낳았다. 큰아들의 이름은 신월이고 작은아들의 이름은 신년이다. 양진포 선생 일화 양진포 선생은 15세에 북경 전문외 동대시의 의복점에서 점원으로 일했다(신점로 북쪽 1호 만흥고의점). 주인을 따라 옷 보따리를 메고 각 집을 돌며 판매했다. 키가 작고 체격이 약해 자주 병을 앓았는데, 16세 때 주인의 소개로 동해천 선생 문하에 들어가 팔괘장을 배웠다. 부지런히 학습하고 고된 연습을 거듭하여 기예가 크게 진보했고, 뛰어난 무공으로 이름을 날렸다. 옷을 팔아 생계를 이어갔기에 사람들은 그를 "고의양"이라 불렀다. 양 선생은 옷 판매 외에도 북경에서 제자들을 가르쳐 팔괘장을 전수했는데, 전문외 동주시구로 남쪽 "덕성거" 황주관의 주인 왕성재가 그의 제자였다. 그래서 그는 자주 전문외 동주시구 해풍황주관에 있었고, 입문하려는 사람이 있으면 황주관에서 절차를 진행했다. 전문외 다마창의 항의창 비단가게는 하북 기현 단가가 차린 것으로, 매년 정주 묘회에 가서 물건을 팔았다. 매년 양진포 선생이 보표로 정주에 갔는데, 정주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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