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도관류 가라테의 창시자, 후나고시 기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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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도관류 가라테의 창시자, 후나고시 기친

후나고시 기친(船越義珍, 1868년 12월 23일〈메이지 원년 11월 10일〉 – 1957년〈쇼와 32년〉4월 26일)은 오키나와현 출신의 가라테 가(공수가空手家)이다. 처음으로 공수(당시에는 당수(唐手))를 본토에 소개한 공수의 창시자이며, 송도관류(松濤館流)의 사실상의 창시자이다. 본토에서의 공수 보급에 공적이 있었다.

생애

성장 과정

54431141591 d4e271d00d d후나고시 기친은 1868년(메이지 원년, 호적상으로는 1870년[메이지 3년]) 토나코시 기스케(冨名腰義枢)의 장남으로 슈리 야마카와무라(현 나하시 슈리 야마카와초)에서 태어났다. 아명은 우미카미(思亀), 당명(唐名)은 요지니(容宜仁)이다. 요씨 토나코시(容氏冨名腰) 가문은 토마리 사족(泊士族)의 명문 요씨 야마다(容氏山田) 가문의 분가로, 대대로 슈리 왕부에 봉사한 하급 사족(치쿠둔[筑登之] 가문)이었다. 조부 기후쿠(義福)는 키코에오오키미 어전(聞得大君御殿, 최고 신녀 키코에오오키미가 거처하는 전각)의 주방 필자(서기직)를 맡았고, 퇴직 시에는 티라무라(현 나하시 슈리 티라초)에 가옥 부지를 하사받았다고 하나, 부친 기스케가 술을 매우 좋아했기 때문에 가세가 몰락하여, 기친이 태어났을 때는 셋방살이를 하는 궁핍한 생활을 보내고 있었다.

후나고시는 조산이었던 탓인지 어릴 적 병약하여,이 때문에 외가인 오야도마리(親泊) 가문에서 자랐다. 처음에는 의학교 입학을 희망했으나, 사족의 상징인 카타카시라(欹髻, 상투)를 자르는 것이 조건이었기 때문에 단념하고, 대신 교원의 길을 선택했다. 오키나와현 심상사범학교(1880년 개교. 후 오키나와현 사범학교로 개칭)의 속성과(1년 과정)를 졸업하자, 후나고시는 준쿤도(準訓導) 검정 시험에 합격하여, 만 20세(1887년) 때 우선 대용 교원(준쿤도)으로 교사 생활을 시작했다. 그 후, 심상과 정과 쿤도(訓導) 검정에도 합격하여, 정교원(쿤도)으로 승격했다.

오키나와 시절

코죠(湖城) 가문(코죠류)의 증언에 따르면, 후나고시 기친은 1885년(메이지 18년) 봄, 16세 때 처음 나하테(那覇手)의 대가 코죠 타이테이(湖城大禎, 1837년 – 1917년)에게 당수(唐手)를 사사했다고 한다. 그러나 5척(약 151.5cm)이 안 되는 체격에 나하테가 맞지 않았거나, 타이테이와의 관계가 좋지 않았는지, 후나고시가 사사한 기간은 불과 3개월에 그쳤다.

그 후, 후나고시는 슈리테(首里手)의 대가 아사토 야스츠네(安里安恒)에게 본격적으로 사사하게 되었다. 슈리 귀족인 아사토가 토마리 사족 가계인 후나고시에게 슈리테를 가르치게 된 이유는, 후나고시가 아사토의 장남과 친했기 때문이다. 아사토에게 사사한 정확한 시기는 불분명하나, 후나고시에 따르면 아사토는 마지막 류큐 국왕이었던 쇼타이(尚泰) 후작을 수행하여 1879년(메이지 12년)부터 13년간 도쿄 코지마치(치요다구)의 쇼(尚) 가문에서 일했다고 한다. 아사토가 오키나와에 귀향한 것은 1892년(메이지 25년)이었다. 따라서 후나고시가 아사토에게 사사한 것은 24세 이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아사토에게서는 특히 코소쿤(公相君, 공상군) 형(型)을 배웠으며, 이는 후나고시가 가장 자신 있어 하는 형이 되었다.

한편, 가마쿠라 엔가쿠지 경내에 세워진 석비의 비문(오하마 노부모토[大浜信泉] 서)에는 “11세 무렵부터 당수술을 아사토 야스츠네, 이토스 야스코(糸洲安恒) 두 스승에게 배우고…”라고 되어 있으나, 아사토의 도쿄 체류 기간과 겹쳐 신빙성이 떨어진다. 후나고시는 아사토의 유일한 제자였다. 또한, 아사토에게 사사하는 한편, 아사토와는 같은 마츠무라 소콘(松村宗棍) 문하의 친구이기도 했던 이토스 야스코에게도 사사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마부니 켄와(摩文仁賢和)의 장남 마부니 켄에이(摩文仁賢榮)는, 후나고시는 아들 후나고시 기고(船越義豪)를 통해 마부니 켄와에게서 이토스의 형을 배웠으며, 이토스에게 직접 사사하지는 않았다고 그의 경력을 부정하고 있다.

초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후나고시는 초등학생들에게 당수도 지도했다. 1916년(다이쇼 5년) 무렵, 토마리 초등학교에서 후나고시에게 당수를 배운 나가미네 쇼신(長嶺将真)에 따르면, 후나고시는 학생들에게 나이판치(ナイファンチ, 철기)나 핀안(ピンアン, 평안) 형을 가르쳤다고 한다. 한편, 후지와라 료조(藤原稜三)에 따르면, 후나고시는 마부니 켄와에게서 핀안을 배웠다고 한다. 이는 후나고시가 아사토의 직계 제자여서, 이토스에게서 평안형(이토스의 창작형)을 배울 충분한 기회가 없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러나 후에는 ‘평안 선생’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후나고시가 자신 있어 하는 형 중 하나가 되었다.

그 후, 30여 년간 계속된 교원 생활을 마치자, 후나고시는 선배나 친구들과 사적으로 오키나와 학생 후원회나 오키나와 상무회(沖縄尚武会) 등을 설립하여, 학생 지원과 당수 보급, 통일 활동을 시작했고 1916년(다이쇼 5년) 교토 부토쿠덴(京都武徳殿)에서 당수를 시연했다.

1917년(다이쇼 6년) 5월, 후나고시는 마부니 켄와가 자택에서 연 ‘오키나와 당수 연구회’에 참가했다. 이 모임에는 야부 켄츠(屋部憲通), 하나시로 초모(花城長茂), 미야기 초준(宮城長順) 등도 참가했다. 또한, 1919년(다이쇼 8년)부터는 야부 켄츠의 추천을 받아 오키나와현 사범학교 예과(1908년 개설) 학생들에게 과외 체육으로 당수를 지도했다.

1921년(다이쇼 10년) 3월, 유럽 순방 도중 오키나와에 들른 쇼와 천황(당시 황태자) 앞에서 중학교·사범학교 학생들이 슈리성에서 당수 어전 시연을 하게 되었고, 후나고시는 그 지휘를 맡았다.

본토 시절

1922년(다이쇼 11년) 5월, 후나고시는 도쿄로 가서 문부성 주최 제1회 체육 박람회(도쿄 여자 고등사범학교 부속 교육 박물관)에서 당수의 형과 쿠미테(組手, 대련) 사진을 두 폭의 족자에 정리하여 패널 전시를 했다. 다음 달 6월에는 강도관(講道館)에 초청되어 카노 지고로(嘉納治五郎)와 유도 유단자들 앞에서 후나고시와 도쿄 상과대학(현 히토츠바시 대학) 학생 기마 신킨(儀間真謹) 두 사람이 당수 시연과 해설을 했다. 이때 후나고시는 코소쿤(公相君), 기마는 나이판치(ナイファンチ)를 시연했다. 시모토미자카(분쿄구)의 도장에 200명의 관원이 모여 참관했다고 한다. 후나고시는 그대로 도쿄에 머물며 오키나와현 출신자들을 위한 학생 기숙사 ‘메이세이주쿠(明正塾)’에 기숙하면서 도쿄에서 당수 지도를 하게 되었다. 11월에는 공수도 역사상 최초의 저서 『류큐권법 당수』를 출판했다.

강도관 시연은 형만의 단독 시연이었던 탓에, 란도리(乱取り, 자유 연습) 수련을 중시하는 유도가들에게는 그다지 강한 인상을 주지 못했다고 한다. 당수 수련이 형 위주라는 문제는 그 후에도 반복적으로 유도가 측에서 불만 사항으로 제기되었다. 란도리에 해당하는 수련이 없다면, 진정한 실력을 측정할 척도가 당수에는 없는 것이 아니냐는 것이었다. 후나고시의 초기 제자였던 오츠카 히로노리(大塚博紀, 와도류 창시자)나 코니시 야스히로(小西康裕, 신도 자연류 창시자)에 따르면, 후나고시는 당초 15개의 형을 가지고 상경했지만, 쿠미테는 그다지 잘 알지 못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1924년(다이쇼 13년) 무렵, 오츠카가 중심이 되고 다른 제자인 코니시나 시모다 타케시(下田武) 등도 협력하여 오츠카나 코니시가 배우던 신도 요신류(神道揚心流)나 타케노우치류(竹内流) 유술을 참고하여 쿠미테가 만들어졌다. 본토에서의 약속 쿠미테(約束組手, 약속 대련)의 탄생이다. 공수의 약속 쿠미테가 신도 요신류와 유사한 것은 이 때문이라고 한다. 오츠카는 나아가 자유 쿠미테(自由組手, 자유 대련)를 당수에 도입하자고 제안했으나, 이에 후나고시가 격렬하게 반대하여 두 사람의 관계는 점차 어려워졌다고 한다.

코니시도 형을 중시하는 후나고시에게 석연치 않은 점 때문에 나중에 후나고시를 떠나 모토부 초키(本部朝基)에게 제자로 들어간다. 교육자(스포츠적 요소 강조)인 후나고시로부터, 교육자와 대극적인 현장에서 실전을 경험하고 중시하는 모토부에게 간 것은 후나고시 입장에서는 배신이었고, “코니시를 용서할 수 없다!”고 소리쳤다고 한다.

1924년(다이쇼 13년), 후나고시는 ‘당수 연구회 회장 토나코시 기친(唐手研究会長・富名腰義珍)’의 이름으로 공수도 역사상 최초의 단위를 발행했다. 단위 수여자로는 카스야 신요(粕谷真洋), 오츠카 히로노리, 코니시 야스히로, 기마 신킨 등이 있었다. 같은 해 10월, 게이오기주쿠 대학에 당수 연구회가 발족했고, 다음 해인 1925년(다이쇼 14년) 10월에는 도쿄 제국대학에도 당수 연구회가 발족하여 각각 후나고시가 초대 당수 사범으로 취임했다. 또한, 이 해에 후나고시는 두 번째 저서 『연단호신 당수술』을 출판했다. 이전 저서가 간단한 삽화에 의한 형의 동작 해설이었던 것에 비해, 이 책에서는 형 해설에 사진이 채용되었다. 후에 후나고시는 형의 서기 폭 등을 개변하지만, 이 책은 개변 이전의 후나고시 형을 사진으로 확인할 수 있어 본토 공수도 형의 변천을 탐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자유 쿠미테나 시합화 실현의 문제는 후나고시의 골칫거리였다. 1927년(쇼와 2년), 도쿄대학 당수 연구회가 방구 당수(防具唐手, 방어구를 착용한 당수)를 고안하여 당수의 시합화를 모색하기 시작하자, 후나고시는 이에 항의하여 1929년(쇼와 4년) 12월, 도쿄대학 사범직을 사임했다. 후나고시는 만년까지 공개적으로 공수도 시합을 인정하지 않았지만, 후나고시가 사범을 맡은 대학 공수도부 중에는 이미 1935년(쇼와 10년) 무렵부터 후나고시 몰래 자유 쿠미테를 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같은 해, 후나고시가 사범을 맡은 게이오기주쿠 대학 당수 연구회가 기관지에서 반야심경의 ‘공(空)’ 개념에서 착안하여 당수(唐手)를 공수(空手)로 고친다고 발표했다. 공수 표기는 하나시로 초모가 1905년(메이지 38년)부터 이미 사용하고 있었지만, 도쿄에서 공수 표기로 바뀌면서 급속히 공수 표기가 퍼져나갔다. 당초 오키나와 공수계에서는 반발도 있었다고 하나, 1935년대(쇼와 10년대)가 되자 오키나와현에서도 이를 따라 공수 표기가 확산되었다. 본토에서 공수 표기가 퍼지는 가운데 당수 표기를 고집하면 발상지인 오키나와현의 지위가 위태로워질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었다. 1931년(쇼와 6년) 9월에는 당시 와세다 대학 유도부에 적을 두고 있던 고등학원 학생 노구치 히로시(野口宏)가 후나고시를 사범으로 초빙하여 공수 연구회를 창설했다. 회장에는 오하마 노부모토 교수가 취임했고 그대로 부장이 되었으며, 1933년(쇼와 8년) 와세다 대학 공수도부가 되었다. 1936년(쇼와 11년), 후나고시는 세 번째 저서 『공수도 교범』을 출판했다. 이 책에서는 일본의 다른 무도처럼 새롭게 ‘도(道)’ 자를 붙여, 이리하여 당수술은 공수도(空手道)라는 호칭으로 바뀌었다.

1939년(쇼와 14년), 후나고시는 토시마구 조시가야에 염원하던 ‘송도관(松濤館)’ 도장을 건설하고, 혼고구 마사고초(현 분쿄구)의 도장에서 이전했다. 그러나 이 송도관은 1945년(쇼와 20년) 전재로 소실되었다. 또한, 같은 해 후나고시의 후계자로서 자타가 공인하던 삼남 기고(義豪)가 병으로 사망했다. 후나고시에게는 고뇌의 해였다.

만년

1947년(쇼와 22년), 후나고시는 피난처였던 오이타현에서 도쿄로 돌아온다. 도쿄에서는 와세다 대학 공수도부가 1946년(쇼와 21년)부터 활동을 재개하고 있었다. 1948년(쇼와 23년), 후나고시의 제자들이 중심이 되어 일본 공수도 협회(日本空手協会, JKA)가 결성되었고, 후나고시는 그 초대 최고 사범으로 취임했다. 1953년(쇼와 28년)에는 칸다 쿄리츠 강당에서 후나고시 상경 30주년을 기념하여 ‘공수 보급 30주년 기념식’이 개최되었다(실제로는 31년째).

1948년(쇼와 23년) 무렵, 후나고시와 이토스 야스코의 만년 고제(高弟)인 토야마 칸켄(遠山寛賢) 사이에서 ‘공수의 본가(本家)’를 둘러싼 논쟁이 일어났다. 이토스의 직계 제자임을 자처하는 토야마는 “후나고시는 이토스 문하에서는 방계에 불과하며, 이토스의 직계에 속하지 않는 자는 오키나와 공수의 정통이라고 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또한, 토야마가 오키나와 사범학교 본과 졸업생인 데 반해, 후나고시는 오키나와현 사범학교 속성과(1년 과정) 출신이었다는 점도 이 논쟁의 쟁점 중 하나였다. 토야마는 사범학교 본과에서 이토스에게 배운 자만이 이토스의 후계자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토스가 사범학교에서 가르치기 시작한 것은 1905년(메이지 38년)부터였고, 설령 후나고시가 본과에 입학했다고 하더라도 (호적상) 1870년(메이지 3년)생인 후나고시가 이토스에게 사사할 기회는 없었다. 어쨌든, 토야마-후나고시 논쟁을 통해 이토스 문하의 제자들 사이에 직계와 방계의 차별 의식이 있었던 것은 확실해 보인다.

1955년(쇼와 30년), 일본 공수도 협회 본부 도장이 완성되었고, 그 개소식에 후나고시는 참석했다. 그러나 협회에서 독립한 히로니시 모토노부(廣西元信) 등 송도회(松濤会) 소속 제자들을 고려하여 중립적인 입장을 지키고 싶었던 후나고시는 이후 이 도장에 가지 않았다고 한다. 다음 해인 1956년(쇼와 31년) 4월, 후나고시는 협회 최고 기술 고문직을 사퇴하겠다는 편지를 보냈다. 양측의 화해를 바라면서, 1957년(쇼와 32년) 4월 26일 영면했다. 향년 90세.

후나고시의 인품에 대해, 자유 쿠미테 문제로 갈라섰던 오츠카 히로노리는 후에 “후나고시 씨라는 사람은 어린아이 같은 마음의 소유자로 참으로 정직한 사람이었습니다”라고 평가했다. 후나고시는 본토의 공수 보급에 큰 공적이 있었지만, 그의 실력에 대해서는 의문의 목소리도 제기되고 있다. 저명한 공수 연구가 카네시로 히로시(金城裕)는 후나고시의 송도 20훈(松濤二十訓) 중 11번 “공수는 끓는 물과 같아서 끊임없이 열을 가하지 않으면 원래의 물로 돌아간다”를 예로 들며, 공수를 오랫동안 수련하면 쉽게 끓는 물이 식는 일은 없으며, 그것은 초보자의 생각이라고 단정했다. 한편, 직계 제자였던 에가미 시게루(江上茂)의 술회에 따르면, 당시 20대였던 에가미의 상단 찌르기를 70세에 가까웠던 후나고시는 부드럽게 받아 중심을 무너뜨리고 역으로 중단 찌르기를 넣었다고 한다. 후나고시는 생애 자신의 유파를 자칭하지 않았지만, 후나고시의 계통은 일반적으로 송도관류(松濤館流)라 불리며, 사실상의 창시자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오늘날 송도관류는 일본 4대 유파 중 하나로 꼽힌다.

후나고시 기친의 제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지만, 주요 인물을 열거하면 카스야 신요(粕谷真洋), 기마 신킨(儀間真謹), 오츠카 히로노리(大塚博紀, 와도류), 코니시 야스히로(小西康裕, 신도 자연류), 시모다 타케시(下田武), 후나고시 기고(船越義豪), 나카야마 마사토시(中山正敏), 에가미 시게루(江上茂), 히로니시 모토노부(廣西元信), 타카기 마사토모(高木正朝), 이와타 세이지(岩田成志), 오카노 토모사부로(岡野友三郎) 등이 있다.

한편, 후나고시는 한학을 비롯하여 와카(和歌, 일본 전통 시가), 서예에도 어릴 적부터 친숙했으며, 송도관류라는 이름은 후나고시의 아호(雅号)인 송도(松濤)에서 유래했다.

묘소는 가나가와현 가와사키시의 니치렌슈(日蓮宗) 젠쇼지(善正寺)에 있다. 매년 4월 29일에는 가마쿠라 엔가쿠지 경내에 있는 “공수에는 선수가 없다(空手に先手なし)”는 비석 앞에서 송도 동문회(松濤同門会)가 후나고시를 추모하며 송도제(松濤祭)로서 송도관의 각 단체, 대학 공수도부가 시연을 행하고 있다.


송도 20훈 (공수도 20개조)
(松濤二十訓(空手二十箇条)

다음은 후나고시 기친이 공수도의 정신과 수련 자세에 대해 강조한  송도 20훈이다. 태권도 정신과 유사한 것에 주의!

  1. 空手道は礼に始まり礼に終る事を忘るな (공수도는 예로 시작하여 예로 끝나는 것을 잊지 말라): 공수도는 예의범절을 중시하며, 시작과 끝 모두 예의를 갖추어야 한다. 겸손한 마음과 상호 존중의 자세를 강조한다.

  2. 空手に先手なし (공수도에는 선수가 없다): 공격은 소극적인 방어에서 시작되어야 하며, 먼저 공격하지 않는다. 방어적인 자세를 취하고, 부득이한 경우에만 자기 방어를 위해 행동해야 한다.

  3. 空手は義の補(たす)け (공수도는 정의를 돕는다): 공수도는 정의를 실현하는 데 기여해야 한다. 정의로운 마음으로 약자를 돕고, 불의에 맞서 싸우는 데 사용되어야 한다.

  4. 先づ自己を知れ而して他を知れ (먼저 자신을 알고 그리고 타인을 알라): 자신을 먼저 이해하고 자신의 강점과 약점을 파악한 후에 타인을 이해해야 한다. 자기 성찰과 타인에 대한 이해를 통해 현명한 판단을 내릴 수 있다.

  5. 技術より心術 (기술보다 심술): 기술적인 능력보다 정신적인 수양이 더 중요하다. 강한 정신력과 올바른 마음가짐은 기술적인 능력을 더욱 빛나게 한다.

  6. 心は放(はな)たん事を要す (마음은 놓아주어야 한다): 지나치게 긴장하거나 집착하지 말고, 마음을 자유롭게 풀어주어야 한다. 편안한 마음은 잠재력을 최대한 발휘하는 데 도움이 된다.

  7. 禍(わざわい)は懈怠(かいたい)に生ず (화는 게으름에서 생긴다): 게으름은 재앙을 불러올 수 있다. 꾸준한 노력과 성실함은 성공과 안전을 보장한다.

  8. 道場のみの空手と思ふな (도장에서만의 공수도라고 생각하지 마라): 공수도는 도장에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실천해야 한다. 공수도의 정신은 삶의 모든 영역에 적용될 수 있다.

  9. 空手の修業は一生である (공수도의 수련은 평생이다): 공수도 수련은 단기간에 끝나는 것이 아니라, 평생 동안 지속해야 한다. 끊임없는 수련을 통해 육체와 정신을 단련해야 한다.

  10. 凡ゆるものを空手化せよ其処に妙味あり (모든 것을 공수도화하라, 그곳에 묘미가 있다): 주변의 모든 것을 공수도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활용하라. 일상생활 속에서 공수도의 원리를 적용하는 데서 새로운 의미와 즐거움을 찾을 수 있다.

  11. 空手は湯の如し絶えず熱度を与えざれば元の水に還(かえ)る (공수도는 탕과 같아서 끊임없이 열을 가하지 않으면 원래의 물로 돌아간다): 꾸준히 수련하지 않으면 실력이 퇴보한다. 지속적인 노력과 훈련을 통해 실력을 유지하고 발전시켜야 한다.

  12. 勝つ考は持つな負けぬ考は必要 (이기려는 생각은 갖지 말고, 지지 않으려는 생각은 필요하다): 공격적인 마음보다 방어적인 마음을 더 중요하게 생각해야 한다. 승리에 집착하기보다는 패배하지 않기 위한 신중한 자세가 필요하다.

  13. 敵に因って轉化せよ (적에 따라서 변화하라):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대처해야 한다. 고정된 방식에 얽매이지 말고, 상대와 상황에 맞춰 적절한 기술과 전략을 사용해야 한다.

  14. 戦は虚実の操縦如何に在り (싸움은 허와 실의 조종에 달려있다): 싸움은 허와 실을 적절히 활용하는 전략에 달려있다. 상대방을 속이고 혼란스럽게 만드는 전략적인 기술을 익혀야 한다.

  15. 人の手足を剣と思へ (사람의 손발을 검이라고 생각하라): 자신의 손과 발을 날카로운 검처럼 생각하고, 매 순간 신중하게 사용해야 한다. 신체의 모든 부분을 무기처럼 활용할 수 있도록 단련해야 한다.

  16. 男子門を出づれば百万の敵あり (남자가 문을 나서면 백만의 적이 있다): 세상에는 수많은 어려움과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항상 경계심을 늦추지 않고, 모든 상황에 대비해야 한다.

  17. 構は初心者に後は自然体 (자세는 초심자에게, 후에는 자연체): 처음에는 기본 자세를 철저히 익히고, 숙달된 후에는 자연스러운 자세를 취해야 한다. 기본에 충실하되, 융통성을 잃지 않아야 한다.

  18. 形は正しく実戦は別物 (형은 바르게, 실전은 별물): 형은 정확하게 연습하되, 실전은 형과는 다르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형은 기본기를 다지는 훈련이며, 실전에서는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대처해야 한다.

  19. 力の強弱体の伸縮技の緩急を忘るな (힘의 강약, 몸의 신축, 기술의 완급을 잊지 마라): 힘의 강약, 몸의 신축, 기술의 완급을 조절하는 능력을 키워야 한다. 상황에 따라 적절한 힘과 기술을 사용할 수 있도록 훈련해야 한다.

  20. 常に思念工夫せよ (항상 사념하고 궁리하라): 끊임없이 생각하고 연구하며 새로운 기술과 전략을 개발해야 한다. 창의적인 사고와 끊임없는 노력을 통해 무예 실력을 향상시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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