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은 The 인천 에 실린 기사를 허락을 받아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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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은 쿵후의 고장”… 마지막 남은 화교 사범 ‘필서신’의 바람
동인천 옛 인형극장 앞 ‘정무문 쿵후 총본관’은 기합 소리가 끊긴 채 적막했다. 어찌 보면 당연하다. 금요일 저녁 시간이니. 막 도장에 왔다 갔을 수련생의 온기를 느끼기엔 충분했다. 그의 첫인상은 털털한 아저씨다.
내공이 깊어 보여 오히려 유연한 외모에서 결기가 가득한 젊은 시절의 모습이 언뜻언뜻 보였다. 그는 차를 마시고 있었다. 차를 권했다. 동행한 언론인 유사랑 화백의 소개가 이어졌고 그의 삶과 인천 쿵후 역사 이야기로 바로 빠져들었다.
필서신(畢庶信). 우리말로는 ‘비수신’, ‘삐수신’이라는 읽는다. 1958년에 인천에서 태어난 대한민국 화교 출신 무술가다.
중국인(대만 국적) 부모 사이에서 출생한 화교 2세로 16세에 무당파 팔괘장(八卦掌)의 고수였던 화교 사부 ‘유순화’를 만나 중국 무술을 시작했다.
그의 성장 과정은 여러 차례 언론에서 소개되어 익히 알려져 있다. 줄여 소개한다.
인천 차이나타운 화교학교에서 초중고 과정을 마친 필서신 관장은 20대이던 1977년 중화민국 중국무술대회의 심판 자격으로 참가한 사부 유순화를 따라 대만에 간다. 그곳에서 홍가권(洪家拳)의 일대종사였던 ‘장극치’를 만난다. 장극치가 시연한 취권과 사권을 보고 한눈에 반한다.
황비홍의 4대 제자로 한국 쿵후 맥 이어
홍가권-팔극권-영춘권-당랑권 모두 전수“인천 쿵후역사가 곧 대한민국 쿵후역사
계보의 정리와 무술 기법을 체계화 필요
박물관 설립해 후대들에게 남기고 싶어”
이후 사부의 허락을 받아 장극치 문파로 들어간다. 홍가권은 ‘황비홍’과 ‘임가곤’ 그리고 장극치로 이어지는 정통 무술이다. 필 관장은 비법(비기)을 모두 전수한다. 이로써 필 관장은 황비홍의 직계 제자(황비홍 4대 제자)가 된다.
또 팔극권(八極拳)의 일대종사이자 전설적인 존재였던 ‘이서문’의 제자였던 ‘유운초’에게 정통 ‘무당 팔극권’을 전수하여 대한민국에서 유일하게 라이센스를 보유하게 된다.
그 이외에도 브루스 리(Bruce Lee, 이소룡)의 스승이자 영춘권의 일대종사인 ‘’엽문’의 조카이자 이소룡의 사형이었던 ‘노문금’에게 영춘권을 전수하고 대만 청도 국술관 ‘고도생’에게 당랑권을 전수했다.
그는 기자에게 “인천에서 맥을 잇고 있는 한국 쿵후의 정통성을 유지해야 합니다”라며 “인천 쿵후 역사가 곧 대한민국 쿵후 역사인 만큼 이제는 정리해 남겨야 할 때입니다”라고 강조했다.
“인천은 대한민국 쿵후의 뿌리이자 메카입니다. 제물포 개항과 함께 인천에 청나라 조계지가 만들어지고 중국인들이 인천으로 이주를 시작하던 19세기 말부터 서구열강의 외침과 간섭에 중국도 피폐한 시기였지요. 무술인들의 힘으로 외세를 물아내자는 ‘의화단운동’이 일어났지만, 실패로 쫓기던 무술인들이 대거 인천으로 이주해 오면서 인천은 중국 무술의 본거지가 됐습니다.”
당시 중국 무술인들은 중국과 해상으로 가장 가까운 인천에서 ‘화교’란 이름으로 정착했고, 청일전쟁을 거치면서 항일운동을 벌이며 인천은 명실상부한 중국 전통 무술 고수들의 춘추전국시대가 됐다는 것. 팔괘장 직계인 노수전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인천에 정착한 노수전은 많은 제자들을 길러내 우리나라 무술인들에게 ‘쿵후의 전설’로 회자한다.
필 관장은 노수전의 직계 제자인 유순화로부터 팔괘장을 배웠다. 인천 중구 선린동 차이나타운에 있는 중국 도교 사당 ‘의선당’ 옆 노천도장이 소년 필 관장의 수련장이었다.
이후 1980년대에는 우리나라 전역에는 쿵후 수련생이 급증했다. 필 관장은 1982년 쿵후 유학을 마치고 인천으로 돌아와 다음 해에 경기도 김포에 첫 쿵후 도장을 차렸다. 그야말로 대박이었다. 100여 명의 제자들이 수련했다. 그도 그럴 것이 대만 유학파 출신, 무술인이 직접 중국 정통 쿵후 도장을 열었다는 소문은 순식간에 퍼졌다.
여러 다른 도장의 시샘도 있었다. 어느 날 이웃 도장의 관장이 찾아와 도전장을 내밀었고 10여 분 동안 겨뤘으나 대결 중간에 이웃 관장이 갑자기 대결을 중단하며 순순히 물러났다. 며칠 뒤, 그 관장은 자신의 도장 명판(名板)을 들고 필 관장을 찾아와 도장과 수련생들을 인수해달라고 부탁했다. 이러한 대결을 몇 차례 더 치르면서 필 관장은 자신의 도장을 3개로 늘리고 수련생들은 성황을 이뤘다.
그러다 필 관장은 김포도장을 제자에게 넘기고, 인천으로 돌아와 동인천, 지금 자리에서 새로운 도장을 연다. 차이나타운의 발상지이자, 중국 정통 쿵푸의 메카인 인천을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 때문이었다.
1985년 개장해 벌써 40년째다. 한때 호황이던 시절도 있었지만, 지금은 도장 운영이 빠듯하다. 하지만 그는 “옛날 유순화 사부께서 저에게 그랬듯이 어린 제자에게 쿵후를 가르치고 무예의 도를 전수하는 일이 가장 행복합니다”라며 힘주어 말한다.
그에겐 꿈이 있다. “한평생 이곳 인천에서 나고 자랐으니 저는 인천 사람입니다. 국적은 불가피하게 대만이지만 누구보다 대한민국을, 인천을 사랑합니다. 마지막으로 중국 정통 쿵후의 역사가 인천에서 다시 시작한 만큼 쿵후 계보의 역사 정리와 무술 기법을 체계화해 박물관 설립 등으로 후대에 남기고 싶습니다.”
그의 바람이 이루어지는 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 그래야 인천이다. 필서신 관장을 만나야 했던 이유다. 그를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