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대의 소림무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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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다음 글은 텔아비브 대학의 Meir Shahar 교수가 쓰고 『Harvard Journal of Asiatic Studies』Vol. 61: Number 2에 실린 ‘Ming-Period Evidence of Shaolin Martial Practice’라는 논문을 번역한 글입니다.

2. 현재 소림사의 무술들은 독자적인 경로로 고대부터 전해진 것들이 아니라 북파 무술의 한 종류일 뿐이며 특히 현대에는 북파무술을 기반으로 소림사 무술이 재건된 바가 있습니다. 소림사 심의파조차 하남성 민간의 심의육합권이 소림사로 전해진 것입니다.

3. ‘소림곤법천종’처럼 과거 무술교본에 있었던 무술들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현대 중국무술의 무기술로 발전계승된 것입니다. 예전 것들을 복원하는 것은 복원 자체에 의미가 있는 것이지 옛날의 기술들이 더 뛰어나고 우수한 것은 아닙니다.

4. 샤하르 교수는 이 글의 말미에 소림사에서 왜 ‘곤’이 주요무기가 되었는지에 대해 후속연구를 내겠다고 했는데 별도의 논문은 발표하지 않고 2008년 소림사 무술에 대한 단행본을 출간합니다. 이 책안에 그 답이 있을 듯합니다. 단행본의 표지모델은 현재 소림사 부근에서 무관을 운영중인 석연로 스님이군요. 한국과도 인연이 있어 무승단을 데리고 여러 번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명대의 소림무술

소림사는 전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한 불교사원의 하나임에 틀림없다. 그 이유는 소림사 승려들의 학문적인 업적때문도 아니고 전설적인 선불교의 설립자인 보리달마를 연상시키는 전통때문도 아니다. 오히려 소림사의 명성은 소림사가 많은 중국무술의 발원지라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20세기 서양에서는 중국무술을 즐기는 사람들이 점점 더 늘어나는 것과 같은 매혹적인 문화적 변화가 있었다. 전투적인 면과 양생적인 면 그리고 종교적인 목적이 절묘하게 조화된 것이 특징인 이 무술들은 불교신앙이 필요치 않은 많은 사람들에게 소림의 명성을 퍼뜨렸다.

과연 소림사가 그러한 명성을 누리는 것이 정당한가? 소림사의 승려들은 무술을 수련하는가? 그들은 불교의 금기를 무시했는가? 소림사의 지리적, 경제적, 사회적 환경이 그들로 하여금 불교의 기본교리를 위반하도록 자극-만약 그런일이 일어났다면-하였는가?

독경을 하는 대신 무술을 수련하는 승려들에 대해 정부는 어떠한 태도를 취했는가? 불교학자와 지방사학자들에게 관련성을 인정받았지만 지금까지 이 의문들은 서양의 학자들로부터 아무런 주목을 받지 못했다.

유럽과 미국의 중국학자들은 소림사의 승려들이 무술을 수련하였는지 만약 그렇다면 언제 어떠한 이유로 수련하였는지에 대해 연구한 적이 없다. 중화민국시기의 뛰어난 중국인 학자 당호는 사료의 대조를 통해 소림무술의 역사를 연구하였다.

당호가 모든 자료를 이용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당호는 사회적, 종교적 의미보다 소림무술의 전투적인 양상에 더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소림무술 발달의 주된 영역을 도표화 하기위한 그의 선구적인 작업은 매우 의미있는 것이다.

중국과 일본의 학자들이 쓴 무술의 역사들은 당호의 소림사 연구를 이용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소림사가 규칙적인 무술수련을 시작한 가장 최초의 시기라고 알려진 명대말기의 소림무술 수련에 관한 나의 연구도 그의 연구가 출발점이다. 이 글에서는 소림무술수련의 전투적, 종교적, 사회적 관계에 대해 평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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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술과 관련이 있는 하남성의 지역들

명대 훨씬 이전부터 지리적, 정치적, 종교적 이유들로 소림사는 명성이 높았다. 5세기말경 건설된 소림사는 사찰을 둘러싸고 있는 숭산의 신성한 기운으로부터 큰 혜택을 얻었다. 기원전 1세기부터 숭산은 중국의 황제들이 제사를 지냈다고 추측되는 오악의 하나였으며 낙양으로부터 35마일정도의 거리에 있었기 때문에 황제의 후원을 손쉽게 얻을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수나라 문제때 1400에이커의 백곡오(柏谷塢)를 수여받았다. 보리달마의 전설은 선불교에서 소림사의 위치를 확고히했다. 보리달마로부터 혜가에게 전수된 선불교의 가르침은 8세기초 확고한 전통으로 확립되었다.

소림사가 무술과 연관되기 시작한 최초의 시기는 당나라때로 추정된다. 소림사에 남아있는 몇몇 석판의 비문에 따르면 소림사의 승려들은 두 번의 전투를 경험하였다고 한다. 수나라말기 소림사의 승려들은 도적들의 공격을 격퇴시켰다.

621년 봄 소림사의 승려들은 소멸한 수나라의 왕좌를 둘러싸고 경쟁자인 왕세충과 싸우던 당태종 이세민을 도왔다. 왕세충과의 전투는 왕세충의 수도였던 낙양 인근에서 벌어졌다. 승리한 당태종은 소림사의 승려들에게 포상을 내렸으며 그들중 한명을 자신의 군대의 대장군으로 임명했다. 그 석판의 비문에는 소림사의 군사적인 지원에 대한 포상으로 토지와 다른 특권을 하사하였다는 공문들과 이세민이 소림사의 승려들에게 보낸 감사의 편지가 포함되어 있다.

소림사의 승려들이 두 번의 전투를 경험했다는 비문의 내용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이 비문에는 그에 못지않은 중요한 내용에 대한 언급이 없다. 즉 소림사에서 무술을 수련하였다는 내용뿐 아니라 소림사의 승려들이 어떤 특정한 무술을 익혔다는 기록도 없다. 소림사의 승려들이 전투에 참가하였다는 기록에서 그들이 소림사에서 어떠한 무술수련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논의하여야 한다.

하지만 다른 가능성들도 있다. 전투에 참가했던 승려들이 소림사 외부의 장소에서 무술수련을 받았을 수도 있다. 또는 그들이 관여되었던 군사적인 용무에 의해 임시적으로 무술수련을 받았을 수도 있다. 이는 소림사의 승려들이 무술수련을 받지 않았어도 당시의 전투에 참가할 수 있었음을 의미한다.

소림사의 비석에 쓰여진 소림사 승려들의 전투에 관한 내용은 당나라때의 것뿐이다. 소림사를 방문했던 당대의 유명한 학자들 가운데 소림사에서 무술수련을 하였다는 내용을 암시하고 있는 사람은 없다. 뒤이은 송대와 원대의 학자들 역시 소림사에서 무술을 수련하였다는 언급을 하지 않았다. 따라서 명확하게 결론을 내릴만한 증거는 없지만 당대의 소림무술은 소림사의 양생법이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명대 후기의 흔적

7세기때 새겨진 소림사 비석의 비문에서 소림사에 어떠한 군사적인 책무가 있었다는 것을 전혀 알아내지 못했다. 그러나 갑자기 소림무술에 대한 명대 후기의 흔적들이 홍수처럼 쏟아져 나왔다. 현존하고 있는 40개의 명대후기의 증거가 소림사의 승려들이 무술수련을 하였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그것들은 무술수련을 소림사 승려들의 수행에 있어서 뺄수 없는 필수적인 요소로 만들었고 이를 정당화하기 위해 새로운 불교적 지식이 창조되었다. 소림사의 인과적인 전설의 내부적인 성장은 대외적으로 소림사의 명성을 확장시켰다. 16세기중반 중국내의 모든 군사전문가들은 소림무술을 배우기 위해 소림사를 향해 여행을 떠났다.

소림무술에 관한 언급은 군사백과사전, 무술교본, 지리학적 기록, 역사, 비문, 소설 등 다양한 문헌에 등장한다. 이 광범위한 자료들은 소림무술이 명대의 다양한 지식인층의 관심을 끌었음을 보여준다.

소림무술은 장군, 정부관료, 학자, 승려 그리고 시인들의 글속에 등장한다. 역사가들도 전투와 불교의 연관관계를 통해 호기심을 불러 일으켰다. 고염무(顧炎武)는 ‘소림승병’이라는 글에서 승려들이 전쟁과 관련이 있었다는 다양한 기록들을 조사하였다. 소림무술의 기원에 대한 그의 질문은 그가 살던 시대에 소림무술들이 확립되어 있었음을 보여준다.

명대후기 소림사의 자료들은 풍부함과 다양함뿐 아니라 소림사의 승려들이 무술을 수련했다는 정확한 정보 등에서 당대의 소림무술과 의견을 달리한다. 당대의 비문에 있는 자료에서는 전투에 참가했던 승려들이 전문화된 전투기술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 관한 내용을 볼 수 없다. 대조적으로 16~17세기 글들에는 소림사의 창술과 권술에 대한 언급이 있으며 소림사의 승려들이 곤법에 뛰어났다는 내용도 있다.

소림곤법에 관한 정종유(桯宗猷)의 해설

최초의 문헌화된 소림무술교본은 곤법에 관한 것이었다. 소림곤법천종(少林棍法闡宗)이라는 이름의 이 무술교본은 오늘날의 안휘성(安徽省) 남부인 휘주(徽州) 휴녕현(休寧縣)에서 온 정종유라는 무술전문가에 의해 편찬되었다. 정종유의 일가는 지방의 유지였는데 그 가운데는 몇몇 주목받는 학자들과 관료들도 있었다. 그는 전통적인 학문에는 관심이 없었지만 무술에는 많은 관심을 가졌다.

우리는 정종유가 자신의 가솔들을 훈련시켰고 그의 형제들 그리고 80명에 이르는 사병들과 함께 관아에서 무술시연을 하였다는 기록을 가지고 있다.

정종유는 산적도 아니었고 세습 군인도 아니었다(두 부류 모두 무술에 어느정도의 일가견이 있어야 한다). 그는 지식인층이었고 저명한 학자들과의 교분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무술에 많은 열정을 가졌다. 그 열정은 정종유와 같은 지식인층에 속한 몇몇 다른사람들도 함께 공유하고 있던 것이었다.

예를 들어 내가(內家)무술에 관한 최초의 무술교본을 편찬한 황백가(黃白家)는 저명한 학자인 황종희(黃宗羲)의 아들이었으며 17세기 창술에 관한 내용을 기록한 오수(吳殳)는 시인이자 문학비평가였다. 이들 같은 지식인층은 때때로 자신보다 사회적 지위가 낮은 선생에게서 무술을 배우기도 했다. 무술역사에서 그들이 기여하는 바는 문맹계급에서 만들어져 사라질수도 있었을 무술 기술들을 기록하였다는 점이다.

정종유는 소림곤법외에도 창술, 도술, 석궁에 관한 글뿐 아니라 사사(射史)라는 제목의 궁술교본도 편찬하였다. 창술, 도술, 석궁에 관한 글은 1621년 합본형태의 경여잉기(耕餘剩技)라는 책에 소림곤법과 함께 발표하였다. 멋들어진 화보가 곁들여진 무술교본의 상대적인 분량에서 볼때 정종유는 곤을 가장 선호하였다. 소림곤법에 관한 것은 다른 세가지 무술교본을 합한 것만큼 방대하다.

정종유가 곤에 정통했던 것은 그가 오랜기간동안 소림사에서 생활했기 때문이다. 그의 말에 따르면 정종유는 십년동안 무술을 배웠다. 그의 글에 나타난 소림사는 승려와 속인들이 함께 곤법을 수련하던 장소였다.

소림사는 문무를 겸비하고 있다. 소림사에서 곤법과 선종의 교리를 가르치는 것은 합리적인 사대부들에게 인정받아왔다. 젊은시절 나는 무술을 배우기로 결심하였다. 어느때든 유명한 무술가에 대한 소문을 들으면 그의 가르침을 받기위해 먼 곳까지 여행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나는 여행에 필요한 자금을 모아 소림사를 향해 여행을 떠났고 소림사에서 십년이상을 머물렀다. 처음에는 나를 관대하게 맞아준 홍지(洪紀) 스님을 사부로 모셨다. 나는 그 무술에 관한 광범위한 내용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고 그것을 완전히 습득하지 못했다.

홍전(洪轉) 스님의 나이는 당시 80세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홍전 스님의 봉술은 매우 뛰어났고 승려들은 홍전스님을 매우 존경했다. 나는 홍전 스님을 나의 두 번째 스승으로 모셨고 매일매일 지금까지 듣지 못했던 새로운 것들을 배웠다. 또한 나는 종상(宗想), 종대(宗岱) 두명의 스님과도 교류를 가졌고 그들과의 수련을 통해 많은 것을 얻었다.

후에 나는 가장 뛰어난 무술가중 한명이었던 광안(廣按) 스님을 만났다. 광안 스님은 홍전 스님의 진전을 고스란히 물려받았을뿐 아니라 그것을 보다 더 개선시켰다. 광안 스님은 개인적으로 나를 가르쳤고 나에게 놀랄만한 정묘함을 보여주었다. 후에 나는 광안 스님을 쫓아 소림사를 나왔고 몇 년동안 함께 여행하였다. 처음에는 곤의 신묘한 변화와 놀랄만한 빠르기 때문에 고생을 했지만 점차 익숙해졌고 그것을 배웠다. 나는 곤법을 나의 무술로 선택했고 어느정도의 성취에 도달할 수 있을것으로 믿었다.

나는 궁술과 기마술, 검술, 창술 등을 조사하기 위해 많은 관심을 쏟아부었지만 당시 나는 내가 가진 에너지의 절반을 소모해 버린 상태였다. 나의 삼촌이자 무학생(武學生)이었던 운수(蕓水)와 나의 조카 군신(君信), 태학생(太學生)이었던 함초(涵初)는 한때 나와 함께 소림사에서 무술을 배웠다. 그들은 지금까지의 소림곤법은 소림무술의 대가로부터 다음세대로 구전되고 있다는 점을 지적했고 나에게 같은 취향을 가진 사람들을 위해 소림곤법을 문헌화하자고 제안했다. 처음에는 그와 같은 일을 감당할 수 없다고 말하며 정중히 거절했다. 그러나 전국 각지의 사대부들이 그 일의 가치를 지지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내가 소림곤법의 비밀을 유지하고 그들에게 소림곤법을 전수해 주지 않는다고 비난했다. 마침내 나는 어느정도의 자유로운 시간을 가질수 있었고 나의 사부들과 친구들이 나에게 전해준 이론들을 모아 나 자신의 경험과 결합시켰다. 나는 솜씨좋은 사람에게 무술에 관한 그림을 그리도록 주문했고 각 그림의 좌측에 가결-어느정도의 저속한 표현도 포함된-을 추가시켰다.

이 그림과 가결이 합해져서 책을 구성하였다. 나는 이 책을 소림곤법천종이라 이름 지었다. 이 그림중 하나를 슬쩍 보는 것만으로도 그속에 그려진 자세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책을 읽은 사람은 사부의 도움 없이도 이 무술을 익힐 수 있을 것이다. 매우 단순함에도 불구하고 각각의 가결은 승패의 비밀을 포함하고 있으며 각각의 그림들은 움직임의 진수를 감추고 있다. 곤법이 하찮은 무술이라고 불려지기도 하지만 이 책속의 설명들은 최선을 다한 노력의 결과이다.

이 책은 마음이 있는 사람들을 한단계 진전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이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기 위해 이 책을 사용하고 나의 스승이 전한 기술의 영광됨을 드러나게 한다면 나의 목적은 달성되는 것이다.

소림곤법이 소림사 승려들의 명성을 드높이게 될 것이라는 정종유의 기대는 헛되지 않았다. 소림곤법이 출판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당시 명성이 높았던 모원의(茅元義)는 소림곤법을 다음과 같이 평했다.

“모든 병기술은 곤법에서 나왔고 모든 곤법은 소림에서 왔다. 정종유의 소림곤법천종처럼 세밀하게 소림곤법을 표현한 것은 없다.”

모원의는 정종유의 곤법교본에 깊은 감명을 받았고 소림곤법선종을 그가 지은 무술백과사전격인 무비지(武備志)에 거의 전문에 가깝게 포함시켰다.

소림곤법의 모든 것을 총망라한 정종유의 소림곤법선종은 병기술교본의 효시이다. 그는 명대후기 대부분의 군사전문가들이 선호하던 무기인 곤의 길이, 무게, 무술에 이용하기 위한 곤의 제작법 등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정종유의 글에 따라 곤을 나무 혹은 철로 만들 수 있었다. 나무의 경우에는 8~8.5 척(尺) 길이가 요구되며 무게는 2.5~3근이다. 철곤은 7.5척 정도로 나무곤보다 약간 짧고 15~16근 사이의 무게를 요구한다. 정종유는 나무곤의 제작에 이용되는 나무의 형태에 대해서는 이야기하고 있다.

지역이 다양하기 때문에 나무의 형태도 다르다. 견고하고 조밀할수록, 단단하고 유연할수록 마치 쥐꼬리와 같이 땅에서 나무끝까지 점점 얇게 자란다. 옆흔과 마디가 없으면서도 곧게 뻗은 형태의 나무가 최상의 것이다. 만약 쪼개고 잘라서 곤을 만든다면 그 곤은 입맥을 따라 부서질수도 있다.

정종유는 곤법을 73가지 자세로 구분하고 각각의 자세마다 그림과 함께 가결을 덧붙여 놓았으며 각각의 자세를 하나로 묶어 연속된 수련을 하는 것을 로세(路勢)라 불렀다. 실제 전투에 쓰이는 기술들을 가정하여 그린 이 복잡한 그림은 초보자들이 자세를 연속적으로 이행할 수 있도록 유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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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충두의 ‘소림곤법천종’중 투로의 방향도

정종유는 여러 가지 연속적인 수련을 하나로 뭉쳐 법(法)이라고 불렀다. 정종유가 정리한 소림곤법에는 소야차(小夜叉), 대야차(大夜叉), 음수(陰手), 배곤(排棍), 천사(穿梭)의 다섯가지 다른 곤법이 있었다. 배곤은 다른 네가지 곤법과 달리 개인적으로 연습하는 것이 아니라 두사람이 연습하는 것이었으며 배곤과 천사는 다른 세가지 곤법과 달리 ‘활법무정세(活法無定勢)’ 즉 정해진 자세가 없는 자유로운 곤법이었다.

정종유에 따르면 이 다섯가지 곤법은 모두 소림사에서 나온 것이다. 그의 교본 소림곤법천종에 종(宗)이라는 말이 포함되어 있는 것은 이러한 점 때문이다. 정종유의 목적은 소림곤술과 큰 차이를 보이는 많은 곤술들-소림사의 이름을 빌려온 것도 있는-과 자신이 진정한 소림곤술이라고 주장하는 곤술사이의 차이점을 설명하는 것이었다. 그의 글은 17세기초 소림사의 명성을 반영하고 있다. 만약 소림사의 명성이 높지 않았고 다른 무술을 익힌 무술가들이 소림사의 이름을 이용하려 들지않았다면 정종유는 소림곤법을 공개하라는 요구를 듣지 않았을 것이다.

정종유의 소림곤법에는 오늘날의 무술계를 어느정도 예견하고 있다. 경쟁관계에 있는 무술도장들은 모두들 자기만이 유일한 계승자라고 주장한다.

현재 많은 소림곤법의 전문가들이 있다. 그러나 그들의 곤법은 모두 다르다. 어떻게 다른 스승을 선택하고 어떻게 수련생들이 다른 기술들을 배울 수 있는가? 나는 대답했다. 가르침은 동일한 기원에서 나왔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사람들은 기원으로부터 등을 돌렸다. 스승들은 보편적이지 않은 방법을 존중하고 이상한 기술들을 좋아한다. 몇몇은 이 무술의 투로 시작부분을 가져다 저 무술의 투로 마지막 부분과 섞어버렸다. 또 다른 사람들은 저 무술의 투로 마지막부분을 가져다 이 무술의 투로 중간부분과 뒤섞어 버렸다. 원래 하나였던 투로가 두개로 변했다. 스승들이 명성과 이익에 집착하였기 때문에 세상을 혼란으로 빠뜨렸고 초보자들이 길을 해매도록 만들었다. 나는 이러한 상황을 매우 슬프게 생각한다. 내가 그것들을 바로잡으려 노력하는 것은 이러한 이유때문이다.

승려와 장군

정종유가 소림곤법에 대한 가장 구체적인 해설을 했다고 해서 정종유만이 소림곤법의 전문가라는 의미는 아니다. 도리어 명대후기의 무술백과사전에 등장하는 소림곤술의 언급은 정종유의 소림곤법교본보다 70년 앞서 쓰여진 당순지(唐順之)의 무편(武編)에서 시작되었다.

소림곤법의 특징이 포함된 다른 무술관련 편찬물에는 유명한 장군이었던 척계광(戚繼光)의 기효신서(紀效新書), 앞서 언급했던 모원의가 쓴 무비지, 장군이었던 하량신(何良臣)이 쓴 진기(陣紀) 등이 있다. 기효신서나 무비지, 진기 등에서는 소림무술이 불교계내에서만 전파되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거기에는 소림곤법이 허난성 복우(伏牛)산 수도원에 소속되어 있던 우(牛)산의 승려들에게 전파되었다고 적고있다.

명대후기의 무술가들은 대개 소림곤법을 추켜세웠다. 예를 들어 척계광은 당시의 유명한 무술의 목록속에 포함시켰고 모원의는 소림곤법을 다른 모든 곤법의 기원이라고 결론지었다. 그러나 비난의 목소리를 통해 얻어지는 정보는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다. 소림곤법을 비난하는 무술가들은 그에 대한 세부적인 정보를 제공했다.

소림사가 곤법에만 집착하는 것에 반대하는 무술가인 오수(吳殳)는 소림사가 곤법에 집착하는 것은 태만의 결과이며 다른 병기의 수련을 왜곡했다고 주장했다. 오수는 유하(劉何) 인근의 태창현(太倉縣)에서 태어났다. 정종유와 같이 그도 지식인층이었으며 오교(吳喬)라는 필명으로 위노시화(圍爐詩話)를 쓴 작가로도 알려져 있다. 그는 창술이 특기였다.

그는 1633년부터 당시 순회중이던 창술의 대가인 석전(石電 ?~1634)에게 창술지도를 받았다. 40년후 그는 다른 일곱가지 무술교본이 포함된 수비록(手臂錄)이라는 선집 내에 자신의 창술수련을 요약해 놓았다.

이들 가운데 하나인 몽록당창법(夢綠堂槍法)은 정종유의 스승이라고 언급되었던 홍전 스님이 쓴 것으로 추정되었다. 오수는 홍전의 무술교본을 그의 선집에 포함시켰지만 소림의 무술을 강도 높게 비난했다. 그는 “소림사의 승려들은 창법을 이해하지 못한다. 사실 소림사는 창법을 위해 곤법을 도입하였다. (少林全不知槍, 竟以其棍爲槍)”라고 외쳤다. 바꾸어 말하면 소림사의 승려들은 곤법수련에 너무 치중한 나머지 창법이 갖는 독특한 특성의 이점을 얻는데 실패했다는 것이다. 오수의 설명에 따르면

소림곤법은 신성한 기원을 가지고 있으며 고대부터 현재까지 명성을 누리고 있다. 나는 스스로 곤법에 몰두했었다. 곤법은 실로 산만큼 높고 바다만큼 깊다. 곤법은 실로 최고의 기술이라 부를 수 있다. 그러나 창이라는 무기는 곤과는 완전히 다르다. 옛 속담에 “창은 병중지왕이며 곤은 창의 영역안에 있는 종자이다.”라는 말이 있다. 소림사의 승려들은 이와 같은 것을 결코 몰랐다. 그들은 곤과 창이 유사한 병기라고 생각하며 곤과 창을 다룬다.

오수가 소림사의 승려들이 곤 이외의 다른 무기들을 무시하는 것은 잘못되었다고 말한 것에 반해 다른 무술전문가였던 유대유(兪大猷)는 소림곤법 자체를 비난했다. 유대유는 중국변방의 다섯 이민족에게 섬김을 받았던 성공한 장수였다. 그는 복건성 진강(晉江)지역의 세습군인이었으며 그의 가장 큰 공적은 중국 남동부해안의 해적들을 소탕한 것이었다. 그는 탁월한 책략가였을뿐 아니라 뛰어난 무술가이기도 했다. 그는 형초장검(荊楚長劍)이라는 곤술에 정통하였으며 당시의 군사전문가들에게 찬양을 받았던 곤술교본인 검경(劍經)을 편찬하기도 하였다.

소림사의 명성에 혹한 유대유는 1560년경 소림무술을 살펴보기 위해 여행을 떠났다. 그러나 그는 크게 실망-그의 기준에서 볼때-하였다. 소림무술은 크게 쇠퇴해 있었으며 결국 소림사의 승려들에게 그의 무술을 가르치게 되었다.

나는 하남성의 소림사에서 신묘한 격검(擊劍)을 전해준다고 들었다. 운중(蕓中)에서 돌아온 후 소림사를 찾아갔다. 스스로가 격검의 전문가라고 생각하는 열명이 넘는 승려들이 나에게 시범을 보여주었다. 나는 그들이 이미 과거에 가지고 있던 소림무술의 신묘함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했고 그들에게 이를 말해주었다. 승려들은 즉시 나에게 가르침을 얻고자 했고 나는 대답했다. “이 기술을 익히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중 젊고 용감한 두명의 승려를 선발하였다. 한 명의 이름은 종경(宗擎)이었고 다른 한 명의 이름은 보종(普從)이었는데 이들은 나를 따라 남쪽으로 왔고 나의 병영에 머물렀다. 나는 그들에게 정중하면서도 분명한 명령처럼 음양의 운용을 가르쳤다.

삼년의 시간이 지난후 그 둘이 말했다. “우리는 여기서 충분히 머물렀습니다. 이제 우리는 돌아가서 다른 승려들에게 우리가 배운 것을 가르치고자 합니다. 당신의 무술은 영원히 전수될 것입니다.” 나는 그들이 가는 것을 허락하였다. 순식간에 13년의 시간이 갔다. 하루는 갑자기 문지기가 한 승려가 나를 만나기를 청한다고 알려왔다. 허락을 하고 보았더니 어찌된 일인가! 그는 종경이었다! 그는 나에게 보종은 이미 죽었으며 자신은 소림사로 돌아가 검결(劍訣)과 선종의 교리를 가르쳤다고 말했다. 승려들중 거의 백명이 달하는 사람들이 그 기술의 신묘한 이치에 도달했다. 이렇게 그 기술은 영원히 이어질 것이다!

유대유는 자신의 곤술이 소림사에서 세대를 거쳐 이어진다는 것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소림사의 전통에 그가 준 충격이 과대평가 받았는가? 정종유의 무술교본을 살펴보면 그가 소림사-유대유가 방문한지 15년이 지난후-에서 배운 곤술은 유대유의 검경에 등장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르다. 유대유가 가르친 곤법과 정종유가 배운 곤법은 명칭에서부터 가결과 삽화에 이르기까지 모든 부분에서 서로 다르다.

확실히 유대유가 소림사를 방문하기 이전부터 소림사에는 고유한 곤법이 있었고 오랜기간동안 번성해왔다.

유대유는 소림무술에 대한 자신의 영향을 그릇판단하였지만 그가 소림무술에 어느정도 족적을 남긴 것은 사실이다. 유대유가 소림사를 방문한지 100년이 지난후 편찬된 오수의 수비록에는 아래글과 같은 힌트가 있다.

소림사는 오호란(五虎攔)이라 불리는 곤법이 있었다. 일타일게(一打一揭)가 전부이며 그것에 모든 것이 있다. 타는 곤이 땅에까지 닿아야 한다. 게는 사람의 머리까지 쳐올려야 한다. 이것은 간단한 방법이며 오묘한 점이라고는 전혀 없으며 마치 농부가 땅에 괭이질을 하는 것과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오랜기간 연마하면 충분히 신묘한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 타게를 통해 사람은 힘을 얻는다. 소림사의 다른 모든 무술들이 이것을 경외한다. 이것은 매우 단순하기 때문에 가볍게 얻을 수 없다.

오수는 오호란의 특징인 일타일게를 두드러지게 나타내고있다. 유대유의 검경에도 이와 매우 유사한 형태가 있는데 이는 오수가 묘사한 것에 비해 다른 것이 없다. 만약 이러한 가설을 주장한 당호가 옳다면 17세기 후반의 소림사 승려들은 두가지의 곤법과 관련되어 있을 것이다. 하나는 유대유가 소림사를 방문하기 이전의 곤법인 정종유의 소림곤법이고 다른 하나는 명대의 장군에서 배웠다는 곤법 즉 오수가 오호란이라고 부른 곤법이다.

유대유가 소림사에 미친 영향에 대한 문제를 제쳐두고라도 그가 소림사와 관련이 있었다는 점은 지식인층이 명대 후기의 완전히 다른 두가지 부문 즉 불교와 군사에 관여하는 경향이 있었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소림사를 군사시설과 같이 생각하는 그의 개념은 명대 후기 불교활동의 역할에 대한 다방면의 이해를 돕는다.

유대유의 말에 따르면 그는 소림사의 승려들을 가르쳤다. 다른 예에는 소림사의 승려들이 소림무술의 전문적인 지식을 군부와 공유하였다고 한다. 가장 확실한 예는 16세기 중반 해적소탕을 위한 군사작전에 잘 나타나는데 당시 진강지역에는 이를 도와주려고 온 소림사 승려라고 불리는 장교들이 있었다. 전쟁에 참가한 소림사 승려들은 그들의 종교적인 정체성은 돌아보지 않았다. 그들은 다른 군사들과 함께 있었지만 승군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결국 한명의 승려는 군대에서 지위를 받고 그 결과 속인으로 돌아왔다. 그는 유덕장(劉德長)이라는 17세기 소림사의 승려인데 그는 군대에서 유격장군(游擊將軍)이라는 지위를 부여받았다. 그는 장교의 지위를 위해 소림사의 계율을 어겼지만 소림사의 승려들이 학생의 자격으로 그의 창술에 대한 가르침을 받는 것도 허락하였다.

만약 소림사의 승려들이 장군들과 협력하였다면 소림사의 승려들은 군대가 아닌 새로운 무술가집단이 되었을 것이다. 우리는 이 새로운 무술가집단중 두사람을 만났다. 정종유와 오수가 바로 그들이다. 제3의 인물로 정진여(程眞如)가 있다. 정진여는 소림사가 아니라 사천성 아미(峨嵋)산에 있는 다른 불교사원에서 무술수련을 받았다. 정진여는 훗날 아미창법(峨嵋槍法)을 쓴 승려인 보은(普恩)으로부터 가르침을 얻기 위해 여행을 떠났다.

정진여는 보은이 신령한 존재로부터 창술을 전수받았다는 점을 주목했는데 보은은 이 부분을 꺼려했을 것이다. 정진여는 보은에게 그의 진실함을 인정받기 위해 2년동안 땔감을 모았으며 그 후에 창술의 신묘함을 전수받았다.

정진여는 최고의 창술고수로부터 가르침을 받기 위해 먼 여행을 떠났다. 이러한 면에서 볼때 정진여는 떠돌아 다니는 인생을 살던 명대후기의 다른 무술가들-승려들과 속인들-과 닮았다. 보은은 전국의 모든 곳을 여행했지만 상대를 찾지 못했다. 석전은 제자를 찾기위해 마을에서 마을로 떠돌아다녔다.

정종유는 스승 광안을 쫓아 수년간을 떠돌아 다녔다. 삼기우공(三奇友公)이라는 소림사 승려는 허난성, 하북성, 산동성, 강소성의 광범위한 지역을 여행하며 천여명의 제자들을 얻었다고 말했다. 강호를 주유하는 무술가들은 그들이 승려이든 속인이든 일반적으로 각 지역의 사원을 주거지로 택했다. 오수는 석전이 보본사(報本寺)라는 절에 기거하였다고 언급하고 있으며 황백가에 따르면 왕정남이 철불사(鐵佛寺)에서 사람들을 가르쳤다고 한다. 방랑하는 무술가들에게 숙소를 제공하는 것은 지역의 사원이 무술을 수련할 수 있는 장소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명대 후반의 무술가들은 이렇게 자주 노상위에 있었다. 16~17세기의 작가들은 배우나 웅변가, 예언가들과 같은 떠돌이들이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만든 강호(江湖)라는 배경속에서 무술가들을 표현하였다.

무술가들은 다른 사람들처럼 경제적인 이유로 인해 강호를 주유했을까? 잠시 생각해보면 무술가들은 배우고 가르치고 훌륭한 상대를 만나 자신의 힘을 시험하기 위해 여행을 떠났을 것이다. 그러나 개인적인 기술의 발전은 경제적인 뒷받침없이는 어렵다. 무술스승들은 제자들에게 수업료를 받았으며 구경꾼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시합을 열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 운유객(雲游客)은 강호총람(江湖叢談)에서 떠돌이 방랑자로서의 무술가들에 대한 생생하고 세부적인 언급을 하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표국의 보표(保鏢)로 일하기도 하였고 어떤 사람들은 장똘뱅이처럼 장이 서는 마을과 마을을 떠돌면서 사람들에게 자신의 무술을 팔기도(賣藝)하였다.

방랑은 명말기의 무술가와 청말기의 후계자들 사이의 연결고리를 생성시켰다. 두 집단 모두 소설적인 묘사와 관련이 있다. 당대의 소설에서 강호라는 방랑의 영역은 영웅적인 행위를 하는 협객에게 피할수 없는 환경이었다. 무협소설에서 강호는 더 이상 생계를 위한 영역이 아니었다. 대신 강호는 가족과 사회와 국가의 원칙이 적용되지 않는 자유의 영역을 상징한다. 강호는 일상적인 생활을 넘어선 상태에 있는, 협행의 꿈을 성취하기 위한 곳이다.

무승과 국가

명대후기의 무술관련 서적들을 보면 훨씬 이전부터 소림무술이 훈련되어 왔다는 느낌을 받는다. 예를 들어 오수는 “소림곤법은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명성을 유지해오고 있다”고 말했고 유대유는 전설적인 소림무술이 쇠퇴하는 것을 슬퍼하였다. 장군들은 소림승려들이 “잃어버린 고대 소림무술의 비밀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16세기 군사전문가들이 옳았고 소림무술은 훨씬 이전부터 존재했다면 왜 명대후기에 이르러 소림무술에 대한 정보가 범람하게되었는가?

명대 후기 군사관련서적의 성행은 왜 소림무술이 훨씬 이전부터 수련되어 왔으면서도 명대후기가 되어서야 처음 언급되었는지에 대한 부분적인 이유를 보여준다. 16세기 수많은 군사관련물의 출판이 확인되었고 그 출판물들은 대포나 군함에서부터 소림무술에 이르기까지 무술에 관련된 다양하고 광범위한 내용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무승들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게 된 보다 중요한 이유는 정규군의 쇠퇴이다. 16세기 중반 명의 군대는 매우 궁핍하였고 병참체제에 의한 명나라의 방어시설은 대부분 사라졌다. 몽골의 왕자 알탄이 북경외곽을 마음놓고 약탈한 1550년대의 상황은 매우 암담하였다.

계속되는 명나라 군대의 퇴화는 그 부족분을 보충하기위해 다수의 다양한 향병(鄕兵)에 관심을 쏟도록 만들었다.

당시의 군사분석가들은 하남성의 산에 사는 사람, 하북성의 돌던지는 사람, 복건성의 선원, 여러 성의 염전 노동자들과 같은 다양한 집단의 전투기술에 대해 여러 가지 이야기를 했다. 소림사의 승려들은 16세기 중반의 해적들과의 전투를 통해 그들의 군사적 역량에 큰 주목을 받았다.

1540년대와 1550년대 해적들이 대규모로 중국 동부와 동남부 해안을 급습했다. 왜구(倭寇)라고 알려진 이 해적들에는 일본인과 다른 외국인 외에도 밀거래를 하고 있던 많은 수의 중국인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들은 진강지역에 특히 많이 나타났는데 변방뿐 아니라 성곽에 둘러쌓인 도시마저도 약탈하였다. 예를 들어 1554년 송강(松江)이 점령당했고 책임자가 죽음을 당했다. 지역의 관리 자신들이 산적들과 거래에 관련이 있었지으며 정규군이 부족하였기 때문이다. 명정부는 그와 같은 상황을 통제하는 과정에서 무시무시한 어려움들과 맞닥뜨렸다.

하지만 부분적으로 그것은 위에서 언급한 척계광과 유대유의 활약에 힘입어 강남의 공권력이 되살아난 1560년대 이전의 일이었다.

16세기의 몇몇 자료는 해적들의 약탈이 절정에 달했던 1553년 진강지역의 장교들이 소림사와 다른 사원의 승병들을 동원할 것을 결의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가장 세부적인 근거는 정약증(鄭若曾)의 강남경략(江南經略)에 포함된 승병수첩기(僧兵首捷記)이다.

그는 검사하지 않고 지나치는 일이 없었다. 정약증은 중국해변지역에 정통한 지리학자와 같은 동시대의 인물들에게서 나온 판단을 수집하였다. 이같은 이유로 인해 정약증은 1560년 당시 복건성와 저장성 그리고 중국남부 대도시주변의 군사를 지휘하던 허종헌(胡宗憲)의 고문이 되었다. 정약증은 허종헌의 고문으로 있는 동안 해박한 지식으로 해적들과의 전투에 기여했고 해적들은 감금되었다.

정약증의 증거와 다른 명대후기의 증거를 대조해보면, 남경 총사령관의 부관이었던 만표(萬表)가 승병들의 동원을 시작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으며 승병들이 참여한 네번의 전투가 벌어졌던 격전지도 정확히 알 수 있다. 첫 번째는 1553년 봄 항주만으로부터 전당강을 통해 항주까지 이어지는 진입로를 통제하는 자산(赭山)이라는 곳에서 벌어졌다.

나머지 세 번은 운하로 가득찬 황포강의 삼각주에서 벌어졌다. 1553년 7월에는 옹가항(翁家港)에서, 1554년 봄에는 마가빈(馬家浜)에서, 1555년 가을에는 도택(陶宅)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무능력한 장군이 네 번의 전투에서 승군을 이끌었고 사망한 승려 네명의 유해는 상해에서 남서쪽으로 20마일쯤 떨어진 사산(佘山)에 있는 사의승탑(四義僧塔)아래 묻혔다.

승려들이 가장 큰 공을 세운 것은 옹가항 전투에서였다. 1553년 7월 21일 120명의 승병들은 한 무리의 해적들을 물리쳤고 그 잔존세력을 10일동안 남쪽 20마일의 거리에 있는 왕가장까지 쫓아갔으며 7월 31일 마지막 남은 도적들을 처리하였다.

쉽게 말하면 백명 이상의 도적들을 처치했고 승려들은 단 4명만 사망하였다. 승려들은 이 전투에서 자비심을 베풀지 않았다. 승려들은 도망치는 도적들의 아내들도 철곤으로 때려죽였다. (승려들이 무장도 하지않은 부녀자들을 죽였지만 정약증은 그들이 불교의 교리를 어겼다고 평하지 않았다.)

소림사

소림사에서 온 모든 승려들이 옹가항의 승리에 관계된 것은 아니다. 몇몇 승려들은 이미 전투경험이 있었지만 다른 이들은 이번 전투를 위해 특별한 훈련을 받았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을 승리로 이끈 승려는 소림사에서 무술훈련을 받았다. 그의 이름은 천원(天員)인데 정약증은 그의 무술과 전략적 천재성을 크게 칭찬하였다. 한 예로 정약증은 그 소림사의 탁발승은 그의 지휘권에 도전한 열여덟명의 항주출신 승려들을 가볍게 제압했다고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천원이 말하길 “나는 진정한 소림이다(吾乃眞少林也). 네가 나보다 우월하다는 너의 주장을 정당화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무술이 있느냐?”. 열여덟명의 승려들은 그들중 여덟명을 선택하여 천원에게 도전했다. 여덟은 즉시 그들의 무술로 천원을 공격하였다. 그때 천원은 집회장 앞쪽으로 열린 테라스위에 있었다. 여덟명의 공격자는 안뜰에서 그가 있는 곳으로 가기위해 계단을 올라가려했다. 그러나 그들이 오는 것을 본 천원은 그의 주먹을 휘두르며 계단을 올라오는 여덟명의 승려를 막았다.

여덟명의 승려들은 집회장의 뒷문쪽으로 뛰었다. 그들을 검을 들고 집회장을 통해 앞쪽의 테라스로 달려갔다. 그들은 천원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천원은 급히 집회장의 문을 잠그는데 사용하는 긴 나무를 움켜잡고 좌우로 휘둘렀다. 여덟명의 승려는 최선을 다했지만 테라스에 갈 수 없었다. 반대로 그들은 천원에게 얻어맞았다.

도전자들의 지도자격인 월공(月空)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천원에게 용서를 빌었다. 열여덟명의 승려들은 천원앞에 엎드려 그들의 패배를 시인하였다.

월공의 무술에 대한 묘사는 아마도 무협소설 독자들에게는 친숙한 이야기 일 것이다. 정약증의 이야기속에 나오는 몇몇 주제는 명대이후, 근대문학 유형의 기본적인 특징이 되었다. 무협소설은 일반적으로 중무장한 적군을 한손무기 혹은 맨손으로 제압하는 영웅들을 찬양하고 있다. 그러나 천원의 무술은 허구가 아니다. 16세기 군사분석가는 소림사 승려들의 전투능력에 큰 감명을 받았다. 그는 정부가 승군을 정기적으로 이용하려 들었다고 주장했다.

오늘날 이 땅의 무술가들중 소림에 굴복하지 않은 사람이 없다. 복우(伏牛)는 두 번째이다. 소림에서 무술을 배운 복우의 승려들은 광부들로부터 그들 스스로를 지켰다. 세 번째는 오대(五臺)이다. 오대사의 전통중에는 양가창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는 양가에서 만들어져 전해진 것이다. 이들 셋은 수백의 사원과 수많은 승려들로 이루어져있다. 만약 정부가 이들을 모집한다면 항상 전투에서 이길 것이다.

정약증이 16세기 승군의 힘을 과대평가하였을 수도 있고 해적과의 전쟁에서 승군들이 기여한 바를 부풀린 듯 하다. 승군이 전투에 참여하는 것은 제한되어 있었다. 가장 큰 승군의 경우 120명 정도였고 다른 승군들은 수십 명정도였다. 그런 까닭에 그들의 무술이나 개개인의 용기에도 불구하고 승군은 전쟁에서 큰 힘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정약증은 승군들이 국가에 큰 힘이 되어주었다고 확신했다. 그의 승병에 대한 징집요구는 중요시되었는가? 소림사의 승려들이 해적과의 전쟁외에 다른 전쟁을 위해서도 징병된적이 있을까?

하남성 지방정부는 해적들과의 전쟁에 앞서 소림사 승려들의 군사적인 잠재력과 그들이 국지전을 위해 모집되었다는 것을 언급하고있다. 예를 들어 1552년 오십명의 소림사 승려들은 측방참공(竺方參公)의 지휘아래 정부가 하남성의 도적 사상조(師尚詔)를 성공적으로 토벌하는데 기여했다.

다른 예로 1630년대에는 지역적인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소림사의 승려들이 하남성 서쪽 의 섬주현 지사에게 징병되었다.

당시는 왕조의 쇠퇴시기였고 정부조직은 실타래가 풀리듯 풀려있었다. 사기언(師記言)이라는 이름의 지사는 더 이상 중앙정부의 지원에 의지할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의 돈을 지역군대를 위한 군자금으로 내어놓았다. 그는 소림사의 승려들을 병적에 편입하여 훈련시켰고 노회회(老回回)라는 별명을 더 잘 알려진 반란군 지도자 마수응(馬守應)의 엄청난 대군에게 패하기전까지 몇 번의 승리를 기록하였다.

하남성에서의 소림사 승려들의 군사적인 기여-진강 해안지역에서의 기여와 같은-는 명대의 몇몇 관리들에게 승려들의 군사훈련이 승리를 보증하게 되었다.

명 나라 정부는 소림무술의 수련에 호의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 학자는 소림사의 승군이 정부 군사기관에 소속된 특수부대로 변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몇몇 장교들만이 승려들의 군사훈련을 환영하였을 뿐 다른 이들은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다. 그들은 무승들이 자신들이 배운 전투기술로 그들에게 대항하지 않을까하는 두려워했다.

예를 들어 왕사성(王士性)은 그의 저작인 『예지豫志』에서 도적질과 반란의 성향이 있는 무승들을 비난했다.

고위층이면서 감찰의 지위에 있던 왕사성은 하남성의 불교사원들이 도적들, 반란군들과 내통하고 있다고 비난했고 소림사의 승려들을 가장 크게 비난했다.

왕사성의 글에는 그 지역의 황폐한 사회경제적 환경과 무술의 출현이 그 지역의 새로운 빛을 뿌렸다는 점을 간략하게 말해주고 있다. 그의 글에는 당시의 고통스럽고 지독한 상황이 어두운 분위기의 그림들과 같이 묘사되어 있다. 예를 들어 1593년부터 1594년까지 하남성 남부 여녕현을 강타한 기근은 식인주의를 불러 일으켰다. “사람들은 식량으로 이용되기 위해 살해당했다. 인간의 살은 공공연히 매매되었고 정육점에 버젓이 진열되었다.

기아로 인해 무법천지가 되었다. 왕사성은 도박꾼부터 악명높은 광부들에 이르기까지 수만가지 하남의 무법자들의 형태를 열거하고 있다. 광부들에게 광업은 직업이고 살인은 생계의 수단이었다. 이 글에서 왕사성은 하남의 승려들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으며 도적질과 반란에 대해 명백하게 비난하고 있다.

하남성의 승려들은 결코 도첩(度牒)을 획득할 수 없다. 오늘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고 내일 머리를 기르고 환속한다. 그들은 마치 즐기듯이 이 같은 일을 행했다. 그런 까닭에 어디선가 백련교(白蓮敎)가 나타났다. 수많은 사람들이 백련교도로 가입했으며 정부는 그들에 대해 조사할 방법이 없었다. 수없이 많은 도적들이 머리를 깎고 겉모습을 바꾸어 승려가 되었다. 문제가 해결되면 그들은 다시 환속하였다. 그들이 정좌해있든 떠돌아다니든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당신은 수백의 승려들 가운데 술마시지 않고 고기를 먹지 않는 승려를 단 한명도 찾지 못한다.

Barend ter Harr의 연구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백련교는 명대 후기동안 드물게 종교적인 명칭을 사용하였다. 관리들은 옳든 그르든 반감을 갖고 있다고 의심되는 모든 집단들을 비난하기 위해 백련교를 이용하였다. 그 기간 동안의 왕사성의 글은 완벽한 예이다.

그는 하남성에서 백련교와 연관이 있다고 의심되는 단 하나의 그룹도 조사하지 않았다. 결국 왕사성은 그 지역에서의 종파에 따른 이론에 대해서는 거의 신경쓰지 못했다. 오히려 백련교의 이름을 이용하여 그의 동료관리들에게 하남성의 승려들이 위험하다는 것을 경고했다. 왕사성은 도망다니는 도적들을 승려의 반열에 끌어들이는 사원들에 대한 공격을 주저하지 않았다. 그는 승려들이 술을 마시고 고기를 먹는 것은 불교의 교리를 어기는 것이며 하남성의 사원에는 진정한 승려가 없다고 비난했다.

왕사성은 불교의 교리를 어겼을뿐 아니라 선불교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소림사의 승려들을 위해 특별한 비난거리를 준비해놓았다. 예를 들어 그들은 그들은 봉(棒)과 갈(喝)이라는 기본적인 수련에 익숙치 못했다고 비난했다. 쉽게 말하면 이 소림사의 식객들은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 먹고 마시고 싸우는 일에 시간을 허비했다.

소림사에서는 먼곳에서부터 여행 온 떠돌이 승려들만이 소림사에 어울리는 불교의 계율을 지켰다. 소림사의 승려들은 술을 마시고 고기를 먹고 무술을 수련했다. 그들은 권과 곤만을 알 뿐이었고 봉(棒)과 갈(喝)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랐다.

따라서 소림사의 군사적인 활동에 대한 명정부의 태도는 정규군의 그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몇몇 관리들은 전장에서 기끼어 승군들에 의지하였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승들의 반역적인 성향에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다.

명의 관계(官界)는 하남지역 승려들의 군사적인 경향이 해당지의 격렬한 폭력상황을 투사하고 있다는데 이견을 달지 않았다. 하남지역의 승려들이 도적과 역도들과 결탁했다고 비난한 왕사성은 기아와 무정부상태가 소림사 승려들의 무술활동에 힘을 주고 있으며 그들은 다른 사회집단이 군대화되는 것을 이끌고 있다고 말했다.

정부가 승군들을 편입시키도록 재촉했던 정약증도 동일한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정약증은 자신의 글에서 왕사성의 글에 상세히 설명되어 있는 범죄자와 같은 광부들에 맞서 그들 스스로를 지켰던 소림사의 승려들을 소림무술의 기원이라고 보고 있다. 왕사성과 정약증 두사람 모두 하남성 일대에 팽배했던 무정부상태가 해당지역의 승려들이 군사적인 경향을 갖는데 큰 영향을 끼쳤다고 지적하고 있다.

하남성의 궁핍하고 폭력적인 사회경제적 상황은 소림무술의 발전에 대한 부분적인 이유를 말해준다. 하남성의 상황은 다른 무술의 등장에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명대 초기에 시작되어 청대 말기까지 하남성이 무술의 발원지와 같이 여겨졌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세계적인 명성을 가지고 있는 태극권은 소림사에서 북쪽으로 30마일정도 떨어진 진가구라는 곳에서 탄생하였고 장내주(萇乃周)는 자신의 무술교본을 사수(汜水)인근에서 편찬하였다. 팔괘장도 하남성에 기원을 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형의권은 산서성에서 형성되어 그곳에서 훈련되어졌다. 팔극권은 하남성은 아니지만 인근에 있는 하북성에 기원을 두고 있다. 소림사는 명대말기 많은 무술이 탄생했던 지역에 위치해 있다.

학자들은 중국북부의 무술의 역사는 지역적인 폭력이라는 의미를 지닌다고 지적했다. 약탈경제는 무술을 하남성과 그에 이웃한 지역 전체의 사회에서 필수적인 요소로 만들었다. 그들의 수확물이 약탈당하는 것을 막기 위해 사람들은 자경단을 구성하였으며 때로는 다른 마을을 약탈하기도 하였다. 죠셉 애셔릭과 수잔 네이퀸의 연구에서는 무술이 왕륜의 팔괘교, 의화단의 난 등의 배경으로 작용했다고 서술하고 있다. Douglas Wile는 중국북부지역의 잔혹한 생태환경이 하남성에서 태극권이 발전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고 결론내렸다.

무승들이 가진 반항적인 성향의 낌새는 17세기 사회에서는 그리 특별한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이것이 사실이던 아니던 무승들이 모반할 수 있었다는 견해를 나타낸 취성석(醉醒石)이라는 이야기모음집에 반영되어 있다. 『광화상망사대보:우술사공설역모(狂和商妄思大寶:愚術士空設逆謀)』란 제목의 이 글은 청나라 침공 이후에 쓰여졌으나 명대를 다루고 있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인 승려 명과(明果)는 소림사에서 곤술을 공부했다(해설자는 소림사가 곤법으로 유명했다고 말하고 있다). 멍청한 예언가는 명과의 외모를 관찰한 후 그에게 황제가 될 운명이라고 이야기해 준다. 예언에 현혹된 명과는 승려의 삶을 버리고 반란에 몰두하였고 결국 잡혀서 예언가와 반란에 동참했던 모든 사람들과 함께 죽음을 당하였다.

책의 줄거리는 예언가가 승려 명과가 관심을 갖도록 현혹하는 내용이다. 예언가는 명과가 황제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납득시키기 위해 다른 승려의 이름을 언급한다.

그 승려가 명나라를 세운 주원장(朱元璋)이며 주원장이 안휘성 봉양현에 있는 황각사(皇覺寺)에서 승려생활을 한 적이 있다고 말했다. 주원장이 16세때 사원에 들어가 그곳에서 무술을 연마했었다는 증거는 없다. 그러나 사원을 떠났던 23세때 그는 황제의 자리를 얻기 위한 군대의 지휘관이 되었다. 이러한 점에서 볼때 예언가는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니다. 결국 한사람의 승려가 군대의 지휘관이 되어 300년간 지속되는 제국을 건설하였다.

중국무술의 한국유입과정

긴나라(緊那羅) 전설

16세기 소림승려들의 국가에 대한 충성심의 논의는 우리에게 그들의 무기에 대한 정보를 제공한다. 소림사의 승려들은 정부가 고용하도록 주장했던 정약증은 소림사의 승려들이 곤술만 연마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는 해적소탕전투에 관한 그의 기술에서 소림사의 승려들은 곤뿐 아니라 강차(綱叉), 구창(鉤槍)도 사용했다고 적고 있다. 다른 명대후기의 근거들은 소림사의 승려들이 곤법과 함께 여러 가지 무술을 연마했다고 확언해준다. 오수는 소림사의 창법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으며 당순지는 소림사의 권법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가장 열렬한 소림곤법의 옹호자인 정종유도 소림사의 승려들이 맨손무술을 수련했다고 인정한다. 정종유는 “소림사의 승려들은 그들 스스로 맨손무술을 연마했으며 곤법과 같은 완벽한 수준에 도달하기를 원했다.”고 쓰고 있다.

그러나 작가들은 소림사에 다른 무기가 존재했다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소림사의 승려들은 곤법에 가장 정통했다고 생각한다. 오수는 소림사의 승려들이 창법을 위해 곤법을 도입했다는 점을 비판하였고 소림사 승려들의 기술에 관한 정약증의 도혜는 곤법 혹은 곤법과 유사한 다른 병기와 관련되어 있다.

한 일화에서 정약증은 문을 잠그는 나무기둥을 가지고 마치 개량된 곤법인 것처럼 사용한 천원의 기술을 찬양하고 있는 내용이 있으며 다른 일화에는 곤을 들고 여덟명의 적을 쓰러뜨린 고주(孤舟)라는 승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두 번째 글의 당초문에는 해적에 대항하기 위해 소림사의 승려를 최초로 동원했던 장수 황표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삼가(三可)는 황표를 비난했다. “승려들은 쓸모없는 존재다. 왜 당신은 그들을 영예롭게 만드는가?”하고 말했다. 황표는 그들에게 소림사 승려들의 문화적, 군사적 업적에 대해 말했다. 삼가는 승려들에게 술을 권하는 내기를 제안했고 황표는 용금(湧金)문에 잔치를 벌였다. 삼가가 도착했고 비밀스럽게 여덟명의 무술가들에게 누워서 잠복해 있으라고 명령했다. 감사는 황표가 그들에게 대항할 저명한 승려를 초대하도록 재촉하였다. 황표는 고주를 초대했다. 고주는 이 사실을 몰랐고 초대에 흔쾌히 응했다.

고주가 여덟명의 무술가가 잠복해 있는 장소에 도달했을때 여덟명의 무술가는 각자 손에 곤을 들고 뛰어 올라 팔방에서 고주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고주는 완전한 빈손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공격을 피하기 위해 승복의 소매를 이용하였다. 곤들중 하나가 그의 소매에 걸렸고 고주는 힘들이지 않고 곤을 나꿔챘다. 그리고 그들 여덟을 향해 반격하기 시작했다. 그는 즉시로 그의 곤을 가지고 그들을 땅에 쓰러뜨렸다. 삼가는 저도 모르게 박수를 쳤다.

불교적인 근거는 군사적, 역사적 근거와 다름없이 소림사의 승려들이 곤법에 정통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곤은 명대후기동안 소림사의 신화와 관습에 영향을 미친 유일한 무기이다.

16세기 후반 소림사의 승려들은 소림곤법이 긴나라라는 불교의 신에게서 비롯되었다는 점으로 그들의 곤법수련을 정당화하려 했다. 소림사에 기원을 둔 전설에 따라 긴나라는 초라하고 비참하게 되었다. 소림사가 도적들의 공격을 받았을때 긴나라는 신성한 곤을 들고 공격자들을 쫓아버렸다.

소림사의 승려들은 감사의 뜻으로 긴나라를 소림사의 가람신(伽藍神)으로 정하고 그후로 그의 신성한 곤술을 수련하였다. 그러므로 소림사의 승려들은 그들의 근본적인 무기인 곤에 정통한 수호신을 숭배하였다.

곤을 휘두르는 긴나라의 전설은 4개의 17세기 문헌에 잔존해 있다. 정종유의 소림곤법, 부매(傅梅)의 숭서(嵩書, 서문에는 1612년, 등봉국 색인에는 1652년, 하남현 색인에는 1661년으로 쓰여져있다)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최초의 증거는 비문이다. 1517년 나라연신호법시적(那羅延神護法示跡)이라는 제목의 중심주 비문에는 소림사의 주지였던 문재(文載)가 전설을 번역해 놓은 비문이 포함되어 있다. 후대의 설명과는 달리 이 비문은 소림곤법의 구세주를 긴나라가 아닌 나라연(那羅延)으로 표현하고 있다.

지정 11년 신묘(辛卯)년 셋째월 스무엿세날(1351년 4월 22일) 사(巳)시(오전 9시에서 11시사이) 영주(潁州)에서 홍건(紅巾)적이 일어났을때 한무리의 도적들이 소림사에 다다랐다. 소림사에 성현이 있었는데 그는 그때까지 소림사의 주방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는 성실하게 땔감을 운반하고 아궁이를 돌보았다. 그는 머리를 산발한채 맨발로 돌아다녔다. 단지 얇은 하의만 걸치고 있었으며 상체는 벗고 있었다. 그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한 단어만을 중얼거렸고 그의 동료들 사이에서 어떠한 관심도 받지 못했다. 그의 성, 출생지, 이름은 아무도 몰랐다. 그는 만행만을 거듭했다.

홍건적이 소림사의 가까이 접근한 날 보살(菩薩)은 단신으로 고봉의 꼭대기에 서서 화곤을 휘둘렀다. 그에게 겁먹은 홍건적들은 모두 도망쳤고 그러자 그는 사라졌다. 사람들은 그를 보았지만 더 이상 그를 볼 수 없었다. 그들은 그가 자신의 신성함을 보여준 보살이라는 것을 깨닫았다. 그로인해 그는 소림사의 호법(護法)이 되었고 소림사의 가람신의 자리에 올랐다.

이 전설은 역사적인 사실과는 관련이 없다. 소림사는 홍건적이 일어난 1350년대에 도적들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당호가 설명하는 것처럼 소림사가 공격을 받은 것은 1351년-비문이 적혀있는-이 아니라 홍건적이 개봉을 포함한 하남성 대부분을 점령하고 북진하였던 1356년이다. 소림사는 홍건적에게 약탈당하고 부분적으로 파괴되었다.

이같은 내용은 1371년과 1373년에 쓰여진 두개의 14세기 비문에서 입증되고 있다. 전자는 앞의 내용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으며 1373년의 비문은 명대초기 전란에서 살아남은 승려들이 소림사의 수복을 기념하는 뜻으로 세긴 것이다.

14세기의 자료들은 소림사가 1350년대에 공격을 받았다는 것을 증명해주고 있으며 이 사건에 대한 그들의 설명은 16세기 전설과 큰 차이를 보인다. 후자가 곤을 휘두르는 신이 홍건적을 몰아냈다고 하는 반면 전자는 그와 다른 어떤 승려들도 침략자에게 저항하지 않았다고 언급하고 있다.

명대 초기의 자료들은 소림사가 승리하기는커녕 도적들로부터 엄청난 약탈을 당했다고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예를 들어 도적들은 불화의 금박까지도 벗겨갔으며 복장유물을 찾기위해 불상들을 부수었다. 소림사의 파괴는 승려들이 소림사를 떠나도록 만들었다.

당호는 소림사의 승려들은 정부군의 반격으로 하남성의 홍건적이 몰려나가는 1359년 이전까지 소림사에 돌아오지 못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전설에 대한 최초의 설명에서 소림사의 수호자라고 말해지는 나라연은 소림곤법과 연관되기 훨씬 전부터 불교신화에 등장하고 있다. 불교문학에서 나라연은 일반적으로 전설적인 병기 바즈라(金剛杵)로 무장한 전사와 같이 묘사된다. 아덕(阿德)이 지적한 것처럼 나라연은 12세기초부터 소림사에서 공경받았다.

1150년 당시 소림사의 주지였던 조단(祖端)이 의뢰하여 만든 소림사의 중심주에는 무서운 표정으로 바즈라를 휘두르고 있는 수호신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나라연과 소림사의 최초의 관계는 나라연이 16세기 소림무술의 창시자로 선택되게 된 이유를 설명해 줄 수 있다.

그러나 16세기에 이르러 나라연의 정체성은 점차 다른 불교의 신인 긴나라로 바뀌어져 갔다. 이는 아마도 소림사의 승려들이 나라(那羅)연과 긴나라(那羅)라는 둘의 이름을 혼동한데서 비롯된 일일 것이다.

그러므로 1575년의 소림사 중심주에는 후대에 인정된 긴나라가 곤을 휘두르는 소림사의 수호신으로 등장하고 있다.

나라연과 같이 긴나라도 인도계통의 신이다. 긴나라(Jinnaluo)는 산스크리트어 긴나라(Kimnara)의 중국어 번역이며 긴나라의 이름은 불교와 힌두교에서 동일하게 쓰인다. 인도신화에서 긴나라는 때때로 반신반인의 존재로 묘사되며 때때로는 음악의 신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중국에서 긴나라는 부처를 수행하는 천룡팔부(天龍八部)를 일컫기도 한다.

긴나라가 중국적인 개념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경전은 연화경이다. 이 경전에는 4명의 긴나라왕을 구분하고 있다. 긴나라법(法)왕, 긴나라묘법(妙法)왕, 긴나라대법(大法)왕, 긴나라지법(持法)왕이 그것이다. 따라서 소림사의 수호신을 시각적으로 표현할 경우 곤을 든 네명의 긴나라로 표현하기도 한다.

긴나라는 외국에 기원을 둔 신이며 소림사의 전승에 나타난 그의 외관은 지역적인 관심을 말해주고 있다.

곤으로 무장한 긴나라는 소림사의 승려로 변해 신성한 소림무술의 창시자가 되었다. 이것으로 인해 그들은 신성하게 전해진 것처럼 소림무술의 위신을 향상되었고 소림사에 걸맞는 불교적인 기운으로 겉치레를 했다. 소림곤술의 신성한 기원을 위해 전설을 확립시키고자 하는 요구가 동시대의 군사문학에 반영되었다는 것은 주목할만한 점이다. 유대유나 오수와 같은 군사전문가도 소림무술의 초자연적인 기원에 대해 언급했다.

전설에 대한 최최의 해석에는 신이 곤을 들고 싸웠지만 그의 무술을 소림사의 승려들에게 전해주었는지 아닌지에 대해 언급하지 않고 있다. 정종유의 기술과 같은 후대 신화와의 대조를 통해 신과 승려와 무술간의 노골적인 관계가 만들어졌다.

연왕조 지정(1341~1367)때 홍군(紅軍)이 반란을 일으켰다. 소림사는 홍군에 의해 다시 파괴되었다. 운좋게도 어떤이가 소림사의 주방에서 나와 승려들의 기운을 북돋우며 말했다. “모두들 침착하라. 내가 저들을 격퇴할 것이다.” 그는 신곤(神棍)을 휘두르며 스스로 아궁이속에 몸을 던졌다. 그리고는 아궁이를 부수고 나와서 숭산과 어채(御寨)에 두다리를 걸치고 섰다. 홍군은 허물어져 물러갔다.

소림사의 승려들은 이같은 일에 매우 놀랐다. 한 승려가 홍군에게 말했다. “너는 홍군을 물리친 것이 누구인줄 아느냐? 그는 긴나라왕(緊那羅王)의 화신인 관음대사(觀音大士)다.” 그로 인해 그들은 나무로 그의 조각을 만들었고 오늘날 그의 무술을 계속 수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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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산의 정상과 어채를 밟고 있는 긴나라. 뒤에 관음보살의 모습이 보인다. 때로는 긴나라가 관음보살의 현현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정종유의 서적에 나와있는 그림이다.

소림사의 승려들은 긴나라의 이미지를 여러 가지로 바꾸었다. 그들은 곤을 가진 전사뿐 아니라 긴나라의 위치를 보살로 끌어올렸다. 정종유의 해설에서 긴나라는 관음보살의 현신중 하나로 곤을 휘두르는 관음보살의 화신과 동일시되고 있다. 긴나라의 신성은 더욱 향상되었지만 그의 신성은 저급한 외모뒤에 조심스럽게 숨겨져있다. 소림사의 전설에서 태어난 긴나라는 넝마를 걸친 상놈의 모습으로 현신한 것처럼 위장되어 있다.

숭산의 정상과 어채를 밟고 있는 긴나라. 뒤에 관음보살의 모습이 보인다. 때로는 긴나라가 관음보살의 현현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정종유의 서적에 나와있는 그림이다.

더군다나 소림사의 수호신이라는 그의 위치에도 불구하고 그 괴상한 성인은 불교의 교리에 도전하는 것을 서슴치 않는다. 머리를 깎는 대신에 산발한 머리를 자랑스럽게 휘날린다.

이러한 점에서 소림무술의 신성한 창시자는 남루한 옷차림뒤로 신성을 숨긴채 천한 직업을 가지고 때로는 폭력적인 행동을 하기도 하는 중국의 불교성인들과 닮았다. 육조단경(六祖壇經)에 의하면 명성높은 혜능(慧能)도 거룩한 선의 생애의 첫시작은 사원 주방의 접시닦이였다. 선종 개조의 평범하고 비천한 시작과 소림사의 수호신은 전자의 생애가 후자의 전설에 영향을 미쳤을 것임을 암시한다.

긴나라전설에서 그가 주방에서 일했던 때의 상징인 화곤(불쏘시개)를 가지고 있는 것이 묘사된다. 화곤은 그의 손에서 전투를 위한 곤으로 바뀌었다. 이런식으로 숨겨진 성자의 비천한 기원은 소림사 무기의 정수와 능숙하게 연결되었다.

전설에 대한 정종유의 해설은 기묘한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 정종유는 “긴나라가 아궁이에 몸을 던졌고 그곳을 빠져나와 숭산과 어채를 밟고 섰다”고 말하고 있다. 소실봉 꼭대기에 위치한 어채는 숭산으로부터 5마일이나 떨어져있다. 엄청난 거인만이 두 곳을 밟고 설 수 있다. 이는 긴나로가 불타는 아궁이 속에서 마법과도 같은 변신과정을 경험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긴나라의 거대한 모습은 왜 도적들이 그의 모습을 보고 산산히 흩어져 버렸는지를 설명해준다. 긴나라는 그들에게 사람의 모습뿐 아니라 신의 모습도 보여주었다.

긴나라의 변형의 힘은 곤으로 무장한 중국전설의 다른 신을 생각나게 한다. 그는 서유기(西游記)에 나오는 귀여운 원숭이 주인공인 손오공(孫悟空)이다. 어쩌면 중국의 문학에서 나오는 가장 유명한 불교의 전사일지도 모르는 손오공은 현장(玄奘)법사가 중국에서 인도까지 불경을 구하러가는 역사적인 여행을 줄거리로 하는 전설속에 나타난다.

이 전설의 기원은 송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수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는 서유기는 중국의 허구문학이 정점에 달했던 16세기의 대표작중 하나이며 많은 문학작품과 연극을 통해 발전해 왔다. 이같은 기나간 문학적 발전을 통해 손오공은 16세기 소설의 제목이었던 “여의금고봉(如意金箍棒)”이라는 마법의 봉을 휘두르는 후행자(猴行者)로 알려졌다. 그 이름이 가리키는 바와같이 이 마법같은 무기는 소유자가 원하는데로 크기가 변한다.

손오공이 그의 손에 여의봉을 들고 “작아져라. 작아져라. 작아져라!”라고 외쳤다. 그러자 여의봉은 귓속에 숨길 수 있는 작은 바늘만큼 줄어들었다. 손오공의 위엄에 눌린 원숭이들이 외쳤다. “위대한 왕이시여! 그것을 다시 꺼내어 우리에게 좀 더 보여주십시오”. 원숭이들의 왕은 그의 귀에서 여의봉을 꺼내어 손바닥위에 올려놓았다. “커져라. 커져라. 커져라!” 그가 외치자 여의봉은 다시 통처럼 굵어졌고 20피트가 넘는 길이로 커졌다. 그는 여의봉을 휘두르는 것을 즐거워하며 다리위로 뛰어올라 동굴밖으로 걸어나갔다. 그는 손에 여의봉을 움켜쥐고 우주와도 같은 마법을 실행했다. 그가 몸을 구부려 “커져라!”라고 외치자 그의 몸이 단번에 일만피트의 크기로 커졌다. 그의 머리는 태산만하고 그의 가슴은 울퉁불퉁한 상봉우리같으며 눈은 번개와 같고 입은 거대한 붉은 그릇과 같고 이빨은 검과 창같았다. 그의 손에 들려진 여의봉도 그와 같은 크기로 커져 위로는 천상에 까지 닿았고 아래로는 지옥에 까지 닿았다. 호랑이와 표범과 늑대와 모든 네발로 기는 짐승들, 산에 사는 모든 괴물들, 일흔두개의 동굴속에서는 악마의 왕들도 겁을 집어먹고 엎드려 조아리며 공포와 전율에 휩쌓여 원숭이의 왕을 위한 동상을 세웠다. 곧 손오공은 그의 마법을 풀고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아 왔으며 작은 바늘처럼 변한 여의봉을 귓속에 보관했다.

손오공의 행위는 긴나라의 행위와 매우 유사하다. 이 두명의 불교 전사들은 동일한 마법무기를 사용했으며 동일한 초인적인 차원의 변신을 했다. 이들 곤을 휘두르는 신성한 존재들이 다른 전설에 영향을 미쳤을까? 서유기는 소림사의 성인을 대상으로 한 문학작품 등의 원천이 되었을까? 아니면 역으로 소림사의 전설들이 손오공을 찬양하는 소설과 연극 등에 영향을 끼쳤을까?

두가지의 이유가 손오공의 전설이 긴나라전설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첫째, 명대후기 서유기는 소림사 수호신전설보다 훨씬 널리 알려져 있었다. 소림사의 전설이 지역적인 것이며 그 전설에 친숙한 사람들도 소림사의 사람들과 소림사의 방문객정도였음에 반해 서유기는 문학작품으로, 구두와 극적 개작으로, 수많은 지방 사투리로 전국에 걸쳐 퍼져 있었다.

둘째, 서유기와 주인공 원숭이의 변신마법은 긴나라전설보다 몇세기 정도 앞선다. 서유기에 대한 최초의 문헌적 근거는 대당삼장법사취경기(大唐三藏法師取經記)이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 글이 남송시대에 쓰여진 것으로 믿고 있으며 이는 소림사의 수호신전설이 나타나는 시기보다 대략 300년 정도 앞선다. 송대초기 이야기에 나오는 후행자는 마법봉으로 무장하고 있으며 초인적인 차원의 능력을 뽐낸다. 만약 어떤 전설이 다른 것에 영향을 미쳤다면 이는 손오공의 전설이 긴나라의 전설에 영향을 미친 것을 말하는 것이다.

원대와 명대의 문학에 등장하는 봉을 휘두르는 불교의 전사는 손오공만이 아니다. 중국의 민간전승에는 손오공 외에 동일한 무기를 사용하는 두명의 다른 무승이 등장한다. 무협소설 수호전(水滸傳)의 노지심(魯智深)과 연애희극 서상기(西廂記)의 혜명(惠明)이 바로 그들이다.

이들의 복잡한 이야기전개는 여기서 다 이야기 할 수 없다. 단지 손오공의 전설과 같이 이들의 전설도 남송까지 그 기원을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는 점만으로 이야기 할 것이다. 봉을 사용하는 이들 세명의 승려들의 이야기는 명대말기 이전인 16세기에 나타났던 소림곤법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는 느낌이 강하다. 13세기 소림사 혹은 다른 불교사원에서 승려들이 곤법을 연마하였으며 이들 세명은 그 이후에 만들어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노지심과 혜명의 곤법수련은 당시의 승려들과는 다른 특색을 보여주고 있다.)

소림사의 신중에 하나인 긴나라와 양생법으로서의 곤법이 갖는 중요성은 소림사에 현존하고 있는 다양한 불화들을 통해 증명되고 있다.

소림사의 입설정(立雪亭)에는 곤을 휘두르고 있는 신상-17세기의 것으로 추정되는-이 있으며 백의전(白衣殿)은 거대한 긴나라가 숭산과 어채를 밟고 서 있는 벽화가 그려져 있다.

긴나라전의 중앙에는 신성을 표현하는 동과 쇠으로된 신상이 위치하고 있다. 이 조각상이 승려들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것은 이미 17세기 정종유의 소림곤법에서 언급되었다. 그러나 외관상 매우 정말했다는 이유로 인해 일세기 후에는 신 스스로가 이것을 조각했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가 되어 버렸다. 이것은 긴나라의 전설이 완벽한 신의 이미지에 관한 염원을 반영했기 때문이며 이는 중국종교에서는 일반적인 일이다.

몇 몇 중국신화에 나오는 신들은 자신들만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는 사람들이 시각적으로 보이는 잘못된 것을 숭배하지 않도록 신자들의 염원을 만족시키기 위한 것인 듯 하다.

긴나라가 스스로 조각했다는 조각상은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1928년 긴나라전은 전소되었다. 사당은 1984년 재건되었다. 그곳에는 종교적인 예배를 위해 복원된 세 개의 새로운 신상이 있다.

17, 18세기의 자료들에는 긴나라에 대한 소림사의 숭배는 다른 불교사원들과 구분되었다고 쓰여있다. 긴나라는 소림사에서 수호신의 위치에 있지만 다른 대부분의 사원들은 다른 무신인 관공(關公)을 수호신으로 하고 있었다. 긴나라와 달리 관공은 불교적인 신이 아니다. 그는 3세기때의 장군으로 그에 대한 존경은 민간신앙에서 출발하였다.

영웅적인 장군인 관공은 아마 그의 전설이 탄생한 송대이후 불교의 신들에 포함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관공이 죽은후 그의 영혼은 역사적인 승려 지의(智顗)에 의해 구원받았고 그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불교사원의 수호신이 되었다. 오늘날 관공은 대부분의 불교사원에서 수호신의 위치에 있는 반면 소림사만은 긴나라를 수호신으로 하고 있다.

소림사의 무기로 무장한 불교의 신은 긴나라만이 아니다. 소림사 천불전(千佛殿)에는 오백나한(五百羅漢)을 표현한 거대한 벽화가 있으며 그림속에서 대부분의 나한이 곤을 들고 있다. 1630년경에 그려진 것으로 보이는 이 웅장한 벽화속에는 다양한 모습과 기능을 가진 곤들이 등장한다. 어떤것들은 불교의 양장(鍚杖)과 같이 금속제 고리로 장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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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림사지』에 있는 긴나라의 모습

다른 것들은 지팡이처럼 생긴것도 있으며 지게작대기처럼 생긴것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나한들이 들고 있는 것은 무기였을 것이라고 추정된다. 예를 들어 중국화가들이 대승불교의 성자들이 갖는 이국적인 외모를 과장하기 위해 툭 튀어나온 코와 커다란 눈, 털이 무성한 눈썹을 표현한 나한이 봉을 휘두르고 있는 모습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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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으로 무장한 나한. 16세기 소림사의 벽화로부터.

나한의 근육질 팔의 동작과 동일한 곤의 동작은 이것이 전투에 이용되었음을 암시하며 무시무시한 표정의 호랑이는 무술적인 분위기를 부각시킨다. 소림사의 승려들이 이 대승불교의 성자를 표현한 그림속에 자신들의 무술을 투영하였음에 분명하다.

왜 소림사의 승려들은 소림사 무술이 불교의 신에 속해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높아진 소림사의 명성에 더하여 신들이 소림사 무술을 인정했다는 권위를 주기 위해서일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때 긴나라 전설은 16세기 소림사의 승려들이 그들의 무술수련이 살생을 금하는 불교의 규율을 어지럽히고 있다는 깨달았음을 반영한다. 곤을 휘두르고 있는 신은 소림사무술을 만듦으로써 짊어지게 될 책임으로부터 소림사 승려들을 해방시켜 주었다.

긴나라의 전설에서 우리는 소림사의 폭력적인 행위에 대한 소림사의 변명을 읽어낼 수 있다. 만약 현신한 불교의 신이 사원을 지키기 위해 전쟁을 수행한다면 승려들도 그와 같이 할 수 있음을 내포하고 있다. 정종유의 소림곤법에 기록된 긴나라에 대한 예찬은 긴나라전설이 이러한 시각에서 이해되었다는 증거를 보여준다.

그 예찬은 자비라는 불교의 미덕속에서 신의 무술적 행위가 도덕적인 바탕을 가지고 있음을 추구하고 있다. 그들은 불교를 지키는 것-폭력이 동반되었다 할지라도-이 자비의 행위라고 말하고 있다. 예찬중 하나를 지은 정종유의 형제인 정윤만(程胤萬)은 그 요지를 요약해서 말하고 있다. “용맹으로 자비심을 기른다.(慈以勇養)”

따라서 우리는 명대후기의 소림문학에서 무술수련과 살생을 하지 말라는 불교의 교리 사이의 긴장감을 찾을수 있다. 긴나라전설은 이 긴장감을 해결하기 위한 시도였음을 설명해 줄 수 있다. 이는 불교의 교리를 지키기 위해 전쟁에 참가하는 것-신이 이전에 그랬던 것처럼-을 허락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러나 우리가 찾을 수 없는 것이 무엇인지에 주목하는 것도 똑같이 중요하다. 내가 아는한 17세기 소림문학 가운데 무술이 불교개화를 위한 시도였다고 쓰고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명대 후기의 작가들은 무술수련이 영적완성을 이끌어 줄 수 없으며 영적 완성이 이루어진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무술적 능력을 강화시켜주지는 않는다고 말한다. 이러한 점에서 볼때 불교와 소림문학사이의 관계는 일본의 그것과 다르다. 긴나라전설이 탄생하였을 무렵 타쿠앙(澤庵宗彭)은 검도에 대해 無心이라는 이론을 체계화시켰다.

이 일본 선종의 대스승은 정신적 완성은 검도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될 것이며 그것으로부터 생겨난다고 주장했다.

수 세기 후 정신적인 것과 무술적 자기수양 사이의 관계에 대한 타쿠앙 선사의 개념은 스즈키, 헤리겔 그리고 다른 사람 등의 활동에 의해 서양에서 인기를 얻게 되었다. 그러나 명대 중국무술에는 불교개화에 관한 유사한 수사가 없었다.

더군다나 중국에서 이러한 것의 출현 여부-만약 출현하였다면 19세기 후반일 것이다-를 결정할지도 모를 연구는 일본의 영향을 받은 결과이다.

결론

활용가능한 증거들를 가지고도 우리는 소림사가 언제 무술을 시작했는지에 관해 결론을 내릴수 없다. 그러나 16세기 불교의 양생법으로서의 무술수련이 등장하였다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명대 후반의 사람들이 소림사 무술에 관심을 기울인 한가지 이유는 정규군의 쇠퇴였다. 몇몇 군사전문가들은 정부가 승군을 정규군으로 편입시켜야 한다고 주장했고 실제로 무승들은 16세기 해적들과의 전투에서 큰 공헌을 하였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정부의 다른 관료들이 무승들이 그들의 무술로 정부에 대항할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에 사로잡혀 소림사의 무술수련에 대해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보냈다.

무술을 수련했던 사원은 소림사뿐만이 아니다. 16~17세기의 기록들에서 언급하고 있는 아미산, 오대산, 곤륜산에 있는 다른 불교사원들도 연구할 가치가 있다. 게다가 떠돌이 무술가들의 피난처 역할을 했던 많은 지역의 불교사원에서도 무술수련을 했다. 그러나 소림사의 승려들이 가장 뛰어난 무승으로 여겨졌다. 소림사의 무술이 그처럼 걸출했던 이유중의 하나는 소림사의 위치가 하남성 중앙이었다는 점이다.

궁핍과 폭력은 하남성에서 무술수련을 당연한 것으로 만들었으며 부분적으로 명대후기의 무술은 지역적인 영향을 받았음에 확실하다.

소림사의 무술수련은 소림사의 종교적 지식을 반영한다. 명대후기 소림사의 승려들은 그들의 곤법이 그들이 사원의 수호신으로 모시고 있는 긴나라라는 불교의 신에 속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긴나라 전설은 소림사의 명성을 드높였으며 승려들의 무술수련을 종교적인 규율로부터 해방시켰다. 긴나라 전설은 은연 중에 명대의 문학과 연극의 영향을 받았음이 드러난다. 긴나라의 외모는 부분적으로 서유기에 등장하는 손오공 이후에 꾸며진 것이다.

왜 소림사의 승려들이 그들의 무기로 곤을 선택했는지에 대한 질문은 별도로 연구할 가치가 있다. 여기서 나는 단지 불교의 상징과도 같은 의미를 지니는 무기로서의 곤의 역할에 대해 쓰고 있을 뿐이다. 중국의 중세시대가 시작되면서 승려들은 양장이라 부르는 고리로 장식된 지팡이를 종교적인 권위의 상징처럼 들고 다녔다. 향후의 연구는 그들의 조상이 소림사의 상징으로 들고 다녔던 곤을 실제 전투에 사용했는지 여부를 알아볼 것이다.

출처88운동과학연구소 네이버 블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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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개의 댓글

  1. 다음 글은 텔아비브 대학의 Meir Shahar 교수가 쓰고 『Harvard Journal of Asiatic Studies』Vol. 61: Number 2에 실린 ‘Ming-Period Evidence of Shaolin Martial Practice’라는 논문을 번역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