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력천근왕, 왕자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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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력천근왕, 왕자평

왕자평은 중국현대무술사에서 제일 유명하고 영향력있는 인물이다. 왕자평(王子平, 1881년 – 1973년), 자(字)는 영안(永安), 호(號)는 신력천근왕(神力千斤王). 하북성 창주(滄州) 의화가(義和街)에서 출생한 회족 출신으로, 근대 중국의 격동기를 거치며 무예와 의술, 사회활동 등 다양한 분야에서 뚜렷한 족적을 남긴 인물이다. 

1. 무예 가문의 성장 배경과 초기 수련 과정

54431347198 ac4b6c2719 o d1881년, 왕자평은 대대로 무예를 숭상해 온 창주의 가문에서 태어났다. 조부는 뛰어난 완력으로 ‘강자(强子)’라 불렸고, 아버지 역시 ‘조각박왕(骟角膊王)’이라는 칭호를 얻을 정도로 힘이 셌다. 하지만 가세는 넉넉하지 못했고, 부모는 아들이 무예 대신 안정적인 직업을 갖기를 희망했다.

어린 시절 왕자평은 허약한 체격을 지니고 있었고, 주변 사람들로부터 무예에는 재능이 없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무예에 대한 강한 열정을 품고 있었고,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어갔다. 그는 강도 높은 훈련을 통해 점차 강인한 체력과 정신력을 갖추게 되었으며, 14세가 되자 기본적인 무예 기법을 익히기 시작했다. 그는 도립(倒立), 장자(桩子), 매화장(梅花桩) 등의 기술을 연마하며 균형 감각과 민첩성을 키웠다. 또한, 새벽 별을 보며 무예를 연마하거나, 해가 뜰 때까지 훈련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왕자평은 장권(长拳), 홍권(洪拳), 사권(查拳), 활권(滑拳) 등 다양한 권법을 섭렵하며 무예 실력을 향상시켰다. 또한, 창(枪), 도(刀), 검(剑) 등 다양한 병장기를 다루는 법을 익혔다. 그는 특정 문파에 얽매이지 않고 다양한 무예 기법을 익히며 자신만의 독창적인 무예 스타일을 구축해 나갔다. 

2. 격동기 사회 속에서의 무예 활동

20세기 초, 중국 사회는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과 사회적 혼란으로 인해 격동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1900년 의화단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면서 왕자평은 예상치 못한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그는 무예 실력이 뛰어나다는 이유로 의화단원으로 오해를 받아 고향을 떠나 제남(济南), 청도(青岛), 북경(北京) 등지를 떠돌게 되었다.

타향살이 속에서도 왕자평은 무예 연마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는 각 지역의 무예 명가를 찾아다니며 가르침을 구하고 자신의 무예 실력을 더욱 발전시켜나갔다. 제남에서는 사권(查拳)의 대가인 양홍수(杨鸿修)를 만나 사권의 정수를 배우고 자신의 무예에 접목시켰다. 또한, 다양한 문파의 무예를 섭렵하며 무예에 대한 이해를 넓혀갔다.

왕자평은 힘든 도피 생활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어갔다. 그는 무예를 통해 자신의 존재 가치를 증명하고, 사회에 기여하고자 했다. 그의 이러한 굳은 의지는 훗날 그가 무예계에서 활동하는 데 중요한 동기가 되었다.

그는 각지를 유랑하며 자신의 무예 실력을 시험하고, 다양한 사람들과 교류하는 기회를 가졌다. 1919년 청도에서 열린 무예 공연에 참여하여 자신의 기량을 선보였고, 외국인 무예가들과 교류하기도 했다. 또한, 상해에서는 ‘자평 진료소(子平诊所)’를 개업하여 의술을 통해 사회에 봉사하는 한편, 무예 활동도 지속적으로 전개해 나갔다.

3. 의술 습득과 사회 봉사 활동

상해에 정착한 왕자평은 무예 연마와 함께 의술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는 질타손상(跌打损伤, 타박상) 치료에 관심을 가지고, 경험이 풍부한 의사들에게 가르침을 받으며 의술을 익혔다. 그는 무예를 통해 단련된 신체와 뛰어난 집중력을 바탕으로 의술을 빠르게 습득해 나갔다.

왕자평은 ‘자평 진료소(子平诊所)’를 운영하며 의술을 통해 사회에 봉사했다. 그는 질타손상, 골절, 탈구 등 다양한 질환으로 고통받는 환자들을 치료하며 명성을 쌓았다.

4. 무예 진흥을 위한 노력과 후진 양성

중화인민공화국이 건립된 후 왕자평은 무예 진흥을 위해 다양한 활동을 전개했다. 그는 전국체육회 위원, 전국정협 위원 등 여러 직책을 맡아 사회 활동에 참여하며 무예의 발전을 위해 노력했다.

정부는 무예를 중요한 민족 유산으로 여기고 스포츠 종목으로 채택했다. 전국적인 무예 경기가 열려 각 문파 간의 교류가 활발해졌고, 오랫동안 전해 내려오던 무예 기법들이 발굴되었다. 왕자평은 이러한 변화에 참여하며 무예의 진흥에 힘썼다.

1958년 전국무예협회가 창립되자 왕자평은 제1회 전국무예협회 부의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무예의 발전을 위해 다양한 사업을 추진했다. 왕자평은 후진 양성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는 자신의 무예 기법과 경험을 젊은 세대에게 전수하고, 그들이 무예의 발전에 기여할 수 있도록 지도했다. 

5. 저술 활동과 학문적 탐구

왕자평은 무예와 의술에 대한 지식과 경험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저술 활동을 펼쳤다. 그는 《권술이십법(拳术二十法)》, 《거병연년이십세(祛病延年二十势)》 등 저서를 통해 자신의 무예 기법과 의학 지식을 공유하고 후대에 전수하고자 했다.

《권술이십법》은 왕자평이 평생 동안 연마해온 다양한 권법의 기법을 집대성한 책이다. 그는 이 책에서 다양한 권법의 장점을 융합하여 실용적인 무예 기법을 제시하고 있다. 《거병연년이십세》는 왕자평이 자신의 의학 경험을 바탕으로 저술한 건강 서적이다. 그는 이 책에서 무예를 통해 건강을 증진하고 질병을 예방하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6. 말년과 삶의 마무리

만년에도 왕자평은 무예 연구와 의학 연구를 지속하며 끊임없이 배우고 탐구하는 자세를 유지했다. 그는 자신의 경험과 지식을 바탕으로 무예와 의술의 발전에 기여하고자 노력했다. 1973년, 왕자평은 생을 마감했다. 그의 삶은 무예와 의술을 통해 사회에 헌신하고자 했던 한 개인의 족적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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