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심오杜心五(1869-1953)의 이름은 신괴慎媿로 청나라 동치 8년(1869년) 11월 3일 호남성 자리현 강아향 암판전촌에서 태어났다. 남북대협중 남 대협으로 불리며 중국 근대의 유명한 무술가이며 근대무술사에서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자연문自然門의 개조인 서왜사徐矮師의 수제자이자 자연문 2대 장문인이다. 혁명에 참여했으며 당시 유명 무술가였던 황원수, 손록당, 정좌평 등과 절친한 친구로 지내며 무림칠현(武林七賢)으로 불렸다. 항일전쟁 당시 국민정부에 재직하면서 장제스와 국민정부를 비판하였다.
자연문은 호남성의 무술이며 상당히 유명하다. 만약 무술계가 북경 중심이 아닌 호남성 중심으로 재편되었으면 자연문은 지금 태극권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을 것이다. 자연문은 우스꽝스러운 시연 영상과는 달리 이론의 깊이와 수준 높은 기격 기술을 가지고 있다.
북경이 무술의 중심이 되었기 때문에 표연 중심의 장권과 건강피트니스 중심의 태극권이 정권이 비호를 받아 발전한 것이다.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후 호남성 군정위원회 고문, 호남성 정치협상회의 위원 등을 지냈다. 1953년 7월 8일, 84세의 두심오는 명상 중에 좌망하였다.
생애
두심오는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시와 책을 즐겨 읽었다. 그의 아버지는 염수재를 초청하여 집에서 수업하였다. 그는 공부한 후에는 어른들을 따라 무예를 연마하기를 좋아한다.
일곱 살 때 집사 왕원청과 함께 석표라는 무사에게 ‘비황석飛蝗石’이란 기술을 배우고 돌팔매질을 잘하게 되었다.
여덟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가세가 기울었다. 두심오는 집에서 30리 떨어진 서당에 가서 공부하고, 동시에 엄극嚴克을 스승으로 삼아 남파 권술을 배웠다. 이곳에서 그는 낮에는 책을 읽고 밤에는 무술을 연마하는 등 3년에 걸쳐 금암산 장진인(張眞人)에게 전하는 ‘대련도(大連圖)’의 오의를 깨달았다. 열두 살 때, 스승 엄극이 티향으로 떠나자 두심오는 보개산으로 가서 우호도인에게 무당권의 내가무술을 배웠다.
13세 때, 그는 나를 이길 수 있는 사람만 스승으로 삼겠다는 공지를 내며 스승을 구하였다. 지원자는 많았지만 그를 이긴 사람은 없었다. 어느 날 귀주의 조옥산(趙玉山)이 무사를 천거했다. 추천 편지에는 “좋은 선생을 추천드립니다. 서왜사라는 분께 가르침을 받으세요. 이 분은 무림의 기인이니 부디 영접하여 주시고, 절대로 기회를 놓쳐 평생 후회하지 마세요.”라고 적혀있었다.
두심오는 편지를 들고 온 서왜사의 몸집이 작고 수척한 것을 보고 납득하지 못했지만 몇 번 시험해 본 결과, 확실히 기인이라는 것을 알고, 더욱 공손하게 대하였다. 서왜사는 두심오에게 무거운 짐을 지고 말뚝을 밟아 둥글게 걷는 것을 가르쳤고, 두심오는 자연문의 내권법을 익혔다. 서왜사는 “자연문은 먼저 기를 연마하고 말뚝을 밟고 걸으면 가볍고 자연스러워야 하며, 동정이 함께 있고, 기운이 단전에 가라앉으며 허실이 분명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후 다리에 차는 모래주머니는 점차 무거워지고 손, 눈, 걸음걸이에 주의를 기울이고 차기, 밟기, 후리기, 채기 등을 동시에 연습하며 기운을 가라앉혀 상승하는 힘을 느끼면 순식간에 발력할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주었다. 그는 두심오가 의意, 기, 내공, 외공을 모두 갖추도록 요구했다. 서왜사는 사천 사람으로 학문이 깊고 경서에 정통했다. 어린 시절 아미산에서 무당도인 서청허의 기술을 배우고 소림 무술을 연구하여 무당과 소림의 정수를 모아 ‘동정무시動靜無始, 변화무단變化無端, 허허실실, 자연이 그러한 것’이라는 자연문 무술을 창조하였다.
열네 살, 서왜사가 사천으로 돌아가고 어포서원에 가서 경서를 읽고 서예를 연습하였다. 기억력이 뛰어나고 부지런했기 때문에 동네 어른들의 신망이 두터워 예주에 가서 시험을 치르도록 배려받았으며 10등 안에 들었다. 그 후 상덕고등보통학당에 들어갔다. 여가 시간에 집에 가서 현지 유명 사냥꾼으로부터 호랑이 사냥을 배우고, 호랑이 사냥용 창을 연습했다. 그는 어릴 때 일찍이 아편을 피워 버릇이 되었다. 한 번은 멧돼지 한 마리를 잡았는데 동료가 어깨에 메라고 힘에 부쳤다. 그래서 아편의 폐해를 통감하고 끊기로 했다.
16세 때 쓰촨성 아미산에 가서 서왜사에게 ‘천지 음양의 이치와 자연의 법칙에 순응하는 도’이라는 자연문 경공을 전공하여 자연문 개조 서왜사의 수제자가 되었다.
1887년, 18세의 두심오는 중경의 금룡표국의 표사로 가서 사천, 귀주, 운남, 광서 일대를 여행하며 상인과 여행의 안전을 도모했다. 한 번은 말 상인을 목적지까지 호위하고 혼자 말을 타고 돌아가는 중 사천-귀주 접경의 숲에서 그는 흑점을 운영하는 대도 이노대를 제거하고 유괴당한 몇 명의 부녀자를 구출했다.
1889년, 두심오는 표사직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와 공부에 전념하였다. 하지만 곧 베이징에 가서 수도를 지키는 호위무사가 되었다. (무려 월 은자 80냥을 받고)
1904년 여름, 친구의 조언에 따라 상하이에서 고베마루호를 타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는 도쿄백과학교에서 일본어를 전공한 뒤 도쿄제국대학 농과에 입학하였다. 체류 기간에는 일본의 유명 스모선수 사이토 이치로와 히비야 공원에서 무예를 겨루어 유도에서 우승해 도에이(東瀛)라는 별명을 얻었다.
1905년, 두심오는 송교인, 가진의 소개로 동맹회에 가입하여 반청운동에 투신하고 혁신운동을 하였으며, 손문의 보디가드를 맡았다. 동시에 손문을 보호한 사람은 권왕 왕윤생(호남성 장사 출신)이었다. 이때 서태후는 환관 장씨를 일본에 보냈다. 장은 거액의 돈을 가지고 부유한 상인으로 변장하여, 은밀히 일본 낭인들을 매수하여 손문을 암살하려고 하였다. 두심오는 발각 후 환관을 죽였다. 한 번은 청나라 대사관은 도쿄 우마치구 와카미야에서 손문과 황흥, 송교인, 류아자 등을 죽일 암살자를 몰래 보냈고, 송교인은 소식을 듣고 두심오를 경호원으로 보내라고 했다.
두심오는 신원이 불명한 일본인 세 명이 근처에 머무르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재빨리 그들을 쓰러뜨렸고, 곧 그들의 권총을 찾아냈고 모임을 무사히 마쳤다. 또 한 번은 도쿄의 일본 유학생이 손문을 초청해 강연을 했는데, 혁명파·수구파 두 파의 사람들이 참석했다.손문이 열강의 중국 침략을 비판하고 청나라가 굴욕적으로 나라를 팔았다고 비난하자 수구파 학생들은 소란을 피웠다.
두심오는 송교인, 왕윤생 등에게 손문을 보호하라고 요구했고, 자신은 수구파 틈으로 달려가 “난동을 부리려는 자들이 나서라”고 호통을 쳤다. 그들은 두심오 한 사람만 있는 것을 보고 “역당”, “역적”이라고 욕하며 폭행을 시도하였다. 두심오는 갑자기 ‘바람을 맞으며 날개를 펴고迎風展翅’, ‘관음이 연꽂을 던진다觀音轉蓮’는 기술로 그들을 때리고 뿔뿔이 흩어지게 했다.
1908년, 귀국하여 반청운동에 뛰어들다.
1912년 5월, 송교인은 북경정부 농림총장으로 취임하여 두심오에게 도움을 청하였다. 송 총장의 자택 앞에는 한 덩치가 찾아왔는데 한 번 보자마자 자객임을 알았다. 슬그머니 그의 곁으로 다가와 호룡봉주雙龍捧珠의 수법을 사용하자 그 사람은 오뢰장으로 두심오의 머리를 내리쳤다. 고개를 쓱빡으로 피하고 그는 여세를 몰아 발차기 후 뒤쪽으로 뛰어올라 양손을 뒤로 젖히고 체포를 했다. 자객은 “송 총장 집안에 유능한 사람이 있다고 해서 견문을 넓히고 싶었다”고 시인했다. 두심오는 다시는 오지 말라고 한 뒤 풀어주었다.
두심오가 농사전습소(농업대학)에서 교편을 잡았을 때 두심오는 농대 졸업생인 만뢰성과 곽기봉을 제자로 받아 그 의발을 전하였다.
1913년 3월 20일, 원세개는 상해역에서 송교인을 암살하고, 두심오는 상해로 가서 송의 상을 치룬 뒤 북경으로 돌아왔다. 군벌의 암울한 통치에 분개하여 벼슬을 버리고 강호에 은신하여 청홍 양방의 쌍룡두가 되었다. 그 후 그는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고향에서 쉬거나 강호에 머물며 불교를 공부하고 참선을 하였으며 때로는 모임을 만들어 제자를 거두기도 했다. 이 시기에는 틈이 나면 건강장생서를 읽고 관상법을 배우고 단약을 만들고, 고약을 만들면서 소일했다고 하며 행적이 불분명하다.
1920년대 초반 두심오는 북경 서직문 장방대원 6호에 살았다. 어느 날 그의 동창이 사천에서 상경한 류신선(일설에는 류천일)을 그에게 소개했다. 이 사람은 태평천국 홍수전군에서 의사로 있다가 석달개(태평천국의 익왕)를 따라 대도하 전쟁 때 도망쳐 아미산(眉山山)으로 가서 기공을 배웠다고 하였다. 그는 두심오 집에서 몇 년을 묵었다. 두심오는 이때 류신선에게 기공과 의약을 배웠다.
무림고수중 한 명인 금표는 화북에서 꽤 유명하다. 그는 두심오를 음해하여 세상에 이름을 날리려 했다. 한번은 그가 두심오를 연회에 초대했다. 두심오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 강철 호신대를 입고 연회에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 금표가 두심오에게 술을 권하면서 가슴을 세게 때리자 갈비뼈가 크게 다쳤다. 그래도 아픔을 꾹 참고 아무렇지 않게 금표에게 한잔을 권하며 그의 천돌혈을 후벼팠다. 금표는 즉시 피를 토하고 곧 죽었다. 이후 두심오의 인지도는 크게 높아져 위세를 떨쳤다. 그의 갈비뼈 부상은 유신선의 치료를 받았다.
1928년 가을, 항주에서 제1회 전국 국술 시험이 거행되었다. 두심오는 심사위원으로 초빙돼 주원장走圓場를 선보였다. 그는 먼저 무대 중앙에서 원을 그리며 자연권을 연무했고 그 다음 점점 더 빨리 걸었는데, 갑자기 그 사람은 보이지 않았고, 검은 그림자가 번개처럼 흔들리고, 홀연히 멈추었다. 서 있는 모습이 얼굴빛을 바꾸지 않고, 숨을 헐떡이지 않았다. 관중은 입을 딱 벌리고 감탄했다.그날 저녁 항주의 한 술집에서 고향 친목회에 참석하자 사람들이 경공을 보여달라고 요청했습. 그들은 식탁 세 개를 포개놓자 두심오는 훌쩍 뛰어올라, 맨 위 식탁의 가장자리에서 연무를 한 후, 마치 제비처럼 날아내렸고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동향 사람들은 감탄해 마지않았고, 두심오의 무공은 당시 무림 지존이었던 손록당의 극찬을 받았다.
두심오의 묘는 호남성 장사시 호남대학 악록산에 묘비 앞에는 ‘자연문 후손’비와 ‘두신오생애’비가 세워져 있다.이 중 두심오의 비석이 훼손돼 절반도 남아 있지 않다.
https://youtu.be/yXJ2XFrm9cE
왼쪽 비석에는 ‘자연문 후손’이라는 큰 글자가 새겨져 있고, 그 아래에는 만뢰성, 이려구 등 39명의 이름이 새겨져 있으며, 맨 아래에는 “자연문 무술 개조가 사천에서 문파를 열고 두공 심무선사(先公心武先師)를 가르쳤다.”고 적혀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