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진포, 양파 팔괘장의 시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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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진포, 양파 팔괘장의 시조

양진포(梁振蒲), 자는 조정(照庭)이며, 하북성 기현河北省 冀县 北郝家冢村 출신이다. 청나라 동치 2년(계해년) 5월 20일(1863년)에 태어났으며, 1932년 8월 13일 사망하였다.

어린 시절 북경 전문외 동대시 신점로 북쪽의 만흥고의점에서 점원으로 일했는데, 이 가게는 그의 아버지가 창업한 것이었다. 아버지의 사업을 이어받아 생계를 꾸려나갔기에 사람들은 그를 ‘고의양(估衣梁)’이라 불렀다. 선생은 성품이 강직하고 선량하며 활달했고, 어려운 사람을 돕기를 좋아하여 협객의 기질이 있었다.

어릴 때 마을의 진봉의 선생에게서 담퇴 등의 권법을 배워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북경에 온 후 16세에 동해천 선생 문하에 들어가 팔괘유신연환장을 배웠다. 선생은 부지런히 학습을 멈추지 않아 무예가 빠르게 진보했다(선생은 동해천 조사의 묘비에 40번째로 이름이 새겨져 있다).

광서 25년 4월 20일, 양진포 선생이 27세 때, 마가보에서 조육과 다투어, 조육의 부자와 사제 20여 명을 죽이는 사건이 있었다. 처음에 북경의 기차는 마가보(馬家堡)까지 밖에 운영하지 않았다.역에는「각주인(脚走人」이 대기하고 있어 승객들의 화물을 날라주고 돈을 받았다.각주인중에는 질이 나쁜 사람이 있어 부탁할 필요가 없는 작은 화물까지 빼앗다시피 하며 운반해주거나 요금을 비싸게 받기도 하였다.

이 살인사건으로 인해 청나라 형부의 투옥 처벌을 받았으나, 후에 큰 제자 이동태의 구명으로 다행히 사형은 면했다. 이 사건은 당시 신문에도 보도되었다.

광서 26년 7월 20일 8개국 연합군이 북경에 들어오자, 감옥의 간수들이 도망가 수감자들이 서로 쇠사슬을 부수고 탈옥했다. 선생은 출옥 후 고향으로 돌아가 은거했는데, 원수들의 해코지를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이후 하북 기현에서 덕승표국을 열어 많은 제자들을 가르치며 말년을 즐겁게 보냈다. 선생은 민국 21년 8월 13일(1932년)에 세상을 떠났다.

양진포 은사의 원배 부인은 기현성 서북쪽 손정리장 출신이다. 이씨는 자식을 낳지 못해 둘째 동생의 아들 추원을 양자로 들였으나, 조카(양자)는 결혼 후 얼마 되지 않아 병으로 죽었다. 양진포 선생의 원배 부인 이씨도 세상을 떠나자, 다시 현성 서북쪽 사가장의 유씨를 부인으로 맞이했다. 양진포 선생은 유씨 부인과의 사이에서 두 딸을 두었는데, 큰딸은 16세에 죽었고 둘째 딸은 8세에 죽었다. 1919년 유씨 부인은 또 한 아들을 낳았는데 이름이 보염이고 양띠였다. 보염은 팔괘장을 배우지 않았고 1979년 정월 초육일에 병으로 죽었다. 보염에게는 딸이 하나 있었는데, 이름이 양준경이며 현재 56세로 기현성 서북쪽 양가장의 조쌍겸의 아내가 되어 두 아들을 낳았다. 큰아들의 이름은 신월이고 작은아들의 이름은 신년이다.

양진포 선생 일화

54296532044 3c6c84c9e8 c d양진포 선생은 15세에 북경 전문외 동대시의 의복점에서 점원으로 일했다(신점로 북쪽 1호 만흥고의점). 주인을 따라 옷 보따리를 메고 각 집을 돌며 판매했다. 키가 작고 체격이 약해 자주 병을 앓았는데, 16세 때 주인의 소개로 동해천 선생 문하에 들어가 팔괘장을 배웠다. 부지런히 학습하고 고된 연습을 거듭하여 기예가 크게 진보했고, 뛰어난 무공으로 이름을 날렸다. 옷을 팔아 생계를 이어갔기에 사람들은 그를 “고의양”이라 불렀다. 양 선생은 옷 판매 외에도 북경에서 제자들을 가르쳐 팔괘장을 전수했는데, 전문외 동주시구로 남쪽 “덕성거” 황주관의 주인 왕성재가 그의 제자였다. 그래서 그는 자주 전문외 동주시구 해풍황주관에 있었고, 입문하려는 사람이 있으면 황주관에서 절차를 진행했다.

전문외 다마창의 항의창 비단가게는 하북 기현 단가가 차린 것으로, 매년 정주 묘회에 가서 물건을 팔았다. 매년 양진포 선생이 보표로 정주에 갔는데, 정주에는 유패부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무예를 익혔고 화기도 잘 다뤘으며, 호위를 하고 있었다. 한 사람이 유패부에게 말했다. “저 보표를 봐라, 두부 세 조각만한 키로 보표를 한다니! 가서 그의 엉덩이를 한번 들이받아보는 게 어떠냐?” 그래서 유패부는 양 선생을 만나러 갔고, 거짓으로 안부를 물었다. 양 선생이 그를 부축하자 유는 곧바로 어깨로 들이받았는데, 양 선생은 손으로 한 번 튕기니 유의 대퇴부가 부러져 다쳤다. 그가 양 선생에게 접골을 부탁했지만 양은 “나는 접골을 못한다”고 했다. 유는 그때부터 불구가 되어 늘 다리를 절뚝거리며 걸어다녔다.

당시 북경 기차역은 완평현 마가보까지만 개통되어 있었다. 역의 짐꾼들은 우두머리가 있었지만 정식 조직은 없었고, 수입이 좋았다. 이때 무뢰한 짐꾼 조육이 마가보에 와서 발행을 강탈하려 했고, 양측이 싸움을 벌이게 되었다. 마침 양진포 선생이 지나가다 이를 보고 중재에 나섰으나, 조육은 매우 거칠고 무례하여 양 선생에게 꺼지라며 영정하에 던져버리겠다고 위협했다. 양 선생이 “너희가 많다고 이유 없이 그럴 순 없다”고 하자 조육은 더욱 화를 내며 “먼저 너부터 끝내고 보자”고 했다. 조육이 칠절편으로 공격해오자 양 선생은 피하면서 편을 잡아 즉시 한 발로 조육을 쓰러뜨리고, 편으로 조육을 쳐 죽였다. 조육의 조카들과 제자들이 눈이 붉어져 한꺼번에 몰려들어 양 선생을 포위했다. 당시 27세였던 양 선생은 자위 차원에서 조육의 조카와 제자들을 모두 쳐서 뇌수가 터지게 했는데, 20여 명이 죽거나 다쳤다고 한다. 나머지는 도망갔다.

조육의 제자들이 완평현에 가서 포졸 110여 명을 데려왔다. 그들이 보니 양 선생이 들고 있던 칠절편은 삼절만 남았고 이미 20여 명이 죽거나 다쳤으니 실력자임을 알았다. 포두가 말했다. “친구, 당신 이 싸움 잘 했소. 죽을 사람은 죽었고 도망갈 사람은 도망갔소.” 양 선생이 말했다. “다들 도망갔으니 더는 싸우지 않겠소.” 차인이 말했다. “당신이 더 싸우지 않더라도, 우리 관할에서 이렇게 많은 사람이 죽었으니 이 관송은 피할 수 없소. 당신이 의리 있는 사람으로 보이니 체포하진 않겠소. 완평현까지 수고스럽게 가주시오.” 양 선생은 달아날 수 없음을 알고 “좋소, 함께 가지요”라고 했다. 이렇게 많은 사람을 죽였으니 본전은 했고, 죽어도 아깝지 않다고 생각했다. 완평현에 도착해서 관리가 심문을 마치자 그날 밤으로 양 선생을 형부로 보내 투옥했다.

감옥에서는 매일 밤 ‘상봉’을 해야 했다. 상봉이란 잠잘 때 죄수들의 머리를 벽 쪽으로 향하게 하고, 손발에 수갑을 채워 쇠사슬로 묶어 잠그는 것이었다. 쇠사슬 한쪽 끝은 벽에 박혀있고 다른 쪽은 죄수의 몸 위에 놓여 자물쇠로 잠겼다. 감옥에는 빈대가 특히 많아 죄수들은 움직이지도 못하고 매우 고통스러웠다. 이렇게 3일을 보낸 후, 양 선생의 큰 제자 이동태가 은 30량을 써서 감옥에서 침상 하나를 샀고, 그래서 상봉을 면하게 되었다. 이동태는 전문루 수리로 돈을 벌었고 이련영과도 교류가 있어서 양 선생은 참수를 면할 수 있었다. 광서 26년 7월 20일, 8국 연합군이 북경을 침략하자 모든 관리들이 도망가버렸고, 죄수들이 감옥을 부수고 탈출했다. 양 선생도 고향으로 도망가 은거했다. 후에 다시 제자들을 받아 팔괘장을 가르쳤고, 이후 덕승표국을 열었다. 마지막에는 동록현 여자사범학교에서 교직을 맡았다.

당시 기현의 하북성립 제14중학교에서 무술 교사를 구하고 있었는데, 마침 양 선생이 기현으로 돌아와 그를 교사로 초빙하여 무술을 가르치게 했다. 양 선생이 부임한 후, 교장은 계속해서 그의 절기를 보여달라고 간청했다. 당시 교문 앞에는 연꽃 연못이 있었는데 지름이 3-4장이었고, 때마침 연꽃이 만발한 계절이라 연잎이 무성했다. 양 선생이 말했다. “한번 시도해보겠습니다.” 이때 전교 교직원과 학생들이 연못가에 둘러서서 구경했다. 양 선생이 남쪽 기슭에서 장법을 돌리더니, 굽이치는 곳에서 발을 들어 연잎 위를 걸어 곧장 북쪽 기슭에 도달했다. 전교 교직원과 학생들이 천둥같은 박수를 보내며 절기라고 감탄했다.

한번은 학교에서 운동회를 열어 전현의 무술계 인사들을 초청해 시범을 보였다. 당시 현성 서쪽 풍가장의 진적의 대부는 형의권에 능했는데, 그는 심현 유기란 선생의 제자였고 양 선생과 교류가 매우 좋아 사람들이 진 선생이라 불렀다. 진대부의 아들 대건은 양가창법에 능했고 역시 운동회에 참가했다. 모두가 시범을 보인 후, 양 선생이 큰 창을 들고 진대건에게 말했다. “자, 우리 부자가 몇 수 겨뤄보세. 당신이 양가창을 써보시오, 내가 받아주겠소.” 말을 마치자 양 선생은 팔괘전창세로 대응했다. 진대건이 창으로 찌르기를 상, 하, 좌, 우, 중으로 해보았지만 전혀 들어가지 않았다. 후에 대건이 양 선생의 등 뒤로 돌아가 한 창을 찔러왔을 때, 양 선생은 배후침창법으로 대건의 창을 떨어뜨려 바닥에 떨어뜨렸다. 장내에서는 찬탄의 함성이 울려 퍼졌다.

기현에는 4명의 패천이라 불리는 자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모두 천팔백 근의 완력을 가졌다. 그들의 이름은 소삼뚱, 마노뚱, 두마자, 대명량이었다. 4명은 기현에서 위세를 부리며 횡포를 부렸다. 이들은 등을 맞대고 싸우면 아무리 많은 사람이 와도 이길 수 없었다. 이때 양 선생은 25세였는데, 북경에서 귀향하다가 마침 5월 28일 묘회를 만났다. 소삼뚱이 도발하여 양 선생과 싸움이 벌어졌는데, 양 선생은 좌우로 피하다가 도차보를 써서 구구도류하여 한 장으로 마의 고관절을 쳤다. 마노뚱은 5-6척 높이로 튀어올랐다가 땅에 떨어져 기절했고, 3-4시간이 지나서야 깨어났다.

민국 14년(1925년) 하북성 국술관이 설립되어 양진포 선생을 국술관 고문으로 초빙했다. 국술관에서 위임장을 보냈는데, 당시 북평 시장은 상록이고 부시장은 부작의였다. 위임장이 내려진 후 양 선생이 북경에 와서 감사 인사를 하자 상록과 부작의가 동시에 접견했다. 당시 양 선생은 62세였는데, 일어나서 두 시장에게 말했다. “제가 팔괘유신장을 몇 수 보여드리겠으니 봐주십시오. 웃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고는 돌면서 비틀어 넘기를 하니 마치 용이 움직이고 매가 나는 듯 민첩하고 활발했으며 기세가 날카로웠다. 돌면서 동시에 발에 힘을 주니 목조 구조의 큰 복도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상록과 부작의 두 시장이 말했다. “선생님, 천천히 하십시오. 복도가 무너질까 걱정됩니다.” 세 사람은 서로 보며 웃었다. 상록과 부작의는 양 선생을 대문 밖까지 배웅하며 말했다. “선생님께서는 이렇게 연세가 많으신데도 정말 잘 수련하셨습니다!”

기현 성남 요촌에는 유봉지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집이 매우 부유했고 무술을 좋아하여 실력도 괜찮았다. 그의 집에서 호위를 하던 사람이 사근조(자는 수당)와 알고 지냈다. 당시 유봉지와 상의하여 사수당에게 입문하기로 했고, 사수당도 동의했다. 마차를 보내 모시러 갔는데,

사수당이 말했다. “후촌에 가서 내 사형 양진포도 함께 모셔와야 합니다.” 마부는 별로 내키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갔다. 유가에서 양가로 가서 보니 양 선생의 키가 작고 보기에 별로여서 마부가 약간 무시하는 기색을 보였다. 두 사람이 마차를 타고 소요촌에 도착하자 유봉지와 호위가 마을 밖까지 나와 맞이했다. 서로 소개하고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눈 후 배사의식을 거행했다. 주객 모두 매우 기뻐했다. 양 선생이 말했다. “여러분이 비록 문하에 들었지만 아직 배우지는 않았소. 여러분 모두 무공의 기초가 있으니, 모두 처음 만난 것처럼 한번 겨뤄보면 어떻겠소? 여러분의 기예도 보고 내 것도 보여드리겠소. 마 사부도 참가하시지요, 어떻소?”

모두가 동의했다. 유가의 객당 앞은 큰 마당이었고 동쪽 담 옆에는 큰 돼지우리가 있었다. 양 선생이 다시 말했다. “오늘은 이렇게 하지요. 진짜 한 판 붙어봅시다. 여러분이 한꺼번에 오십시오. 칼, 창, 편, 망치, 삽이든 마음대로 내 머리를 향해 내리치시오.” 모두가 동쪽에 서고 양 선생 혼자 서쪽에 섰다. 그리하여 모두가 각자 무기를 들고 양 선생을 향해 공격했다. 양 선생은 조급해하지 않고 직진과 후퇴를 반복하며 그들을 모두 넘어뜨렸다. 마부의 솜씨가 꽤 괜찮아서 편으로 양 선생을 공격해왔는데, 양 선생이 앞으로 한 발 나아가 손목을 비틀자 마부는 그 자리에 쓰러졌다. 양 선생은 다리를 들어 한 발로 마부를 돼지우리에 차 넣었고, 돼지 똥과 오물로 온몸이 더럽혀졌지만 칠절편은 여전히 손에 쥐고 있었다. 한참 만에 기어 나오자 모두가 크게 웃었다. 마부는 옷을 갈아입고 양 선생 앞에 무릎을 꿇고 배우기를 청했지만, 양 선생은 “됐소, 당신의 기예가 아주 좋습니다. 충분하니 그만두시지요”라고 했다.

이렇듯 양 선생의 일화는 매우 많아 모두 기록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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