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법은 불산시에서 인기가 높다. 전국적으로 유명한 무술가들이 사범으로 있는 8개의 체육관이 있다. .관비는 한 달에 2, 3달러에 불과하다.
” 광동타임스 1919년 9월 9일”
1910년대 말에 불산은 매력적인 장소였을 것이다. 홍승관 체육관(鴻勝舘)의 채리불권은 광둥 무술계 대부분을 장악했다. 재미있고 혁신적인 일들이 홍가권 그룹에서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물론, 오중소吳仲素는 적지만 헌신적인 영춘권 수련생들을 육성하고 있었고 1920년대와 1930년대에 있었던 급속한 성장의 시대를 앞두고 있었다. 중국 남부의 무술은 짧지만 화려한 황금기로 접어들었다.
이러한 유행의 사회적 위치는 무엇이며, 어떻게 그들의 개화를 가장 잘 설명할 수 있을까? 두 가지 질문에 대한 인기 있는 이론들이 있다. 우리는 남소림사, 방랑하는 혁명가들과 비밀 결사들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다. 정무체육회의 세련되고 전국적인 광활한 광고 캠페인이나, 새로운 중국을 위한 새로운 무술을 만들고자 하는 정부 군관들과 교육 개혁자들의 시도들이 많이 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 남소림사의 설화와 정무체육회를 서로 대조하는 것은 쉬운 일이며, 이것이 논쟁의 대상이라고 생각한다. 만약 신화적인 설명이 엘리트들이 주도하는 국가적인 운동보다 앞 선다면 잘못된 것이지만 혼동스러운 것은 양쪽에 진실의 요소가 있다는 점이다.
청나라는 진짜로 소림사를 불태워서 남소림사로 승려들이 망명하게 하지 않은 것이 분명하지만, 그 이미지는 대중적인 상상을 사로잡았고, 수많은 지방의 무술들이 그들 자신을 그 설화로 포장하여 중화민국 시대를 시작했다는 것이다. 민족주의와 혁명. 이는 “국가” 와 같은 추상적인 개념들의 지역화를 촉진시키고, 개인들의 수준에서 새로운 상상의 공동체를 만들고 경험할 수 있는 통로를 제공했다. 마찬가지로 정무체육회는 사회적으로 진보적이며 현대의 요구에도 부합하는 중산층의 취미를 광고했다. 중국의 무술이 현대 중국 사회의 밑거름이 돼야 한다고 주장하고 싶은 사람들을 위한 준비된 경로를 제공한 것이다. 사실, 우리는 여전히 그들의 개혁 효과를 느끼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두 가지 설명은 대부분의 남중국의 무술인들의 실제 경험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무협소설은 고전스타일의 수준 높은 문체로 쓰여져 엘리트들에게 어필했다. 정무체육회가 상대한 도시 중산층은 상대적으로 성장하고 있었지만, 여전히 남중국 전체 인구의 매우 작은 비율이었다. 대부분의 도시 민들은 일반적인 노동자들이나 지역 사회에서 먹고 사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정무체육회의 회비를 감당할 수 없었고, 그것이 촉진한다는 세계적인, 코스모폴리탄적인 비전에는 별 관심이 없었을 것이다.
중국 남부의 무술이 급속히 성장하고 있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현지 노동시장을 조사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우리는 중화민국 시절에 이 지역의 많은 작은 직능단체들과 도시의 무술체육관의 대규모 확산 사이의 관계에 관심을 집중시킬 필요가 있다.
맨 위에 있는 뉴스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라.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불산이 무술 시장의 전문화를 이끌었다는 점에서 상당한 의미가 있다. 불산의 무역항으로서의 지위는 그것을 독특한 제조업을 발전시켰다. 불산은 상업적인 도자기 수출로 유명했고, 철강의 지역 생산을 독점하였다. 비단과 설탕은 또한 지역적으로 중요한 무역 상품이었다. 그리고 그 거리들은 광저우를 지탱하는 생활용품들을 만드는 공방들로 가득 차 있었다. 광저우에서 판매된 것의 대부분은 불산의 작업장에서 처음 제조되었다. 중국의 “산업혁명”은 작은 가게들에서 실제로 일어나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이 지역 노동시장의 발전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대부분의 농민들이 현금을 거의 손에 쥐지 못하는 시대에, 불산의 노동자들은 꾸준한 임금을 받았다. 그들은 예측 가능한 시간을 일했다. 중요한 것은, 그들은 집단적안 직능단체인 길드로 조직되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단체들은 근로 조건을 협상하는 것 외에도, 그들의 구성원들에게 특정 상품을 제공하는 책임을 맡았으며, 주택, 공동예배 공간 (때로는 공동묘지) 그리고 심지어는 오락거리도 제공했다. 청나라의 마지막 수십 년 동안, 그들에게 자신들의 모은 경제적인 부를 무술 사범을 고용하고 길드원들에게 무술을 가르치는 것이 점점 더 인기를 얻게 되었다. 그리고 이 지역이 노동불안을 겪고 있는 것을 감안하면, 무술 수련의 의미가 취미나 오락적인 선택이라고는 볼 수 없다.
농민들이 농촌을 떠나 광저우, 상하이, 홍콩과 같은 산업화 도시에서 보수가 좋은 일을 찾기 시작하면서 이러한 과정은 계속되고 가속화되었다. 길드들은 작은 노동조합을 만들고 이들은 여전히 사회 안전망의 역할을 했고, 주택 지원, 오락, 네트워킹 기회를 제공했다. 린보옌의 연구는 시골 출신 노동자들이 지역의 무술 사범을 그들의 적은 돈으로 고용하고 대도시로 데려오는 방법을 설명했다. 이것은 한때 익숙했던 세상이었지만, 이전에 온 소도시 민병대나 일반적인 무술 수련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이었다. 광저우의 변화하는 도시 풍경에 대한 ‘노스차이나헤럴드’의 기사는 다음과 같다.
광동사람들은 여가에 더 많은 시간을 들인다. 정규 근무 시간을 가지고 있는 도시의 공무원과 철도 직원들은 테니스를 인기 있는 오락으로 받아들였다. 학생들과 후배 공무원들의 모임인 선팅 클럽 (Sun Ting Club) 은 20여 명의 정규 회원들로 구성된 야구단을 운영하고 있다. 체육관과 수영장은 많은 수의 사업가들과 전문적인 남성들을 매일 끌어들이고 있으며 법원과 백화점의 점원들은 이러한 장소들에서 그들의 게임을 즐기고 있다.
노동계층은 파업을 통해 더 짧은 시간과 높은 임금에 대한 요구가 성공한 이후 지금은 오락과 놀이에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 일반적으로 권법으로 몸을 단련하는 사람들은 ‘호신술’을 배우고 있다. 이 클럽들은 또한 인기있는 사자의 춤을 가르쳐 주며 퍼레이드나 다른 공개석상에서 그들의 기술을 발휘하고 있다.
한 영상에서는 광동에 있는 한 기관을 소개하는데, 이 곳에는 젊은 여성과 소녀들로 구성된 20여개의 극단들이 있다. 요즘 시골 마을들은 한두 달 안에 4, 5개의 쇼를 한 번에 2, 4일씩 자신들의 마을로 데려와 쇼를 진행하는데 어려움이 없다. 광동에서는 자정에 문을 닫아야 하고, 시골 지역에서는 저녁 8시부터 아침 5시까지 지속할 수 있다. 일반 극장뿐만 아니라 대형 백화점과 놀이공원도 일반 입장료를 받을 수 있는 다양한 공연을 제공하고 있으며, 많은 사람들이 여가시간을 그곳에서 보내고 있다.
” 광동의 유흥 : 더 많은 여가시간” 노스 차이나 헤럴드1921년 9월 17일.
다시 한 번, 근로시간의 제한과 더 많은 임금이 쿵후체육관의 개관을 촉진했다. 이 모든 것들이 정무체육회 시대의 한복판에서 일어나고 있지만, 그 조직의 진보적인 개혁과 국수주의적 의제들은 이 기사들에 보도된 추세와 별로 관련이 없는 것 같다. 1920년대와 1950년대사이 정무체육관의 세력이(남동아시아를 제외하고) 사라지는 동안, 이러한 직능단체들이 선호하는 지역적인 특색의 무술인, 홍가권, 남당랑권, 채리불, 영춘권 들이 지역 무술계의 중추를 담당하고 있었다.
그러나 위 신문의 보도처럼 이러한 스타일의 인기는 문화적인 공백으로 나타나지 않았다. 이러한 관행들은 가극을 즐기는 동일한 근로자들에 의해 소비되었다. 이러한 무술 수련의 사회적 의미와 정체성은 중국의 상류층 사이에서 훨씬 더 인기있는 테니스나 수영과 같은 것들과 동등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지역의 무술 수련과 서양 체육은 지역 경제가 확장하면서 같은 덕을 보고 있었다.
이것은 무술체육관에 등록하는 사회적 의미가 야구팀에 등록하는 것과 동일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종종 후자에서는 분명하지 않았던 사회적 힘 (아마도 강제성) 이 있었다. 노동자들은 무술 연습을 확실히 즐겼지만, 이들 무술체육관들은 “황방(Yellow Unions)” 에 의해 후원을 받았는데, 이들은 직능단체의 간부들을 그들의 회원으로 포함시켰다. 그러한 경우에, 사용자의 고용주는 무술계 내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함으로써 노동자들에 대한 추가적인 사회적 영향력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무술 사범들은 회사 측을 돕기 위해 고용되어 있었다..
무술 수련은 또한 국민당과 다른 사회개혁자들의 노동운동을 무장화하기 위한 중요한 메커니즘으로 여겨졌다. 이 같은 무술 훈련을 추진하는 것은 당의 보다 혁명적이고 반제국주의적인 목적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노동력의 군사화가 진행되고 있었다. 1925년 영국 상품 불매 운동 (홍콩과의 교역)에는 여러 무술 사범과 단체들이 참여했다.그러나 차이나 프레스의 다음 기사에 따르면 불매 운동 2년차까지 그러한 훈련은 피켓 라인과 광저우의 노동자들에게 의무화되었다.
광저우시에만 170개 이상의 노동조합으로 구성된 국민당 노동자대표회의의 제안에 따라 군대제도하에 훈련될 피켓연대에 가입하지 않은 구성원을 위해 광저우에 거주하는 모든 노동조합에게 무술 훈련을 실시할 것이다. 이번 대회에서 1,700~2,000명의 피켓 그룹을 조직하기로 결정한 것을 기억할 수 있을 것이다.
” 모든 외국인들은 경찰 감시 하에” 차이나프레스 1926년 9월 23일
하지만 혁명과 ‘바리케이드 돌진’이 전부는 아니었다. 노동조합 내 무술 진흥도 정부의 체육문화 진흥을 위한 대대적인 노력의 일환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우리는 이미 공공 부문 직원을 위한 고급 무술 클럽을 만들기 위한 추민이(褚民誼)의 노력에 대해 논의했다. 이러한 노력은 단독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들은 한동안 진행되었던 경향의 연장선이었다. 다시 한 번, 우리는 1933년(국수주의 시대의 절정)부터 노사 관계, 무술 교육, 민족 체육 문화 운동의 촉진을 훌륭하게 결합한 또 다른 뉴스 기사에 나와있다. 이것들은 우리가 소수의 엘리트 사회 운동에만 집중할 때 무시받는 이야기들이다.
내년 봄 체육대회를 앞두고 있는 노동조합
중국 현지 스포츠 역사상 처음으로 내년 봄에 남두시의 공설운동장에서 열리는 노동 육상 경기 대회에서 4개의 오픈 챔피언십을 개최한다. 육상, 필드, 모든 게임 및 무술이 포함된다. 각 노동조합은 4개 대회 중 최소 1개 대회에 참가해야 한다.
차이나프레스, 1933년, 12월 16일
결론
이 모든 것은 1949년 공산당의 승리에 의해 없어질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무술 연습을 명시적으로 금지한 적이 없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실제로 새로 구성된 우슈 산업은 스포츠와 교육 영역에서 배양되었다. 중국에서 가장 유명한 무술가들 중 많은 사람들이 대학에서 코치로 근무하거나 병원에서 기공과 태극권을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엘리트 관행은 대부분의 인구를 배제했다. 당이 경제를 바꾸고, 시장을 국유화하고, 노조를 금지하면서 더 많은 무술인들은 더 이상 연습을 계속할 수 있는 동기나 기회를 갖지 않았다. 1950년대 말까지, 중화민국 시절을 지배했던 무술 문화의 대부분은 스스로 사라져 버렸다.
중국 밖은 사정이 달랐다. 작은 노동조합들은 동남아와 홍콩에서 무술 수업을 계속해서 후원했다. 홍콩에 있는 음식점 종사 노동자 단체에서 엽문이 무술을 가르치기 시작한 것을 기억하자. 또한 그가 홍콩 생활을 하는 동안 그가 가르친 마지막 노동 단체는 아니었다. 이 이야기에는 지역적 색채가 많이 들어가 있다. 이는 남중국의 길드와 노동자 단체의 역사적 중요성을 일깨워주고 있다. 중화민국 시절에 그들은 인기 있는 쿵후의 전통을 만들고 홍보하였다. 1950년대 초, 홍콩의 한 노조는 엽문을 후원하여 영춘권을 생존케하고 전 세계적으로 확산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