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락한 자연문의 계승자, 만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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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락한 자연문의 계승자, 만뢰성

만뢰성 (萬籟聲)은 자연문의 계승자이며 현대 중국의 주요 무술인 중 한 명이다. 만뢰성은 대학을 졸업하고 글을 쓸 수 있는 인재여서 무술계의 많은 각광을 받았다. 이전 세대의 유식한 무술가로는 손록당이 있지만 현대에는 만뢰성이 있다. 자연문의 무술은 현대적으로 개편되어 있으며 전통적은 투로 훈련이 아닌 개별 기술을 반복으로 연습하여 숙달하는 시스템이다. 투로 훈련은 장점도 많지만 단점도 많아 이것을 개혁하고자 하는 무술인들이 중국에도 많았다.

자연문은 근대의 무술이 집대성된 문파로 기격과 단련에서 많은 장점을 가지고 있지만 현재 세력이 줄어 호남성의 한 군소문파로 생존하고 있다. 현대 중국의 정치, 경제적 중심이 호남성으로 짜여졌다면 자연문은 지금 태극권의 위치에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와 현재의 자연문은 지역적인 한계를 못 벗어나고 지방 권술의 하나로 몰락했다.

만뢰성 (1903년 2월-1992년 8월)은 원명은 상청(常青)이다. 호북성 무창(武昌)출신이다. 1903년 출생. 북경국립농업대학 삼림학과에 다녔으며 졸업 후 학교에 남아 교편을 잡았다. 그동안 명사를 모시고 무예를 익혔다. 1928년말에 이제심李濟深에 의해 양광국술관 관장으로 초빙되었다. 항일전쟁 기간에 중경중앙훈련단 무술총교관, 호남국술훈련소 소장, 광서대학 체육부 주임 등 직무를 맡았다. 현대 중국 성립 후 복건성에서 의사로 일하고 무예를 가르쳤다.

만뢰성은 1903년에 무창 갈선진의 한 중산층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배우기 좋아하며 성격이 기격을 좋아하여 공부를 안할 때는 무리의 아이들과 권각을 하며 놀았다.

학교 시절, 고향을 떠나 베이징에서 민국 초기 정부 교육차장을 지낸 삼촌 집에 살았다. 1920년에 북평농업대학에 입학하여 졸업 후 학교에 남아 교편을 잡았다.

당시 중국은 군벌이 할거하여 중국인들은 “동아시아의 병자”라고 놀림을 받았던 때이다. 만뢰성은 국가의 존망이 위험할 때 여 강국이 반드시 먼저 근본이 튼튼해야 하니 ‘무술로 구국’에 뜻을 두고 무공을 단련하여 자강을 추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무술계의 명사인 두심오杜心五, 조흠주趙鑫洲, 양도지楊度之, 등지령鄧芷靈, 왕몽재王夢齋, 왕영표王榮標 등을 스승으로 모시고 무술 내외공, 도공, 약학 등을 배웠다.

어느 날, 북경의 “신보晨報”에서 무림이야기를 게재하여 독자들의 깊은 흥미를 불러일으켰다. 당시, 농대의 임교수는 만뢰성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는 대학을 졸업한 수재고 또 다년간 무공을 연습하였는데 왜 무술에 관한 글을 쓰지 않는가?”라고 말했다. 이 언급은 만뢰성이 바라던 바였다. 그는 “문인은 무예를 하지 않고 무인은 글을 쓰지 않는다.”는 편견을 타파하려고 신보晨報에서 무술관련 글을 연재하였는데, 참신한 주장, 폭넓은 취재, 풍부한 그림과 글, 매끄러운 문체로 수도권에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스승과 친구들이 기뻐하며 축하하였고 “무술휘종武術彙宗”으로 출판되었다. 이때 유명한 극작가이며 시인인 전한은 만 뇌성의 장형인 만회 천의 친구였는데 만상청을 만뢰성으로 개명할것을 건의했다. 1928년에 상무인서관에서 “무술회종”이 저자 만뢰성의 이름으로 출판되었는데 만상청이라는 이름은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다.

1928년 10월, 전국국술경기가 남경에서 개최되었다. 26세의 만뢰성은 하북성과 북경대표팀 인솔자로서 20여명의 선수를 이끌고 경기에 참가했다. 당시 중앙국술관 관장 장지강은 이 사실을 알고 경기 후 사람들에게 훈화를 할 때 “너희들은 쿵푸를 몰라. 진짜 대단한 사람은 만뢰성이야”라고 말했다. 이후 만뢰성이 이름이 잘 알려지게 되었다. 이 시기에 만뢰성은 나한문의 유백천劉百川을 만나 그 진전을 얻었다.

이듬해, 이제심李濟深은 만뢰성을 광주로 초청하여 양광국술관 관장을 맡게 하였는데, 동행한 사람은 북파 무림 고수 이선오李先五, 부진숭傅振嵩, 고여장顧汝章, 왕소주王少周 다섯 명이었다. 이것이 바로 무림의 일대사였던 “오호가 강남으로 가다五虎下江南”이다. 만뢰성이 부임한 후 리제심은 즉 소장 계급을 수여하였고 동행한 고수들도 각기 계급을 수여하여 교관이 되었다. 중국 무술계에서는 평소 지방색과 문파간 벽이 있었는데, 만뢰성이 관장을 맡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양광 무림인들의 불만이 심햇다. 잇달아 이제심에게 항의하여 현지인을 관장으로 임명하려고 애썼다. 이제심은 여러 번 설명했지만 소용없었다.

1934년 만뢰성은 광서대학교 체육교육과장으로 임명되었다. 1937년 노구교 사건 이후 낙양보충훈련소에서 무술교관으로 복무했다. 1938년 늦겨울, 그는 국민당 중앙훈련단 중국무술 수석교관을 역임했다. 1942년 복건성 주석 류젠서(劉建舍)의 초청으로 복건성 용안에 복건체육사범학교를 설립하고 교장을 역임했다.

만뢰성은 현대중국 건국 이후 복주동가보건센터에서 정형외과 의사로 일했다. 1957년에는 복건성 무술대회 주심을 역임하며 자연문 무술, 철판교 등 무예를 선보였다. 그 후 그는 베이징으로 가서 전국우슈대회에 참가하여 성과상을 받았다.

저서에는 『무술휘종武術彙宗』, 『원식태극권도해原式太極拳圖解』, 『국술교본國術教本』, 『약공비藥功秘』, 『국제무예체육교재國際武術體育教範』, 『국제기격무술교범國際技擊武術教範』, 『무술기격정화武術技擊精華』, 『무술자연문武術自然門』, 『중의상과中醫傷科』, 『기공氣功』, 『금창24식金槍廿四式』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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