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자명李子鳴(1902년-1993년)은 팔괘장 3대 전인이며 양진포 노사의 제자이고 양파 팔괘장의 전인이다. 동해천 노사가 팔괘장의 창시자라면 중흥조는 이자명 노사이다.
경력
이자명李子鳴 노사의 원명은 용(鏞)이다. 다른 이름은 직(直), 자는 명(鳴)이라고 한다. 1902년 음력 8월 4일에 태어나 1993년 음력 1월 1일 91세로 죽었다. 본적은 하북성 기현의 외딴 마을 이도촌(李桃村)이다. 어려서 연청권을 익히고 18세에 팔괘장의 2대 명가 양진포에게 입문하였다. 동시에 배사한 스승으로는 이금표(李金豹)가 있다. 서화에 능해 평생 무술과 서화 속에서 노닐었으며 북경, 하북, 천진을 오가다 북경에 정착하였다.
이자명 노사는 일찍이 중국공산혁명에 참가했다. 항일 전쟁과 공산혁명 시기에 공산당의 결정으로 북경에서 공장을 경영하기도 하였다. 이자명 노사는 신 중국 성립 이후 당의 안배로 제빙소와 식품공장 등 몇몇 국영공장의 공장장을 역임했다. 이 노사는 말년에 개혁개방을 옹호하면서 서방의 유익한 경험을 거울삼아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중국무술의 계승, 정리, 연구, 보급에 힘써 무술사업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중국무술협회 명예위원, 북경시무술협회 고문, 전일본중국권법연맹 고문을 지냈으며 국내외에서 명성을 얻은 저명 무술가이다. 이자명 노사는 1921년 동해천의 2대 제자인 양진포를 스승으로 모시고 팔괘장을 연마하였다. 하북성 국술관에서 장점괴, 상운상, 거경원 등 무술 명가들의 가르침을 받았다. 북경에서는 곽고민, 이소암, 증성삼 등 많은 무술 명가들과 교류하면서 유파별 기법을 살펴보고, 각 문파의 장점을 얻기 위해 자료를 모았다.
양진포 선생이 계승한 팔괘장 체계를 보완하여 유명 권사들을 배출하였다. 그는 자신의 체험을 통해 팔괘장에 대한 이론을 발전시켰고, 팔괘장의 기격 특징으로 끊임없는 움직임과 유격전술을 꼽았으며 팔괘장의 주요 이론은 모은 36가결과 48법을 주석하였다. 그는 ‘동해천전장’ ‘양진포팔괘장’ ‘팔괘장진비록’ 등 10여 종의 전작과 원고를 출간하고 간행하며 무술기술과 이론발전에 기여했다.
이자명 노사는 고희를 넘긴 후, 동분서주하며, 팔괘장 창시자인 동해천 선사 묘비를 발굴하고, 동해천 선사 묘릉을 건립하였다. 이 노사의 행적은 국내외 무술 동호인과 체육계, 문화계의 찬사를 받으며 중국무술협회와 북경징시무술협회로부터 여러 차례 상을 받았다.
이자명 노사는 팔순을 넘긴 뒤에도 북경무술대, 체육원 교사 및 각계 무술 애호가들에게 기예를 전수하였다. 북경대, 인민대, 과기대, 공업대, 항공학원 등 등 대학무술협회의 명예회장이나 고문을 지냈고 전통무술에 대해 학자들에게 강의하고 전파하였다.
2004년 북경만안공묘 팔괘장 묘역에서 치러진 이자명 노사 추도식. 시연자는 양파 팔괘장 5대 전인들이며 4대 이공성 노사의 제자들이다.
유년시기
부잣집 출신으로 이자명 노사는 4세 때부터 아버지 이진인을 따라 서당에 다니며 진경(晉卿)으로부터 권법을 배웠다.
청년기
16세부터 외조부쪽 금가게에서 일했으나 1923년 병으로 고향으로 돌아와 양진포로부터 팔괘장을 배우고 몸이 좋아졌다. 하북성 국술관에 들어가 장점괴, 상운상, 거경원 등의 명가들에게 무술을 배웠고 북경에서는 곽고민, 이소암, 증증계, 유지강 등과 가깝게 지내면서 다양한 무술을 배워 오늘날 양파 팔괘장의 기술 체계를 정형화하고 보완하는데 기여하였다.
노년기문화혁명 후 문하생을 널리 받아들여 기예를 전수하는 한편, ‘동해천전장董海川轉掌’, ‘양진포팔괘장梁振蒲八卦掌’, ‘팔괘장오통八卦掌悟通’, ‘팔괘장진비록八卦掌珍秘錄’을 편찬하였다. 1981년 동해천 묘를 이전하였으며 같은 해 시체육위의 후원으로 중국 무술계 최초로 단일권술연구회인 북경시팔괘장연구회를 발족하여 회장으로 취임하였다. 팔괘장 지도장을 개설하고 국내외 동호인의 교류를 증진시켜, 팔괘장의 널리 퍼지도록 추진하였다. 생전에 국내외 50여 개 무술단체의 고문 및 명예 관장으로 초빙되어 팔괘장 수련생을 늘다. 이자명 노사의 제자로는 마전욱, 조대원, 왕동, 이공성, 저국용, 장전량, 수운강 등이 있다.
무림 평가
이자명 노사의 인품은 온화하고 자상하며, 곤경에 처한 사람을 도와주기를 즐겨하여 무덕이 국내 외에 널리 알려져 있다. 동해천 선사의 무덤은 문화대혁명으로 파괴되어 농경지로 변할 위험이 있었는데 1980년 국내외 팔괘장 전인들에게 모금하여 북경 서쪽 만안공동묘지에 동해천 선사 묘를 건립하였다. 만안공묘에는 사형인 곽고민 노사의 무덤도 있다. 1986년에는 양진포의 무덤을 원적지에서 북경만안공묘로 옮겨 팔괘장의 성지를 만들었다. 중국정부는 이자명 노사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덕고망중(德高望重덕이 높고 명망이 두텁다)’이라는 편액을 수여하였다.
팔괘권사의 무덤, 북경 만안공묘
이자명 노사의 서거 후 가족들은 남쪽 사랑방에 기념당을 설치하였다. 집 안의 맞은편 벽에는 사진이 걸려 있고, 그 위에는 ‘덕고망중(德高望重)’ 현판이 걸려 있고, 동해천 선사와 양진포 노사의 사진도 걸려 있다. 1997년 4월 5일 친족 및 제자들이 유골함을 만안공묘 동해천 선사묘 좌측, 양진포 및 곽고민 묘 우측에 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