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하무공출소림(天下武功出少林)
무협과 무술쪽에서 회자되는 유명한 말 중에 ‘천하무공출소림(天下武功出少林)’이라는 말이 있다. 세상의 모든 무공은 소림사에서 비롯되었다는 뜻이다.
무술인이 아니어도 소림사를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며, 어쩌면 동아시아에서 가장 유명한 불교사찰 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소림사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을까?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고 있는 소림사에 대한 정보는 무협지에서 시작된 것이니, 그다지 정확하다고 볼 수는 없다.
이제 소림사는 어떤 절인지 알아보자.
위키백과에 보면 이렇게 서술되어 있다.
소림사(중국어: 少林寺 샤오린스)는 중국 허난 성의 정저우 숭산에 있는 사찰이다.
『위서』 제114 권 「석노지」를 보면, 태화 20년인 496년에 북위 효문제가 464년에 중국으로 와서 인도 불교를 전파하기 시작한 인도 승려 발타를 주지로 하여 소실산음에 소림사를 창건하였다. 그리고 북주 시대에 파괴되었으나 수 시대에 문제에 의해 재건되었다.
태화 20년인 496년에 북위 효문제의 명으로 인도 승려 발타를 주지로 하여 창건되었을 당시 소림사의 구조는 복잡하지 않고 간단하였지만, 혁세할 때마다 거듭하여 덧붙여 늘려 지어서 으리으리해진 현재 소림사의 복잡하고 간단하지 않은 구조는 주로 명 대와 청 대의 산물이다.
소림사에서는 솜씨가 빈틈없이 꼼꼼하고 교묘한 벽화를 이용해 매만져 꾸미고 맵시를 곱게 낸 殿裏가 오늘날까지도 잘 보존된 千佛澱이 인상 깊고 소림사 인근에 있는, 중국 건축 역사상 위대한 사업 일종인 塔林에서는 경이로울 만큼 다양한 탑이 묘소 이백사십륙 개를 수호하듯이 소림사는 구조상 다양성에 선종이 발생한 곳이라는 중요성까지 더해져 중국에서 불교상 중요한 유적이다. 2010년 8월 2일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소림사의 역사는 천년보다도 훨씬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으며, 중국 선종의 발상지이다. 선불교는 인도불교가 중국에 들어와서 도교와 결합되어 형성된, 동아시아의 독특한 불교형태이다.
현재 알려진 사실에 의하면, 소림사는 서기 495년 인도 천축에서 온 발타선사가 창건하였으며, 30여년이 지난후 서기 520년 천축에서 온 달마대사가 소림사에서 수도하였다고 한다. 당시 달마대사가 8년간 면벽수행을 했다는 달마동 동굴은 지금도 오유봉 정상근처에 있다. 북송 시기에 승려는 7천여명이 넘었다고 하며, 이 승려들은 소림사 주변의 수십개 암자와 사찰에 분산되어 수행하였고, 소림사 본원은 그저 중앙행정본부의 역할이었다고 전한다.
전설에 의하면 당나라 이세민이 왕세충과 전쟁을 할 때, 소림의 13곤승이 이세민을 도와 격퇴하였다고 하며, 원말에 홍건적의 난이 벌어졌을 때 주방의 긴나라왕이 불쏘시개를 들고 나와 도적들을 때려눕혔다고 한다. 그래서 ‘소림의 무공은 주방에서 나왔다’는 말이 생겨났다.
달마대사는 소림사 무술의 시조일까?
2001년 3월, 소림사가 있는 중국 하남성에 소재한 안양사범대학 연구팀이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소림사 무술의 창시자는 달마대사가 아니라 소림사 2대 주지 초우선사였다는 것이다. 이 학설은 그후에 학술대회를 거쳐 비교적 정설로 인정되었다. 초우선사는 소림사가 아닌 인근 안양현의 사찰에서 무술을 익혔으며, 후일 소림사에 와서 거처했다고 한다.
지금까지의 연구결과로는 달마대사가 무술을 했다는 그 어떠한 증거도 없다. 하지만 어느 조직이나 자신들에게 가장 자랑스럽고 훌륭한 분을 정신적 지주로 모시는 묵인된 전통이 있으니, 달마대사의 명성에 가탁하여 권법과 무기술에 ‘달마’를 붙이는 것이 특별히 잘못되었다고는 말할 수 없다.
20세기 들어 문화혁명을 거치면서 소림사는 피폐해졌고, 한때 늙은 승려 2명이 남았던 상황까지도 있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등소평 이후에 중국정부는 소림사와 태극권의 가치에 주목하였고, 태극권을 부흥시킴과 동시에 소림사 재건에 착수하였다.
정부 주도하에 전국에서 무술명인들을 수소문하여 소림사에 모아놓고 북파무술을 채록하였다. 이때가 70년대후반-80년대 초반 즈음이다. 이 당시에 소림사에 불려간 무술명인들이 지금도 생존해 있으며, 그들의 증언도 분명히 남아있다.
소림무술의 대대적 채록시기에 소림사 노승 2명은 무술시연을 보일 수 없는 연령이어서, 자리에 누워서 구술로 표현하기도 했다고 하니, 상당히 엄숙하고 비장한 상황이었던 것 같다. 이때 채록된 권법중의 하나가 ‘소림 간가권’이다.
또한 중국정부는 정부의 역량을 기울여서 영화 ‘소림사’ 제작을 지원했다. 이때 스타로 등장한 사람이 이연걸이다. 소림사 영화는 중국이 소림사를 관광자원으로 론칭하기 위해 전략적으로 만들어 낸 영화였다.
현대 소림사의 위상
소림사가 위치한 하남성 등봉현 시내에는 소림이라는 간판을 단 무술학교가 100여개가 넘는다. 무술도장 규모가 아니라, 대형 학교 체제를 가지고 있다. 교장과 교사들이 있고, 교실에서는 수업을 한다. 새벽과 오후, 야간시간에 주로 무술을 수련하며, 오전에는 학과 수업시간이다. 타꺼우(塔溝)무술학교처럼 역사가 오랜 대형 학교는 학생수가 1만여명에 육박하니, 거의 웬만한 대학교 크기이다.
타꺼우 무술학교는 소림사 입구에서 가까우며, 본래 소림의 승려였던 사람이 환속하여 오픈한 무술학교이다. 소림사 근처 무술학교중에서 가장 먼저 생겨서 그 역사가 가장 오래되었다.
외국에서 오는 사람들을 위해 ‘달마홀’이라는 호텔 스타일의 기숙사도 운영하고 있으며, 방문자는 하루 숙박부터 1년이상의 장기체류까지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
소림사 근처 무술학교들은 소림사 직영 학교가 아니다. 이 학교들은 외부인들이 설립한 사설학교이며, 소림사는 여기에 직접 관여하고 있지 않다.
소림사 인근에서 ‘소림’이라는 간판을 붙이려면, 소림사에 간판값에 해당하는 세금을 내야한다. 학교 이름에 ‘소림’이 붙었다는 것은 소림사에 정기적으로 명칭 사용료를 내고 있다는 뜻이다. 이런 비용 지출이 싫은 곳은 소림사 이름을 쓰지 않고 있다. 등봉현에서 무술학교를 선택할 때 고려해야 할 사항중의 하나이다. 소림 간판을 붙이지 않은 무술학교는 두가지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학교 무관설립자가 엄청난 무공이 있어서 소림사 이름을 빌리지 않아도 충분히 운영해 나갈 수 있거나, 아니면 듣보잡 이거나.
실제로 소림사 최고의 스타인 덕양스님은 본인의 무술학교에 소림사 이름을 붙이지 않고 운영하고 계신다. 덕양스님은 소림의 수많은 사진모델로 등장했던 무공이 높은 고수이다.
소림사는 자체적으로 A,B,C 등급으로 나뉘어진 공식 시범단을 운영하고 있으며, 소림의 무술시범단은 전세계를 항상 순회공연 하고 있다. 등급별로 초청비용이 차등화되어 다르다. 소림시범단의 단원들은 스님인 사람도 있고, 일반인도 섞여 있다. 하지만 모두 다 머리를 깎고 승복을 입고 있으므로, 외부에서는 구별하지 못한다. 또한 일반인인데도 불구하고 종교가 불교여서 채식을 하는 시범단원도 있으므로, 식사 여부로 스님인가 아닌가를 알 수도 없다.
소림사 무술학교 출신의 사회 진출
소림사 인근 무술학교들은 거의 대부분이 정식 학교가 아니다. 오전에 국영수 중심으로 간단한 수업을 받지만, 이 학교들은 졸업후에 학력인정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졸업후에 검정고시를 봐서 중학교, 고등학교 학력을 인정 받아야 하는데, 거의 대부분의 학생들은 검정고시를 통과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공부를 워낙 못하기 때문이다.
소림사 근처 무술학교는 1990-2000년대 시기에는 정말 비참했다. 한족은 자녀를 1명밖에 못 낳는 법이 있었으므로, 둘째 아이를 낳은 부모는 거액의 벌금을 내거나 혹은 자식을 호적에 올리지 못하고 숨겨 키워야만 했다. 벌금을 낼 여유가 없었던 가난한 부모들은 둘째 자식을 소림사 근처 무술학교에 보냈던 사람이 많다. 정규 학교에 입학하려면 호적이 필요한데, 호적이 없는 아이들이었기 때문이다.
소림사 근처 무술학교들은 이 아이들을 거둬서 집단으로 숙식하며 무술을 가르쳤다. 이 과정에서 열악한 식사와 가혹한 구타가 이어졌다. 저녁식사후의 밤에는 무술학교 경내에서 몽둥이로 매맞는 타작소리가 밤하늘을 울렸다. 대낮에도 선배가 후배를 구타하는 일은 비일비재했다.
이 아이들은 음식이 열악하고 구타로 일관하는 학교가 싫어서, 졸업전에 학교를 도망가려고 수없이 탈출을 했고, 하남성 정주의 버스터미널과 기차역 앞에는 탈출한 아이들을 새벽에 체포(?)해서 다시 소속 무술학교로 돌려보내는 사냥꾼들이 있었다. 야밤도주한 아이들이 갈 곳은 결국 기차역과 버스터미널 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환경에서 자라난 아이들은 이미 정상적인 판단력과 사회적응력이 없었다. 소림사 근처 졸업생들은 호적이 없는 애들이 많고 학력이 없었으므로, 졸업후에 정상적인 직장을 갖지 못하며, 군입대도 못한다. 중국의 군대는 모병제이며, 생각보다 입대 조건이 까다롭다. 지방 농촌에서는 중졸이상, 도시 출신은 고졸 이상이어야 군대에 입대가 가능하다. 소림사 무술학교 출신들은 군대도 갈 수 없고, 경찰이 될 수도 없다.
소림사 무술학교 출신들을 가장 선호하고 받아준 곳은, 중국 각지의 조직폭력 조직이었으며, 두 번째는 아파트 경비원 직종이었다. 소림사 무술학교 졸업생들은 대부분 불량배가 되거나 경비원이 되는 것이 흔했고, 무술실력과 인물이 좋은 아이들은 보표(경호원)가 되기도 했다.
소림사 무술학교를 나와서 대부분이 군인과 경찰, 혹은 공무원이 된다는 것은 매우 잘못된 정보이다. 때로는 의지가 강하고 머리가 좋은 아이들이 스스로 노력해서 검정고시를 치고, 대학을 가는 경우도 있을수는 있다. 이런 경우에는 공무원 지원과 군입대도 가능할 것이지만, 이런 특출난 학생에 대한 소식은 거의 들은 바가 없다. 하지만 이런 학생도 가끔 있긴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무술학교 수련생이 수십만명이 있는 등봉현에서 왜 이런 아이가 없었겠는가. 살다보니 부모가 부유해져서 다시 자식을 데려가서 정규 학교에 보내고 진학하는 아이들도 있었으니 말이다.
소림사 방장
방장과 주지는 다르다. 주지는 절의 행정적인 책임자이며 방장은 선방의 지도자이다. 절에서는 주지보다는 방장의 권위가 더 높다. 선방이 있는 절은 선불교이며, 소림사는 선불교의 발생지라 선방이 있는 것인데, 현재 소림사의 선방 운영 실태는 확실치 않으나 방장이 있기는 하며 대외적으로 주지보다 더 유명하다. 소림사는 현재 하버드 대학에서 MBA를 마친 석영신 스님이 방장 주지를 맡고 있다. 석영신 방장의 배경은 강택민 라인인 상해방이며, 시진핑 집권이후에 견제를 많이 받고 있다. 석영신 방장은 중앙정부가 임명해서 29살 나이에 소림사 방장이 되었다. 1966년생이니까 현재 54세다.
그는 소림사에 올 당시에 무술이라고는 전혀 몰랐고, 불경 염불도 할줄 아는게 없었다. 그래서 요새는 기공동작을 좀 배워서 외국에서 시연도 하는 것 같다. 그는 원래 무승이 아니며, 정치권에서 임명한 관리직 CEO 방장이다.
하지만 그는 공부도 많이 하고 머리가 좋은탓에, 소림사를 양적으로 발전시켰고 유네스코에도 등재했으며, 소림사를 관광상품화 하는데에 성공했다. 중국정부의 포석은 옳았다고 생각된다. 주지가 행정과 경영을 잘하면 그 소임은 다한 것 아닌가. 불교 공부와 무술 공부는 산속의 암자에 있는 진짜 스님들이 하면 될 일이다.
소림사 본원에는 선방도 제대로 된 것이 없고, 공부하는 곳이 마땅찮다. 그러나 숭산 산속에는 소림사의 말사들이 많으며, 그 암자에서 스님들이 열심히 수행하고 있다. 이런 수행하는 암자에는 외부인 출입금지이며, 관광객은 입구 현관도 통과하지 못한다. 따라서 소림사 본원만을 보고 이곳이 공부하는 절이 아니라고 판단하면 안된다.
천하무공출소림(天下武功出少林), 이 말은 지금도 우리의 가슴을 울리는 말 이지만, 소림이 천하무술의 뿌리도 아니고, 달마대사가 무술을 하신 무술승도 아니다. 그러나 소림사의 명성과 그 무게는 앞으로도 영원할 것 같다. 1600여년의 역사는 하루아침에 생겨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