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화의 어두운 면, 동아시아 무술 전통은 위조와 허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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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의 무술은 오랜 시간동안 역사적으로 전수되었다는 것이 정설이지만 무술의 전통과 교습방식은 모두 근대에 만들어졌다.

에릭 홉스봄(Eric Hobsbawm,1917-2012)은 영국의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인데, 주요 연구분야는 사회 및 경제 역사학이다. 20세기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 중에서 가장 뛰어난 역사학자로 손꼽히는데, 당대의 정치와 경제, 사회와 문화, 예술 및 문화비평을 포괄하는 박식한 학자였다.

그의 명저중의 하나가 ‘만들어진 전통(The Invention of Tradition)’이라는 책이다. 여기서 인류사회의 전통이라는 것이 위조와 허구의 세계라는 것을 객관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한국에도 번역되어 있다.

우리는 영국 스코틀란드를 생각하면 대개 타탄체크 치마복장과 백파이프 행진을 떠올린다. 이런 문화는 오래된 것이 아니라 후대에 만들어진 전통이다. 18-19세기경에 그냥 만들어진 것이라는 것이다.

이런 의복과 의식이 만들어진 계기도 알고보면 하찮고 우습다. 근대에 광산 노동자들의 편한 작업복으로 그냥 우연히 타탄체크 무늬 복장이 만들어졌는데, 타탄체크의 문양과 색상에 따라 소속 조직이 달랐으며, 대정부 시위때 그것을 입다보니 스코틀란드의 정체성으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는 스토리다. 따라서 영화 브레이브하트에서 타탄체크 복장을 입고 전투하는 것은 고증에 맞지 않는다.

영국의 찰스왕 대관식때 보았던 화려한 행사들도 역시 근대에 만들어진 것이다. 영국의 각종 왕실 행사와 근위병 교대식도 18-19세기에 만들어 졌다고 한다.

환타지 소설이나 영화에서 흔히 등장하는 음유시인도 고대부터 전해지며 있었던 것이 아니라, 1700년대에 시작된 것이 현재까지 전해지는 것 이라고 한다. 고대에도 음유시인과 가수는 있었겠지만, 그들의 정통 맥이 근대까지 사람과 사람으로 이어진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원로들은 도전하는 젊은이들로부터 농촌의 생산수단에 대한 자신들의 지배권을 방어하기 위해 ‘전통’에 호소하는 경향이 있었다. 정치체의 최고 지배층과 지배귀족들도 통제권을 확보하기 위하여 ‘전통’에 호소하였다.  – 만들어진 전통, 472p.

유럽에서는 1차대전 시기를 전후하여 수많은 전통이 발명되고 사용되기 시작했다. 수도, 국가, 국기, 군복, 군장, 국화 등등이 계속 만들어지고 통용되었다. 스포츠를 이용한 대중 세뇌도 이때부터 시작되는데, 대표적인 것이 올림픽이다.

가장 거대한 사기는 크리스마스다. 크리스마스는 이런 저런 설에 근거하여 제정된 것이며, 그래서 지금도 교회마다 크리스마스 날자가 다르다. 세월이 흘렀기 때문에 크리스마스는 인류의 전통이 되었지만, 이와 유사하게 최근에 만들어져서 전통이 되어가는 것으로는 발렌타인데이와 화이트데이, 빼빼로데이가 있다. 언젠가는 이 날 들도 오랜 전통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천 년쯤 지나서 후손들에게 전해지는 빼빼로데이의 기원에는 일본 과자회사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우리나라도 다르지 않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들어간 조선의 종묘제례악도 조선초에 만든 것이다. 삼국시대부터 했던 것이 아니고, 조선초에 국가의 권위를 세우기 위해 이것 저것을 참고하여 그냥 만든 것인데, 600년이 지나다보니 이제는 전통이 되었고 유네스코에 등재되기에 이르렀다. 이제는 역사적인 전통이 확실히 생겼다.

최근에 만들어 졌는데도 오랜 역사를 참칭하는 사례는 생각보다도 많다. 대표적으로 한국불교 조계종의 선종 역사도 만들어 진 것이다. 한국 조계종에서는 석가모니 부처님부터 용수보살을 거쳐, 중국 달마대사를 선종의 시조로 삼고, 한국 조계종까지 끊임없이 법맥이 내려왔다고 주장한다. 법맥이 끊어지지 않으려면 스승과 제자의 전수맥이 명확해야 하고, 깨달은 자는 스승에게서 인가를 받는 선불교의 전통을 지켜야 한다.

하지만 한국 불교는 경허스님 이전의 역사는 불분명하고, 족보도 사실과 다르다. 환성지안부터 경허스님까지 사이의 약 200여년의 계보는 명확하지 않으며, 더구나 경허스님은 득도 이후에 선종의 전통인 깨달음의 인가도 받지 않았다. 경허스님의 위로 5대의 스승에 적힌 분 들은 그냥 평범한 스님들이었으며, 깨달음의 인가를 받은 큰스님도 아니었다.

결국 경허스님은 사실상 나홀로 깨달았다고 주장한 셈 인데, 이것이 한국 선불교의 현주소다.
조계종은 입구 주렴에 ‘불불조조유비전(佛佛祖祖唯比傳)’ 이라 써 놓았지만, 사실과는 조금 다르다.

최근에 전통무예를 주장하는 한국 무술은 대부분 1960년대 이후에 만들어졌다. 70년대 들어서 조금씩 태동되던 이름없는 몇가지 무술들이 세상속으로 튀어나온 것은 1980년 이후다.

전두환 정권은 쿠테타와 국민학살을 통해 집권한 원죄를 덮기 위해 3S 정책을 실시한다.
3S는 스크린(screen:영화), 스포츠(sport), 섹스(sex)에 의한 우민(愚民)정책을 가리키는 용어인데, 대중을 이와 같이 3S로 유도함으로써 우민화하여, 대중의 정치적 자기 소외, 정치적 무관심을 유도함으로써 지배자가 마음대로 대중을 조작할 수 있게 하는 정책을 말한다. 식민지정책에 있어서 순치(馴致)정책의 한 전형이다.

전두환 정권은 전통을 부르짖으며 국풍81이라는 국가적 행사를 통해 국수주의와 민족주의를 부흥시켜 독재의 원죄를 덮으려 시도하였다.

그리고 프로야구를 출범시켰다. 그 당시에 ‘국민들이 프로야구를 보면서 (독재의)포로가 되었다, 이건 포로야구다’ 라는 자조섞인 말도 나왔다.

국가적 차원에서 지원하는 전통문화 중흥 덕분에 부상한 것이 전통무예였다. 중국무술과 일본무술을 변형시켜 소수 그룹이 수련하던 마이너 무예들이 전통무예로 탈바꿈 하여 세상에 쏟아져 나왔다.

무예연구가 육태안 선생은 오래전에 중앙일보와의 인터뷰 기사에서 “전통무예의 뿌리를 찾아 올라가면 대부분 일본인과 중국인이 앉아 있었다”고 회고 하였다. 현재까지 전통무예로 인정된 것은 택견, 씨름, 국궁 이외에는 없다. 나머지 무예들은 그 조상이 대부분 일본인과 중국인이며, 한국 고유의 무술로 검증된 것은 알지 못한다.

홉스봄이 책에 쓴 것처럼, 전통은 사실 최근에 발명되고 보급된 것이 많다. 그런데 만들어진 전통은 거의 예외없이 고대의 계승을 주장하며 사람들에게 역사적 가치를 호소한다.

영국의 음유시인들도 고대와 중세의 전통을 직접 승계한 자 들은 없고, 중간에 자기네들이 전통을 만든후에 고대의 역사를 적법하게 이어받았다고 주장해 왔다. 홉스봄은 이런 것이 모두 다 만들어진 전통이라고 밝힌다.

이런 구도는 한국 전통무예와 너무나 흡사하다. 1980년대에 만들어진 전통무예들은 예외없이 고구려와 삼국시대를 들먹여 왔다.

이런 역사왜곡은 외국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다. 중국과 일본의 무예도 대부분 근대에 만들어 졌지만, 그 역사는 고대와 중세의 영웅을 시조로 삼고 있다. 전국시대 즈음부터 있었다고 주장하는 일본의 검술 종가들도, 알고보면 19세기쯤에 형성된 것이 대부분이다. 중국의 유명 문파들도 전승 역사가 청나라 시절인 18세기 이전으로 올라가는 것은 사실상 없다. 오죽하면 9대 전수자가 장문인으로 있는 청평검술이 중국의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겠는가. 청평검은 창시자와 전수맥이 너무나 분명하기 때문에, 위조의 여지가 거의 없는 투명한 역사를 갖고 있다.

소림사와 달마대사의 연관도 실제로는 20세기 초반에 이루어졌다. 소림권과 달마대사가 연관된 것은 1919년에 출판된 『중국 체육사』에서 언급한 것이 최초이다. 그 이전에는 달마대사와 무술이 전혀 상관이 없었고 이것 또한 20세기 초반 위조된 소림사의 전설 중의 하나이다.

무당검술도 9대 전수자 이전의 역사는 불분명하다. 족보에는 이름이 있으되, 그들이 했던 것은 지금과 같은 검술이 아니라 무당의 제례적 칼춤 이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오래전에 쓰여졌다는 무당검술의 책에는 검술 초식은 거의 나오지 않으며, 그저 음양오행 도표와 도교식 종교 의례만 있을 뿐이다.

19세기 무당검 책에는 상당히 많은 분량의 부적이 실려 있어서, 사실상 검객이라기 보다는 종교인 도사로 보아야 한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전통은 과거부터 오랫동안 내려오는 것도 있지만 현대에 만들어지고 위조되는 것도 흔하다. 그런데 이렇게 위조된 전통은 과연 아무런 가치가 없는가? 그냥 버려져도 되는 것일까?

오래된 현대무술, 소림권

우리는 이제 동아시아에서 무술이 어떻게 교습되었는가를 볼 필요가 있다.

무예도보통지의 무술은 조선군인이 명나라 군관에게서 배운 것이다. 무술 교습의 시간도 십년 이십년간 꾸준히 배운 것이 아니라, 짧은 시간동안에 단기교습으로 이루어졌다. 그렇게 단기 교습으로 전수받은 무술을 기록하여 왕명으로 무예도보통지를 만들었다. 무술을 배워오라고 명나라 군인에게 보낸 조선장수는 아마도 고르고 골라 뽑은 신체능력이 뛰어난 사람 이었을 것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단기 연수 인 것이 가려지는 것은 아니다.

지난 세월동안 중국에서의 무술 교습도 그러하였다. 무술 명인에게 가서 짧으면 며칠, 길어봐야 한두달의 기간동안 집중적으로 배웠던 것 이며, 무술명인을 독선생으로 모시고 매일 수련하는 것은 부잣집 아들에게나 가능했다. 과거에는 지금처럼 월 수업료를 내고 배우는 학원 스타일의 무술도장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술은 돈이 있어야 배운다는 말이 생겼다. 무술명인을 집에 몇 년간 모시고 무술을 배우려면 그 경비가 이만저만이 아니었을테다. 지금도 그런 사람은 흔치 않다.

현대의 한국에서도 그러하였다.
일제 강점기부터 지금까지 우리나라의 무술 원로들도 대부분 단기연수 출신이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에서 가라테를 배워온 사람들도 그 연한이 2년을 넘지 않는다. 태권도의 원로인 최홍희 총재도 일본에서 1년반정도 배운 것이 전부였으니, 다른 사람들도 별로 다를바가 없다. 대부분 일본 유학중에 배웠기 때문에, 수업 기간이 길 수가 없었다.

한국에 들어온 중국무술은 크게 두가지 경로로 이루어졌다. 인천으로 들어온 당랑권과 팔괘장은 한국에서 오랫동안 뿌리를 내렸다. 특히 당랑권은 화교인 강경방 노사와 임품장 노사가 전파했는데, 강경방 노사는 중국에서도 족보가 명확한 무술 명인이었고, 그래서인지 한국의 당랑권은 수법과 기술체계가 매우 훌륭하다.

일본에서 들어온 무술들도 단기연수의 과정을 거쳤다. 일본에서 한국으로 넘어오는 과정에서 단기연수로 기술을 습득한 사람들이 한국의 시조가 되었다. 그러다 보니 부족한 부분은 다른 콘텐츠를 융합하여 덩치를 키웠다.

오히려 최근 30년동안 중국과 일본에서 무술을 수입한 사람들이, 옛날 선배들보다 더 오랫동안 더 체계적으로 무술을 배운 경향이 있다. 1992년도에 한중 수교가 이루어 졌는데, 중국과의 수교 이후에 중국땅에 몰려간 사람들은 중국무술 사범과 보따리 무역상들 이었다.

수 십년간 중국 본토와 단절된 상태에서 한국땅에서 독자적으로 발전해온 중국무술은, 중국 본토의 형태와 많이 달랐다. 1945년 이후에 한국땅에 남은 화교들은 대만국적자들이었는데, 이들은 중국 대륙 본토와 단절된 상황을 이용하여 중국 콘텐츠를 독점하였고, 자신들의 무술이 중국 본토보다 더 정통이라는 논리를 폈다. 공산치하에서 무술이 탄압을 받아서, 무술 명인들이 거의 다 대만으로 이주하였기 때문에, 이제 무술의 정통맥은 대만에 있다는 주장이었다. 중국 본토에서 무술이 탄압받은 적은 없으며, 대만계 무술인들의 주장은 사실이 아니었다. 1992년 이후에 중국대륙 땅을 밟은 한국인들은 본토에 무술이 번성하고 있을 뿐 아니라, 한국에서 배운 무술과 다른 부분이 많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래서 1992년도 이후에 중국 본토에서 무술을 배운 사범들과 한국 토종 중국무술 사범들간에는 갈등이 발생한 적이 있었다.

일본 무술도 마찬가지였다. 1988년에 노태우 대통령때 여행자율화가 이루어져서, 일반 국민들도 자유롭게 해외여행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 이전에는 정부의 허가를 받은 사람들만 제한적으로 해외 여행이 가능했다. 1990년도 이후에 많은 사람들이 일본땅을 밟았고, 그제서야 일본 무술의 실제 형태를 직접 알 수 있었다. 그 이전에는 일본 아이키도, 검도, 고류검술, 가라테 도장에 직접 가서 배운 사람을 보기 매우 힘들었다.

1988년도 해외여행 자율화 이후에 중국과 일본에 장기체류 하면서 무술을 배운 사범들이 등장했다. 지금은 유학파 무술인들이 한국에 자리잡고 뿌리를 내린 시대에 살고 있다.

동아시아의 무술 교육과정을 지켜 보노라면, 민간에서 매일 도장에 출석하면서 무술을 수련하는것은 20세기가 특이한 경우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본래 무술이란 매일 출석하여 학원 교습식으로 배우던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가끔 가서 기술을 배우고, 각자 가정에서 혼자 연습하다가, 어쩌다 스승을 만나면 다시 교정받고 수업하는 것이 오히려 일반적인 학습 형태였었다.

최근에는 서양의 무술들이 들어오면서, 비정기적으로 체육관에 출석하여 운동하는 것이 보편화 되고 있다. 한달에 한두번, 혹은 두어번 출석하거나 오픈 세션에 참가하여 교류 형식으로 무술을 견식하고 배우는 형태가 늘어나고 있다.

이런 스타일의 무술 습득 방식에 문제가 있다고 여기는 사람들은 많은데, 이런 주장의 대부분은 무술을 업으로 삼고 있는 무술 사범들과 무술 전문가들이다.

생활체육은 매일 운동할 필요성까지는 없으며, 일반인이 생업을 희생하면서 매일 수련하면 반드시 문제가 생기기 마련이다. 전업 무술인이 아닌데 매일 수련한다는 것은 시간과 비용의 희생 뿐 아니라, 신체의 건강도 감소할 수 있다. 하지만 체육대학에 진학하고 선수를 하는 엘리트 무술인이라면 매일 도장에 출석하여 운동해야 한다.

우리의 조상들도 매일 무술을 수련한 적이 없듯이, 우리도 매일 수련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생활체육의 차원이라면 분명히 그렇다.

일반인이라면 하루에 30분정도 몸을 푸는 것 만으로도 하루에 필요한 것은 얻을 수 있으며, 일주일에 3-4일정도 체육관에 나가 운동한다면 매우 훌륭한 무술인 이라고 할 수 있다. 취미로 무술을 하는 직장인이 1주에 3회 도장 출석한다면, 대단히 노력한 것이다. 매일 못 나간다고 해서 죄책감을 가질 필요도 없고, 주말까지 포함하여 매일 운동하면 언젠가는 몸에 탈이 나게 마련이다.

무술이 오래된 전통이라는 생각, 무술은 경건하게 기도하는 자세로 매일 매일 수련해야 한다는 생각은 올바른 생각은 아니다. 이런 생각을 주입하는 사람들은 무술을 직업을 삼고 있는 도장 관장들이며, 무술산업에 종사하는 업자들이다. 물론 전업 무술가라면 매일 운동하고 무공을 단련하여 자신의 몸을 유지해야만 한다. 그러나 일반인이 그럴 필요까지는 없다.

재미있는 것은, 매일 운동해야 하는 전업무술가는 사실 중년 이후에 매일 운동하지 않으며, 매일 운동하지 않아도 되는 일반인들은 오히려 매일 무술을 수련하는 현상을 보게 된다.

나이 오십살 넘어서 운동 제대로 하는 사범은 10%도 보기 어려운데, 아이러니 하게도 그런 사범의 도장에 다니는 60대 아저씨는 (동작이 잘 안되지만) 매일 출석하려 노력한다.

전통도 만들어진 것이고, 매일 무술을 수련해야 한다는 강박관념도 만들어져서 주입된 것이다. 둘 다 사실이 아니다.

무술은 평생 지속적으로 하면 좋은 취미이다. 하지만 매일 도장에 발 도장 찍고 출석해서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생업에 지장 없는 한도 내에서 즐기면 딱 좋은 운동이기 때문이다.

평생 하면 좋지만, 매일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만들어진 전통과 만들어진 관습에 속지 말아야 한다.

모든 종교는 매주 주말에 출석하여 예배를 드릴 것을 강제한다. 무술 도장도 매일 출석하여 운동하는 것이 올바른 것처럼 몰아가고 있다.

이런 만들어진 관념은 종교와 무술의 교집합이다. 종교와 무술이 매번 정기출석을 강요하는 것은 결국 돈 때문이다. 주말에 출석하더라도 돈을 내는 관습이 아예 없다면, 목사님도 스님들도 매주 꼭 오라고, 안오면 지옥간다고 겁을 주지는 않을 것이다.

무술도장도 유사하다. 무술 교습 자체가 무료라면, 무술을 종교화하여 결석에 죄책감을 갖게 하는 개념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돈도 안 내는데, 매일 와서 가르쳐 달라고 귀찮게 하는 제자를 환영하는 스승은 많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만들어진 전통에 경도되어 스스로 마음에 속박을 만들 필요는 없다. 한달에 한번 하는 오픈세션에 참가하던, 어쩌다 생각이 나면 수련 모임에 나가던, 그것은 개인의 자유이다. 한달에 하루를 수련하더라도, 내가 무술인 이라는 것을 마음속에 갖고 있다면, 무인이 맞다.

그리고 만들어진 전통과 관습도 결과물이 훌륭하다면 유지 보존 할 가치가 있다. 한국 선불교가 중간에 전수맥이 불분명 하다고 하지만, 현재의 한국불교는 수행체계가 잘 되어 있고, 많은 선승을 배출하였다. 불교에서는 대선사에 한정하여 자수자각(自修自覺)도 인정한다. 한국 근대불교는 인가 없이 자수자각 하신 분 들이 많다. 경허스님도 그러했고, 원불교 소태산 대종사도 자수자각한 분 이다.

마찬가지로 무예도보통지를 복원한 복원무예도 그 존재가치가 있다. 앞으로 60여년쯤 지나면 완벽한 전통무예로 자리매김 될 것이 분명하다.

해방 이후에 성립된 한국의 태권도도 20여년뒤에는 전통무예가 된다. 1930년대에 한국에 들어온 당랑권과 팔괘장도 십 여년 뒤에는 ‘외래 전통무예’가 될 수도 있다.

만들어진 전통도 타당성이 있으면 유지 보존할 가치가 있는 것이고, 그게 과히 잘못된 것 이라고 생각되지도 않는다. 다만 역사 연원을 투명하게 밝힌다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

만들어진 전통에서 중요한 것은 창작의 수준과 투명한 역사의식 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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