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은 『다렌무술간사大连武术简史』의 ‘당랑권’편의 번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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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다롄의 무술 유입사
다롄에는 근대 이후, 중국 전국 각지의 무술 명가들이 다롄에 와서 교류하고 다양한 유파의 무술을 전파한 것은 다롄 무술 문화를 풍부하게 하고 무술 운동의 발전을 추진하는 데 긍정적인 역할을 했다.
다롄 근대 민간 무술의 발전은 19세기 말, 20세기 초에 시작되었다. 1901년 러시아가 다롄 항만 건설을 거의 완료하면서, 다롄 항은 동북 무역의 중심지로서의 지위가 더욱 두드러졌다. 특히 러시아가 동청철도(東清鐵路)를 다롄까지 연장하여 러시아 영내 이르쿠츠크까지 직접 연결한 후, 다롄은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해상 및 육상 교통의 허브가 되었다.
다롄의 해상 및 육상 교통 발전과 함께 시가지 개발 건설이 빠르게 진행되었고, 공상업 무역도 점차 번영했다. 1903년에는 다롄 시가지에 각종 중소형 공장들이 빠르게 생겨났고, 시내 상점은 500여 개에 달했다. 공상업과 항만 및 도로 건설의 필요성으로 인해 산둥, 허베이, 상하이 등지에서 대규모 건축 노동자들이 모집되었다. 당시 사회 치안 관리 기구가 아직 설립되지 않았고, 의화단 운동이 다롄에까지 영향을 미치면서 곳곳에서 인심이 흉흉했고, 건축 노동자들 간의 싸움이 빈번하게 발생했다. 대규모 상인들은 자신들의 재산과 생명 안전을 보호하기 위해 사회 치안 유지와 민중의 어려움 해소를 명분으로 러시아 식민 당국의 동의를 얻어 다롄 공의회(公議會)를 설립했다. 공의회는 공의처(公議處)를 두고 800명의 순경을 모집했으며, 장톈(張田)이 회의처 통령을 맡아 전문적으로 지방 치안 업무를 담당했다.
이 순경들 대부분은 무술을 할 줄 알았고, 일부는 무림 고수였다. 또한 다롄의 특수한 지리적 위치는 내륙에서 동북 지역으로 가는 교통의 요지였기 때문에, 많은 내륙 이민자들이 이곳을 지나가거나 다롄에 정착했다. 이 이민자들 중에는 뛰어난 무술 실력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고, 생계를 위해 이곳에 도장(武館)을 열고 제자를 가르쳤다. 다롄은 상업이 비교적 발달했기 때문에, 일부 상점들은 무역 중 노상 강도를 걱정하여 무술 실력이 뛰어난 사람들을 경호원으로 고용했고, 이로 인해 다롄 지역에도 표국(鏢局, 경호업체)이 생겨났다.
통계에 따르면 청나라 말기 랴오닝(遼寧)에는 30여 개의 표국이 있었는데, 표사(鏢師)들의 왕래 경호 활동도 다롄 무술 전파의 중요한 경로였다. 특히 러일 전쟁 이후 일본이 다롄에 40년간 식민 통치를 하면서 대규모 도시 건설로 인해 다롄 지역의 산업 노동자가 끊임없이 증가했다. 또한 다롄은 대외 개방된 국제 무역항으로서 국내외 상업 인사들을 끌어들여 상업 무역 활동을 진행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다롄에 와서 돈을 벌려는 다양한 인물들이 점차 늘어났다. 뛰어난 무술 실력을 가진 무술가들이 다롄에 와서 무술을 전수했을 뿐만 아니라, 다롄에 일하러 온 많은 사람들도 비범한 실력을 가진 무술 대가들이었다. 그들은 다롄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무술을 전파했고, 한때 권종(拳種)이 많고 유파가 다양한 번성하는 국면을 이루어 다롄 근대 백년 무술 발전의 확고한 기초를 다졌다.
다롄 지방 문헌 기록에 따르면, 근대 외지 무술가들이 다롄에 와서 무술을 전수한 것은 1884년부터 시작되었다. 산둥 무술가 장카이위안(張開元)이 다롄에 와서 좡허에 도장을 열고 통배권, 영조권, 후권을 전수했고, 좡허의 유명 권사이며 “쉬가취안팡(徐家拳坊)”의 관주(館主)인 쉬훙페이(徐鴻飛)가 그의 중요한 전수자이다.
이어서 1890년, 산둥(혹은 후베이로 여기는 사람도 있음)의 유명한 육합당랑권 창시자 웨이더린(魏德林, 웨이싼/魏三)이 산둥을 거쳐 바닷길로 좡허에 와서 육합당랑권을 전수했다. 웨이싼은 손가락 사이에 살이 연결되어 오리발 모양과 같았기 때문에, 좡허 사람들은 그를 “웨이다바장(魏大巴掌, 위대한 큰 손)”이라고 불렀다. 1894년, 산둥 권사 팡슈산(逄秀山)이 좡허에 “팡가취안팡(逄家拳坊)”을 개설하고 장권, 형의권, 팔괘장, 그리고 착각번자 등의 권술을 전수했다.
20세기 이후, 산둥, 허베이 등지의 많은 유명 권사들이 다롄에 와서 도장을 열고 제자를 가르치면서 다롄 민간 무술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20세기 초, 허베이 비종권(秘宗拳) 명사 장자오주(張兆珠)가 다롄에 와서 비종권을 전수했고, 허베이 연청권(燕青拳) 명사 궈진융(郭金庸)이 다롄에 와서 연청권을 전수했다. 산둥 무술 명가 샤오수빈(肖樹彬)이 다롄에 와서 칠성당랑권을 전수했고, 산둥의 유명 매화당랑권 사범 장화룽(姜化龍)이 다롄에 와서 매화당랑권을 전수했다. 허베이 창현(滄縣) 고가구(高家口) 비종권 명사 가오위춘(高玉春)이 다롄에 와서 비종권을 전수했고, 허베이 무술 명가 우전둥(吳振東), 류즈(劉智), 슈젠츠(修劍癡), 왕마오톈(王茂田)이 다롄에 무관을 개설하고 소기파(少祁派) 통배권을 전수했다. 허베이 무술 명가 류언취안(劉恩泉)은 다롄에 와서 백원통배권(白猿通背拳)을 전수했다. 산둥 칠성당랑권 명사 리쯔잔(李子占), 류둬싼(劉多三)은 다롄에 와서 칠성당랑권을 전수했다. 20세기 20년대, 허베이 무술 명가 리마오춘(李茂春)이 다롄에 와서 공력권(功力拳)을 전수했고, 왕마오톈과 함께 남산 무술 연구회를 설립했는데, 이는 동북 지역 최초의 무술 연구 조직이었다.
같은 시기 산둥 무술 명가 왕쉐정(王學正)이 다롄에 와서 매화당랑권을 전수했고, 후융푸(胡永福) 등이 다롄에 와서 칠성당랑권을 전수했다. 특히 다롄 백년 무술사에서 특별히 언급해야 할 점은, 1921년 유명 지식인 푸리위(傅立魚)가 다롄에 중화청년회를 조직하고, 회원들의 무술 정신 고취, 심신 단련, 고유 국기 보존을 취지로 삼아 회 내에 전문적으로 무술부를 설치했다는 것이다. 무술부에는 무술 명가 왕마오톈, 쑨쯔위(孫子玉), 샤오수빈, 류둬싼, 우쯔제(吳子傑) 다섯 명의 코치를 초빙했다. 교육 과정은 권술, 기계, 대련, 산타, 내공 등으로 설정되었고, 학제는 2년, 4년, 6년으로 시험 심사를 거쳐 초급, 중급, 고급 졸업 증서를 발급했다. 고급 과정을 졸업한 학원은 연구과에 진학하여 계속 심화 학습을 할 수 있었다. 다롄 중화청년회 무술부 장정(章程)은 이 부서가 무술 교육과 무술 연구를 통합하고 있으며, 통배권, 당랑권, 연청권, 공력권, 장권 등 여러 권종에 걸친 270여 개 이상의 무술 권계(拳械) 투로(套路)를 개설했다고 규정했다. 중화청년회 무술부는 무술 교육과 연구를 통합한 중국 최초의 전통 무술 근대 학제 교육기관이라고 할 수 있으며, 중국 근대 무술 교육에 일정한 영향을 미쳤다. 또한, 중화청년회 무술부의 학생들은 모두 무술의 전파자였다. 학생들은 학생, 노동자, 상인, 교사 등 다양한 사회 계층 출신이었으며, 이곳에서 무술을 배운 후 대부분 자신의 직장이나 여가 시간을 이용해 더 많은 사람들에게 무술을 가르쳤다. 예를 들어, 중화청년회 초기 회원 린성팅(林升亭)은 1921년 중화청년회에 가입했고, 이듬해 친구들과 함께 중화증지학교(中華增智學校)를 창립한 후 교장을 역임했다. 1924년~1925년, 그는 증지학교 학생들에게 무술을 배우게 했고, 정기적으로 무술 공연을 개최하여 무술의 인기를 고취시켰다.
20세기 30년대 이후, 또다시 한 무리의 무술 명가들이 다롄에 와서 다양한 유파의 무술을 전수했다. 산둥 무술 명가 쑨성(孫勝)과 이수산(李樹山), 이수봉(李樹峰), 이수생(李樹生) 삼형제는 다롄에 와서 비종권을 전수했다. 오식 태극 명가 정허춘(鄭和春)은 다롄에 와서 오식 태극권을 전수했다. 산둥 당랑권 명가 하오빈(郝斌), 쑨중민(孫忠民)은 다롄에 와서 매화당랑권을 전수했다. 산둥 칠성당랑권 명가 판쉬둥(範旭東), 양웨이신(楊維新)은 다롄에 와서 칠성당랑권을 전수했다. 무술 명가 추이서우산(崔壽山), 지춘팅(紀春亭)은 다롄에 와서 태극매화당랑권을 전수했다. 무술 명가 스펑포(石鳳坡)는 다롄에 와서 자오매화당랑권을 전수했다. 무술 명가 쑨루원(孫汝文)은 다롄에 와서 윤씨 팔괘장을 전수했다. 태극권 명가 천징타오(陳敬陶)는 다롄에 와서 양식 태극권, 형의권, 정식 팔괘장을 전수했다. 무술 명가 류리싱(劉力行)은 다롄에서 팔괘태극권을 전수했다.
다롄의 당랑권 전파의 역사
다롄(大連) 당랑권(螳螂拳)의 전파와 발전은 청(清)나라 말년과 민국(民國) 초기에 대량의 산둥(山東) 이민자들이 다롄(大連)으로 유입되면서 시작되었으며, 이는 주로 산둥성(山東省)의 옌타이(煙台), 칭다오(青島), 웨이하이(威海) 등지에서 유전되던 칠성당랑권(七星螳螂拳), 매화당랑권(梅花螳螂拳), 육합당랑권(六合螳螂拳), 태극매화당랑권(太極梅花螳螂拳), 자오매화당랑권(子午梅花螳螂拳) 등이다. 이 당랑권(螳螂拳)들은 산둥(山東)에서의 전파와 발전이 주로 청(清)나라 말년부터 민국(民國) 시기까지 산둥(山東) 라이양(萊陽), 옌타이(煙台) 등지의 당랑권(螳螂拳) 대가인 이곤산(李昆山), 강화룡(薑化龍), 학빈(郝斌), 양유신(楊維新), 범욱동(範旭東), 손충민(孫忠民), 우천보(於天寶), 이수무(李樹茂), 강본하(薑本河) 등의 노력에 의한 것이다.
당랑권(螳螂拳)이 다롄(大連)으로 전파된 것은, 청(清)나라 말년과 민국(民國) 초기 산둥(山東) 이민자들이 다롄(大連)으로 대량 유입된 이후이다. 당랑권(螳螂拳)이 다롄(大連)에 가장 먼저 전파된 것은 청(清)나라 말년으로, 산둥(山東) 사람 위덕림(魏德林)(일명 위싼(魏三))이 좡허셴(莊河縣) 타이핑산(太平山) 난마다오춘(南馬道村)에 와서 육합당랑권(六合螳螂拳)을 전수했다. 그의 권법은 실전(實戰)을 중시하고, 투로(套路)가 적으며, 실전을 위주로 했으며, 그는 좡허(莊河)에서 20여 년간 무관(武館)을 열고 제자를 가르쳤으며, 문도(門徒)가 많았다. 좡허(莊河) 타이핑산(太平山)에 있던 위덕림(魏德林)의 큰 제자 손충의(孫忠義)도 육합당랑권(六合螳螂拳)을 계승했으며, 그는 좡허(莊河)에서 계속 육합당랑권(六合螳螂拳)을 전파하여, 좡허(莊河) 지역에 큰 영향을 미쳤다.
청(清)나라 말년과 민국(民國) 초기에는 산둥(山東) 출신 당랑권(螳螂拳) 명가들이 다롄(大連)에 가장 많이 왔던 시기이다.
* 산둥(山東) 치샤(棲霞) 사람 이단림(李丹林)은 칠성당랑권(七星螳螂拳)을 전수했다. 그가 다롄(大連)에 온 것은 광서(光緒) 연간으로, 뤼순(旅順)에 무관(武館)을 열고 제자를 가르쳤으며, 그가 양성한 제자로는 오자걸(吳子傑), 손자옥(孫子玉), 임승정(林升亭) 등이 있다.
* 산둥(山東) 라이양(萊陽) 사람 왕옥림(王玉林)은 민국(民國) 초년에 다롄(大連)에 와서 칠성당랑권(七星螳螂拳)을 전수했으며, 그의 제자로는 유영강(劉永剛) 등이 있다.
* 산둥(山東) 라이양(萊陽) 사람 강화룡(薑化龍)은 저명한 매화당랑권(梅花螳螂拳) 명가이다. 그는 민국(民國) 초년에 다롄(大連)에 와서 매화당랑권(梅花螳螂拳)을 전수했으며, 그의 유명한 제자로는 왕학정(王學正), 손충민(孫忠民), 유다삼(劉多三) 등이 있다.
* 산둥(山東) 라이양(萊陽) 사람 학빈(郝斌) 또한 저명한 매화당랑권(梅花螳螂拳) 명가이다. 그는 민국(民國) 초년에 다롄(大連)에 와서 매화당랑권(梅花螳螂拳)을 전수했으며, 그의 유명한 제자로는 범욱동(範旭東), 양유신(楊維新), 석봉파(石鳳坡) 등이 있다.
* 산둥(山東) 라이양(萊陽) 사람 우천보(於天寶)는 민국(民國) 초년에 다롄(大連)에 와서 칠성당랑권(七星螳螂拳)을 전수했다.
* 산둥(山東) 라이양(萊陽) 사람 이곤산(李昆山)은 민국(民國) 초년에 다롄(大連)에 와서 칠성당랑권(七星螳螂拳)을 전수했다.
* 산둥(山東) 옌타이(煙台) 사람 손충민(孫忠民)은 민국(民國) 초년에 다롄(大連)에 와서 칠성당랑권(七星螳螂拳)을 전수했다.
당랑권(螳螂拳)이 다롄(大連)에 유입된 후, 주로 뤼순(旅順), 좡허(莊河) 등지에서 전파되고 발전했다. 그중 좡허(莊河) 일대에서는 육합당랑권(六合螳螂拳)의 전인(傳人)이 가장 많았고, 영향력이 가장 컸으며, 뤼순(旅順) 일대에서는 칠성당랑권(七星螳螂拳)의 전인(傳人)이 가장 많았고, 영향력이 가장 컸다.
당랑권(螳螂拳)은 다롄(大連)에서 전파되고 발전하는 과정에서, 다른 권종(拳種)과도 교류하고 융합했다. 예를 들어, 뤼순(旅順) 지역의 칠성당랑권(七星螳螂拳)은 현지의 공력권(功力拳), 연청권(燕青拳) 등 권종(拳種)과 교류하고 융합하여, 당랑권(螳螂拳)의 투로(套路)와 기법(技法)을 더욱 풍부하고 완벽하게 만들었다.
제1절 당랑권(螳螂拳)의 다롄(大連) 전파
19세기 말 육합당랑권(六合螳螂拳)이 다롄(大連)에 전파된 이후, 칠성당랑권(七星螳螂拳)과 매화당랑권(梅花螳螂拳)도 잇따라 전파되어, 다롄(大連) 무술의 발전에 적극적인 추진 역할을 했으며, 다롄(大連) 무술의 중요한 특징을 형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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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합당랑권(六合螳螂拳)의 다롄(大連) 전파와 발전
청(清)나라 말년 위덕림(魏德林)이 육합당랑권(六合螳螂拳)을 다롄(大連)에 전수한 이후, 적계 전인(嫡系傳人) 진운도(陳雲濤), 단부훈(單不勳)이 20세기 20년대와 40년대에 걸쳐 잇따라 다롄(大連)에 와서 육합당랑권(六合螳螂拳)을 전수했다.
다롄(大連)에 가장 먼저 와서 당랑권(螳螂拳)을 전수한 사람은 육합당랑권(六合螳螂拳)의 창시자이자 일대 종사(一代宗師)인 위덕림(魏德林)으로, 청(清) 광서(光緒) 16년(1890년)에 산둥(山東)에서 배를 타고 좡허(莊河)에 와서 많은 제자를 가르쳤다. 위덕림(魏德林)(일명 위싼(魏三))은 산둥 라이양(萊陽) 성 서쪽 웨이자거우(魏家溝) 사람이다(일설에는 후베이(湖北) 사람이라고도 한다). 그의 한쪽 손 약지와 새끼손가락이 붙어 있어, 좡허(莊河) 사람들은 그를 위다바장(魏大巴掌)이라고 불렀다. 그는 소년 시절 허베이 창저우(滄州)에서 무술을 배웠는데, 진(金), 룽(龍) 두 사람의 육합권(六合拳) 대사 문하에서 진전(真傳)을 얻어 뛰어난 무공 절기를 연마했고, 특히 경공술(輕功)에 뛰어나 담을 타고 지붕을 넘을 수 있었다고 전해진다. 무예를 이룬 후 밖으로 나가 스승을 찾고 친구를 방문하여 기예를 연마했으나, 적수를 만나지 못했다.
고향 라이양(萊陽)으로 돌아온 후, 왕랑(王郎)의 3대 전인 이(李) 성(姓) 권사(拳師)를 만났다. 두 사람은 여러 차례 겨루었으나 승부가 나지 않아 좋은 친구가 되었다. 각자의 무공을 증진시키기 위해 두 사람은 자주 서로 교류하고 장점을 취하며 단점을 보완했고, 위덕림(魏德林)은 당랑권(螳螂拳)의 정수를 깊이 터득하여 육합당랑권(六合螳螂拳)을 창시했다. 이후 위덕림(魏德林)은 강호에 뛰어들어 부자에게 재물을 빼앗아 가난한 사람을 도왔고(劫富濟貧), 관부의 지명수배를 받았다. 덩저우(登州)에서 탈옥한 후, 수년간 동북(東北) 3성에서 활동했다. 위덕림(魏德林)이 좡허(莊河)에서 얼마나 오랫동안 무술을 가르쳤는지는 현재 고증할 수 없지만, 그 영향은 매우 컸다. 주요 제자로는 좡허(莊河)의 저명한 무술가 서홍비(徐鴻飛)가 있는데, 그의 문하에 들어가 육합당랑권(六合螳螂拳) 권술과 기계를 배웠다. 《좡허현지(莊河縣志)》의 기록에 따르면, 육합당랑권(六合螳螂拳)이 좡허(莊河)에 전파된 후, 여러 세대에 걸쳐 이 권법을 수련했으며, 비교적 유명한 사람으로는 서영년(徐永年), 서증업(徐增業) 등이 있다. 기록에 따르면, 위덕림(魏德林)이 가르친 육합당랑권(六合螳螂拳)에는 또 다른 특징이 있었는데, 바로 공을 들일 때 소리를 내는 것이다. 강맹하게 수련할 때는 “하(呵)”, “후(呼)” 소리를 내고, 부드럽고 완만할 때는 “스(嘶)”, “쉬(噓)” 소리를 내며, 영리하고 민첩할 때는 “시(嘻)”, “추이(吹)” 소리를 냈다. 우리는 이것이 소림(少林)의 비전(秘傳) “육자결(六字訣)”임을 알고 있다. 왜냐하면 위덕림(魏德林)에게 당랑권(螳螂拳)을 가르친 이(李) 사부(師傅)는 왕랑(王郎)의 적계 전인(嫡系傳人)이었고, 이러한 호흡법은 분명 왕랑(王郎)으로부터 전수되어 위덕림(魏德林)에게 완전히 계승되어 전파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는 처음에 당랑권(螳螂拳)을 수련할 때 호흡을 병행했었다고 볼 수 있을까? 이는 탐구할 가치가 있는 문제이다. 현재 당랑권(螳螂拳)을 전수하는 권사(拳家)들은 더 이상 호흡의 기법을 언급하지 않는데, 이는 오랜 기간 동안 실전(失傳)된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인지, 당랑권(螳螂拳) 연구 전문가와 무술 사학자들의 추가적인 논의가 필요하다.
진운도(陳雲濤)
진운도(陳雲濤)(1906—1984)는 산둥 황셴(黃縣) 사람(현재 룽커우시(龍口市))으로, 저명한 당랑권(螳螂拳) 대가이다. 1945년에 다롄(大連)의 초대 부시장(副市長)을 역임했다. 그는 어릴 때부터 무술을 익혔고, 육합당랑권(六合螳螂拳) 3대 적계 전인(嫡系傳人)이자 육합당랑권(六合螳螂拳) 대사 정자성(丁子成)의 문하에 들어가 육합당랑권(六合螳螂拳) 권술 및 기계를 배웠으며, 또한 학항록(郝恒祿)을 따라 매화당랑권(梅花螳螂拳)을 수련하기도 했다.
진운도(陳雲濤)는 1925년 중국 공산주의 청년단에 가입했고, 1926년 중국 공산당으로 전당했다. 1927년 다롄(大連)에 와서 다롄(大連) 중화 청년회(中華青年會)의 체육 교사로 일했다. 다롄(大連)에서 근무하는 동안, 육합당랑권(六合螳螂拳)을 전수하기 시작했다. 특히 다롄(大連) 중화 청년회(中華青年會)에는 무술반이 있었는데, 그도 자주 무술 교사들과 서로 기예를 겨루고 교류했다. 항일 전쟁이 발발한 후,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 항일 투쟁에 참여했으며, 산둥(山東) 항일군(抗日軍) 삼군 이로 정치처 처장(三軍二路政治處處長), 팔로군(八路軍) 오지대 처장(五支隊處長), 자오둥(膠東) 지구 해외처 처장(海外處處長), 정보부 과장(情報部科長) 등의 직책을 역임했다. 1945년 9월, 자오둥(膠東) 지구 당위원회의 파견을 받아 동북(東北)으로 왔으며, 신진셴(新金縣)(현재 푸란뎬시(普蘭店市))의 초대 현장(縣長)을 역임했다. 같은 해 10월 15일, 명령을 받고 다롄(大連)으로 가서 다롄 민주정부를 조직하고 부시장(副市長)으로 취임했다. 다롄 민주정권의 공고화와 경제 발전에 기여했다. 다롄(大連) 부시장 재직 기간 동안, 그는 여가 시간을 이용하여 경호원과 주변 직원들에게 육합당랑권(六合螳螂拳)을 수련하도록 가르쳤다. 자신이 업무로 바빴기 때문에, 1946년 자신의 사형(師兄)이자 육합당랑권(六合螳螂拳) 대사 단비훈(單丕勳)을 다롄(大連)으로 초빙하여 육합당랑권(六合螳螂拳)을 가르치게 했으며, 다롄(大連) 지역 무술 사업의 발전에 기여했다. 사료 기록에 따르면, 당시 다롄(大連)은 특수한 해방 구역이었고, 공산당 조직이 아직 공개되지 않았으며, 민주정권이 막 수립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국민당 특무와 일제 위만 괴뢰 한간(日偽漢奸)들이 민주정권을 무너뜨리기 위해, 일단의 무뢰한(地痞流氓)들을 모아 군중 집회를 선동하고 소란을 피웠다. 진운도(陳雲濤)는 군중의 대립 감정을 피하기 위해, 홀로 집회 현장으로 갔다. 당시 무뢰한과 적 특무분자들의 선동으로 일부 군중들이 흥분하여 현장이 매우 혼란스러웠고, 그의 경호원들은 침착하지 못하고 수장의 안전이 위태로울까 염려하여, 권총을 뽑아 경고 사격을 하려 했다. 진운도(陳雲濤)는 매우 민첩하게 경호원의 총을 빼앗고, 군중 앞에서 경호원의 경솔함을 비판했으며, 공공연하게 적 특무 한간의 음모를 폭로하여, 그 나쁜 사람들이 도망가게 하고 사건을 진정시켰다. 바로 진운도(陳雲濤)가 뛰어난 절기를 지니고 용감하고 세심했기 때문에, 군중들은 민주정권의 진실성을 보았고, 새로운 정권에 대한 신뢰를 갖게 되었다. 신중국(新中國) 수립 후, 진운도(陳雲濤)는 잇따라 동북 건재국 국장(東北建材局長)을 역임했고, 1956년 국가 건축 재료 공업부 부부장(國家建築材料工業部副部長)을 역임했다.
진운도(陳雲濤)는 부부장급 간부의 지위에 올랐지만, 평생 무술 수련을 단 한 번도 중단하지 않았다. 여가 시간을 이용하여 육합당랑권(六合螳螂拳)을 전수하고, 육합당랑권(六合螳螂拳)의 역사와 권법을 연구했다. 베이징(北京) 전 무술협회 당랑권(螳螂拳) 연구회 회장이자 중국의 저명한 육합당랑권(六合螳螂拳) 대사 마한청(馬漢清)이 바로 1959년 진운도(陳雲濤)가 가르친 제자이다. 베이징(北京)에 있는 동안, 그는 자신의 사형(師兄)이자 육합당랑권(六合螳螂拳) 일대 종사 단비훈(單丕勳)을 베이징(北京)으로 초청하여 무술을 가르치게 했다. 특히 “문화대혁명(文革)” 기간 동안, 진운도(陳雲濤)는 집에서 쉬면서 제자 마한청(馬漢清)을 집으로 불러 함께 육합당랑권(六合螳螂拳)을 연구하고, 《당랑권의 연원과 특징에 대한 약론(略論螳螂拳的源流與特點)》 등의 논저를 공동으로 저술했다. 이 외에도 《번천복지 및 기타(翻天覆地及其他)》, 《논 주법(論肘法)》, 《당랑 산수(螳螂散手)》, 《퇴법 간론(踢法簡論)》, 그리고 저명한 《당랑권 약론(螳螂拳略論)》 등을 저술하여, 당랑권(螳螂拳) 이론을 풍부하게 하고 육합당랑권(六合螳螂拳) 기법 발전에 탁월한 공헌을 했다. 무학 사학자들은 베이징(北京) 육합당랑권(六合螳螂拳)의 전파와 발전이 진운도(陳雲濤)와 단샹링(單香陵)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데 의견을 같이한다.
단샹링(單香陵)(1905—1984)은 본명이 단비훈(單丕勳)이며, 자(字)로 활동했다. 산둥 황셴(黃縣) 사람(현재 룽커우시(龍口市))으로, 저명한 육합당랑권(六合螳螂拳) 대사이다. 그는 진운도(陳雲濤)의 사형(師兄)으로, 어릴 때부터 무술을 익혔고, 1920년 육합당랑권(六合螳螂拳) 종사 정자성(丁子成)에게 사사하여 육합당랑권(六合螳螂拳)을 배웠으며, “구십삼수(九十三手)”에 능하고, 특히 당랑(螳螂) 산수(散手)에 정통했다. 기록에 따르면, 1938년 단샹링(單香陵)은 베이징(北京)에서 개최된 북방 국술(國術) 비무대회(擂台大賽)에 참가하여 우승을 차지하여 경사(京師)에 명성을 떨쳤고, 푸롄청(富連成) 희극단의 무술 교사로 초빙되었다. 1946년경, 사제 진운도(陳雲濤)의 초청을 받아 다롄(大連)에 와서 육합당랑권(六合螳螂拳)을 가르쳤다. 그러나 당시 특수한 역사적 시기였기 때문에, 가르친 규모가 작았고 전인(傳人)이 많지 않아, 다롄(大連)에서의 영향은 그다지 크지 않았다.
육합당랑권(六合螳螂拳)은 1890년 다롄(大連)에 전파된 이래로 이미 120여 년이 지났으며, 다롄(大連) 무술의 풍요로움에 중요한 공헌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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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성당랑권(七星螳螂拳)의 다롄(大連) 전파와 발전
칠성당랑권(七星螳螂拳)은 산둥 푸산셴(福山縣) 옌타이(煙台) 서관(西關) 사람 왕영춘(王永春)이 창시한 것으로 전해진다.
왕영춘(王永春)(1854—1926)은 자(字)가 운생(雲生)이다. 청(清) 광서(光緒) 말기 무거(武舉) 출신이다. 소년 시절 이의춘(李義春) 도장(道長)을 따라 화산파(華山派) 장권(長拳)을 배웠고, 이후 지당권(地躺拳)을 배웠다. 23세 때 집에서 무관(武館)을 열고 제자를 가르쳤으며, 26세 때 은사(恩師)이자 당랑권(螳螂拳) 명가 이지전(李之剪)(산둥 핑두(平度) 추이자지(崔家集) 리자좡(李家莊) 사람)을 만나 진전(真傳)을 모두 얻었다. 무예를 이룬 후 자신이 수년간 무술을 수련한 경험을 결합하고, 조용히 연마하고 깊이 연구하며 반복적으로 숙고하여, 칠성추(七星錘), 칠성구(七星鉤), 칠성보(七星步) 등의 기법을 깨달았고, 자신의 당호(堂號) “괴덕당(魁德堂)”의 “괴(魁)” 자(字)를 따서 이름을 지었다. 괴(魁)는 또한 칠성(七星)의 으뜸이므로, 칠성당랑권(七星螳螂拳)이라 칭했다. 이 권법은 신체의 머리, 어깨, 팔꿈치, 손, 넓적다리, 무릎, 발 일곱 부위를 칠성(七星)의 명칭과 상응시켰기 때문에, “분신칠성(分身七星)”이라고도 불린다. 왕운생(王雲生)은 《칠성당랑권 역대 조사보(七星螳螂拳曆代祖師譜)》에 자신의 사승(師承) 및 창파(創派) 상황을 기록했다. “칠성당랑권(七星螳螂拳) 이전에는 운생(雲生)이 이의춘(李公義春)의 화산파(華山派) 장권(長拳)과 이지전(李公之剪)의 당랑권(螳螂拳)을 배웠고, 이후 당랑권(螳螂拳)을 주축으로 여러 문파의 권법을 종합하여 칠성당랑권(七星螳螂拳)을 창시했다. 원래의 권법은 칠성당랑권(七星螳螂拳)이라고 불리지 않았지만, 이 사부(師傅)들은 내가 처음에 권법을 배운 사부들이었고, 사승(師承)이 없어서는 안 되며, 스스로 문파를 창시하고도 그 조사를 잊어서는 안 되기에, 몇 분의 사부들을 칠성당랑권(七星螳螂拳) 초조(初祖)로, 왕랑(王郎)과 승소(升霄)를 비조(鼻祖)로 존숭한다”고 기록했다. 민국(民國) 초년부터 칠성당랑권(七星螳螂拳)은 다롄(大連)에서 전파되기 시작했고, 많은 칠성당랑권(七星螳螂拳) 명가들이 나타났다.
범욱동(範旭東)(1875—1935)은 자(字)가 샹성(翔升)이며, 산둥 덩저우(登州) 옌타이(煙台) 다하이야오춘(大海洋村) 사람이다. 어릴 때부터 무술을 익혔고, 1894년 칠성당랑권(七星螳螂拳) 종사 왕운생(王雲生)에게 사사하여 칠성당랑권(七星螳螂拳)을 배웠으며, 6년간 각고의 노력을 통해 왕(王) 선생의 진전(真傳)을 얻었다. 1901년 왕(王) 선생의 구이지에(估衣街) 권방(拳坊)을 이어받아 제자를 가르쳤다. 범욱동(範旭東)은 평생 무술을 수련하며, 당랑(螳螂) 산타(散打) 기예에 정통했고, 철사 장(鐵砂掌)을 연마했다. 특히 도법(刀法)에 능하여 구셩도왕(九省刀王)이라는 명성을 얻었다. 일찍이 동북(東北)에서 표사(鏢師)로 일했고, 이후 옌타이(煙台), 다롄(大連), 선양(沈陽) 등지를 전전하며 칠성당랑권(七星螳螂拳)을 전수했다. 1919년 범욱동(範旭東)은 제자 양유신(楊維新), 라오광위(羅光玉), 왕전의(王傳義)를 데리고 러시아(俄國)로 가서 비무대회(擂台)에 참가하여, 러시아(俄國) 뇌주(擂主)를 이겼고, 일부 도전자들을 물리쳤으며, 제자들과 함께 금과 은방패를 획득하여 나라의 명예를 드높였다. 범욱동(範旭東)은 칠성당랑권(七星螳螂拳)의 일대 종사(一代宗師)로, 칠성당랑권(七星螳螂拳)의 전파와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으며, 제자가 많았는데, 주요 제자로는 구대 제자(九大弟子)인 양유신(楊維新), 곽가록(郭嘉祿), 림경산(林景山), 라오광위(羅光玉), 소수빈(肖樹斌), 왕전의(王傳義) 등이 있다.
소수빈(肖樹斌)(1885—1946)은 산둥 옌타이(煙台) 사람으로, 십여 세에 범욱동(範旭東)을 따라 칠성당랑권(七星螳螂拳)을 배웠고, 범욱동(範旭東)의 구대 제자 중 한 명이다. 1905년 소수빈(肖樹斌)은 다롄(大連)에 와서 부두 옆에 동해루(東海樓) 반점(飯莊)을 개업했으며, 밤에는 스스로 권법을 연마하고 점원들에게도 가르쳤다. 1906년, 한 친구와 무예를 겨루었다가 실력이 부족함을 깨닫고 고향으로 돌아가 스승을 따라 계속 배웠다. 1909년, 소수빈(肖樹斌)은 다롄(大連)으로 돌아와 정식으로 무관(武館)을 개설하고 “영빈무관(英斌武館)”이라 이름 지었으며, 시강(西崗) 스제관(世界館) 근처에서 제자를 가르쳤다 (스제관(世界館)은 일본이 다롄(大連)을 통치하던 시기의 영화관이었으며, 해방 후 허핑(和平) 영화원으로 개명되었다). 1919년 범욱동(範旭東)이 제자 양유신(楊維新), 라오광위(羅光玉), 왕전의(王傳義) 등을 데리고 러시아(俄羅斯)로 비무대회(擂台)에 참가하러 가는 길에 다롄(大連)을 지나쳤고, 소수빈(肖樹斌)은 사부와 사형제들을 접대했으며, 범욱동(範旭東) 사부에게 계속 스승을 따라 무예를 배우고 싶다고 요청했다. 범욱동(範旭東)은 일정이 촉박하여, 이후 양유신(楊維新)을 따라 배울 수 있다고 말했다. 비무대회가 끝난 후, 범욱동(範旭東)은 러시아(俄國)에 남아 돌아오지 않았고, 양유신(楊維新)은 귀국 후 다롄(大連)에서 소수빈(肖樹斌)에게 일부 기예를 가르쳤다. 일부 기록에서는 소수빈(肖樹斌)을 양유신(楊維新)의 학생이라고 칭하는데, 이는 정확하지 않을 수 있으며, 양(楊)은 스승을 대신하여 가르쳤고, 소(肖)는 여전히 범욱동(範旭東)의 제자라고 해야 할 것이다.
1921년 1월 21일, 다롄(大連) 중화 청년회(中華青年會) 무술부 제1기 무술반이 개강했으며, 소수빈(肖樹斌)은 무술부 코치로 초빙되어 칠성당랑권(七星螳螂拳) 권술 및 기계를 가르쳤다. 또한, 매화당랑권(梅花螳螂拳) 대사 학굉(郝宏)의 제자 류둬산(劉多山)도 중화 청년회(中華青年會) 무술반에서 교사로 재직하며 매화당랑권(梅花螳螂拳) 권술 및 기계를 가르쳤다. 일로(一路)부터 사로(四路) 팔주(八肘)와 일로(一路)부터 육로(六路) 요체(摘要) 등 25개의 투로(套路)가 무술반의 수업 내용이었고, 무술반에는 당랑권(螳螂拳) 단타부(單打部)가 별도로 설치되었다. 이는 당시 당랑권(螳螂拳)이 다롄(大連) 지역에서 얼마나 큰 영향력을 가졌는지 보여준다.
소수빈(肖樹斌)은 초기에 다롄(大連)에 와서 칠성당랑권(七星螳螂拳)을 전수한 무학 대가(武學大家)로, 칠성당랑권(七星螳螂拳)의 다롄(大連) 전파에 기초를 다졌으며, 만년에 건강 등의 이유로 시내를 떠나 옌다오(鹽島)에 거주했다. 1946년, 소수빈(肖樹斌)은 다롄(大連) 시내를 떠나기 전에 무관(武館)을 호영복(胡永福)에게 맡겼으며, 그 해 옌다오(鹽島)에서 향년 61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다롄(大連)에서 40여 년간 무술을 가르쳤으며, 제자가 많았는데, 주요 제자로는 장경화(張慶和), 유력행(劉力行), 부유귀(傅有貴), 황극진(黃克珍), 설의형(薛儀衡) 등이 있다.
왕사비(王少飛)
왕사비(王少飛)(1875–1959)는 자(字)가 운펑(雲鵬)이며, 산둥 안추(安丘) 스훼이쟈오(石灰窖) 사람이다. 1892년 팔괘(八卦) 명가 마구이(馬貴)에게 사사하여 팔괘장(八卦掌)을 배웠다. 1911년, 톈진(天津) 군벌 저위푸(褚玉璞)가 무술 교관을 모집하자, 왕사비(王少飛)는 톈진(天津)으로 와서 저위푸(褚玉璞) 휘하의 무술 교관으로 재직했다. 업무가 너무 많아지자, 왕(王)은 친구이자 칠성당랑권(七星螳螂拳) 대가 림경산(林景山)을 톈진(津)으로 소개했다. 톈진(天津)에 있는 동안, 그는 림경산(林景山)과 권술을 교환하며 칠성당랑권(七星螳螂拳)을 배웠다. 전설에 따르면 민국(民國) 초년에 저위푸(褚玉璞)가 왕사비(王少飛)에게 내몽고(內蒙)로 가서 군마(軍馬)를 사 오라고 명령했지만, 왕사비(王少飛)는 내몽고(內蒙)로 가지 않고, 돈을 가지고 당시 일본 식민 통치하의 다롄(大連)으로 와서 중산구(中山區) 쿤밍지에(昆明街) 일대에 일본식 작은 건물을 샀다. 20세기 중반, 왕사비(王少飛)는 다롄(大連)에서 무관(武館)을 열고 제자를 가르치기 시작했으며, 주로 중국 노동자들이 모여 살던 쓰얼거우(寺兒溝)에서 칠성당랑권(七星螳螂拳)을 가르쳤다.
왕사비(王少飛)의 칠성당랑권(七星螳螂拳) 학습 상황에 대해서는 현재 두 가지 다른 설이 있다. 한 가지 설은 1909년 왕사비(王少飛)가 옌타이(煙台)에 있을 때, 칠성당랑권(七星螳螂拳) 종사 왕운생(王雲生)에게 사사하여 칠성당랑권(七星螳螂拳)을 배우고 싶었으나, 왕(王) 공(公)은 이미 제자를 받지 않았고, 왕(王) 공(公)의 제자 범욱동(範旭東)에게 사사하고 싶었으나 범(範) 공(公) 또한 문을 닫고 제자를 받지 않았다고 한다. 따라서 왕사비(王少飛)의 칠성당랑권(七星螳螂拳)은 림경산(林景山), 왕전의(王傳義)로부터 전수받았다는 것이다. 다른 한 가지 설은 왕사비(王少飛)의 칠성당랑권(七星螳螂拳)이 “쾌수 이(快手李)” 이지전(李之剪)으로부터 전수받았다고 본다. 이 주장은 주로 톈위시(田雨時) 선생을 대표로 하며, 그가 2011년 제1기에 발표한 《칠성당랑권 간략 소개(七星螳螂拳簡介)》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왕랑(王郎) 조사(祖師)가 당랑권(螳螂拳)을 창시한 이후, 복거(福居), 승소도인(升霄道人) 등을 거쳐 저명한 당랑권(螳螂拳) 대사 쾌수 이지전(李之剪)에게 전해졌고, 이지전(李之剪)에게는 후계자가 없어 계승자를 찾았다. 고찰을 거쳐 최초로 산둥 푸산(福山) 사람 왕영춘(王永春)(자 운생(雲生))에게 전수했고, 이어서 산둥 안추(安丘) 사람 왕사비(王少飛)(자 운펑(雲鵬))에게 전수했다. 왕운생(王雲生), 왕운펑(王雲鵬)은 각자에게 전수된 바가 달랐다고 본다. 그는 왕운펑(王雲鵬) 계열은 투로(套路)가 풍부하지만, 외부에 전수된 것은 많지 않고, 중요한 제자가 아니면 흔히 볼 수 있는 투로만 가르쳤으며, 오랫동안 그를 따른 입실 제자만이 그 전체 모습을 엿볼 수 있었고, 목숨을 보존하는 용도로 남겨두라고 당부하며, 쉽게 다른 사람에게 전수해서는 안 된다고 명령했다고 보았다. 이는 주로 송리산(宋立山) 선생이 왕운펑(王雲鵬)에게 9년간 칠성당랑권(七星螳螂拳)을 배웠고, 진전(真傳)을 모두 얻었으며, 왕운펑(王雲鵬)이 그에게 준 권보(拳譜)의 명칭이 바로 “칠성당랑권(七星螳螂拳)”이었고, 그 내용이 풍부하고 투로(套路) 명칭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음을 가리킨다. 우리 시(市) 왕운펑(王雲鵬) 계열 전인(傳人)의 참고를 위해, 현재 그 일부를 다음과 같이 발췌 인용한다. “붕보(崩步), 박선(撲蟬), 칠성당랑(七星螳螂), 와수(蝸手), 활기(滑機), 첨파장(添巴掌), 낙엽권(落葉卷), 건곤(乾坤), 곤룡주(滾龍肘), 연전주(輾轉肘), 탁주(托肘), 흔주(掀肘), 방주(膀肘)(상하), 괴주(拐肘), 팔주(八肘)(두 단), 분신팔단십이주(分身八短十二肘), 투도(偷桃)(두 덩이), 선인적도(仙人摘桃), 번거록고(翻車轆軲), 록고번거(轆軲翻車), 대번거(大翻車), 당랑입문(螳螂入門)(일명 보보금(步步錦)), 당랑수(螳螂手), 당랑영(螳螂影), 당랑지(螳螂之), 당랑폐(螳螂閉), 당랑전(螳螂栓), 당랑점(螳螂沾), 당랑조(螳螂爪), 당랑관(螳螂關), 당랑월량(螳螂月亮), 당랑붕(螳螂崩), 난제(攔截), 요체(摘要)(1단부터 4단), 당랑대수(螳螂對手)”. 기계(器械)로는 곤기(棍技), 유룡검(遊龍劍)이 있고, 내공(內功)으로는 “숙신(宿晨)” 등이 있다. 톈(田) 선생은 “위의 투로(套路)는 칭다오(青島) 왕운펑(王雲鵬) 계열의 전승 투로일 뿐이며, 다롄(大連) 지류는 아직 수록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어느 설이 더 정확한지는 추가적인 고증이 필요하다.
1928년경, 왕사비(王少飛)는 산둥(山東)으로 돌아가 칭다오(青島)에서 칠성당랑권(七星螳螂拳)을 전수하는 일을 생업으로 삼았다. 그는 칠성당랑권(七星螳螂拳)의 다롄(大連) 전파에 기여했다. 그의 다롄(大連) 주요 제자로는 왕칭자이(王慶齋), 왕슈화(王秀華), 류위팡(劉玉芳), 톈빙장(田秉章) 등이 있다.
양유신(楊維新)(1880—1966)은 산둥 덩저우(登州) 펑라이(蓬萊) 사람으로, 어릴 때부터 범욱동(範旭東)을 따라 칠성당랑권(七星螳螂拳)을 배웠고, 범(範) 사부의 진전(真傳)을 얻었으며, 당랑권(螳螂拳) 산수(散手)에 정통했다. 1919년 스승을 따라 러시아(俄國)로 가서 비무대회(擂台)에 참가하여 금방패를 획득했다. 1922년 상하이(上海) 정무회(精武會)에서 교사로 재직했으며, 상하이(上海) 산둥(山東) 회관이 건립된 후 정무 분회 산둥(山東) 회관에서 교사로 재직했다. 1928년 상하이(上海)에 당랑권(螳螂拳) 연구사를 창립하고 회장을 역임했다. 이후 우한(武漢), 다롄(大連) 등지에서 도장(道場)을 열고 제자를 가르쳤다. 나중에 고향으로 돌아가 칭다오(青島) 등지에서 가르쳤다. 칠성당랑권(七星螳螂拳)의 전파와 발전에 중요한 공헌을 했다. 주요 제자로는 장자양(張子楊), 소수빈(肖樹斌)(스승이면서 친구이기도 함) 등이 있다.
왕전의(王傳義)(1900—1973)는 산둥 푸산(福山) 사람으로, 그의 조부는 청(清) 말기 무거(武舉) 출신이자 칠성당랑권(七星螳螂拳)의 창시자 왕운생(王雲生)이었고, 그의 부친은 청(清)나라 마지막 과거의 무수재(武秀才)였으나 36세에 일찍 세상을 떠났다. 왕전의(王傳義)는 6세부터 무술을 익혔고, 8세 때 조부가 그를 옌타이(煙台) 무술 대사 이영덕(李榮德)의 무관(武館)으로 보내 탄퇴(彈腿), 사로분타(四路奔打), 태조권(太祖拳) 등 장권(長拳)을 배우게 했으며, 이는 그가 훗날 무술을 발전시키는 데 견고한 기초를 다졌다. 리(李) 사부(師傅)에게 3년간 배운 후, 조부가 그를 집으로 데려와 자신의 칠성당랑권(七星螳螂拳)을 가르쳤다. 왕전의(王傳義)는 부지런히 배우고 열심히 수련했으며, 깨달음이 매우 높아 조부의 진전(真傳)을 깊이 얻었다. 19세에 이미 조부를 대신하여 무술을 가르칠 수 있었다. 1923년 조부를 대신하여 상하이(上海) 정무회(精武會)의 초청을 받아 8년간 무술 코치로 재직했다. 1932년 상하이 쑹후(淞滬) 전쟁 이후, 라오광위(羅光玉), 왕전의(王傳義) 등은 남쪽으로 이동하면서, 길을 따라 당랑권(螳螂拳)을 전수했다. 나중에 왕전의(王傳義)는 싱가포르(新加坡) 기후에 익숙하지 않아 고향으로 돌아와 계속 무술을 가르쳤다. 1952년, 왕전의(王傳義)는 산둥(山東)에서 다롄(大連)으로 와서, 시강구(西崗區) 허핑(和平) 영화원(原稱世界館) 근처 영빈무관(英斌武館)에서 가르치고 있던 호영복(胡永福)(림경산(林景山)의 제자)을 찾아, 영빈무관(英斌武館)에서 가르쳤다. 이때 호영복(胡永福)은 이미 63세로 나이가 많았기 때문에, 무관(武館)을 왕전의(王傳義)에게 맡기고 자신은 산둥(山東) 노가로 돌아가 평안한 노년을 보냈다. 왕전의(王傳義)는 무관(武館)을 인수한 후, 관(館)의 주소가 몇 차례 바뀌었고, 나중에 라오둥궁위안(勞動公園) 근처로 이전했다.
왕전의(王傳義)는 다롄(大連)에서 20년 가까이 무술을 가르치면서, 많은 권술 투로(套路)를 전수했다. 그의 적전 제자 지쉐위안(遲學元) 선생님의 소개에 따르면, 주로 소번거(小翻車), 대번거(大翻車), 붕포(崩捕), 난접(亂接), 팔주(八肘), 졸강(拙剛), 유령(柔靈), 십팔수(十八搜), 단삽화(單插花), 쌍삽화(雙插花), 철추(拆錘), 절권(截拳), 록로(轆轤), 투도(偷桃), 출동(出洞), 헌서(獻書), 입동(入洞), 헌도(獻桃) 등 백원(白猿) 계열 권법이 있으며, 또한 육로요체(六路摘要), 양로총비(兩路總批), 칠부당랑수(七部螳螂手), 사로분타(四路奔打), 태조장권(太祖長拳), 흑호권(黑虎拳), 육각세(六角勢), 취팔선(醉八仙), 무송탈고(武松脫銬) 등 40여 개의 권법 투로(套路)가 있다. 기계(器械)로는 육합곤(六合棍), 육합창(六合槍), 자룡추(子龍錐), 장비모(張飛茅), 아미산(峨眉鏟), 진경간(秦瓊鐧), 방편산(方便鏟), 수초자(手梢子), 대초자(大梢子), 자룡추(子龍錐), 원앙당(鴛鴦鏜), 아미겸(娥眉鐮), 태극도(太極刀), 천강도(天罡刀), 쌍파백원투도도(雙把白猿偷桃刀), 쌍수백운추풍검(雙手白雲追風劍) 등 희귀한 병기들이 있다. 본문 칠성당랑권(七星螳螂拳) 권술 및 기계 외에도, 그가當年 이영덕(李榮德) 선생에게 배운 태조(太祖), 비종(秘宗) 등 권술 및 기계 투로(套路)도 가르쳤다. 다롄(大連) 무술의 번영과 발전에 중요한 공헌을 했다. 1960년대, 왕전의(王傳義)는 가장 아끼는 제자 지쉐위안(遲學元)을 정식 제자(頂門徒弟)로 세우고, 30여 권의 권보(拳譜)를 그에게 증정했으며, 긴 장대(大杆子), 불진(拂塵) 등 장문(掌門) 신물(信物)을 함께 지쉐위안(遲學元)에게 전수했다. 왕전의(王傳義)의 다롄(大連) 제자는 많았는데, 주요 제자로는 겅원친(耿文勤), 자오롄쥐(趙連舉), 두싱(杜興), 리롄팡(李連方), 유중량(由忠良), 자오훙런(趙洪仁), 왕옌칭(王顏慶), 마광요우(馬廣友), 류수산(劉樹山), 쑨서우산(孫壽山), 먀오옌팅(苗延亭), 왕창롄(王昌連), 싱자오셩(邢兆生), 딩징스(丁京仕), 왕창옌(王昌岩), 왕전신(王振昕), 리완즈(李萬枝), 쟈페이쥔(賈培君), 류다창(劉大強), 류다웨이(劉大衛), 인펑산(殷風山), 샤오리빈(邵立斌), 왕지번(王基本), 가오옌칭(高燕青), 쑨바오쭌(孫寶尊), 유커퉁(由可通), 롼진싱(欒金星), 류칭좡(劉慶莊), 쑨런산(孫仁善), 렁촨저우(冷傳周), 장완순(張萬順), 왕마오셩(王茂生), 주롄시(朱連璽) 등이 있다.
호영복(胡永福)(1889—?)은 산둥 라이양(萊陽) 사람이다. 24세에 칠성당랑권(七星螳螂拳) 대사 림경산(林景山)의 문하에 들어갔는데, 호영복(胡永福)은 스승보다 4살밖에 어리지 않았고, 매우 성실하고 각고의 노력으로 배웠으며, 스승의 진전(真傳)을 얻었다. 림둥주(林棟柱) 선생이 《중화 무술(中華武術)》 잡지에 발표한 《칠성당랑권 소사(七星螳螂拳小史)》라는 글에 따르면, 호영복(胡永福)은 무예를 이룬 후 다롄(大連)에 와서, 그보다 먼저 다롄(大連)에 와 있던 사형(師兄) 소수빈(肖樹斌)의 “사걸무관(四傑武館)”에 초빙되어 교사로 재직했는데, 시기는 1920년 이후경이었다. 호영복(胡永福) 선생의 제자 왕청강(王清綱)의 회고록에 따르면, 민국(民國) 19년(1920년경)에 다롄(大連)으로 이사하여, 류샤오(劉小) 근처의 사걸 무술관에서 칠성당랑권(七星螳螂拳) 명가 호영복(胡永福) 선생을 스승으로 모셨다. 당시 그와 함께 사걸관(四傑館)에서 무술을 수련하던 사형제로는 장의선(張義先)(대사형), 이회당(李會堂)(이점원(李占元)), 매옥선(梅玉善), 이세복(李世福), 서홍훈(徐洪勳) 등이 있었다. 1946년, 소수빈(肖樹斌)은 무관(武館)을 호영복(胡永福) 선생에게 맡겼다. 1952년, 호영복(胡永福)의 사숙(師叔) 왕전의(王傳義)가 다롄(大連)에 오자, 그는 무관(武館)을 왕전의(王傳義)에게 넘기고 자신은 산둥(山東) 고향으로 돌아갔다. 1920년부터 1952년까지, 호영복(胡永福) 선생은 다롄(大連)에서 칠성당랑권(七星螳螂拳)을 30여 년간 가르쳤으며, 제자가 많았고, 칠성당랑권(七星螳螂拳)의 다롄(大連) 전파와 발전에 중요한 공헌을 했다. 주요 제자로는 왕청강(王清綱), 이점원(李占元)(산둥에서 다롄(大連)으로 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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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화당랑권(梅花螳螂拳)의 다롄(大連) 전파와 발전
매화당랑권(梅花螳螂拳)은 태극매화당랑권(太極梅花螳螂拳)이라고도 불리며, 청(清) 건륭(乾隆) 연간 이병소(李秉霄)로부터 시작되었다. 이병소(李秉霄)는 청(清) 가경(嘉慶) 연간 라이양(萊陽) 츠산춘(赤山村) 사람 자오주(趙珠)에게 전수했고, 자오주(趙珠)는 량쉐샹(梁學香)에게 전수했다. 량쉐샹(梁學香)은 두 갈래로 전수했는데, 한 갈래는 학굉(郝宏)이고, 다른 한 갈래는 산둥 라이양(萊陽) 황진거우(黃金溝) 사람 강화룡(薑化龍)이다. 또한, 매화당랑권(梅花螳螂拳)이 자오주(趙珠)로부터 시작되어 이병소(李秉霄)에게 전수되었다는 의견도 있다. 일부 무술 사학자들은 《라이양현지(萊陽縣志)》의 기록에 오류가 있으며, 이러한 오류는 1933년 라이양현지(萊陽縣志) 편집자들이 이곤산(李坤山)에게 당랑권(螳螂拳) 전승 문제에 대해 문의했을 때, 이곤산(李坤山)이 외출 중이어서 그의 제자가 잘못 말해주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본 글은 이병소(李秉霄)가 자오주(趙珠)에게 전수했다는 기록이 잘못되지 않았다고 보는데, 그 방증은 이(李) 가문의 족보이다. 역사를 편찬하고 지리지(志)를 수정하는 사람들이 어찌 한 사람의 말만 듣고 역사 및 문헌 자료를 참조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매화당랑권(梅花螳螂拳)은 20세기경 다롄(大連)에 전파되었고, 다롄(大連) 무술의 중요한 권종(拳種)이 되었으며, 다롄(大連) 무술의 발전에 중요한 공헌을 했다.
최수산(崔壽山)
최수산(崔壽山)(1890—1969)은 호(號)가 펑녠(彭年)이며, 옌타이시(煙台市) 라이양(萊陽) 둥주루춘(東諸麓村) 사람이다. 매화당랑권(梅花螳螂拳) 대사 쑹즈더(宋子德)의 외조카이며, 1905년부터 쑹즈더(宋子德)를 따라 매화당랑권(梅花螳螂拳)을 배웠고, 쑹즈더(宋子德)의 진전(真傳)을 얻었으며, 쑹즈더(宋子德)의 팔대 제자 중 으뜸이자 저명한 “라이양 삼산(萊陽三山)” 중 한 명이다. 견문을 넓히고 여러 장점을 취하기 위해, 쑹즈더(宋子德)의 지원 아래 밖으로 나가 스승을 찾고 친구를 방문하여 자신의 기술을 향상시켰다. 1912년부터 그는 라이양(萊陽), 하이양(海陽), 푸산(福山), 옌타이(煙台), 다롄(大連) 등지에서 무관(武館)을 열고 제자를 가르쳤다. 20세기 30년대, 최수산(崔壽山)은 다롄(大連) 무술계의 초청을 받아, 장남 최홍조(崔洪照)와 기춘정(紀春亭)을 데리고 다롄(大連)에 왔다. 기춘정(紀春亭)이 다롄(大連)에 무관(武館)을 설립하는 것을 도왔고, 자신은 두 지역을 자주 왕래하며 다롄(大連) 지역 무술 발전에 중요한 공헌을 했다. 최수산(崔壽山) 선생은 평생 무술을 연구했으며, 저서 《당랑권보(螳螂拳譜)》에서 자신의 수련 경험을 결합하여, 매화당랑권(梅花螳螂拳) 권술 및 기계에 대해 이론과 실천적인 측면에서 정밀하게 요약하고 논술하여 매화당랑권(梅花螳螂拳) 이론을 풍부하게 했다. 최(崔) 선생은 다롄(大連) 무술의 발전에 깊은 관심을 가졌으며, 그의 제자들의 회고에 따르면, 그가 90세일 때도 다롄(大連)에 와서 제자들의 손자들에게 무술을 지도했다고 한다. 그는 평생 많은 제자를 가르쳤으며, 다롄(大連)의 주요 제자로는 총슈펑(叢秀峰), 취선(曲伸), 중융성(鍾永勝) 등이 있다.
기춘정(紀春亭)(1885—?)은 산둥 옌타이(煙台) 사람으로, 그의 아버지는 옌타이(煙台)의 부유한 상인이었으며, 어릴 때부터 매화당랑권(梅花螳螂拳) 종사 강화룡(薑化龍)을 따라 매화당랑권(梅花螳螂拳)을 배웠고, 스승의 진전(真傳)을 모두 얻었다. 일찍이 다롄시(大連市) 초대 부시장을 역임한 저명한 육합당랑권(六合螳螂拳) 대사 진운도(陳雲濤)는 《당랑권 약론(螳螂拳略論)》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강(薑) 사부(化龍)의 전인(傳人) 중에서 그 기예를 계승할 수 있는 사람으로는, 대혁명(大革命) 시기에 다롄(大連)에 류둬산(劉多山), 기춘정(紀春亭) 두 사람이 도장(道場)을 열고 제자를 가르쳤다”. 어떤 논저에서는 그를 쑹즈더(宋子德)의 학생으로 기록하기도 하는데, 이것도 근거가 있다. 왜냐하면 당시 강화룡(薑化龍)과 쑹즈더(宋子德)는 의형제였으며, 쑹(宋)이 라이양(萊陽)의 최대 부자였기 때문에 신분상의 문제로 인해, 그가 자금을 대어 량쉐샹(梁學香)에게 매화당랑권(梅花螳螂拳)을 배우게 한 다음, 다시 그에게 가르치게 했기 때문이다. 이후 두 사람은 함께 무관(武館)을 열었고, 많은 제자들이 그들 두 사람에게 공동으로 가르침을 받았다. 진운도(陳雲濤) 선생이 류둬산(劉多山), 기춘정(紀春亭) 사형제가 다롄(大連)에서 도장(道場)을 열고 제자를 가르쳤다고 기록한 것은 사실이다. 왜냐하면 류(劉)와 기(紀)가 다롄(大連)에서 제자를 가르치던 기간에, 마침 진(陳) 선생도 다롄(大連)에 있었으며, 다롄(大連) 중화 청년회(中華青年會)의 체육 교사였고, 류둬산(劉多山)은 청년회 무술반의 교사였다. 기춘정(紀春亭)은 다롄(大連)에서 무관(武館)을 열고 제자를 가르쳤는데, 제자들이 동북(東三省) 전역에 퍼져 있었다. 그의 무공은 정교하여, 무술 동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는데, 특히 산둥(山東)의 저명한 태극매화당랑권(太極梅花螳螂拳) 대사 학항록(郝恒祿)은 아들 학빈(郝斌)을 다롄(大連) 기춘정(紀春亭)에게 보내 수년간 배우게 했다는 점은 언급할 가치가 있다. 이후 산둥 황셴(黃縣) 국술관 관장이자 육합당랑권(六合螳螂拳) 대사 정자성(丁子成)의 초청을 받아 황셴(黃縣) 국술관의 코치로 재직했다. 당시 이 관(館)에서 가르치던 사람들은 국내 무술계의 일시적인 명사들로, 팔괘장(八卦掌) 대사 궁바오톈(宮保田), 팔극권(八極拳) 대사 이서문(李書文) 등이 있었다.
기춘정(紀春亭) 선생은 매화당랑권(梅花螳螂拳)의 다롄(大連) 전파에 중요한 공헌을 했으며, 그의 제자가 많았는데, 유명한 제자로는 총슈펑(叢秀峰), 자오방샹(趙幫祥) 등이 있다.
이곤산(李崑山)(1890—1982)은 자(字)가 진위(進玉)이며, 산둥 라이양(萊陽) 사람이다. 어릴 때부터 백부(伯父)이자 저명한 나한지공권(羅漢地功拳) 대사 이중선(李仲先)(자 단백(丹伯))을 따라 나한지공권(羅漢地功拳)을 배웠다. 그의 공력(功力)을 증진시키기 위해, 백부가 그를 매화당랑권(梅花螳螂拳) 대사 강화룡(薑化龍)의 무관(武館)으로 보내 매화당랑권(梅花螳螂拳)을 배우게 했으며, 그 정수(精要)를 깊이 얻었다. 무예를 이룬 후, 이곤산(李崑山)은 먼저 산둥 주청셴(諸城縣) 현장(縣長) 이옥초(李玉招)의 경호원으로 초빙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친구의 초청을 받아 다롄(大連)에 와서 무관(武館)을 열고 제자를 가르쳤다. 그의 제자 회고록에 따르면, 당시 그가 무관(武館)을 열었을 때 배우러 오는 사람이 많지 않았는데, 마침 한 무술 사범이 찾아와 비무(比武)를 청했고, 이곤산(李崑山)은 매우 쉽게 도전자에게 승리했으며, 이는 마치 광고처럼 작용하여 일주일 만에 등록하는 학생이 100여 명에 달했고, 무관(武館)이 매우 번창했다. 나중에 백부 이중선(李仲先)의 아들이 불행하게 세상을 떠나자, 이곤산(李崑山)이 처리하러 갔다가 다시는 다롄(大連)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1931년, 이곤산(李崑山)은 이징린(李景林)이 창립한 산둥 국술관에서 교사로 재직했고, 1932년 친구들과 라이양(萊陽)에 라이양 국술관을 조직했다. 1933년 봄, 지난(濟南)에서 열린 산둥성(山東省) 국술 시험에 참가했고, 이곤산(李崑山)은 장병기(長兵器) 조에서 대창(大槍) 우등상을 수상했다. 같은 해 가을 난징(南京) 중앙 국술관에서 개최된 전국 국술 대회에 참가했고, 이곤산(李崑山)은 각 방면의 고수들을 물리치고 대창(大槍) 우승을 차지했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이곤산(李崑山)의 대창(大槍)은 극도로 숙련된 경지에 이르러, 다른 사람과 겨룰 때 순식간에 상대방 옷의 단추를 모두 따냈는데, 상대방은 전혀 알지 못했다고 한다. 일찍이 서북군(西北軍)에서 교관으로 재직하며 병사들에게 “사식도(四式刀)”와 “사식창(四式槍)”을 가르쳤고, 항일 전쟁 중에는 대도대(大刀隊)를 이끌고 용감하게 싸웠으며, 1948년 이후 대만(台灣)으로 갔다.
이곤산(李崑山) 선생은 세계적으로 명성이 높은 무술 대가로, 다롄(大連)에서 무관(武館)을 열고 많은 학생을 가르쳤다.
학항록(郝恒坡)(1904-1960)은 산둥 옌타이(煙台) 머우핑(牟平) 라이산취(萊山區) 추자먀오(初家廟) 사람으로, 산둥(山東)의 저명한 태극매화당랑권(太極梅花螳螂拳) 종사 학굉(郝宏) 선생의 다섯째 아들이며, 별명은 “오원자(五猴子)”이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를 따라 무술을 익혔고, 기본기가 탄탄하고 몸놀림이 민첩하여 이런 별명을 얻었다. 일찍이 다롄(大連)에서 무관(武館)을 열고 무예를 전수하며 태극매화당랑권(太極梅花螳螂拳)을 가르쳤다. 이후 칭다오시(青島市) 국술 강습소의 소장을 역임했다. 당시 다롄(大連)에서 그에게 전수받은 제자가 많았다.
손충민(孫忠民)(1904—?)은 산둥 치샤(棲霞) 사람으로, 무술 세가(武術世家) 출신이며, 어릴 때부터 가전(家傳) 백원통배권(白猿通背拳)과 비종권(秘宗拳)을 수련했고, 18세에 무예를 지닌 채 스승에게 나아가 매화당랑권(梅花螳螂拳) 권술 및 기계를 배웠다. 손충민(孫忠民) 선생은 공력(功力)이 깊고, “야산 창잉(牙山蒼鷹)”이라는 명성을 얻었다. 1935년부터 1946년까지 다롄(大連)에서 무술관을 개설하고 매화당랑권(梅花螳螂拳) 및 비종권(秘宗拳)을 가르쳤다. 다롄(大連)에서 10여 년간 지내는 동안 제자가 많았으며, 다롄(大連) 지역 무술 발전에 공헌했다.
학빈(郝斌)(1906—1984)은 일명 학선경(郝善卿)이며, 산둥 머우핑(牟平) 사람이다. 산둥(山東) 태극매화당랑권(太極梅花螳螂拳) 대사 학항록(郝恒祿)의 아들이다. 어릴 때부터 조부 학굉(郝宏)과 아버지 학항록(郝恒祿)을 따라 무술을 익혔고, 태극매화당랑권(太極梅花螳螂拳)의 진전(真傳)을 얻었으며, 특히 당랑권(螳螂拳) 달마검(達摩劍) 기법에 정통했다. 18세 때 산둥성(山東省) 국술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고, 평생 무술 연구와 제자 양성을 생업으로 삼았다. 학빈(郝斌) 선생이 젊었을 때, 그의 아버지는 그의 기예를 향상시키고 여러 문파의 정수를 흡수하도록 하기 위해, 특별히 그를 다롄(大連)으로 파견하여 저명한 매화당랑권(梅花螳螂拳) 대사 기춘정(紀春亭)에게 7년간 배우게 했다. 기춘정(紀春亭)은 강화룡(薑化龍)과 쑹즈더(宋子德)의 제자로, 기술적인 면에 정통했으며, 학빈(郝斌)은 기(紀) 선생의 영향을 크게 받아 실전(實戰)에 강한 기초를 다졌다. 기록에 따르면 학빈(郝斌) 선생은 공력(功力)이 깊고, 수많은 사람들과 겨루었으나 패배한 적이 없었다. 일찍이 다롄(大連)에서 무관(武館)을 열고 제자를 가르쳤으며, 제자가 많았다. 학빈(郝斌)의 제자 가오파더(高發德) 선생의 소개에 따르면, 1970년대에 학(郝) 선생이 다롄(大連)에 와서 제자들에게 달마검법(達摩劍法)을 지도했으며, 태극매화당랑권(太極梅花螳螂拳)의 다롄(大連) 전파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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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오매화당랑권(子午梅花螳螂拳)의 다롄(大連) 전파
스루이녠(石瑞年)(1896—1988)은 자(字)가 펑포(鳳坡)이며, 본적은 산둥성(山東省) 옌타이시(煙台市)로, 자(字)로 활동했다. 다롄(大連) 근대 무술사에서 저명한 무술가이자 자오매화당랑권(子午梅花螳螂拳)의 창파 종사(創派宗師)이다.
석봉파(石鳳坡)는 어려서 병이 많았는데, 부모가 그의 몸을 건강하게 만들기 위해 산시(陝西)에서 온 세입자를 초빙하여 그에게 무술을 가르치게 했으며, 9세부터 10년간 그에게 배웠다. 이때 스승이 산시 우타이산(五台山) 철림사(鐵林寺) 속가 제자이자 자오매화문(子午梅花門) 제13대 전인인 이충헌(李忠獻)임을 알게 되었다. 이(李) 가문이 현지 호문(豪門)에게 경작지를 강탈당하고 그의 아버지가 부상을 입자, 분노한 이충헌(李忠獻)이 호문(豪門)을 죽인 후 산둥 옌타이(煙台)로 도망왔다. 석봉파(石鳳坡)가 무예를 이룰 무렵, 마침 청(清)나라가 무너지고 민국(民國)이 수립되어 천하에 대사면령이 내려졌고, 이충헌(李忠獻)은 산시(陝西) 노가에 돌아가 보고 싶어 했다. 석봉파(石鳳坡) 가족의 거듭된 만류로, 이충헌(李忠獻)은 석봉파(石鳳坡)에게 “오호첩배도(五護疊背刀)”, “오호단문창(五護斷門槍)”, “자오매화도(子午梅花刀)”, “매화단문창(梅花斷門槍)”, “자오구(子午鉤)”, “자오검(子午劍)” 및 “야전팔방도(夜戰八方刀)” 등 10여 가지 병기를 전수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자오매화권(子午梅花拳)은 불문(佛門)에서 전해지는 권법으로, 소림사(少林寺)에서 유래했다. 그 공법(功法)은 무당(武當) 내가공(內家功)을 채택하여, 내외합일(內外合一)의 권술이다. 스승은 떠나기 전 석봉파(石鳳坡)에게 사문(師門)의 비밀을 외부에 누설하지 말 것을 당부했다. 스승이 떠날 때, 석봉파(石鳳坡)는 겨우 18세였는데, 견문을 넓히고 무술 기예를 더욱 향상시키기 위해, 석봉파(石鳳坡)는 다시 옌타이(煙台) 매화당랑권(梅花螳螂拳) 권사에게 6년간 매화당랑권(梅花螳螂拳)을 배웠다. 이후 다시 칠성당랑권(七星螳螂拳) 대사 림경산(林景山)을 객사(客師)로 모시고 2년간 칠성당랑권(七星螳螂拳)을 배웠다. 1925년, 산둥(山東) 독군(督軍) 마량(馬良)과 후임 선홍렬(沈洪烈)은 “중화 신무술(中華新武術)”의 적극적인 창도자였으며, 칭다오(青島)에서 비무대회(擂台賽)를 개최했다. 참가 신청자가 800여 명에 달했고, 석봉파(石鳳坡)는 분투 끝에 15강에 진입하여 7위를 차지하고, 은메달과 상으로 도(刀), 검(劍) 각 한 자루를 받았다. 이때 저명한 무술가 왕자평(王子平)이 마량(馬良) 군대에서 무술 교관으로 재직하고 있었는데, 석봉파(石鳳坡)의 무예를 매우 높이 평가했다. 마침 이때 일본 스모(相撲) 선수가 비무대회(擂台賽) 15명 우승자에게 도전하러 왔고, 석봉파(石鳳坡)는 왕자평(王子平)에게 교술(跤術)을 청하여 왕(王) 선생의 진전(真傳)을 얻었다. 1933년 10월, 석봉파(石鳳坡)는 산둥 국술관을 대표하여 난징(南京) 중앙 국술관에서 개최된 전국 국술 시험에 참가했다. 시험은 마지막에 비무대회(擂台賽) 방식으로 진행되었고, 최종 15명 우승자는 추첨으로 순위를 정했으며, 석봉파(石鳳坡)는 4위를 차지했다. 중앙 국술관 관장 장즈장(張之江)은 석봉파(石鳳坡)를 만류하며 국술관에 남아 교사로 재직하기를 권했지만, 석봉파(石鳳坡)는 자신이 글자를 한 자도 모른다고 여겨 교관에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결국 자신의 권술 자료를 남겨두고 떠났다.
이후, 석봉파(石鳳坡)는 문을 닫고 스스로 수련하며, 자신이 배웠던 자오매화권(子午梅花拳), 매화당랑권(梅花螳螂拳), 칠성당랑권(七星螳螂拳)과 왕자평(王子平)이 전수한 중국식 교법(跤法)을 정리했다. 당랑권(螳螂拳)을 기초로 자오매화권(子午梅花拳)과 중국 교법(跤法)의 기법을 융합하여, 완전히 새로운 당랑권(螳螂拳) 유파인 자오매화당랑권(子午梅花螳螂拳)을 창조했다. 그는 자오매화장(子午梅花掌)을 투로(套路)에 넣어, 자오매화로(子午梅花路), 자오출동로(子午出洞路), 천지로(穿枝路), 포선로(捕蟬路), 투사로(鬥蛇路) 등 일련의 수기(手技), 던지기 기술(摔技), 금나(擒拿) 기술을 창안했는데, 이는 완전하고 체계적이며, 독자적인 체계를 형성했다. 이는 당랑권(螳螂拳)의 내용을 풍부하게 했고, 자오매화당랑권(子午梅花螳螂拳)이 뼈를 부수고, 혈을 찍고, 금나하고, 던지고 치는 것을 기법의 선명한 특징으로 보여주었다.
석봉파(石鳳坡) 선생은 자오매화당랑권(子午梅花螳螂拳)을 창시한 후, 먼저 산둥 라이양셴(萊陽縣), 옌타이(煙台), 르자오(日照)에서 제자를 가르쳤다. 1937년 다롄(大連)에 와서 쓰얼거우(寺兒溝)에서 도장(道場)을 열고 제자를 가르쳤는데, 1년 후 집안일로 산둥(山東)으로 돌아갔다. 해방 후, 1950년대에 다시 다롄(大連)으로 돌아와 이얼지우지에(一二九街)와 롄쑤오지에(連鎖街)에서 무관(武館)을 열고 계속 자오매화당랑권(子午梅花螳螂拳)을 가르쳤다. 다롄(大連)의 저명한 연청권(燕青拳) 대사 덩건리(鄧根立) 등 노권사(老拳師)들과 함께 노동공원(勞動公園) 등에서 오일절(五一節), 국경절(國慶節)에 다롄(大連) 시민들을 위해 무술을 시연했으며, 그의 정교한 창법과 독특한 도법은 다롄(大連) 무술계의 일치된 호평을 받았다. “화도 석봉파(花刀石鳳坡)”와 “화창 석봉파(花槍石鳳坡)”라는 명성을 얻었다. 석(石) 선생은 산수(散手) 실전(實戰)에 정통했으며, 1984년 다롄 북방 무도관(北方武道館)의 무술 산타(散打) 고문으로 초빙되어 다롄(大連) 무술 사업의 발전과 산타(散打) 수준 향상에 중요한 공헌을 했다. 그가 다롄(大連)에서 가르친 제자가 많았는데, 주요 제자로는 가오다젠(高大儉), 가오윈선(高雲深), 가오윈치(高雲起), 왕즈중(王志忠), 한윈펑(韓雲鵬), 한윈룽(韓雲龍), 류더리(劉德利), 류치린(劉其林), 량리쥔(梁立君), 취융쥔(曲永俊), 쑤바오쿠이(蘇寶奎), 왕이민(王義民), 관빙촨(管秉川), 장다(張達), 리신민(李新民), 톈린르(田林日), 쟈젠민(賈健民) 등이 있다. 석(石) 선생이 직접 지도한 제자로는 우창(吳強), 추보(邱波), 리화궈(李華國) 등이 있는데, 이들은 모두 이얼지우지에(一二九街) 권방(拳坊)에서 왕즈중(王志忠) 선생의 인도로 입문한 후 석(石) 선생의 만년에 직접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이다.
석봉파(石鳳坡)는 이후 문을 닫고 스스로 수련하며, 자신이 배웠던 자오매화권(子午梅花拳), 매화당랑권(梅花螳螂拳), 칠성당랑권(七星螳螂拳)과 왕자평(王子平)이 전수한 중국식 교법(跤法)을 정리했다. 당랑권(螳螂拳)을 기초로 자오매화권(子午梅花拳)과 중국 교법(跤法)의 기법을 융합하여, 완전히 새로운 당랑권(螳螂拳) 유파인 자오매화당랑권(子午梅花螳螂拳)을 창조했다. 그는 자오매화장(子午梅花掌)을 투로(套路)에 넣어, 자오매화로(子午梅花路), 자오출동로(子午出洞路), 천지로(穿枝路), 포선로(捕蟬路), 투사로(鬥蛇路) 등 일련의 수기(手技), 던지기 기술(摔技), 금나(擒拿) 기술을 창안했는데, 이는 완전하고 체계적이며, 독자적인 체계를 형성했다. 이는 당랑권(螳螂拳)의 내용을 풍부하게 했고, 자오매화당랑권(子午梅花螳螂拳)이 뼈를 부수고, 혈을 찍고, 금나하고, 던지고 치는 것을 기법의 선명한 특징으로 보여주었다.
석봉파(石鳳坡) 선생은 자오매화당랑권(子午梅花螳螂拳)을 창시한 후, 먼저 산둥 라이양셴(萊陽縣), 옌타이(煙台), 르자오(日照)에서 제자를 가르쳤다. 1937년 다롄(大連)에 와서 쓰얼거우(寺兒溝)에서 도장(道場)을 열고 제자를 가르쳤는데, 1년 후 집안일로 산둥(山東)으로 돌아갔다. 해방 후, 1950년대에 다시 다롄(大連)으로 돌아와 이얼지우지에(一二九街)와 롄쑤오지에(連鎖街)에서 무관(武館)을 열고 계속 자오매화당랑권(子午梅花螳螂拳)을 가르쳤다. 다롄(大連)의 저명한 연청권(燕青拳) 대사 덩건리(鄧根立) 등 노권사(老拳師)들과 함께 노동공원(勞動公園) 등에서 오일절(五一節), 국경절(國慶節)에 다롄(大連) 시민들을 위해 무술을 시연했으며, 그의 정교한 창법과 독특한 도법은 다롄(大連) 무술계의 일치된 호평을 받았다. “화도 석봉파(花刀石鳳坡)”와 “화창 석봉파(花槍石鳳坡)”라는 명성을 얻었다. 석(石) 선생은 산수(散手) 실전(實戰)에 정통했으며, 1984년 다롄 북방 무도관(北方武道館)의 무술 산타(散打) 고문으로 초빙되어 다롄(大連) 무술 사업의 발전과 산타(散打) 수준 향상에 중요한 공헌을 했다. 그가 다롄(大連)에서 가르친 제자가 많았는데, 주요 제자로는 가오다젠(高大儉), 가오윈선(高雲深), 가오윈치(高雲起), 왕즈중(王志忠), 한윈펑(韓雲鵬), 한윈룽(韓雲龍), 류더리(劉德利), 류치린(劉其林), 량리쥔(梁立君), 취융쥔(曲永俊), 쑤바오쿠이(蘇寶奎), 왕이민(王義民), 관빙촨(管秉川), 장다(張達), 리신민(李新民), 톈린르(田林日), 쟈젠민(賈健民) 등이 있다. 석(石) 선생이 직접 지도한 제자로는 우창(吳強), 추보(邱波), 리화궈(李華國) 등이 있는데, 이들은 모두 이얼지우지에(一二九街) 권방(拳坊)에서 왕즈중(王志忠) 선생의 인도로 입문한 후 석(石) 선생의 만년에 직접 가르침을 받은 제자들이다.
제2절 당랑권(螳螂拳)의 내용과 특징
당랑권(螳螂拳)은 소림(少林)에서 유래했으며, 장기간의 역사적 발전과 진화 과정에서 내용이 풍부하고 유파가 많으며 각기 체계를 갖춘 권종(拳種)을 형성했다. 20세기 초 이래로 다롄(大連)에 전파된 당랑권(螳螂拳)은 주로 육합당랑권(六合螳螂拳), 칠성당랑권(七星螳螂拳), 매화당랑권(梅花螳螂拳), 자오매화당랑권(子午梅花螳螂拳), 소림당랑권(少林螳螂拳)이며, 내용상 칠성당랑권(七星螳螂拳), 매화당랑권(梅花螳螂拳), 소림당랑권(少林螳螂拳)은 거의 비슷하고 기술적인 특징도 대동소이하다. 육합당랑권(六合螳螂拳)과 자오매화당랑권(子午梅花螳螂拳)은 이들과 비교적 큰 차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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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합당랑권(六合螳螂拳)의 내용과 특징
육합당랑권(六合螳螂拳)은 당랑권(螳螂拳) 계통에서 진화된 한 갈래로, 처음에는 위덕림(魏德林)이 산둥 황셴(黃縣), 자오위안(招遠) 등지에 전수했고, 이후 위덕림(魏德林)이 직접 이 권법을 다롄(大連) 좡허(莊河)에 전수했으며, 한때 다롄(大連) 지역에서 유행했다.
육합당랑권(六合螳螂拳)은 “육합권(六合拳)”의 정수를 흡수하여, 권리(拳理)에서 내외삼합(內外三合)을 운동 종지(宗旨)로 삼는다. 이른바 삼합(三合)이란, 수련할 때 심(心)이 의(意)와 합하고, 의(意)가 기(氣)와 합하며, 기(氣)가 력(力)과 합하는 것을 요구하는데, 이것이 내삼합(內三合)이다. 외삼합(外三合)이란, 손(手)이 발(足)과 합하고, 팔꿈치(肘)가 무릎(膝)과 합하며, 어깨(肩)가 넓적다리(胯)와 합하는 것이다. 삼합(三合)을 기초로 내외합일(內外合一)을 달성한다. 이는 내가권(內家拳)의 권리(拳理)와 유사한 점이 있어, 육합당랑권(六合螳螂拳)은 외형상 다소 부드러워 연당랑(軟螳螂)이라고 불린다. 힘(勁力)의 측면에서 보면, 육합당랑권(六合螳螂拳)은 강(剛), 유(柔), 명(明), 암(暗), 활(滑) 다섯 가지로 나뉘며, 힘은 부드러우면서도 무르지 않고, 강유(剛柔)가 상제(相濟)하며, 안정되고 견고하며, 정교하게 합일된다.
육합당랑권(六合螳螂拳)은 궁보(弓步), 마보(馬步), 전제후타보(前提後拖步)를 기초로, 삼추(三捶) 기본공을 연마하는 것을 주된 투로(套路)로 한다.
* 주요 투로(套路): 삼추 좌우권(三捶左右圈), 접수권(接手圈), 요음장(撩陰掌), 철자(鐵刺), 삽화수(插花手), 경리장화(鏡裏藏花), 조면등(照面燈), (선)수분((仙)手奔), 쌍봉(雙封), 단추(短捶), 육합요체(六合摘要), 구십삼수(九十三手).
* 주요 기술 요령: 구(勾), 괘(掛), 거(鋸), 좌(挫), 탄(彈), 포(刨), 등(蹬), 교(蹺), 주(肘), 각(角), 정(頂), 횡(橫).
* 보법(步法): 궁보(弓步), 마보(馬步), 제전타후보(提前拖後步), 전파이보(前擺步), 후파이보(後擺步), 삼각보(三角步), 활보(滑步), 좌보(坐步), 유수보(流水步) 등.
* 수형(手型): 권(拳), 장(掌), 지(指), 구(勾), 조(爪) 다섯 가지.
* 수법(手法): 오루수(五漏手), 찬사수(纏絲手).
* 퇴법(腿法): 탄(彈), 등(蹬), 소(掃), 괘(掛), 초(抄), 차(踢), 파이(擺), 췌(踹), 반첨각(反尖腳), 부인각(斧刃腳).
* 육합당랑권(六合螳螂拳) 기계(器械): 육합대창(六合大槍)은 구(勾), 자(紮), 붕(崩), 라(拉)를 위주로 하고, 육합단도(六合單刀)는 벽(劈), 요(撩), 창(搶), 자(紮)를 위주로 하며, 육합곤(六合棍)(오호군양곤(五虎群羊棍))은 점(點), 소(掃), 벽(劈), 요(撩), 붕(崩), 대(帶)를 위주로 한다.
육합당랑권(六合螳螂拳)은 기술 내용이 당랑권(螳螂拳), 칠성당랑권(七星螳螂拳), 소림당랑권(少林螳螂拳)과 다를 뿐만 아니라, 스타일에서도 자신만의 특색이 있다. 양팔이 부드럽고 길며, 어깨를 풀고(松肩) 팔꿈치를 내밀어(探膀), 길게 뻗어 멀리 공격하고(放長擊遠), 한 초식 한 타격이며, 먼저 초식을 쓰고 나중에 공격하고(先招後打), 후발제인(後發制人)하며, 리듬이 분명하다. 손(手), 눈(眼), 몸(身), 법(法), 발(步)이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고, 시원하고 대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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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성당랑권(七星螳螂拳)의 내용과 특징
칠성당랑권(七星螳螂拳)은 당랑권(螳螂拳)의 중요한 유파 중 하나로, 장기간의 발전을 거치며 실천 속에서 끊임없이 풍부해졌고, 구조가 엄격하며 기술이 성숙했다. 칠성보(七星步)를 기초로 하고, 나한단타 비결(羅漢短打秘訣)을 강령(綱)으로 삼으며, 힘(勁力)은 강(剛), 취(脆), 횡(橫), 과(裹), 직(直)을 특징으로 한다. 칠성당랑권(七星螳螂拳)은 내용이 풍부하다.
* 주요 수법(手法): 구(勾), 루(摟), 채(采), 괘(掛), 붕(崩), 벽(劈), 조(刁), 자(砸), 점(粘), 나(拿).
* 주요 주법(肘法): 정주(頂肘), 반주(盤肘), 담주(擔肘), 추이주(墜肘), 격주(格肘) 등.
* 주요 보법(步法): 상보(上步), 퇴보(退步), 개보(蓋步), 답보(踏步), 격보(擊步), 옥환보(玉環步) 등.
* 주요 퇴법(腿法): 전차퇴(前踢腿), 후료퇴(後撩腿), 탄차퇴(彈踢腿), 전등퇴(前蹬腿), 전췌퇴(前踹腿), 산퇴(鏟腿), 구소퇴(勾掃腿), 찬퇴(纏腿) 등.
* 주요 신법(身法): 애(挨), 방(幫), 제(擠), 고(靠), 녕(擰), 선(旋) 등.
* 주요 투로(套路): 삽추(插捶), 붕보(崩步), 난제(攔截), 좌강(挫剛), 유령(柔靈), 번거(翻車), 요체(摘要), 팔주(八肘), 지로(指路), 투도(偷桃), 출동(出洞), 헌서(獻書) 등 40여 가지.
* 대련 투로(對練套路): 붕보대철(崩步對拆), 요체대파(摘要對把), 박안(拍案), 적규(摘盔) 등 여러 가지.
* 기계(器械): 도(刀), 창(槍), 검(劍), 곤(棍), 괴자(拐子), 유성(流星), 삼절곤(三節棍), 대초자(大梢子), 쌍구(雙鉤) 등.
칠성당랑권(七星螳螂拳)의 기술적 특징은 분신팔주(分身八肘)를 모체(母)로 삼아 만상(萬象)을 포괄한다. 힘(勁力)의 완전성을 강조하고, 리듬이 명쾌하며, 강(剛)과 유(柔)가 있고, 공격과 수비가 가능하며, 길고 짧음이 결합되고, 세로(縱)와 가로(橫)로 움직일 수 있으며, 신법(身法)이 민첩하고 신속하며, 각종 수법(手法)을 자유자재로 운용하고 변화를 예측할 수 없다. 실전(實戰)에서는 허실(虛實)에 대한 임기응변, 안과 밖의 결합, 성동격서(聲東擊西), 지상타하(指上打下)에 주의하여, 상대방이 방어할 틈을 주지 않는다.
그 실전 기술은 완벽하며, 선인들이 정리했듯이: 칠성당랑권(七星螳螂拳)에는 차(踢), 타(打), 솨이(摔), 나(拿), 점(點) 다섯 가지 대기술(大技法)이 있으며, 각 기술의 구체적인 운용에는 또다시 고유의 체계가 형성되어 있다. 차는 기법에는 이십사 절명 원앙퇴(二十四絕命鴛鴦腿), 삼십육종 암퇴(三十六種暗腿)가 있다. 던지는 기법에는 삼솨이 육뎨(三摔六跌), 총 이십육솨이랴오(二十六摔掠)가 있다. 치는 기법은 더욱 풍부하고 다채롭고, 백령팔자 타법(一百零八字打法), 이십사장 총법(二十四字總法)이 있다. 잡는 기법에는 십팔 대금나수(十八大擒拿手), 삼십육 활류(三十六滑溜), 삼십육 점동(三十六黏凍), 총 칠십이 파나법(七十二把拿法)이 있다. 혈을 찍는 기법에는 십이 대혈(十二大穴)과 이십사 소혈(二十四小穴) 점법(點法) 등이 있다.
칠성당랑권(七星螳螂拳)은 내공(內功) 수양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며, 이른바 “권(拳)을 수련하고 공(功)을 수련하지 않으면, 늙어서 한바탕 헛수고이다(練拳不練功,到老一場空)”라는 말이 있다. 나한 십팔공(羅漢十八功), 삼회 구전 배타공(三回九轉排打功)을 통해 내기(內氣), 내력(內勁)을 단련하고, 내력(內力) 수련을 통해 의(意)로 기(氣)를 이끌고, 기(氣)로 력(力)을 재촉하여, 내력(內力)이 깊어지면 권술의 위력(威力)을 완전히 발휘할 수 있다.
칠성당랑권(七星螳螂拳)은 칠성권(七星拳)의 정수를 융합하여, 사람 신체의 머리, 어깨, 팔꿈치, 주먹, 무릎, 넓적다리, 발을 주요 기술 수단으로 삼는다. 그 운동 특징은 강(剛)을 위주로 하되, 유(柔)를 겸하며, 강하지만 경직되지 않고, 부드럽지만 무르지 않으며, 강유(剛柔)가 서로 섞여 때에 따라 움직이며, 기술적인 특징이 풍부하여 실전(實戰)에 적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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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화당랑권(梅花螳螂拳)의 내용과 특징
매화당랑권(梅花螳螂拳)은 당랑권(螳螂拳)의 중요한 유파 중 하나로, 권법이 강(剛)한 편이어서 경당랑(硬螳螂)이라고도 불린다. 어떤 학자는 강유(剛柔)가 상간(相間)한다고 보기도 한다. 장기간의 전파와 발전을 거치며, 그 기술 체계가 끊임없이 완성되었고, 공법(功法) 내용이 풍부하며, 자신만의 선명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 매화당랑권(梅花螳螂拳)의 보법(步法): 마보(馬步), 궁보(弓步), 허보(虛步), 정보(丁步), 답보(蹋步), 옥환보(玉環步) 등.
* 수형(手形): 장(掌), 구(勾), 조(爪), 권(拳), 지(指).
* 퇴법(腿法): 탄(彈), 등(蹬), 소(掃), 괘(掛), 초(抄), 췌(踹), 파이(擺), 차(踢), 그리고 반첨각(反尖腳), 부인각(斧刃腳) 및 료각(撩腳), 저각(杵腳), 후심각(扣心腳) 등.
* 주법(肘法): 점주(黏肘), 첩주(疊肘), 돈주(墩肘), 괴주(拐肘), 정주(頂肘), 전주(轉肘), 박주(撲肘), 조천주(朝天肘), 흔주(掀肘) 등.
* 투로(套路): 요보추(搖步捶), 요보장(搖步掌), 삽추(插捶), 칠접(七接), 팔매(八媒), 매화로(梅花路), 목동지로(牧童指路), 백원투도(白猿偷桃), 붕보(崩步), 난제(攔截), 번거(翻車), 적수천장(赤手穿掌), 박선(撲蟬), 팔방(八方), 댱루(掉捋), 절채(折采), 전지(展翅), 요체(摘要), 전지(傳枝), 팔주(八肘) 등.
* 신법(身法): 녕요좌과(擰腰坐胯), 의(意)와 형(形)을 함께 중시하고, 내외(內外)를 겸하여 수련한다.
* 기계(器械): 당랑도(螳螂刀), 달마검(達摩劍), 팔선검(八仙劍), 연청도(燕青刀), 육합곤(六合棍), 오호군양곤(五虎群羊棍), 육합창(六合槍), 매화창(梅花槍), 록암검(麓庵劍), 당랑궐(螳螂橛), 략수봉(掠水棒), 십팔창(十八槍), 쌍수대(雙手帶), 쌍인대벽검(雙人對劈劍), 활대간(滑大杆) 등.
* 대련(對練): 붕보대철(蹦步對拆), 매화산(梅花散), 소박안(小拍案), 쌍봉수(雙封手), 첩신고(貼身靠).
* 기법(技法): 제나봉폐(提拿封閉), 점념방첩(粘黏幫貼), 래교순송(來叫順送) 십이자(十二字).
* 전통 공법(功法): 팔단금 신법(八段錦身法), 입식 나기법(立式拿氣法), 당랑 반구(螳螂盤球), 삼회 구전 환양나한공(三回九轉還陽羅漢功), 라봉수(拉封手), 주폐수(走閉手), 창추(搶捶) 등. 라봉수(拉封手)는 두 사람이 손을 맞잡고 활보(活步)하며, 오루(五漏)의 수법으로 공격의 초점과 발력(發力)을 낸다. 주폐수(走閉手)는 두 사람이 활보하며 한 사람은 공격하고 한 사람은 수비하는 것으로, 활보 타법을 연마하며, 창추(搶捶)는 즉 산타(散打)이다.
어린보(魚鱗步)는 유연하게 변화하며, 그 공법 체계는 팔대세(八大勢)(등(登), 기(騎), 탄(吞), 탁(托), 어(禦), 탑(塌), 후(猴), 과(跨)를 가리킴)를 근본으로 하고, 내력(內力)을 바탕으로 하며, 칠성당랑권(七星螳螂拳)과 마찬가지로 삼회 구전 환양법(三回九轉還陽法), 나한공(羅漢功) 등을 내공 심법(心法)으로 하고, 도타공(挑打功), 철사 장(鐵砂掌) 등의 공법을 외적으로 수련하여, 내외 쌍수(雙修)의 효과를 달성한다. 발력(發力) 방법은 순경(順勁), 강경(剛勁), 유경(柔勁)을 중시한다. 매화당랑권(梅花螳螂拳)은 전신 12개 부위를 12추(錘)로 비유하여 공격에 사용하는데, 이는 머리, 발, 손, 팔꿈치, 어깨, 팔뚝, 무릎, 가슴, 등, 배, 팔 등을 포함한다. 그 용법에는 구결(口訣)이 있는데: 머리는 파도와 같고, 손은 유성과 같으며, 몸은 버드나무와 같고, 발은 취한 사람과 같으며, 영성(心靈)에서 취하고, 본성(性能)에서 발하며, 강한 듯 강하지 않고, 실한 듯 허하며, 오래 수련하면 스스로 변화하고, 숙련되면 스스로 신묘해진다. 이는 손(手), 눈(眼), 몸(身), 법(法), 발(步)의 상호 조화와 협력을 요구하며, 노래 구결(歌訣)은 그 기술적인 특징을 지적한다. 손을 내밀어 눈을 찌르고 중문(中門)을 빼앗으며, 가까이 가면 단타(短打)로 몸에 붙어야 한다. 고독한 가운데 기회를 찾아 강직하게 돌진하고, 점념방첩(黏粘榜貼)으로 촌경(寸勁)을 발하며, 허(虛)와 진(真)을 교묘하게 변화시키고, 강유(剛柔)가 서로 어우러져 법(法) 속에 스며든다. 손과 발을 함께 사용하여 초식(招式)이 이어지니, 당랑권(螳螂拳) 법은 나날이 새롭다.
태극매화당랑권(太極梅花螳螂拳)의 특징은 머리와 꼬리가 서로 이어지고(首尾相銜), 음양(陰陽)이 변화하며, 끊임없이 이어지고(連綿不斷), 시작과 끝이 없으며(無始無終), 공(球)을 품고 떨어뜨리지 않고, 회전하며 나아가고, 파괴하여 치는 것을 태극(太極)이라 한다. 손을 내밀 때 연관성이 있으며, 일수(一手), 삼수(三手), 오수(五手), 칠수(七手)의 수법을 사용하고, 어린보법(魚鱗步法)은 유연하게 변화하며, 마치 매화가 피어나듯 겹겹이 쌓이고(層層疊疊), 고리가 서로 맞물리며(環環相扣), 기이한 형세(奇勢)를 모두 드러내는데, 이것이 매화(梅花)의 팔이며, 당랑(螳螂)은 그 형태를 말하는 것이다. 그 감고, 막고, 묶고, 덮치는 모습과 팔꿈치가 연환(連環)하는 것을 보면, 당랑(螳螂)의 거대한 도끼(巨斧)의 형식을 벗어나지 않는다.
매화당랑권(梅花螳螂拳)은 형상(象形)을 취하여 뜻(意)을 얻고, 구조가 엄격하며, 꾸밈이 없고 소박하며, 기법은 허실(虛實) 상간(相間), 강유(剛柔) 상제(相濟), 변화무쌍(変化莫測)을 중시하고, 타법은 한 초식에 여러 변화가 있으며, 발력(發力)이 빠르고 갑작스러우며, 이완(松)과 긴장(緊)이 결합되어 탄력(彈性)이 풍부하고, 촌경(寸勁), 태극경(太極勁)을 중시하여 실전성(實戰性)이 매우 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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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오매화당랑권(子午梅花螳螂拳)의 내용과 특징
자오매화당랑권(子午梅花螳螂拳)은 매화당랑권(梅花螳螂拳)을 기초로, 자오권(子午拳) 및 중국식 씨름(摔跤) 기법의 정수를 융합하여 창안되었다. 그 투로(套路)는 여전히 매화당랑권(梅花螳螂拳)의 투로(套路)를 골격으로 하지만, 수법(手法)에 개혁을 가하여 새로운 내용을 추가했다.
* 투로(套路): 1. 매화로(梅花路)(일명 당랑자오매화로(螳螂子午梅花路))는 일로(一路), 이로(二路)로 나뉘고; 2. 절지(折枝)(종합로), 일명 자오절지(子午折枝), 속칭 절비(折臂), 금나(擒拿); 3. 포선(捕蟬)(종합로), 일명 자오포선 일로(子午捕蟬一路), 이로(二路)(주로 잡고 던지는 기술(捕摔)을 위주로 함); 4. 난제(攔截)(중국 무술 쾌교(快跤)를 종합함), 옛말로는 봉저 투로(封堵套路)라고 칭함; 5. 요체(摘要)(적규(摘盔), 팔주(八肘), 번거(翻車), 록로추(轆轤錘)를 결합함).
* 연수공(練手功): 대벽산(大劈山), 중벽산(中劈山), 소벽산(小劈山).
* 연보공법(練步功法): 대약보(大躍步)(일명 약보실자(躍步實砸)), 소약보(小躍步), 그리고 영문췌(迎門踹) 등.
* 실전 투로(實戰套路): 대자오매화(大子午梅花), 중자오매화(中子午梅花), 소자오매화(小子午梅花).
* 연습 투로(演練套路): 삼환투월(三環套月), 자오매화 연환장(子午梅花連環掌)(일명 비웅장(飛熊掌), 이십사식(二十四式)).
* 기계(器械): 자오매화창(子午梅花槍)(일명 매화단문창(梅花斷門槍)), 자오매화도(子午梅花刀), 자오매화검(子午梅花劍), 대초자곤(大梢子棍), 단비수(單匕首). 기타 도법(刀法)에는 야전도(夜戰刀)(일명 야전 팔방도(夜戰八方刀), 즉 야전도(夜戰刀)와 팔방도(八方刀) 두 가지 투로), 오호첩배도(五虎疊背刀)(일명 오호첩배도(五護疊背刀))가 있다.
* 자오매화당랑권(子午梅花螳螂拳)은 내력(內力) 수련을 중요하게 여기며, 공법(功法)에는 천수공(穿手功), 자오추수공(子午推手功), 자오동자공(子午童子功), 팔식 단조수(八式單操手) 등이 있다.
자오매화당랑권(子午梅花螳螂拳)의 특징은 수법(手法)이 벽(劈), 붕(崩), 함(含), 합(合), 착(捉), 타(打), 탄(彈), 방(放)하며, 산시(山西) 내가형의(內家形意)의 붕방타경(崩放打勁)이 있고, 태극(太極)의 점념순대 화경법(粘黏順帶化勁法)이 있다. 보법(步法)은 매화(梅花), 어린 호보(魚鱗弧步)로 움직이지만, 음양팔괘(陰陽八卦)의 이구외련(裏勾外連)의 방법을 사용한다. 자오매화당랑권(子午梅花螳螂拳)은 손을 내밀 때 신속하고 격렬함을 강조하며, 번개처럼 빨라 귀를 가릴 틈이 없는 기세(迅雷不及掩耳之勢)를 요구한다. 기술적인 측면에서는 처음 2초 안에 승리하는 것을 주장하며, 삼다 삼쾌(三多三快)를 요구한다. 삼다(三多)는 첫째, 던지기(摔)를 많이 하고, 둘째, 퇴법(腿法)을 많이 사용하며, 셋째, 금나(擒拿) 중 혈을 찍고 뼈를 부수는 것(點穴破骨)을 많이 하는 것이다. 삼쾌(三快)는 첫째, 치는 것이 빠르고, 둘째, 던지는 것이 빠르며, 셋째, 차는 것이 빠른 것이다. 그 기술적인 십이자 요결(十二字要訣)은: 점(粘), 념(黏), 쇄(鎖), 대(帶), 조(刁), 벽(劈), 찬(纏), 방(放), 할(割), 말(抹), 유(柔), 좌(銼)이다. 자오매화당랑권(子午梅花螳螂拳)의 특징을 가장 잘 나타내는 연형가결(練形歌訣)은: 안으로 굽히고 밖으로 연결하여 발이 고리 모양으로 움직이고(裏勾外連腳走環), 팔괘(八卦)의 횡경(橫勁)은 솜처럼 수비하며(八卦橫勁守似綿), 형의(形意)의 천균(千鈞)은 낚아채고 포함하여 놓으며(形意千鈞刁含放), 한 초식(一招)에 세 가지 편리함을 완벽하게 운용한다(一招三便玩完).
자오매화당랑권(子午梅花螳螂拳)은 당랑권(螳螂拳)의 내용을 풍부하게 하고, 그 권법 기술의 부족함을 보완했으며, 다롄(大連) 무술계 당랑문(螳螂門)의 삼대 주류파(三大主流派別) 중 하나이며, 특히 뤼순커우취(旅順口區)에 전파된 사람이 가장 많고, 또한 다롄 북방 무도관(北方武道館)에서 산타(散打) 수상자가 가장 많고, 다롄 천산무관(天山武館)에서 투로(套路) 수상자가 가장 많은 당랑권(螳螂拳) 파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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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림당랑권(少林螳螂拳)의 내용과 특징
소림당랑권(少林螳螂拳)은 왕랑(王郎)이 당랑권(螳螂拳)을 창시한 후 소림사(少林寺)에 전파된 고대 당랑권(螳螂拳)이다. 처음에는 쉽게 전수되지 않았으나, 나중에 민간으로 전파되었다. 전설에 따르면 청(清) 가경(嘉慶) 연간, 한 승려가 베이징(北京)에서 은수(恩壽)에게 전수했다. 은수(恩壽)는 이후 산둥 러링셴(樂陵縣)의 현령(縣令)으로 왔는데, 그가 허베이 창셴(滄縣)에 무사(武士)를 모집하러 갔을 때 창셴(滄縣) 무거(武舉) 양쥔푸(楊俊普)의 도움을 받자, 양쥔푸(楊俊普)를 러링셴(樂陵縣)으로 초청하여 당랑권(螳螂拳) 법을 전수했다. 양쥔푸(楊俊普)는 아들 양진위안(楊進元)에게 전수했고, 양진위안(楊進元)은 양더칭(楊德清), 양더푸(楊德符), 양더위(楊德玉) 등에게 전수했다. 손문발(孫文渤) 선생이 바로 양쥔푸(楊俊普)의 전인(傳人)이며, 1930년대에 소림당랑권(少林螳螂拳)을 다롄(大連)에 전파했다.
소림당랑권(少林螳螂拳)의 초기 투로(套路)에는 전칠(前七), 후구탕(後九趟), 총 십육탕(十六趟)이 있었다. 문규(門規)가 매우 엄격하여 쉽게 전수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 투로(套路)의 초식(招式)에는 이름이 없는 경우가 많았고, 스승의 친수(親授)가 없으면 그 문턱을 엿보기 어려웠다. 예를 들어 전칠탕권(前七趟拳)의 가결(歌訣)은: “기수(起手) 좌우 괴이(掛耳), 대위(代爲) 악두 연통(握肚連通). 태산 압정 세 비경(泰山壓頂勢非輕), 지당 삽화 병정(地躺插花並正). 록로 번거 일병용(轆轤翻車一並用), 타상 소하 불류정(打上掃下不留停), 수각 기지 부정(手腳起止不定)”이다. 소림당랑권(少林螳螂拳)이 민간에 전파되면서, 일부 무술 대가들도 그 기초 위에서 발전을 이루었다. 예를 들어 청대(清代) 당랑권(螳螂拳)의 중요한 전인(傳人) 승소도인(升霄道人)은 다시 정리한 《나한단타 비요(羅漢短打秘鑰)》의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파골타(破骨打) 팔탕(八趟), 반차타(返車打) 사탕(四趟), 당랑타(螳螂打) 육탕(六趟), 구전 십팔뎨(九轉十八跌)는 모두 전후 십육탕(十六趟)의 의미를 밝힌 것이다. 매 탕(趟)의 개합(開合)과 절전(折轉)은 구조가 엄격하며, 그 묘미를 모두 취하지 않은 것이 없다. 배우는 사람은 반드시 손(手)으로 강유(剛柔)의 이치를 밀고, 완(緩)과 질(疾)의 기틀을 엎드리며(伏), 토납(吞吐)의 법을 받아들이고, 음양(陰陽)의 회합(會)을 살펴야 하며, 오래 연마하여 순숙(純熟)해야 한다. 소림당랑권(少林螳螂拳) 역시 끊임없는 전승 속에서 발전을 이루었다고 할 수 있으며, 이때 투로(套路)가 증가했을 뿐만 아니라, 권리(拳理)도 더욱 과학적이 되었고, 내공(內功) 수련에 주의했으며, 기법(技法)에서는 강유(剛柔), 쾌만(快慢)의 통제와 파악을 중시했고, 특히 내용이 더욱 풍부해졌다. 예를 들어 구전 십팔뎨(九轉十八跌)는 쌍수대(雙手帶), 반전(搬磚), 사답지(蛇踏地), 찰요안(撻腰眼), 저별솨이(底別摔), 전고구(剪子股), 백마곤안(白馬滾鞍), 라녠(拉輦), 주마활췌(走馬活拽), 당랑앙면타(螳螂仰面打), 갈저찰(蠍蜇撻), 반견(搬肩), 취후신(取後腎), 난마(攔馬), 도제추(倒提鋤), 저공지(豬拱地), 창별솨이(搶別摔), 반반(絆絆) 등을 포함한다. 소림당랑권(少林螳螂拳)은 단조(單操)도 가능하고, 대련(對練)도 가능하며, 조수(操手)도 있고, 연수(演手)도 있어, 체계가 완벽하다.
소림당랑권(少林螳螂拳)의 보형(步型)은 비교적 작으며, 주로 소궁보(小弓步), 소마보(小馬步), 소나한보(小羅漢步)가 있다. 보법(步法)에는 진보(進步), 퇴보(退步), 앙보(拗步)가 있고, 도약(跳躍)이 적으며, 하반신(下盤)의 안정과 보법의 민첩성을 중시한다. 높은 발차기(高腿)가 없는 것이 소림당랑권(少林螳螂拳) 퇴법의 중요한 특징이며, 당랑권(螳螂拳)의 발전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진운도(陳雲濤) 선생이 《당랑권 약론(螳螂拳略論)》에서 말했듯이: “어떤 사람들은 당랑권(螳螂拳)에 퇴법(腿)이 없다고 생각하지만, 당랑권(螳螂拳)은 퇴법(腿)이 없는 것이 아니라, 발이 낮고 가려져 있으며, 발차기는 공격에 사용되지 않고 상대방을 방해하는 데 사용된다”.
소림당랑권(少林螳螂拳)은 기술적인 면에서 강하며, 공격 수법에서는 손(手)이 머리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을 강조하고, 괴이(掛耳), 곤타(捆打), 태산압정(泰山壓頂) 등의 초식(招數)을 잘 사용한다. 손(手), 눈(眼), 몸(身), 법(法), 발(步)의 긴밀한 협력을 요구하며, 한 초식(招數)을 사용할 때 자유자재로 운용한다. 강유(剛柔) 상제(相濟), 쾌만(快慢) 득당(得當), 허실(虛實) 상간(相間), 변화무쌍(變化莫測)을 달성한다.
또한, 소림당랑권(少林螳螂拳)은 내외(內外) 겸수(兼修)를 중시하며, 특히 내공(內功) 수련과 동시에 이 권법의 특징을 결합하여, 모래를 던지고(摔砂) 장(掌)을 연마하는데, 소림당랑권(少林螳螂拳) 대가들은 대부분 철사 장(鐵砂掌)을 연마했으며, 손문발(孫文渤) 선생이 바로 철사 장(鐵砂掌)으로 저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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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형당랑권(龍形螳螂拳)의 내용과 특징
용형당랑권(龍形螳螂拳)은 다롄(大連)의 저명한 당랑권(螳螂拳) 대사 톈빙장(田秉江) 선생이 소림(少林) 십대 상형권(十大象形拳) 중의 용형권(龍形拳)과 칠성당랑권(七星螳螂拳)을 융합하여 창시한 당랑권(螳螂拳)의 새로운 유파로, 그 구조가 합리적이고 기술이 완벽하며, 독자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다.
용형당랑권(龍形螳螂拳)은 칠성당랑권(七星螳螂拳)을 기초로 하고, 소림 용형권(龍形拳)의 취세(取勢)와 기법을 흡수했다.
용형당랑권(龍形螳螂拳)은 현재 총 네 가지 투로(套路)가 있으며, 천지(穿枝), 투도(偷桃), 헌서(獻書), 포선(捕蟬)(일로, 이로)이 있는데, 이는 칠성당랑권(七星螳螂拳)의 투로(套路)에서 진화 및 개조된 것이며, 이 네 가지 투로(套路)는 명칭상으로도 그 모권(母拳)의 원래 이름을 따랐지만, 취세(取勢)와 기법에서는 대담한 혁신을 이루었다. 용형(龍形)의 경령(輕靈)하고 침정(沈靜)함을 취하고, 신법(身法)의 상하 기복, 좌우 우회(迂回), 유연한 움직임, 변화무쌍함, 나선형 찬요(纏繞)를 중시한다. 그 보법(步法)은 민첩하고 순간적으로 변하며, 권법은 연관성 있고 신속하며 격렬하고, 세력(勢)이 서로 따른다. 힘(勁法)은 탄도우(彈抖)를 강조하고, 채찍과 같은 힘(鞭勁)을 사용한다. 예를 들어 용형당랑권(龍形螳螂拳) “헌서(獻書)” 투로(套路)에서 “사대수(四大手)”를 기본 기법으로 삼는다. 용형당랑권(龍形螳螂拳) 4대 전인(傳人) 우선진(於深金) 선생은 《용형당랑권 “개(開), 채(采), 파(耙), 쇄(甩)”(龍形螳螂拳“開、采、耙、甩”)》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이른바 사대수(四大手)란, 개삼수(開三手), 채삼수(采三手), 파삼수(耙三手), 쇄삼수(甩三手)이며, 전체적인 특징은 손을 허리에서 위로 들어 올리고, 가슴을 거쳐 흔들고, 회전하고, 탄(彈)하고, 도우(抖)하여 상대방의 입과 코 또는 등 뒤를 봉쇄하고 공격하며, 구(鉤), 괘(掛), 루(摟), 찬(纏), 나선형 찬사(纏絲), 그리고 반찬사(反纏絲)의 회전하는 기세를 중시한다. 이는 소림 용형권(龍形拳)의 “용형수(龍形手)”와 이곡동공(異曲同工)의 묘가 있다. “용형수(龍形手)” 동작 요구는 오른발이 앞으로 나아가 밟고, 신체가 90도 회전하며, 하반신은 마보(馬步)를 이루고, 동시에 양손 십지(十指)는 용형수(龍形手)를 형성하여, 허리에서 위로 쳐 올려 이마 앞에서 교차하는 것이다. 용형당랑권(龍形螳螂拳)이 “용형권(龍形拳)”과 마찬가지로 허리 발력(發力)을 중시하여 그 기술적인 특징을 강화했음을 알 수 있다. 정방향(正)과 역방향(反) 회전도 용형당랑권(龍形螳螂拳)의 특징 중 하나이다. 전체적으로 보면, 용형당랑권(龍形螳螂拳)은 손(手), 눈(眼), 몸(身), 법(法), 발(步)의 조화와 통일을 요구하며, 의(意)가 발하여 기(氣)가 움직인 후에 행동하고, 마치 유영하는 용이 날아오르듯 막을 수 없다. 톈빙장(田秉江) 선생은 평생 칠성당랑권(七星螳螂拳) 등 권법의 수련과 방법 연구에 종사했으며, 권리(拳理)를 깊이 연구했고, 이 기초 위에서 소림 용형권(龍形拳)의 정수를 취하고 상호 융합하여, 전통 칠성당랑권(七星螳螂拳)의 수련 방법을 창조적으로 개량하여 용형당랑권(龍形螳螂拳)을 창시했다. 그 권법과 조수(操手)는 더욱 간결하고 명쾌하며, 연속적이고 긴밀하며, 신법(身法)은 더욱 민첩하고 신속하여, 속도, 힘, 기술의 완벽한 통일을 달성했다. 조수(操手)와 연수(演手)가 모두 있어 표현력이 향상되었고, 용형당랑권(龍形螳螂拳)은 칠성당랑권(七星螳螂拳)에서 유래했지만, 독립적인 자체 체계를 형성했다. 이로써 칠성당랑권(七星螳螂拳)의 이론과 수련 방법을 풍부하게 했다.
용형당랑권(龍形螳螂拳)은 세상에 나온 이래로 이미 수십 년간 전파되었으며, 광범위한 무술 애호가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용형당랑권(龍形螳螂拳)을 배우는 제자가 많았으며, 많은 제자들이 국내외 무술 대회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고, 용형당랑권(龍形螳螂拳)의 발전과 중화 무술(中華武術)의 홍양(弘揚)에 공헌했다.
제3절 당랑권(螳螂拳)의 전인(傳人)
당랑권(螳螂拳)은 청(清)나라 말년 다롄(大連)에 전파된 후 다롄(大連)에서 크게 발전했으며, 육합당랑권(六合螳螂拳)은 다롄(大連)에 제자가 많지 않았지만, 칠성당랑권(七星螳螂拳), 매화당랑권(梅花螳螂拳), 자오매화당랑권(子午梅花螳螂拳), 그리고 소림당랑권(少林螳螂拳), 용형당랑권(龍形螳螂拳)은 모두 제자가 많아, 다롄(大連) 무술의 중요한 권종(拳種) 중 하나를 형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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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성당랑권(七星螳螂拳)의 다롄(大連) 전인(傳人)
왕슈화(王秀華)(1900-1979)는 본적은 산둥성(山東省) 쥐셴(莒縣)이다. 무술 세가(武術世家)에서 태어나 어릴 때부터 무술을 익혔다. 1916년 가족을 따라 다롄(大連)에 왔으며, 다롄(大連)에서 마칭린(馬慶麟)에게 사사하여 나한지공권(羅漢地功拳)을 배웠다. 이후 다시 칠성당랑권(七星螳螂拳) 명가 왕운펑(王雲鵬)에게 사사하여 칠성당랑권(七星螳螂拳)을 배웠다. 1928년 왕운펑(王雲鵬)이 산둥(山東)으로 돌아간 후, 왕슈화(王秀華) 선생은 무관(武館)을 열고 제자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1933년, 소림당랑권(少林螳螂拳) 명가 손문(孫文) 선생이 다롄(大連)에 오자, 왕슈화(王秀華)는 다시 그에게 사사하여 소림당랑권(少林螳螂拳), 청평검(青萍劍), 단문창(斷門槍)을 배웠다. 여러 무술 대가들의 지도 아래, 왕슈화(王秀華) 선생은 진전(真傳)을 깊이 얻었고, 그의 정교한 무공은 무술계 동료들의 찬사를 받았으며, 제1회 무술협회 위원이었고, 신중국(新中國) 수립 후 다롄(大連)에서 가장 먼저 무관(武館)을 개설한 무술가 중 한 명이었다.
왕슈화(王秀華) 선생은 평생 무술 사업에 종사했으며, “문화대혁명(文革)” 중 부당한 대우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무술에 대한 열정은 줄어들지 않았고, 많은 우수한 무술 인재를 양성하여 다롄(大連) 무술 발전에 중요한 공헌을 했다. 그의 제자는 수천 명에 달했으며, 주요 제자로는 장동빈(張同斌), 국전덕(鞠傳德), 왕빙롄(王炳蓮) 등이 있다.
이점원(李占元)(1901—1992)은 산둥성(山東省) 라이시(萊西) 사람이다. 무술 세가(武術世家)에서 태어나 1906년부터 아버지에게 무술을 배우기 시작하여 소림(少林), 형의권(形意拳)을 배웠다. 1913년 다롄(大連)에 와서, 잇따라 양유신(楊維新), 소수빈(肖樹斌), 호영복(胡永福) 등 무술 대가들을 따라 칠성당랑권(七星螳螂拳)을 배웠고, 28년 동안 수련하여 무공이 극도로 숙련된 경지에 이르렀다. 1928년부터 다롄(大連)과 산둥 핑두(平度) 등지에서 도장(道場)을 열고 제자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1941년 일본인을 때린 일로 인해 다롄(大連)을 떠나 칭다오(青島)에서 무술을 가르칠 수밖에 없었다. 수십 년간의 교수 및 연구를 통해, 끊임없이 칠성당랑권(七星螳螂拳)의 이론을 완벽하게 하고, 칠성당랑권(七星螳螂拳)의 훈련 경험과 방법을 정리했으며, 1984년 제자 류숭시(劉崇禧) 선생과 공동으로 《칠성당랑권(七星螳螂拳)》이라는 책을 저술했다. 여러 장점을 취하고, 당랑권(螳螂拳)의 이론과 기법을 더욱 개혁하고 발전시켰으며, 명경(明勁)과 암경(暗勁)을 결합하여, 종합당랑권(綜合螳螂拳) 수법과 당랑권(螳螂拳) 산타(散打) 기술을 창조하여 당랑권(螳螂拳) 발전에 공헌했다. 수십 년간의 교수 경력에서 이점원(李占元) 선생은 수많은 제자를 양성했다.
왕칭자이(王慶齋)(1906—1993)는 산둥성(山東省) 안추(安丘) 사람이다. 어릴 때부터 무술을 매우 좋아했으며, 1914년 가족을 따라 다롄(大連)에 와서 정착했다. 다롄(大連)에서 칠성당랑권(七星螳螂拳) 종사 왕운펑(王雲鵬)에게 수년간 당랑권(螳螂拳)을 배웠고, 왕운펑(王雲鵬) 선생이 다롄(大連)을 떠난 후, 1933년 다시 허베이(河北)의 저명한 소림당랑권(少林螳螂拳) 손문발(孫文渤)에게 사사하여 소림당랑권(少林螳螂拳), 청평검(青萍劍), 나한단문창(羅漢斷門槍)을 배웠으며, 스승의 무학(武學) 진전(真傳)을 얻었다. 1937년 왕칭자이(王慶齋) 선생은 선양(沈陽)으로 가서 무관(武館)을 열고 제자를 가르치기 시작했으며, 제26무술 전습소(傳習所)를 설립했고, 1939년 무술 진흥회 이사로 재직했다. 1947년 동북 항전 열사회가 주최한 무술 비무대회(擂台賽)에 참가하여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다.
개혁개방 후, 왕칭자이(王慶齋)는 잇따라 랴오닝성(遼寧省) 무술협회 부주석, 선양시(沈陽市) 무술협회 이사, 중화 전국 체육 총회 선양(沈陽) 분회 위원을 역임했다. 1979년 광시(廣西) 난닝(南寧)에서 개최된 전국 무술 관모 교류회에 참가하여 3등상을 수상했다. 1983년 장시(江西) 난창(南昌)에서 개최된 전국 무술 관모 교류 대회에 참가하여 1등상을 수상했다. 1983년 전국 우수 무술 지도원으로 선정되었다.
60년간의 무술 경력에서 왕칭자이(王慶齋) 선생은 많은 무술 인재를 양성했으며, 가히 수많은 제자를 두었다고 할 수 있다. 칠성당랑권(七星螳螂拳)과 소림당랑권(少林螳螂拳)의 발전에 중요한 공헌을 했다. 그의 많은 제자들이 각급 무술협회 지도자나 각급 체육院校에서 무술 코치로 재직하고 있다. 그의 주요 제자로는 이더위(李德昱), 롄진산(連金山), 훠루이팅(霍瑞亭), 류핀정(劉品正) 등이 있다.
왕청강(王清綱)(1908—1988)은 본적은 산둥성(山東省) 황셴(黃縣) 청관샹(城關鄉) 난관춘(南關村)이다. 가세가 빈한했지만, 어릴 때부터 현지 무술 환경의 영향을 받아 무술을 매우 좋아했다. 13세 때 외삼촌 등 친척들을 따라 관동(關東)으로 와 다롄(大連)에 도착했으며, 시강(西崗) 스제관(世界館)(일본 식민 통치 시기 다롄(大連)의 영화관, 해방 후 “허핑(和平) 영화원”으로 불림) 근처에서 잇따라 칠성당랑권(七星螳螂拳) 명가 소수빈(肖樹斌)(산둥 푸산(福山) 사람), 호영복(胡永福)(산둥 라이양(萊陽) 사람)을 스승으로 모셨다(주로 호(胡) 선생을 따라 배웠다). 당시 호(胡) 선생을 따라 배우던 사형제로는 장의선(張義先)(대사형), 이점원(李占元)(이회당(李會堂)), 매옥선(梅玉善), 이세복(李世福), 궁옌장(宮顏章), 우지청(於吉成), 이루이녠(李瑞年), 쑹윈즈(宋雲芝), 서홍훈(徐洪勳) 등이 있었다.
스승의 세심한 지도와 엄격한 요구 아래, 왕청강(王清綱) 선생은 열심히 배우고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 권술에서 기계 및 산수(散手)에 이르기까지 진정한 무공을 이루었다. 1937년경, 스승의 동의를 얻어 왕청강(王清綱)은 원래 다롄(大連) 둥퉈쯔(東坨子) 일대에서 자신의 직업적인 무술 교습 생활을 시작했다. 1941년 6월, 진셴(金縣)(현재 진저우취(金州區))으로 이전하여 계속 무관(武館)을 열고 제자를 가르쳤다.
왕청강(王清綱) 선생은 다롄(大連) 진저우취(金州區) 근대 무술의 중요한 초석을 놓은 사람 중 한 명으로, 특히 다롄(大連) 해방 초기에는 현(縣) 무술조직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며, 여러 차례 제자들을 데리고 직접 시(市), 현(縣) 각급에서 주최하는 무술 활동에 참가하여, 당시 대중들로부터 매우 높은 평가를 받았다. 왕청강(王清綱) 선생은 수십 년간 무술 수련과 교육에 종사했으며, 제자가 많았고, 많은 제자들이 각급 무술 조직에서 활동하고 있다.
1983년 5월 1일, 진저우취(金州區) 제1회 무술협회가 설립되었고, 당시 진셴(金縣) 문체(文體) 업무를 담당하던 차오(曹) 부현장(副縣長)이 직접 무술협회 주석을 맡았으며, 왕(王) 선생은 무술협회 수석 고문 겸 코치로 초빙되었다. 그의 둘째 아들 왕우린(王武林), 사위 왕신(王昕), 제자 자오청쿤(趙成坤), 둥밍자오(董明照), 장뎬요우(張殿友), 마전옥(麻振玉), 류런량(劉仁良), 장저우왕(臧州望), 호내덕(胡乃德), 강영상(薑永祥), 곽사 인(郭士仁), 여세군(呂世軍), 곡유선(曲維旋), 이보창(李寶昌), 주영승(周永勝), 손학량(孫學亮), 추샹린(鄒祥林), 림배한(林培漢), 왕운친(王運勤), 필극검(畢克劍), 왕운샹(王運祥), 마정취안(馬正全), 우칭샹(於慶祥), 처청취안(車成全), 다이펑강(戴風剛), 쉬샹(許祥), 장웨이민(張爲民), 범성강(範成江), 옌자펑(閆家峰), 이성주(李成柱), 오영유(吳永維), 전도진(田道珍), 장림(張林) 등 여러 명도 일찍이 무술조직, 무술협회에서 직책을 맡았으며, 현재까지 그의 제자와 재전 제자 중 여러 명이 성(省), 시(市) 무술협회 부주석, 진저우취(金州區) 무술협회 고문, 주석, 부주석, 이사 등의 직책을 맡아 계속 무술 운동을 위해 일하고 있다.
왕청강(王清綱) 선생은 이미 세상을 떠났지만, 소중한 무술 문화유산을 남겼는데, 권술(拳術) 방면으로는: 탄퇴(彈腿), 삽추(插錘), 붕박(崩撲), 난제(亂接), 투도(偷桃), 출동(出洞), 하서(下書), 요체(摘要), 졸강(拙剛), 팔주(八肘), 유령(柔靈), 대소 번거(大小翻車), 소호연(小虎燕), 소림 삽화(少林插花), 원앙권(鴛鴦拳) 등이 있다. 기계(器械)로는: 태극 단도(太極單刀), 매화 쌍도(梅花雙刀), 춘추 대도(春秋大刀), 쌍수대(雙手帶), 육합창(六合槍), 육합곤(六合棍), 삼절곤(三節棍), 십삼곤(十三棍), 오화 강편(五花鋼鞭), 호두 쌍구(虎頭雙鉤), 팔선검(八仙劍), 달마검(達摩劍) 등이 있다. 직격(直擊)(실전 용)으로는: 산수(散手), 투검(鬥劍), 자창(刺槍), 획대간(劃大杆) 등이 있다. 대련(對練)으로는: 공수대(空手對), 쌍수대 진창(雙手帶進槍), 쌍도 진창(雙刀進槍), 삼절곤 진창(三節棍進槍), 대자창(對刺槍) 등이 있다.
왕청강(王清綱) 선생은 수십 년간의 무술 수련과 교육 연구를 통해, 칠성당랑권(七星螳螂拳)의 과학적 훈련 방법을 정리했으며, 특히 기술적인 면에서는 제자들에게 자주 손을 움직이게 하는 것(常動手)을 위주로 기예를 향상시켰다. 왕(王) 선생은 성품이 충후(忠厚)했으며, 다른 사람과 교류할 때 명예나 이익을 따지지 않았다. 그는 여러 장점을 널리 취하여, 칠성당랑권(七星螳螂拳)의 산타(散打) 기술을 더욱 풍부하게 했으며, 그 내용을 더욱 정교하고 실용적으로 만들었고, 건강 증진과 실전(實戰)의 무술 가치를 높여, 비교적 완전하고 체계적으로 칠성당랑권(七星螳螂拳) 기예를 습득한 일대 명사(名師)가 되었다. 그는 평생 제자가 많았고, 수많은 제자를 양성했으며, 그의 제자와 재전 제자들은 전국, 성(省), 시(市)의 각종 경기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다. 예를 들어: 손자 기한방(紀寒芳)(왕우린(王武林)의 제자)은 1986년부터 1988년까지 3회 연속 다롄시(大連市) 무술 산타(散打) 1위를 차지했고; 쑤톈쑹(蘇天松)은 1989년 전국 제1회 방위 기술 무술 산타(散打) 엘리트 대회 65kg급 1위를 차지했으며; 손자 장융웨이(臧永維)(왕신(王昕)에게 사사)는 2007년 랴오닝성(遼寧省) 전통 무술 교류 대회 남자 그룹 기계 1등상을 획득했고; 그의 제자 류량(劉亮)은 네 차례 국가급 무술 대회 1등상을 획득하여 다롄(大連) 무술의 명예를 드높였다.
치징마오(齊景茂)(1926-1999)는 본적은 산둥 쥐셴(莒縣)이다. 다롄시(大連市)에서 태어나 다롄 사허커우구(沙河口區) 공학당을 졸업했다. 1945년 혁명에 참가했고, 1947년 중국 공산당에 가입했다. 과장, 공회 주석, 공장장 등을 역임했다. 그는 6세부터 무술을 익혔고, 통배(通背), 소림권(少林拳)을 배웠으며, 이후 무술 대사 왕사비(王少飛), 손문(孫文)의 제자들에게 칠성당랑권(七星螳螂拳)과 소림당랑권(少林螳螂拳) 및 각종 기계를 배웠다. 나중에 다시 상하이(上海) 명사 장위밍(張玉明)과 베이징(北京) 양청푸(楊澄甫)의 제자 최의사(崔毅士)에게 태극권(太極拳), 추수(推手)와 각종 기계를 배웠으며, 수십 년간의 수련과 탐색을 거쳐 일대 무술 대가(大師)가 되었다. 1983년 전국 천인 우수 지도원 칭호를 받았으며, 다롄(大連) 무술 사업 발전에 중요한 공헌을 했다.
수십 년간의 무술 전수 경력에서 치(齊) 선생은 수많은 제자를 양성했으며, 주요 제자로는 오수신(吳修信), 이홍준(李洪俊), 양청취안(楊清泉), 로유헌(盧有獻), 거용치(葛永歧), 뢰내평(雷乃平), 하운붕(夏雲鵬), 이나(李娜) 등이 있다.
자오롄쥐(趙連舉)는 1933년 8월 산둥성(山東省) 핑두(平都)에서 태어났으며, 칠성당랑권(七星螳螂拳) 4대 적전 제자이다. 이후 가족을 따라 다롄(大連)으로 이사했으며, 12세 때 가오웨이샹(高維相)에게 사사하여 나한지공장권(羅漢地功長拳)을 배웠다. 1952년 무예를 지닌 채 왕전의(王傳義)에게 가서 칠성당랑권(七星螳螂拳)을 배웠고, 왕전의(王傳義)의 진전(真傳)을 얻었다. 자오롄쥐(趙連舉)는 권법을 깨닫는 능력이 매우 뛰어나, 종종 스승이 시연 및 시범을 맡겼으며, 무예와 무덕(武德) 모두 동문 사형제들 중에서 상위에 속하여, 스승 왕전의(王傳義)의 사랑을 깊이 받았다. 자오롄쥐(趙連舉)는 특히 기계(器械)에 능하며, 특히 육합창(六合槍)에 능숙했다.
1968년, 자오롄쥐(趙連舉)의 집은 진저우(金州) 스허전(石河鎮)으로 이사했다. 그의 무공은 스허전(石河鎮) 일대에서 매우 유명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그의 명성을 듣고 칠성당랑권(七星螳螂拳)을 배우러 왔다. 그가 가르친 주요 제자로는 량훙정(梁洪政), 장남 자오슈량(趙秀良), 차남 자오슈보(趙秀波), 류푸순(劉福順), 왕정셴(王正顯), 웨이치옌(魏啟顏), 오영연(吳永連)이 있으며, 그중 가장 아끼는 제자는 량훙정(梁洪政)이었다.
량훙정(梁洪政)은 깨닫는 능력이 강하고 무공이 탁월하여, 자오롄쥐(趙連舉)의 사제이자 칠성당랑권(七星螳螂拳) 4대 장문인(掌門人) 지쉐위안(遲學元)의 사랑을 깊이 받았으며, 자오롄쥐(趙連舉)는 량(梁)을 지쉐위안(遲學元)의 문하에 소개해 이론과 투로(套路)를 배우게 했고, 지쉐위안(遲學元)은 50여 가지 투로(套路)를 량훙정(梁洪政)에게 전수했으며, 칠성당랑권(七星螳螂拳) 사승(師承)과 30여 권의 권보(拳譜) 및 장문(掌門) 대간자(大杆子) 등을 량훙정(梁洪政)에게 전수했다. 자오롄쥐(趙連舉)는 또한 자신의 아들 자오슈량(趙秀良)을 지쉐위안(遲學元)의 문하에 소개해 배우게 했다.
왕우린(王武林)은 1938년 다롄(大連)에서 태어났다. 무술 세가(武術世家)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는 칠성당랑권(七星螳螂拳) 명사 왕청강(王清綱)이다. 7세부터 아버지를 따라 무술을 익혔다. 1952년 다롄시(大連市) 제1회 무술 대회에 참가하여 8.5점의 고득점을 얻었다. 1950년 이후, 왕우린(王武林)은 사회 공익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는데, 예를 들어 중소 우호 연환회와 항미원조(抗美援朝) 전사 환영 대회에서 무술 시범을 보였다. 1956년부터 1957년까지 허베이성(河北省) 곡예단에 가입했다. 1959년 다롄시(大連市) 직공 문예 경연 대회에 참가하여 무술 시범상(강철 채찍(花鋼鞭) 1등상)을 수상했다. 1960년 정식으로 간판을 걸고 제자를 받기 시작했다. 1983년 진셴(金縣)(현재 진저우취(金州區)) 체육국과 무술협회에서 발행한 코치 증서를 받았으며, 같은 해 진저우취(金州區) 제1회 무술협회 이사를 역임했다. 1986년, 문화부가 주최한 “전국 민간 예인” 전시 공연에 초청받아 참가했다.
칠성당랑권(七星螳螂拳)을 전파하기 위해, 왕우린(王武林) 선생은 1990년부터 1992년까지 다롄 개발구에 “무술 학교”를 설립했고; 1993년부터 1999년까지 진저우(金州)에 “진저우 무관(金州武館)”을 운영했다. 1999년 진저우취(金州區) 무술협회 고문으로 초빙되었다.
왕우린(王武林) 선생은 수십 년간 무술 사업에 종사했으며, 사회 교육에 참여하여 많은 무술 인재를 양성했다. 제자 기한방(紀寒芳), 쑤톈쑹(蘇天松)은 1986년부터 1988년까지 3회 연속 다롄시(大連市) 무술 산타(散打) 우승 및 준우승을 차지했다. 1989년 제자 쑤톈쑹(蘇天松), 기한방(紀寒芳)은 전국 무술 대회에 참가하여 각각 1위와 2위를 차지했다. 왕우린(王武林) 선생은 현재 국가 무술 7단이다.
호내덕(胡乃德)은 1941년 11월 다롄시(大連市) 진저우취(金州區)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무술을 좋아했으며, 11세 때 칠성당랑권(七星螳螂拳) 대사 왕청강(王清綱)에게 당랑권(螳螂拳)을 배웠고, 19세 때 다롄 사범 전문 학교 체육학과에 합격했다. 왕(王) 선생을 따라 8년 이상 수련하는 동안, 칠성당랑권(七星螳螂拳) 권술 및 기계 투로(套路)와 기법을 기본적으로 습득했다. 자신의 종합 능력을 강화하기 위해, 다시 진저우(金州) 씨름팀 명사 둥밍자오(董明照)에게 중국식 씨름을 배웠다. 1961년 졸업 후 진저우(金州) 5중의 체육 교사로 배정되었다.
호내덕(胡乃德) 선생은 무술 사업에 열정적이었으며, 1992년 진저우취(金州區) 무술협회 주석으로 선출되었다. 진저우취(金州區) 무술협회 주석 재임 기간 동안, 호내덕(胡乃德)은 구(區) 내 무술 사업 발전을 적극적으로 추진했으며, 매년 각종 무술 대회를 조직했고, 특히 진저우(金州) 무술 산타(散打) 대회 개최를 추진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당랑권(螳螂拳)의 진저우(金州) 발전을 위해, 그는 주도적으로 칠성당랑권(七星螳螂拳) 연구회를 조직하고 연중 활동을 지속했다. 2008년 호내덕(胡乃德)은 은퇴하고 무술협회 주석 자리를 자오더쑤오(趙德鎖)에게 이양했다. 호내덕(胡乃德)은 진저우(金州) 무술협회 주석 재임 기간 동안, 광범위하게 각 문파 무술가들을 단결시키고 각종 활동을 전개하여, 진저우취(金州區) 무술 사업 발전에 중요한 공헌을 했다.
이홍준(李洪俊)은 1942년 다롄(大連)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무술을 익혔으며, 먼저 다롄(大連)의 저명한 나한지공권(羅漢地功拳) 대사 왕하오신(王好信)에게 나한권(羅漢拳)과 지공권(地功拳)을 배웠고, 이후 다롄(大連) 칠성당랑권(七星螳螂拳) 대사 치징마오(齊景茂)에게 당랑권(螳螂拳), 태극권(太極拳) 및 각종 기계를 배웠다. 동시에 왕슈화(王秀華), 왕칭자이(王慶齊) 등 대가들에게 수년간 배웠으며, 칠성당랑권(七星螳螂拳)의 권법, 공법(功法), 기계(器械)를 완전히 습득했다. 수년간의 무술 수련 및 전수 경력에서 이홍준(李洪俊) 선생은 제자가 많았으며, 주요 제자로는 곽항곤(郭恒坤), 관자쥔(官家軍), 장싱카이(張行凱), 손운유(孫雲有), 장춘공(張春功), 가영(賈榮) 등이 있다. 그의 제자 곽항곤(郭恒坤)의 재전 제자들은 전국, 성(省), 시(市) 무술 대회에서 여러 차례 당랑권(螳螂拳) 금, 은메달을 획득했고, 금요대 코치(金腰帶教練員) 칭호를 얻었다. 여러 명의 제자가 4단, 5단 단위를 획득하고 무술 코치 증서를 취득했다.
지쉐위안(遲學元)은 1944년 랴오닝성(遼寧省) 다롄시(大連市)에서 태어났으며, 본적은 산둥성(山東省) 푸산셴(福山縣)이다. 어릴 때부터 무술을 좋아했으며, 1953년부터 난산 권방(南山拳坊)에서 덩건리(鄧根立)에게 사사하여 장권(長拳)을 배웠고; 같은 해 가을 성리차오(勝利橋) 후마도(後馬道)에서 머우샹구(牟香古)에게 사사하여 당랑권(螳螂拳)을 배웠다; 1954년부터 1971년까지 왕전의(王傳義)에게 사사하여 칠성당랑권(七星螳螂拳)을 배웠고, 칠성당랑권(七星螳螂拳) 4대 장문인(掌門人)이 되었다.
1961년 왕전의(王傳義)는 지쉐위안(遲學元)이 고생을 감수하고 연구에 몰두하는 것을 보고, 칠성당랑권(七星螳螂拳)의 가전 전수법(家傳傳法卷)을 그에게 전수하고 “능한당(能閑堂)”이라는 당호(堂號)를 하사했다. 1971년 왕전의(王傳義)가 다롄(大連)을 떠나기 전, 그를 칠성당랑권(七星螳螂拳) 4대 정식 제자(頂門徒弟)로 세우고, 그의 조부 왕운생(王雲生)이 창시한 칠성당랑권(七星螳螂拳) 권보(拳譜) 십여 권을 그에게 전수했다. 지쉐위안(遲學元)은 1960년대에 왕전의(王傳義)가 칠성당랑권(七星螳螂拳) 권보(拳譜)를 정리하는 것을 도왔기 때문에, 국내에서 유일하게 칠성당랑권(七星螳螂拳) 50여 가지 투로(套路)를 습득한 권사(拳師)가 되었다. 지쉐위안(遲學元)은 1972년부터 1985년까지 총슈펑(叢秀峰), 딩자오중(丁兆忠), 가위콴(賈毓寬), 중요셩(鍾有盛)에게 태극매화당랑권(太極梅花螳螂拳)을 배웠다.
1986년 전국 무술 발굴 정리 작업에서, 지쉐위안(遲學元)은 자신이 오랫동안 소장해 온 당랑권(螳螂拳) 권보와 기계보 9권 및 고대 병기 등을 국가에 헌납했으며, 국가 체육위원회로부터 전국 무술 발굴 정리 작업의 선진 개인으로 평가받았고, 공헌 권보 2등 웅사상, 고병인 2등 웅사상을 받았다. 같은 해 랴오닝성(遼寧省) 무술 발굴 정리 작업의 선진 개인으로 평가받았다.
지쉐위안(遲學元)은 수십 년간 수련했으며, 지식이 풍부하지만, 겸손하고 자신을 내세우지 않으며, 이해득실을 따지지 않고, 비밀을 지키려 하지 않는다. 1991년 산둥 옌타이(煙台) 국제 당랑권(螳螂拳) 친목회 이사로 초빙되었고; 1994년 《중국 무술 명인 사전(中國武術名人辭典)》에 선정되었으며; 2001년 전국 당랑권(螳螂拳) 명가 우승상을 수상했고; 2002년 라이양시(萊陽市) 당랑권(螳螂拳) 연구회 고문으로 초빙되었고; 2004년 칭다오 라오산배(嶗山杯) 당랑권(螳螂拳) 대회 금메달을 획득했고; 2007년 산둥 옌타이(煙台) 무술 축제 금메달을 획득했다.
지쉐위안(遲學元)은 현재 중국 무술협회 회원, 랴오닝성(遼寧省) 무술협회 회원, 영국 칠성당랑권(七星螳螂拳) 협회 명예 주석, 고문, 국제 중국 쿵푸 총회 회원이다. 근래 지쉐위안(遲學元)은 칠성당랑권(七星螳螂拳)을 빛내고 후세에 전파하기 위해 많은 제자를 가르쳤는데, 손강(孫強), 저우즈빈(周志斌), 왕스위(王仕宇), 정스톈(鄭時鈿), 쑹강이(宋剛義), 량훙정(梁洪政)(원 자오롄쥐(趙連舉)의 제자), 청머우녠(程牟年), 양융(楊勇), 천안하오(陳安好), 오융성(吳隆盛), 류칭주(劉慶祝), 왕징라이(王經來), 류시궈(劉錫國), 추팡젠(邱方儉), 강아남(薑亞南), 류수신(劉述鑫), 쉬윈보(徐雲波), 잔무스(詹姆仕), 일리샤바이(伊麗莎白), 셰디펑(謝迪峰), 싱젠(邢建), 손화준(孫驊駿), 왕빈(王斌), 위화룽(俞華龍), 황셴치(黃顯奇), 자오슈량(趙秀良), 추융(初勇), 류중융(劉忠勇) 등이 있다.
루유셴(盧有獻)(1949—2009)은 다롄(大連)에서 태어났으며, 어릴 때부터 무술을 익혔고, 12세 때 칠성당랑권(七星螳螂拳) 대사 치징마오(齊景茂)에게 사사하여 칠성당랑권(七星螳螂拳), 소림당랑권(少林螳螂拳) 권술 및 기계, 그리고 태극권(太極拳), 추수(推手)와 기계 등을 배웠다. 이후 당랑권(螳螂拳) 대사, 랴오닝성(遼寧省) 무술협회 전 부주석 왕칭자이(王慶齋) 선생에게 수년간 배웠다.
루유셴(盧有獻) 선생은 치징마오(齊景茂) 선생을 평생의 절반 이상을 따랐으며, 치(齊) 선생의 사랑을 깊이 받았고, 치(齊) 선생의 아끼는 제자로 스승의 진전(真傳)을 얻었다. 일찍이 다롄시(大連市) 무술협회 위원, 시(市) 무술협회 부비서장, 국가 코치, 국가 1급 무술 심판원, 시(市) 태극권(太極拳) 협회 훈련부 부장을 역임했다. 루(盧) 선생은 당랑권(螳螂拳), 태극권(太極拳) 무관(武館)을 운영하는 동안, 수련생이 천여 명에 달했으며, 루(盧) 선생 본인과 제자들이 각종 경기에서 당랑권(螳螂拳) 종목의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고, 국가, 성(省), 시(市) 대회에서 여러 차례 태극권(太極拳), 추수(推手) 금, 은메달을 획득했다. 루(盧) 선생의 주요 제자로는 천훙춘(陳洪純), 여가덕(呂佳德), 궁즈정(宮智正), 류지난(劉濟南), 자오신위(趙新玉), 무쥔산(慕君善), 류싱빈(劉興斌), 리닝(李寧), 쑨수치(孫樹琪), 왕샤양(王夏陽), 탄다장(譚大江), 장전하이(張振海), 쉐빈(薛濱), 진중장(晉中江), 쑨샹청(孫祥成) 등이 있다.
왕신(王昕)은 1949년 다롄 진저우(金州)에서 태어났다. 1963년 칠성당랑권(七星螳螂拳) 명가 왕청강(王清綱) 선생을 스승으로 모시고 칠성당랑권(七星螳螂拳)을 배웠다. 그는 학습에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으며, 10년간의 노력 끝에 왕(王) 선생이 가르친 권리(拳理)와 기법을 완전히 습득했고, 왕(王) 선생의 많은 사랑을 받았다. 왕(王) 선생은 또한 딸 왕위즈(王玉枝)를 그에게 시집보냈다.
1974년, 왕신(王昕)은 스승을 대신하여 제자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수년간 그는 진저우(金州) 지역의 무술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며, 1982년 왕청강(王清綱) 사부 및 사형제들과 함께 진저우(金州) 제1회 무술협회 조직 작업에 참여했다. 1983년 5월 1일 진저우취(金州區) 무술협회가 설립되었고, 왕신(王昕)은 이사로 재직했다. 1984년, 왕신(王昕)은 진셴(金縣)(현재 진저우취(金州區)) 체육위원회와 무술협회에서 발행한 무술 훈련반 증서와 무술 코치 증서를 받았다. 1999년 9월, 왕신(王昕)은 “다롄시(大連市) 진저우취(金州區) 구진 권사(九真拳社)”를 설립하고 사장(社長)을 역임했으며, 주로 칠성당랑권(七星螳螂拳), 산타(散打), 검술(劍術), 대간(大杆) 등의 기예를 전수했다. 2002년 진저우취(金州區) 제4회 무술협회 부주석을 역임했고, 같은 해 11월 진저우취(金州區) 제5회 인민대표 대회 대표로 선출되었다. 2006년, 심사를 거쳐 중국 무술 6단을 획득했다.
왕신(王昕) 선생은 수십 년간 무술 수련과 교육에 종사하며 많은 제자를 양성했으며, 무덕(武德)을 중시하고 기예를 전수하여 무술 운동의 보급과 발전에 일정한 역할을 했다. 여러 차례 제자들을 이끌고 전국, 성(省), 시(市), 구(區)의 무술 시연 및 경기에 참가하여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예를 들어 1989년 전국 산타(散打) 대회에서 제자 쑤톈쑹(蘇天松)이 70kg급 3위를 차지했다. 기한방(紀寒芳)은 1986년부터 1988년까지 3회 연속 다롄시(大連市) 무술 산타(散打) 60kg급 1위를 차지했으며, 1989년 전국 산타(散打) 5위를 차지했다. 장융웨이(臧永維)는 2003년부터 2004년까지 제자들을 이끌고 랴오닝성(遼寧省) 제1회 당랑권(螳螂拳) 선수권 대회 등 성급 무술 대회에 참가하여 금메달 26개, 은메달 48개를 획득했고; 2003년부터 2004년까지 제자들을 이끌고 두 차례 전국 전통 무술 대회에 참가하여 금메달 6개, 은메달 8개를 획득했으며; 2005년부터 2007년까지 제자들을 이끌고 전국, 성(省) 전통 무술 대회에 참가하여 금메달 5개, 은메달 6개를 획득했다. 쑨수신(孫舒欣)은 2010년 랴오닝성(遼寧省) 전통 무술 교류 대회에서 남자 그룹 기타 연성 기계 1등상을 획득했고, 2010년 10월 다롄(大連) 제5회 국제 무술 문화 축제에서 남자 단식 쌍연성 기계 1등상을 획득했다. 그의 제자 장융웨이(臧永維), 천지우펑(陳九鋒), 왕젠칭(王劍青)은 무술 4단이다.
이종귀(李宗貴)는 1950년 랴오닝성(遼寧省) 다롄시(大連市)에서 태어났다. 현재 다롄시(大連市) 무술협회 부주석을 맡고 있다. 그는 비종권(秘宗拳), 칠성당랑권(七星螳螂拳), 태극매화당랑권(太極梅花螳螂拳), 용형당랑권(龍形螳螂拳), 오행통배권(五行通背拳)의 전인(傳人)이다. 무술 세가(武術世家)에서 태어나 6, 7세부터 아버지 이서달(李緒達)을 따라 무술을 익혔고, 아버지는 일찍이 무술을 수련했으며, 회해 전역(淮海戰役)에 참전했다.
1958년, 이종귀(李宗貴)는 비종권(秘宗拳)의 서승보(徐承寶)에게 사사했고, 1964년 서승보(徐承寶)가 사망할 때까지 배웠다. 1960년대 초 3년 자연재해 기간 동안, 식량이 부족했지만 이종귀(李宗貴)는 무술 수련을 중단하지 않았다. 그는 먼저 산둥 원덩(文登) 권사 강련진(薑連進)에게 사사하여 소림권(少林拳), 태극매화당랑권(太極梅花螳螂拳), 흑호권(黑虎拳)을 배웠는데, 강련진(薑連進)은 이종귀(李宗貴)의 아버지 이서달(李緒達)의 사제였다. 그 사이에 이종귀(李宗貴)는 또한 칭다오(青島) 권사 장빙더우(張炳鬥)에게 매화당랑권(梅花螳螂拳)과 팔괘 연환검(八卦連環劍)을 배웠다.
19세 때, 이종귀(李宗貴)는 신진셴(新金縣)(푸란뎬시(普蘭店市)) 롄산 공사(連山公社)로 하방(下鄉)되었는데, 그는 칼과 검을 가지고 가서 농사일 후 여가 시간에 무술을 수련하려 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공사(公社)로부터 상납 명령을 받았다. 가전(家傳) 칼과 삼절곤(三節棍)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그는 눈물을 흘리며 어쩔 수 없이 공사(公社)에 상납했다. 비록 기계(器械)는 몰수당했지만, 무술에 미친 이종귀(李宗貴)는 포기하지 않고, 삽, 괭이 등 농사 도구를 기계(器械) 대신 사용하여 수련을 계속했다. 21세 때, 무술을 할 줄 아는 이종귀(李宗貴)는 다롄시(大連市) 경비구로 차출되어 3년간 양판희(樣板戲)를 공연했고, 이후 부대에서 군무(軍務)를 맡아 군용 무기 수리 기술 업무에 종사하며 무술 지도원도 겸하여 경비구의 군관과 노 지도자들에게 무술을 가르쳤다.
1970년대 후반, “문화대혁명(文革)”의 영향으로 무술은 침체기에 있었고, 마란쯔(馬欄子)에서 시산춘(西山村) 일대에는 무관(武館)이 하나도 없었다. 27세 때, 이종귀(李宗貴)는 시산춘(西山村)에 민가 한 채를 사서 무관(武館)을 열고 제자를 모집했는데, 당시 사허커우(沙河口) 기차역에서 완자춘(灣家村) 일대에서 유일한 무관(武館)이었다. 이종귀(李宗貴)는 당시 제자들에게 투로(套路)만 가르치고 격투 산타(散打)는 가르치지 않는다는 원칙을 세웠는데, 제자들이 문제를 일으킬까 염려했기 때문이다.
1980년, 이종귀(李宗貴)는 결혼 후 아내가 몸이 좋지 않아 종종 나한지공문(羅漢地宮門)의 왕커리(王克禮) 노사부(老師傅)에게 진료를 받으러 다녔고, 이로 인해 이종귀(李宗貴)는 왕커리(王克禮)를 알게 되었다. 당시 80세가 넘었던 왕커리(王克禮)는 민융지에(民勇街) 두부방 근처에서도 권관(拳館)을 운영하고 있었지만, 나이가 많아 가르칠 수 없었기 때문에, 특별히 이종귀(李宗貴)를 초빙하여 그를 대신해 제자를 가르치게 했고, 이는 왕커리(王克禮)가 사망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문화대혁명(文革)” 후, 다롄시(大連市) 무술협회가 업무를 재개할 수 있었고, 무술 인재 양성도 정상 궤도에 오를 수 있었다. 1983년, 시(市) 체육위원회는 이종귀(李宗貴)의 권관(拳館) “나한 권사(羅漢拳社)”에 현판을 수여했으며, 당시 다롄(大連)에는 36명의 코치가 있었고, 이종귀(李宗貴)는 그중에 포함되었다. 한 번은 이종귀(李宗貴)가 기차 체육관에서 학생을 모집했는데, 안보(安波)의 가난한 아이들이 무술을 배우고 싶었지만 학비를 낼 돈이 없었다. 이종귀(李宗貴)는 아이들의 무술에 대한 갈망하는 눈빛을 보고, 아이들을 자신의 무관(武館)으로 데려가 학비 없이 무술을 무상으로 가르쳤다.
1984년경, 이종귀(李宗貴)는 자오롄푸(趙連福)에게 사사하여 소림(少林), 칠성당랑권(七星螳螂拳), 청평검(青萍劍)을 배웠고; 1987년, 1988년경에는 다롄시(大連市) 격투 명사 왕촨위(王傳玉)에게 사사하여 권격(拳擊), 산타(散打), 무박권(武搏拳)을 배웠으며, 왕촨위(王傳玉) 선생의 수제자이자 현재 다롄시(大連市) 무술협회 주석인 자오시진(趙錫金)과 동문 사형제이다.
1992년, 이종귀(李宗貴)의 집이 스지지에(世紀街)로 이사했고, 어린이 공원에서 아침 운동을 하던 중 톈빙장(田秉江)의 제자 쉬옌(徐延)을 만났고, 이에 이종귀(李宗貴)는 쉬옌(徐延)에게 사사하여 용형당랑권(龍形螳螂拳)을 배웠고, 용형당랑권(龍形螳螂拳) 2대 전인(傳人)이 되었다.
2001년, 이종귀(李宗貴)는 다롄시(大連市) 무술협회 제4대 주석 옌쯔치(閻子奇)에게 사사했고, 무술협회의 각종 대회와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했다. 진스탄(金石灘) 중화 무관(中華武館)이 설립된 후, 이종귀(李宗貴)는 낙성식(落成儀式)에서 참석한 귀빈들을 위해 멋진 무술 시범을 보였다. 이후 매년 중화 무관(中華武館)을 방문하는 각국 원수와 국내외 귀빈들은 이종귀(李宗貴)의 무술 공연을 감상했으며, 이루이환(李瑞環)의 친절한 접견을 받았다. 많은 외국 귀빈들이 이종귀(李宗貴)의 무술 공연을 본 후 현장에서 그에게 사사하기를 원했기 때문에 그의 제자 수가 적지 않다.
이후, 이종귀(李宗貴)는 중국 무술협회 부주석, 중국 무원(武院) 부원장 장산(張山)에게 사사했고; 선양(沈陽)의 훠루이팅(霍瑞庭)(왕칭(王慶)의 마지막 제자)에게 청평검(青萍劍)을 배웠고; 소림사(少林寺) 더샹(德祥) 방장의 제자 싱장(行長) 대사 멍차오강(孟朝綱)에게 소림 경기공(少林硬氣功)을 배웠다.
이종귀(李宗貴)는 최근 몇 년간 무극권문(無極拳門) 대사 우전스(吳振世)에게 사사하여 무극권(無極拳)과 팔괘장(八卦掌)을 배웠다.
이종귀(李宗貴)는 50여 년간 무술을 수련했으며, 무술에 미쳐 있었다. 2002년부터 52세의 나이로 전국의 각종 무술 경기장을 쉴 새 없이 뛰어다녔고, 10년간 중국 대륙, 홍콩(香港), 마카오(澳門)를 발로 누비며 금메달 164개를 획득했으며, 국가 무술협회 부주석, 국가 무술 학원 부원장 장산(張山)으로부터 친절하게 “무치(武癡)”라고 불렸다. 이 외에도 “랴오난 검협(遼南劍俠)”, “선저우 검협(神州劍俠)”, “화샤 무장원(華夏武狀元)”이라는 별명이 무술 경기장에서 울려 퍼졌다. 그중 비교적 대표적인 예는 다음과 같다:
* 2002년 “자오창쥔배(趙長軍杯)” 전국 무술 대회에서 이종귀(李宗貴)는 첫 금메달을 획득했다.
* 2003년 제1회 홍콩(香港) 국제 무술 대회에서 금메달을 획득하여, 이 대회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다롄(大連) 사람 중 첫 번째가 되었다.
* 2004년 제2회 홍콩(香港) 국제 무술 축제에서 청평검(青萍劍)을 시연하고 금메달을 획득하여, 무술 대회에서 청평검(青萍劍)을 사용하여 금메달을 획득한 국내 첫 번째 선수였다.
* 2008년 무당산(武當山) 아래 스옌시(十堰市)에서 개최된 제3회 세계 중국 전통 무술 선수권 대회에 랴오닝성(遼寧省) 대표로 참가하여 검술(劍術)과 당랑권(螳螂拳) 1위를 차지했으며, 이 종목에서 1위를 차지한 랴오닝성(遼寧省) 최초의 선수였다.
* 2011년 후난성(湖南省) 제1회 국제 무술 축제에서 개인 종합 우승을 차지했다.
* 2012년 황산(黃山) 제5회 세계 전통 무술 선수권 대회에서 도술(刀術) 1위를 차지했다.
이종귀(李宗貴)가 금메달을 획득한 배경에는 일화가 있다.
한번은 다롄시(大連市) 무술협회 회의에서 자오시진(趙錫金) 주석이 이종귀(李宗貴)에게 “만약 60세 이전에 전국 무술 대회 금메달 100개를 획득하면 순금으로 만든 큰 금메달을 포상하겠다”고 말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종귀(李宗貴)가 이미 50대라는 점을 고려하여 자오시진(趙錫金)은 자발적으로 기한을 62세 이전으로 연장할 것을 제안했지만, 이종귀(李宗貴)는 이를 거절하고 자신이 기한 전에 반드시 100개의 금메달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과연 이종귀(李宗貴)는 놀라운 속도로 금메달을 획득했고, 60세가 되기 전인 2008년 58세에 제3회 세계 무술 축제 전통 무술 선수권 대회에서 검술(劍術)과 당랑권(螳螂拳) 우승을 차지하며 100번째와 101번째 금메달을 획득했다.
이에 대해 2009년 11월 28일, 시(市) 무술협회는 특별히 이종귀(李宗貴)를 위한 “백금 경공회(百金慶功會)”를 개최했다. 회의에서 다롄시(大連市) 주청칭(朱程清) 부시장은 이종귀(李宗貴)에게 300여 그램의 순금으로 만든 “백금 기념” 금메달을 직접 수여했으며, 이(李) 노선생은 “화샤 무장원(華夏武狀元)” 칭호를 받았다.
이종귀(李宗貴)는 자신이 경기에 참가하여 금메달을 획득하는 것 외에도, 다롄시(大連市) 무술협회 회원, 노권사(老拳師)들의 경기 참가를 적극적으로 도왔으며, 그의 주도하에 곽항(郭恒), 쑹슈톈(宋修田), 차오젠천(曹建臣), 저우전옌(周振岩), 린쉐하이(林學海) 등도 국제급 무술 대회에서 금메달을 획득하여, 다롄(大連) 무술이 세계로 나아가고 다롄(大連) 무술의 이미지를 보여주는 데 적극적인 공헌을 했다.
2012년 8월, 이종귀(李宗貴)의 장검 “유룡 추혼검(遊龍追魂劍)”은 세계 기네스 본부로부터 “국제급 무술 대회에서 사용되어 금메달을 획득한 가장 긴 검”으로 인정받고 증서를 수여받았다. “유룡 추혼검(遊龍追魂劍)”은 길이 1.62미터, 무게 1.2kg이며, 이종귀(李宗貴)는 이 검을 사용하여 2011년 제1회 중국 후난(湖南) 무술 축제에서 개인 종합 금메달을 획득했다. 주청칭(朱程清) 부시장이 그에게 이 세계 기록 증서를 직접 수여했다.
2012년 톈진(天津) 하계 다보스 포럼에서 이종귀(李宗貴)는 초청받아 참석한 귀빈들을 위해 검술을 시연했다.
또한, 이종귀(李宗貴)는 세계 무술 연합회 산수도(散手道) 연맹의 명예 주석으로 초빙되었고, 세계 저명 무술가 심사 위원회로부터 “세계 무림 백걸(世界武林百傑)”로 선정되었으며, 홍콩(香港) 국제 무술 문화 연구원의 무학 교수(武學教授)로 초빙되었다.
2012년 10월 초, 중앙 텔레비전(中央電視台) 《석양홍(夕陽紅)》 프로그램이 이종귀(李宗貴)에 대한 특집을 제작했다. 10월 30일 오전에 《장검 재수(長劍在手)》라는 제목의 이 프로그램이 방영되었다. 영상에서 이종귀(李宗貴)는 자신의 미래 목표를 밝혔는데: 66세 때 개인 통산 200번째 금메달을 획득하는 것이다.
이종귀(李宗貴)는 현재 잉커루(迎客路) 싱광 주창(星光酒廠) 구내에 무관(武館)을 운영하며 제자를 모집하고 무술을 전파하고 있다. 주요 제자로는 자오스란(趙世蘭), 싱광샹(邢廣祥), 호내춘(胡乃春), 왕하이창(王海強), 인훙리(尹洪利), 손영무(孫永武), 장싱카이(張行凱), 왕셴요우(王先有), 이야난(李婭楠)(우한 체육 학원, 국가급 운동 건장), 선중리(沈中立)(산둥성(山東省) 무술 전문팀, 국가급 무술 건장), 샤오쭤춘(邵作春), 마위콴(馬玉寬), 이마오셩(伊茂勝), 린다융(林大勇), 저우창린(周長林), 위카이(於凱), 왕쥔(王軍), 곽싱용(郭興勇), 취톄파(曲鐵發), 바오위핑(包玉平), 유밍(由明), 장추위(張秋玉), 렁즈첸(冷志前), 호후이룬(胡彙侖), 선중리(沈中立), 장청민(張成敏), 이야난(李婭楠), 위선진(於深金), 량젠더(梁建德), 양전둥(楊振東), 천원제(陳文傑), 샹창하이(相昌海), 장바오차이(張寶財), 류싱웨이(劉興偉), 잔예췬(戰業群), 양롄청(楊連城), 천자오정(陳照政), 처잉젠(車營建), 린이런(林翌人), 자오중궈(趙忠國) 등이 있다.
곽항곤(郭恒堃)은 1951년 랴오닝성(遼寧省) 다롄시(大連市)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무술을 익혔으며, 잇따라 자오매화당랑권(子午梅花螳螂拳) 명가 왕즈중(王志忠), 칠성당랑권(七星螳螂拳) 명가 훠루이팅(霍瑞亭), 무술 명가 왕촨위(王傳玉), 무극권(無極拳) 명가 우전스(吳振世) 등에게 전통 무술과 격투를 배웠으며, 수년간의 연구와 탐색을 통해 각 문파 권술에 대해 비교적 깊은 이해를 갖게 되었다.
1980년, 곽항곤(郭恒堃)은 “다롄 항곤 칠성당랑권 무관(大連恒堃七星螳螂拳武館)”을 창립하고 관장 겸 코치로 재직했다. 자신의 무공을 향상시키기 위해, 자주 각 문파 명가들과 교류하고 기예를 겨루었으며, 풍부한 교육 경험을 축적했다. 20여 년간, 그의 무관(武館)은 700여 명의 수련생을 모집했으며, 적절한 교육 방법과 기본기 훈련 중시 덕분에, 그의 학생들은 국내외 중요한 대회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다. 예비 통계에 따르면, 총 금메달 500여 개, 은메달 400여 개, 동메달 500여 개를 획득했으며, 여러 차례 성(省), 시(市) 대회에서 단체 1위라는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제자 차이싱왕(蔡興旺)은 2012년 전국 제5회 전통 무술 선수권 대회에서 금메달 1위를 차지하여 다롄(大連)의 명예를 드높였다.
곽항곤(郭恒堃) 선생은 수십 년간 무술을 수련했으며, 자신을 채찍질하고 끊임없이 노력했으며, 성(省), 시(市) 무술 대회에 적극적으로 참가하여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2003년 랴오닝성(遼寧省) 제1회 당랑권(螳螂拳) 선수권 대회 금메달을 획득했고, 같은 해 랴오닝성(遼寧省) 제1회 무술 이미지 대사 1등상을 수상했다. 2004년 제5회 칭다오(青島) 국제 전통 무술 선수권 대회 “무술 명가 금요대 대상”을 수상했다. 2005년 제2회 중국 옌타이(煙台) 국제 무술 축제 우수 당랑권(螳螂拳) 사범상을 수상했다. 같은 해 다롄시(大連市) 무술협회 돌출 공헌상을 수상하고 다롄(大連) 우수 코치로 평가받았다. 2006년 중앙 텔레비전(中央電視台) “무술 엘리트 대회 및 제1회 국제 절권도(截拳道) 권왕 쟁패전” 전통 무술 투로(套路) 단체 1위를 차지했다. 2009년부터 2012년까지 4회 연속 다롄(大連) 국제 무술 축제 단체 1등상을 획득했다. 2011년 제8회 옌타이(煙台) 무술 문화 축제에 팀을 이끌고 참가하여 “당랑권(螳螂拳) 고향 선수권 대회” 단체 1위를 차지했으며, 동시에 우수 권사(拳師) 칭호를 획득했다.
주요 제자로는 한젠차오(韓建超), 인쭝런(尹宗仁), 장한(張涵), 쉬즈칭(徐志慶), 양더리(楊德利), 차이싱왕(蔡興旺), 쑨위지(孫宇霽), 장청후이(張晟輝), 양싱쥔(楊興軍), 쉬잉쩌(徐英澤) 등이 있다.
곽항곤(郭恒堃) 선생은 현재 다롄시(大連市) 무술협회 부주석, 국가 무술 6단, 국제 산타(散打) 7단이다.
왕빙롄(王炳蓮)은 1952년 랴오닝성(遼寧省) 다롄시(大連市)에서 태어났다. 소년 시절 왕하오신(王好信) 선생의 무관(武館)에 가서 나한지공권(羅漢地功拳)을 배웠고, 1969년 정식으로 다롄(大連) 칠성당랑권(七星螳螂拳) 명가 왕슈화(王秀華)에게 사사하여 칠성당랑권(七星螳螂拳)을 배웠다. 칠성당랑권(七星螳螂拳)의 권리(拳理)와 기법을 체계적으로 습득했으며, 1981년부터 취미로 무술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1983년 다롄시(大連市) 체육위원회의 심사를 거쳐 무술 코치 증서를 받았고, 취미 무술 훈련반을 개설했으며, 이후 “왕빙롄 당랑권사(王炳蓮螳螂拳社)”로 개명하고, 여러 차례 제자들을 이끌고 다롄(大連) 무술 대회에 참가했다. 1984년부터 다롄시(大連시) 무술 대회 심판 업무를 시작했다. 1987년 국가 2급 심판원 시험에 합격했고, 1992년 국가 1급 심판원으로 승진하여 부심판장, 심판장, 부총심판장 등을 역임했다. 2003년 다롄시(大連市) 제5회 무술협회 임원 교체 시 자오시진(趙錫金) 무술협회 주석에 의해 무술협회 부비서장으로 초빙되었고, 2004년 다시 다롄시(大連市) 무술협회 부주석으로 초빙되어 무술 대회 및 교육 업무를 담당했다. 그의 일화는 《중화 무림 인물지(中華武林人物志)》, 《중화 무술 30년 특집호(中華武術30年特刊)》에 수록되었다.
왕빙롄(王炳蓮) 선생은 현재 삼산포(三山浦) 민간 전통 무술 회관 이사회 회장과 종합 무관(武館) 관장, 국가 무술 6단이다.
량훙정 (梁洪政)
량훙정(梁洪政)은 1954년 4월 다롄시(大連市) 진저우구(金州區) 얼스리춘(二十裏村)에서 태어났으며, 칠성당랑권(七星螳螂拳) 5대 장문인(掌門人)이다.
량훙정(梁洪政)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학구열이 높았으며 무술을 매우 좋아하여 보이는 무술은 무엇이든 배웠다. 민간 무술인들에게서 장권(長拳), 통배권(通背拳), 지당권(地趟拳)을 배웠다. 고생을 마다하지 않아 깊은 하단(下盤) 기초와 다리 기술을 연마했다.
스무 살 때 량훙정(梁洪政)은 30리 떨어진 곳에 국영 공장이 있는데, 공장장 자오롄쥐(趙連舉)가 칠성당랑권(七星螳螂拳) 창시자 왕운펑(王雲鵬)의 직손(嫡孫) 왕촨이(王傳義)의 입실제자(入室弟子)이며, 많은 사형제들 중에서 기격(技擊)에 뛰어나 참된 무공을 전수받았다는 소문을 듣고, 그에게 배우기 위해 달려갔다. 자오(趙) 공장장은 제자를 받지 않았고, 량훙정(梁洪政)은 자주 그를 귀찮게 찾아갔다. 자오(趙) 공장장은 어쩔 수 없이 어느 날 그에게 한 초식(招式)을 가르쳐주며 말했다: “이 초식으로 10명을 쓰러뜨리면 다시 나를 찾아와라”. 집으로 돌아온 량훙정(梁洪政)은 이 초식을 각고의 노력으로 연습했고, 며칠 후 그는 이 초식으로 친구들을 능숙하게 쓰러뜨릴 수 있게 되었다. 그 후 자오(趙) 사부를 찾아가 다른 초식을 배웠다. 자오(趙) 사부는 그의 부지런함과 각고의 노력에 감동하여 공식적으로 그를 입실제자로 받아들이고 평생 배운 것을 전수했다.
공식적으로 스승을 모시고 배우면서 량훙정(梁洪政)은 칠성당랑권(七星螳螂拳)의 광대하고 심오함을 깊이 느끼고, 이 권법을 집중적으로 탐구하기로 결심했다. 자오(趙) 사부는 그의 탐구 정신에 감동하여 그를 동문 사숙(師叔) 지쉐위안(遲學元)에게 추천하여 스승으로 모시게 했다. 지쉐위안(遲學元)은 왕촨이(王傳義)가 지정한 칠성당랑권(七星螳螂拳) 4대 장문인(掌門人)으로, 왕촨이(王傳義)의 많은 제자들 중에서 투로 연련(演練)과 칠성당랑권(七星螳螂拳) 이론에 능했다. 량훙정(梁洪政)이 지쉐위안(遲學元)을 스승으로 모신 후, 지쉐위안(遲學元)은 자신이 배운 것을 그에게 전수하고, 역대 권보(拳譜), 단타비요(短打秘要), 기공 연습법 등 귀중한 문집과 칠성당랑권(七星螳螂拳) 문파 전승의 칠보(七寶)를 그에게 전수하여 그를 칠성당랑권(七星螳螂拳) 5대 장문인(掌門人)으로 지정했다. 주된 에너지를 한 문파의 무공 수련에 집중한 것이 량훙정(梁洪政)에게 단맛을 안겨주었지만, 동시에 전통 무술의 문파적 편협함에 빠지게 했다. 1990년대 초, 그는 뤼쯔젠(呂紫劍)이 옌쯔치(閻子奇)를 중국 무술 문화의 대가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 자주 옌(閻) 씨 집을 찾아 함께 중국 무술 문화를 논의했다. 량훙정(梁洪政)은 옌쯔치(閻子奇)가 자신의 친구이니 그에게 가르침을 청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생각하고, 그 후 자주 옌쯔치(閻子奇)를 초대하여 차를 마시며 무술을 탐구했고, 점차 좋은 스승이자 친구가 되어 15년간 함께 탐구하며 보냈다. 오늘날 량훙정(梁洪政)은 각 문파 권보(拳譜) 10여 종을 수집하고 수백 권의 책을 소장하며 각 문파의 무학을 세심하게 연구하여 무술 친구들로부터 “무술 도서관”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무술과의 인연, 수년간의 연구를 통해 량훙정(梁洪政)은 많은 무술 수련자의 특성을 가지게 되었다. 그는 겸손하고 배우기를 좋아할 뿐만 아니라, 성격이 시원하고 의롭게 말했다. 량훙정(梁洪政)은 수십억 위안 자산 기업의 이사장인데, 그의 기업 성공 비결은 “무도(武道)로 상업에 임하고, 신뢰와 의리를 중시하며, 공정하게 이윤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1980년대, 원저우(溫州)의 한 기업이 량훙정(梁洪政)에게 100만 위안이 넘는 대금을 지불하지 않아, 그는 어쩔 수 없이 직접 찾아가 독촉했다. 채무를 진 사장(老總)은 그가 사무실을 떠나려 하지 않는 것을 보고, 이런 식으로 빚을 독촉하는 사람은 분명 무공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자신의 경호원을 불렀다. 이 경호원은 키 1미터 85센티미터에 건장한 체격이었고, 그의 체중보다 50여 킬로그램이 더 나갔다. 양측은 먼저 문비(文比, 말로 겨루기)로 힘을 겨루고, 후에 무비(武比, 무술로 겨루기)에서는 무림 규칙에 따라 점혈까지만 하기로 합의했다. 문비 추수(推手)에서는 량훙정(梁洪政)이 졌지만, 무비에서는 량훙정(梁洪政)이 상대방을 세 번 쓰러뜨려 최종 승리했다. 채무자는 이 광경을 보고 즉시 돈을 지불하고 그 후 친구가 되었다. 그 기간 동안 량훙정(梁洪政)은 이와 유사한 방식으로 많은 친구들을 사귀었고… (텍스트 일부 잘림) …권, 팔괘 단: 1989년 산둥(山東) 지난(濟南) 중국 서진(書鎮)에서 스승의 지도를 받아 중국식 (텍스트 일부 잘림) 배꼽을 잡고 웃었다. 2011년 9월 연합 무술협회 “현재 일(目前日)” 반구호, 육연성(六連城)에 가입하고, 쉬신(敘欣) 스승의 지도 아래 2012년 7월 (텍스트 일부 잘림) 성(省) 전통 무술사 55권 종목을 전달받아 금메달을 획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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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롄(大連)에서의 매화당랑권(梅花螳螂拳) 전수자
류중카이 (劉仲愷)
류중카이(劉仲愷)(1898-1987)는 자(字)가 퉁러(同樂)이며, 본적은 산둥성(山東省) 하이양셴(海陽縣)이다.
류중카이(劉仲愷)는 청소년기에 고향 하이양(海陽), 옌타이(煙台)에서 현지 권사들에게 장권(長拳), 당랑권(螳螂拳)을 배웠다. 1934년 옌타이(煙台)에서 관동(關東) 지방으로 와서 다롄(大連)으로 왔고, 다롄(大連)에서 기춘팅(紀春亭), 최수산(崔壽山) 두 선생에게 체계적으로 태극당랑권(太極螳螂拳)을 배웠다. 류중카이(劉仲愷)는 1943년부터 다롄시(大連市) 중산구(中山區) 민이제가(民意街)의 판잣집(민주 광장 도로변 근처) 약방 뒤에서 권관(拳館)을 열고 권법을 가르쳤고, 이후 중산구(中山區) 치이제가(七一街) 삼십삼중학교 강당, 중산 광장, 노동 공원 대종(大鐘) 근처에서 자원봉사로 권법을 가르쳐 백여 명의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의 아들 류춘보(劉春波), 양자 우스쿠이(吳世奎), 조카 류춘허(劉春河)는 모두 류중카이(劉仲愷)에게 권법을 배웠다. 그의 손자 류잔궈(劉占國)는 일곱 살 때부터 조부에게 권법을 배웠고, 후에 총슈펑(叢秀峰)에게 “팔주(八肘)”를 배웠고, 중유성(鐘有盛)에게 “매화로(梅花路)”, “라봉수(拉封手)”, “피수(批手)” 등을 배웠다.
충수민 (叢樹敏)
충수민(叢樹敏)(1904-1981)은 자(字)가 시우펑(秀峰)이며, 호(號)는 샤오펑(笑風)으로, 자(字)를 사용하여 활동했다. 본적은 산둥성(山東省) 웨이하이시(威海市) 펑린샹(鳳林鄉) 청쯔춘(城子村)이다.
1913년 본 마을 사숙(私塾)에서 글을 읽었고, 1917년 다롄(大連)으로 왔다. 1920년 다롄시(大連市) 중화 청년회(中華青年會)에 가입했고, 1925년 4월 중국 공산주의 청년단에 가입했으며, 같은 해 중국 공산당에 입당했다. 1926년 중국 공산당 다롄(大連) 지부 조직부장을 역임하며 여러 신분으로 지하당 활동을 위장했다. 1946년 다롄(大連)이 해방된 후, 충슈펑(叢秀峰)은 당시 다롄시(大連市) 부시장이었던 천윈타오(陳雲濤)에게 자신의 생활과 업무 경험을 보고했고, 같은 해 12월 시 정부 총무과 소개로 중소 합영(中蘇合營) 다롄 연합 조선 회사에 근무했으며, 1963년 은퇴했다.
1921년 1월 다롄(大連) 중화 청년회(中華青年會) 무술반이 설립되자 충슈펑(叢秀峰)은 무술반에 들어가 류둬산(劉多山), 쑨쯔제(孫子傑)에게 무술을 배웠다.
1928년 충슈펑(叢秀峰)은 다시 태극매화당랑권(太極梅花螳螂拳) 대사 최수산(崔壽山), 기춘팅(紀春亭)에게 당랑권(螳螂拳)을 배웠다. 기춘팅(紀春亭)은 자신이 마스터한 태극매화당랑권(太極梅花螳螂拳)을 아낌없이 가르쳤으며, 충슈펑(叢秀峰)은 기춘팅(紀春亭)이 다롄(大連)에서 가르친 큰 제자로, 강렬한 성격과 정의감이 넘쳤다. 말년에는 중유성(鐘有盛), 류중카이(劉仲愷) 두 사제(師弟)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무술을 즐겼고, 함께 후배들을 가르치다가 세상을 떠났다. 주요 전수자로는 왕이링(王義令), 쑨수궈(孫淑國), 장훙라이(薑宏來), 루밍진(蘆明金), 정롄청(鄭連成), 류춘허(劉春河), 자오원저우(趙文洲), 한칭저우(韓清洲) 등이 있다.
중유성 (鐘有盛)
중유성(鐘有盛)(1906-1992)은 랴오닝성(遼寧省) 다롄시(大連市) 진셴(金縣) 성 동서거우(城東西溝) 사람이다.
1928년 최수산(崔壽山), 기춘팅(紀春亭)을 스승으로 모시고 태극매화당랑권(太極梅花螳螂拳)을 배웠고, 1931년 기춘팅(紀春亭) 선생이 톈진(天津)으로 간 기간 동안 중유성(鐘有盛)은 여전히 무관(武館)에 남아 사형제들과 함께 무공을 익혔다. 1933년 기춘팅(紀春亭) 선생이 다롄(大連)으로 돌아와 시강(西崗)에 무관(武館)을 열자, 계속 스승을 따라 무술을 배웠다. 최수산(崔壽山) 선생의 장남 최훙자오(崔鴻照)는 스물한 살 때 다롄(大連)으로 와서 중유성(鐘有盛)의 집에서 머물며 함께 라봉수(拉封手), 주폐수(走閉手), 창추(搶捶) 등을 배우고 연마했다.
193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 최수산(崔壽山) 선생은 산둥(山東)과 다롄(大連)을 빈번하게 왕래하며, 때로는 중유성(鐘有盛)의 집에서 머물며 반복적으로 지도했고, 중유성(鐘有盛)이 배운 라봉수(拉封手), 주폐수(走閉手), 창추(搶捶) 등의 기술은 나날이 숙련되었다.
중유성(鐘有盛)은 평생 무술을 사랑했으며, 태극매화당랑권(太極梅花螳螂拳)의 정수를 깊이 터득하여 조예가 깊었다. 그는 겸손하고 온화하며 우아했다. 문파적 편견이 없어 배우러 오는 사람을 마다하지 않았다. 후배들에게는 끊임없이 말과 행동으로 가르쳐, 업계 동료들의 존경과 후배들의 존경을 깊이 받았다. 주요 전수자로는 충이쯔(叢毅滋)(총슈펑(叢秀峰)의 아들), 장훙라이(薑宏來), 왕징훙(王景宏), 가오파더(高發德), 취광하오(曲廣浩), 자원촨(賈文川), 이펑위(李峰煜), 왕쥔둥(王俊東), 장수위안(張書元), 장펑양(張鳳陽), 장자이(張家毅)(중유성(鐘有盛)의 외손자), 왕서우민(王壽敏), 류잔궈(劉占國)(류중카이(劉仲愷)의 손자), 장궈칭(張國慶), 최화평(崔和平) 등이 있다.
자위콴 (賈毓寬)
자위콴(賈毓寬)(1910-1989)은 산둥(山東) 무핑(牟平) 사람이다. 1930년대 다롄(大連)으로 와서 다롄(大連) 철도에서 근무했다. 1965년 스얼거우(寺兒溝)에 무관(武館)을 열고 제자들을 모집하여 태극매화당랑권(太極梅花螳螂拳)을 가르쳤다. 주요 전수자로는 쉬자펑(許家峰), 쉐위밍(薛玉明), 왕징훙(王景宏), 가오파더(高發德), 취광하오(曲廣浩), 자원촨(賈文川), 이펑위(李峰煜), 왕쥔둥(王俊東), 장수위안(張書元), 린스밍(林世明) 등이 있다.
취선 (曲伸)
취선(曲伸)(1921-2005)은 본명 취롄청(曲連成)으로, 랴오닝성(遼寧省) 다롄시(大連市) 사람이다. 1934년 다롄(大連)에서 자오페이치(趙培起), 왕쯔장(王子章)을 스승으로 모시고 연청권(燕青拳) 권술 및 기계를 배웠다. 1936년 최수산(崔壽山)을 스승으로 모시고 태극매화당랑권(太極梅花螳螂拳)을 배웠다. 1967년 지린성(吉林省) 창춘시(長春市) 제1무술관 아침 무술 지도소에서 코치를 역임했다. 1970년 이후 다롄(大連) 중유성(鐘有盛) 선생(매형)의 집으로 가서 최수산(崔壽山)이 남긴 태극매화당랑권(太極梅花螳螂拳)과 내공(內功)의 문자 자료를 발굴 정리하고, 모든 투로(套路)를 다시 정리했다. 그 중 『삼회구전환양나한공(三回九轉還陽羅漢功)』과 『팔단금신법(八段金身法)』의 수련 방법을 문서화하여 창춘시(長春市)에서 공법과 권법을 전수하기 시작했다. 1983년 지린성(吉林省) 무술 시범에 참가하여 우수상을 받았다. 1985년 지린성(吉林省) 무술 발굴 작업 선진 개인상을 받았고, 동북 사범 대학, 지린 공업 대학, 창춘 지질 대학, 바이치우언(白求恩) 의과 대학으로부터 무술협회 고문으로 초빙되었다. 1995년 창춘시(長春市)에서 “창춘시 당랑권(螳螂拳) 연구회”를 설립하고 회장을 맡았다. 주요 전수자로는 왕처자(王策佳), 왕진성(王金生) 등이 있다.
왕처자(王策佳)는 일찍이 창춘시(長春市) 무술협회 위원, 국가 2급 심판을 역임했으며, 2002년 창춘시(長春市) 무술 경기에서 노년부 권술 1위, 검술 2위를 차지했다. 2006년 창춘(長春) 전통 무술 투로 공법 절기 실용 기술 대회에서 전통 공법 시범 1위를 차지했다. 왕진성(王金生)은 일찍이 창춘시(長春市) 무술협회 위원을 역임했으며, 2000년 창춘시(長春市) 지창(吉昌)컵 무술 경기에서 곤술 3위를 차지했고, 2005년 창춘시(長春市) 전통 무술 투로 절기 대회에서 1위를 차지했다.
장훙라이 (薑宏來)
장훙라이(薑宏來)는 1940년 2월 랴오닝성(遼寧省) 다롄시(大連市)에서 태어났다. 1956년 충슈펑(叢秀峰)을 스승으로 모시고 태극매화당랑권(太極梅花螳螂拳)을 익혔고, 3년간 기본기를 각고의 노력으로 수련한 후 전통 투로(套路)를 배우기 시작했다. 1981년 충슈펑(叢秀峰) 선생이 사망한 후, 사숙(師叔) 중유성(鐘有盛)에게 계속 배웠다. 동문 사제(師弟) 가오파더(高發德), 취광하오(曲廣浩), 자원촨(賈文川)과 함께 배우고 연마했으며, 주로 라봉수(拉封手), 주폐수(走閉手) 등을 익혔다.
장훙라이(薑宏來)는 수년간 무술에 미친 듯이 열중하여 공력(功力)이 깊고 해박했으며, 각고의 노력으로 연구하고, 몰입하여 수련하며, 한 치의 오차도 없었다. 추위나 더위에도 불구하고 단 한 번도 중단하지 않았고, 특히 기격(技擊)에 능하여 동문 중에서 뛰어난 인물이었다. 1960년대 장훙라이(薑宏來)는 입대하여 구이저우(貴州)에 있는 동안 군구(軍區) 사령관 경호원을 역임했고, 자주 구이저우성(貴州省) 무술협회 부주석 왕즈허(王之和), 다롄(大連) 무술가 메이잔위안(梅占元)(아들을 따라 구이저우(貴州) 건설 지원)과 함께 무술을 교류하며 두 명사로부터 지도를 받아 무학이 크게 향상되었다.
은퇴 후 장훙라이(薑宏來)는 무술 수련과 제자 양성을 즐기며 많은 무술 인재를 양성하여 태극매화당랑권(太極梅花螳螂拳)의 홍보에 공헌했다. 2005년 제자들을 이끌고 “제2회 중국 옌타이(煙台) 무술 축제”에 참가하여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다. 제자 저우구이친(鄒桂芹)은 태극매화당랑권(太極梅花螳螂拳) 전통 투로 금메달을 획득했고, 톈훙(田紅)은 금메달 2개, 은메달 1개를 획득했으며, 대회 조직 위원회로부터 “우수 사마귀권사상”을 받았다. 2005년 칭다오(青島) 국제 사마귀권(螳螂拳) 초청 경기(라오산컵)에 참가하여 저우구이친(鄒桂芹)은 금메달을 획득했고, 톈훙(田紅)은 금, 은, 동메달을 각각 1개씩 획득했다. 2009년 장훙라이(薑宏來)는 중국 무술 웹사이트로부터 “무림 명사” 칭호를 받았다. 주요 전수자로는 왕융지(王永吉), 가오젠룽(高劍龍)(가오파더(高發德)의 아들), 저우구이친(鄒桂芹), 톈훙(田紅), 다이구이화(戴桂華), 양언청(楊恩程) 등이 있다.
돤겅선 (段庚申)
돤겅선(段庚申)은 1946년 산둥성(山東省) 루산셴(乳山縣)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고향에 무술을 익히는 풍습이 있어 어려서부터 사마귀권(螳螂拳)을 연습했다. 1957년 다롄(大連)으로 와서 자주 권사들이 무술을 익히는 곳을 찾아가 관찰하고 배웠다. 1962년 초, 쿠이잉제가(葵英街)에 거주하던 충수민(叢樹敏) 선생을 스승으로 모시고 매화당랑권(梅花螳螂拳)을 배웠다. 1963년 초, 우전둥(吳振東)의 제자 류수난(劉樹楠)을 스승으로 모시고 통배권(通背拳)을 배웠고, 1980년 스승이 사망할 때까지 배웠다.
수년간 통배권(通背拳)을 널리 알리고 발전시키기 위해 한 푼도 받지 않고 제자들을 가르쳤으며, 자주 무림 친구들을 방문하여 기술을 교류하고 함께 실력을 향상시켰다.
2006년 돤겅선(段庚申)은 다롄시(大連市) 무술협회 부비서장으로 초빙되었다.
취광하오 (曲廣浩)
취광하오(曲廣浩)는 1952년 랴오닝성(遼寧省) 다롄시(大連市)에서 태어났다. 1959년 천리줘(陳立卓)를 스승으로 모시고 무술을 익혔으며, 10가지 탄퇴(彈腿), 사로분타(四路奔打), 육해식(六解式), 그리고 칠성당랑권(七星螳螂拳) 중의 출동(出洞), 행보(行步), 포찬(撲蟬), 요약(摘要), 투타오(偷桃), 헌서(獻書) 등 투로(套路)를 배웠다.
1975년 명사 중유성(鐘有盛)에게 비교적 체계적으로 태극매화당랑권(太極梅花螳螂拳) 법을 배웠고, 수련 기간 동안 자위콴(賈毓寬) 선생에게도 학(郝) 가문 당랑권(螳螂拳) 술을 배웠다. 그는 겸손하고 무학이 깊었다.
가오파더 (高發德)
가오파더(高發德)는 1954년 랴오닝성(遼寧省) 다롄시(大連市)에서 태어났다. 1965년 자위콴(賈毓寬) 선생에게 태극매화당랑권(太極梅花螳螂拳)을 익혔고, 1974년 자위콴(賈毓寬) 선생의 허락을 받아 명사 중유성(鐘有盛)에게 계속해서 태극매화당랑권(太極梅花螳螂拳)을 깊이 연구했다. 그는 스승을 존경하고 친구를 사랑했으며, 두 선생의 세심한 전수와 체계적인 지도를 받았다. 그는 무술을 매우 좋아하고 깨달음이 매우 뛰어나 부지런히 배우고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으며, 추위나 더위에도 쉬지 않아 스승의 참된 가르침을 모두 받았고, 태극매화당랑권(太極梅花螳螂拳)의 권법, 공법, 투로를 전면적으로 마스터했다. 그의 무공은 정교하고 무학은 깊었다.
1975년부터 1978년까지 톈진 대학(天津大學)에서 공부하는 동안 황지산(黃吉山) 일맥 전수자 천샹첸(陳向前)에게서 “개문팔극권(開門八極拳)”을 배웠다. 가오파더(高發德)는 문무(文武)를 겸비했으며, 직업상 무술 경기에 참여할 시간이 없었지만, 수십 년간 하루도 빠짐없이 무술을 수련하여 무학의 진수를 깊이 이해했다. 당랑권(螳螂拳) 발전을 위해 그는 최근 몇 년 동안 당랑권보(螳螂拳譜)를 세심하게 정리하는 것 외에도 여가 시간을 활용하여 자원봉사로 당랑권(螳螂拳)을 전수하고 있다. 주요 제자로는 류더취안(劉德全), 저우스룽(周世榮), 자전(賈榛)(자원촨(賈文川)의 아들), 장링(薑苓), 장리(薑莉)(장훙라이(薑宏來)의 둘째 딸), 취훙(曲虹)(취광하오(曲廣浩)의 딸)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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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롄(大連)에서의 자오매화당랑권(子午梅花螳螂拳) 전수자
왕즈중 (王志忠)
왕즈중(王志忠)은 1932년 다롄(大連)에서 태어났으며, 본적은 산둥 핑두(平度)이다. 소년 시절 무술을 매우 좋아하여 열두 살 때 비종권(秘宗拳) 대사 자오펑팅(趙鳳亭)을 스승으로 모시고 비종권(秘宗拳)을 배웠다. 1947년 중국 인민 해방군에 입대하여 동북 장갑 부대 통신 중대 1반 반장을 역임했다. 1952년 왕즈중(王志忠)은 제대하여 다롄(大連)으로 돌아왔고, 1953년 친구의 소개로 다롄(大連)의 유명한 용형당랑권(龍形螳螂拳) 종사 톈빙장(田秉江)의 문하에 들어가 칠성당랑권(七星螳螂拳)과 용형당랑권(龍形螳螂拳) 및 산수(散手)를 배웠다. 후에 어떤 이유로 인해 학업을 중단했다. 한때 무술 친구의 추천으로 오행통배권(五行通背拳) 명사 왕야오팅(王耀庭)의 무관(武館)에서 통배권(通背拳)을 얼마 동안 배웠다. 후에 친구 량리쥔(梁立君)으로부터 자오매화당랑권(子午梅花螳螂拳) 종사 스펑포(石鳳坡)가 산둥(山東)에서 다롄(大連)으로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왕즈중(王志忠)은 한윈펑(韓雲鵬), 가오윈치(高雲奇) 등 사형제들과 함께 스펑포(石鳳坡) 문하에 들어가 자오매화권(子午梅花拳)과 자오매화당랑권(子午梅花螳螂拳)을 배웠다.
1965년 왕즈중(王志忠) 등은 이얼주가(一二九街)에서 스펑포(石鳳坡)를 위해 권방(拳房)을 설립하고 스승을 대신하여 기술을 전수했다. 자오매화당랑권(子午梅花螳螂拳)이 다롄(大連)에 보급되도록 하기 위해 왕즈중(王志忠)은 뤼순(旅順)에서도 많은 제자들을 가르쳤다. 그는 성품이 강직하고 명리를 추구하지 않으며 묵묵히 노력하여 자오매화당랑권(子午梅花螳螂拳)이 다롄(大連)에 전파되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한, 선대와 후대를 잇는 인물이다. 또한 왕즈중(王志忠)은 70년 가까운 무술 생활 동안 다롄(大連) 무술에 매우 정통하여 “다롄(大連) 무술의 살아있는 사전”이라고 불렸다. 그의 제자는 매우 많다. 주요 제자로는 우창(吳強), 이화궈(李華國), 장푸핑(薑福平), 런웨이둥(任衛東), 린바오팅(林寶庭), 롼량베이(欒良倍), 위하이야오(於海堯), 우유웨(吳有嶽), 바이뎬화(白殿華) 등이 있다. 그의 제자 이화궈(李華國)는 다롄(大連) 톈산무관(天山武館)을 설립하고 여러 차례 전국, 성(省), 시(市) 무술 경기에서 수상했다. 그의 제자 장푸핑(薑福平)은 뤼순(旅順)에 동방 무도관(東方武道館)을 설립하고 수련생들이 여러 차례 국내 무술 경기에 참가하여 많은 금메달을 획득했다. 특히 이화궈(李華國)의 제자 자오춘웨이(趙春偉)가 2011년 10월 미국 뉴욕에서 개최된 제3회 세계 무술 오픈 경기에 참가하기 전에, 이화궈(李華國)는 특별히 제자를 왕즈중(王志忠) 선생에게 추천하여 심도 있는 지도를 받게 했고, 자오춘웨이(趙春偉)는 기대에 부응하여 금메달 2개, 은메달 1개를 획득하여 다롄(大連) 무술의 영예를 드높였다. 이는 스승 이화궈(李華國)의 공헌뿐만 아니라 스승의 스승 왕즈중(王志忠)의 땀방울도 담겨 있다.
왕즈중(王志忠)은 이미 80세가 넘는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몸이 건강하여 여전히 무술 애호가들에게 무술을 지도하며 다롄(大連) 무술 발전에 계속 기여하고 있다.
류메이성 (劉美勝)
류메이성(劉美勝)은 1950년 랴오닝성(遼寧省) 다롄시(大連市)에서 태어났다. 삼촌 할아버지(叔祖父)는 다롄시(大連市) 무술 명가 류리싱(劉力行)이고, 부친 류충싱(劉崇興)은 천씨(陳氏) 태극 명가 천파커(陳發科)의 제자였다. 류메이성(劉美勝)은 어려서부터 부친의 영향으로 천씨 태극권(陳氏太極拳)을 배웠고, 천씨 태극권(陳氏太極拳)의 기본 공법을 마스터했다. 2008년 부친 사망 후 왕즈중(王志忠) 스승을 따라 자오매화당랑권(子午梅花螳螂拳)을 배웠고, 자오매화 연환장(子午梅花連環掌), 삼환타오월권(三環套月拳), 자오매화장(子午梅花掌), 쌍수검(雙手劍), 자오매화대도(子午梅花大刀) 등 여러 권법과 투로(套路)를 배웠다.
류메이성(劉美勝)은 현재 파오야 광장(泡崖廣場)에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으며, 푸민 광장(富民廣場)에서는 스승 왕즈중(王志忠)을 대신하여 제자들을 지도하고 있다.
이화궈 (李華國)
이화궈(李華國)는 1953년 다롄(大連) 뤼순(旅順) 룽왕탕(龍王塘) 사람이다. 부친은 다롄(大連) 철도 기관사로, 1957년 서북 철도 건설을 지원하여 온 가족이 간쑤(甘肅) 우웨이시(武威市)로 이주했다. 그의 체력을 강화하기 위해 부친은 그에게 태극권(太極拳)과 오행공(五行功)을 가르쳤다. 아홉 살 때 간쑤(甘肅) 무술 명가 쑤제싼(蘇傑三)의 제자 최리장(崔立章)에게 소림홍권(少林洪拳), 포권(炮拳), 및 팔문권(八門拳) 계열의 관권(貫拳), 사권(撕拳)과 편간(鞭杆), 행자곤(行者棍), 탸오쯔(條子) 등 무기(械)를 배워 그의 무술 생활의 기초를 다졌다.
1966년 이화궈(李華國)의 부친은 그를 다롄(大連)으로 돌려보내 공부하게 했으나, 마침 문화대혁명이 일어나 학교 수업이 중단되었다. 고모부는 그를 일대 무술 종사, 자오매화당랑권(子午梅花螳螂拳) 창시자 스펑포(石鳳坡)의 제자 왕즈중(王志忠) 선생이 이얼주가(一二九街)에서 대리 운영하던 무관(武館)으로 보내 왕즈중(王志忠)에게 자오매화권(子午梅花拳)과 자오매화당랑권(子午梅花螳螂拳), 그리고 당랑검(螳螂劍), 자오매화도(子午梅花刀) 등 무기(械)를 배우게 했고, 이로 인해 이화궈(李華國)의 무공은 빠르게 향상되었다.
1976년 이화궈(李華國)는 부친의 뒤를 이어 신장(新疆) 산산(鄯善) 철도 기관사로 일하게 되었고, 여가 시간을 활용하여 꾸준히 무술을 수련했다. 1982년 3월, 선발을 거쳐 신장(新疆) 우루무치 철도국 무술 대표팀에 들어가 난창(南昌)에서 개최된 전국 철도 시스템 무술 대회에 참가하여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신장(新疆)으로 돌아온 후 산산(鄯善) 지역 무술팀을 결성하고 코치를 겸했으며, 1983년 신장(新疆) 철도 시스템 무술 경기에 참가하여 단체 3위의 좋은 성적을 거두었고, 개인적으로 당랑권(螳螂拳), 검(劍) 종목에서 각각 1위를 차지했다. 1984년 신장(新疆) 사범 대학 체육학과에서 운영하는 무술 코치 양성반에서 형의권(形意拳), 팔괘권(八卦拳), 남권(南拳), 팔섬번(八閃翻) 및 무기(械)를 배웠다. 그 기간 동안 신장 위구르 자치구 무술협회 부주석이자 마가통배권(馬家通背拳) 전수자 허우리성(侯瑞盛) 대사를 스승으로 모시고 벽괘권(劈掛拳), 번자권(翻子拳)을 배웠다. 신장(新疆)에서 근무하는 동안 이화궈(李華國)는 여러 차례 산산(鄯善) 무술팀을 이끌고 신장(新疆) 전역 철도 시스템 및 지역에서 개최된 무술 경기에 참가하여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각 방면의 무술계 친구들을 폭넓게 사귀었고, 특히 쿤밍(昆明) 화권(華拳) 명가 다이훙쥔(戴洪軍), 정저우(鄭州) 의권(意拳) 명가 주톈시(朱天熹), 허난(河南) 등펑(登封) 루뎬(蘆店) 무술 학교 교장 량이취안(梁以泉), 소림사(少林寺) 서우시(壽喜) 방장, 산둥(山東) 당랑권(螳螂拳) 명가 마진룽(馬金龍)과의 교류를 통해 많은 것을 얻고 좋은 것을 배웠으며, 무술에 대한 더 깊은 인식을 가지게 되었다. 1983년 철도부에서 조직한 “철도무원(鐵道武苑)” 총서 중 『사마귀권(螳螂拳)』이라는 책을 정리 출판하여 자오매화당랑권(子午梅花螳螂拳) 전파에 공헌했다. 특히 1986년 신장 위구르 자치구 무술 발굴 정리 작업 2등상을 획득했다.
1987년 이화궈(李華國)는 다롄(大連)으로 전속되어 다롄 톈산(天山) 무술관을 설립했다. 25년간의 무술 교육을 통해 약 2천 명의 초급 무술 수련생과 6백 명 이상의 경기 참가 선수들을 양성했다. 교육 업무에서 그는 왕즈중(王志忠) 선생의 추천을 받아 스펑포(石鳳坡)의 직접적인 가르침을 받았고, 스펑포(石鳳坡) 선생과 협력하여 5가지 자오매화당랑권(子午梅花螳螂拳) 완전한 경기 투로를 완성했다. 그 중 1로, 2로 권법으로 학생들과 그 자신은 여러 차례 전국 및 성(省), 시(市) 경기에 참가하여 금은상을 받았다. 그는 또한 무술 보급 사업에도 매우 중점을 두어 다롄시(大連市) 5개 학교를 위해 대규모 무술 단체 체조를 훈련시켰다. 예를 들어 시강구(西崗區) 신화 실험 학교, 중산구(中山區) 삼팔 초등학교, 사허커우구(沙河口區) 진시우(錦繡) 초등학교는 모두 구급 특색 체조 대회 대상을 받았다. 중산구(中山區) 민생 초등학교 전교 단체 체조는 랴오닝성(遼寧省) 쉬는 시간 특색 체조 대회 대상을 받았고, 베이린(北麟) 초등학교는 우수상을 받았다.
이화궈(李華國)는 학생들에게 무술을 가르치는 것 외에 무덕(武德) 교육을 더욱 중시했다. 그의 노모는 8년 동안 중병으로 누워 계셨는데, 그는 아들로서의 효도를 다했다. 비록 여러 차례 국내 각종 경기에 참가할 기회를 잃고 최적의 경기 연령을 놓쳤지만, 그는 원망 없이 후회하지 않고 노모를 세심하게 보살폈으며, 그의 학생들은 모두 감동했다. 2011년 모친 사망 후 이화궈(李華國)는 비로소 전국과 성(省) 경기 참가를 시작했다. 2012년 랴오닝성(遼寧省) 전통 무술 교류 대회에서 금메달 1개, 은메달 1개를 획득했으며, 대회를 통해 랴오닝성(遼寧省) 무술팀에 선발되어 2012년 황산(黃山) 제5회 세계 전통 무술 선수권 대회에 참가하여 자오매화당랑권(子午梅花螳螂拳) 은메달, 소림곤(少林棍) 동메달을 획득하여 그의 깊은 무공을 보여주었다. 현재 국가 무술 6단이다.
이화궈(李華國)의 제자는 매우 많다. 주요 제자로는 자오칭웨이(趙青偉), 정웨이나(鄭維娜), 후옌쥔(胡彥軍), 린샤(林霞), 뤄샤오난(羅曉楠), 쉬완녠(許萬年), 왕리나(王麗娜), 위리민(於立民), 저우지성(周繼盛), 지징차(計景茶), 장지더(張積德), 위안쿤(原昆), 양카이(楊凱), 왕쥔(王俊), 카오즈청(考志誠), 저우위안차오(鄒媛喬), 차오원위(喬文宇), 쑨위(孫裕), 이윈룽(李雲龍), 왕위둥(王宇冬), 멍판샹(孟繁祥), 판디(潘帝), 장비빈(張毅斌), 장제(薑傑), 자오둥하이(趙東海) 등이 있다.
장푸핑 (薑福平)
장푸핑(薑福平)은 1955년 다롄(大連) 뤼순(旅順)에서 태어났다. 소년 시절 무술을 매우 좋아하여 1968년 다롄(大連)으로 와서 자오매화당랑권(子午梅花螳螂拳) 명사 왕즈중(王志忠)을 스승으로 모시고 자오매화당랑권(子午梅花螳螂拳)을 배웠다. 후에 스승의 스승인 자오매화당랑권(子午梅花螳螂拳) 창시자 스펑포(石鳳坡) 선생의 직접적인 지도를 받아 참된 가르침을 깊이 터득하며 무공이 크게 향상되었다. 수년간 계속해서 교육 업무를 진행했으며, 특히 최근 몇 년 동안 다롄 공업 대학 뤼순 캠퍼스 태권도관과 다롄 동방 무도관을 설립하고 직접 관장 겸 총코치를 맡았다. 뤼순커우구(旅順口區)에서 학생들을 널리 모집하여 전통 무술을 보급했으며, 통계에 따르면 최근 10년 동안 대학생, 사회 청년, 초중고 학생 500여 명을 양성했다. 13명이 다롄시(大連市) 무술 선수권 대회에 참가하여 금, 은, 동메달을 각각 획득했으며, 7명이 3단 이상의 단위를 획득했다. 장푸핑(薑福平)은 현재 국가 무술 5단, 다롄시(大連市) 무술협회 코치이다.
궈청신 (郭成新)
궈청신(郭成新)은 1966년 2월 다롄(大連) 뤼순(旅順)에서 태어났다. 소년 시절 체육을 좋아하여 열두 살 때 쿵셴신(孔憲新) 선생 문하에 들어가 오행통배권(五行通背拳)을 배웠다. 후에 스승이 이사하여 무술 학습을 중단하지 않기 위해 뤼순(旅順) 자오매화당랑권(子午梅花螳螂拳) 명사 우창(吳強)의 문하에 들어가 자오매화당랑권(子午梅花螳螂拳)을 익혔다. 서른아홉 살 때 자신의 종합적인 기술을 더욱 향상시키기 위해 천씨(陳氏) 홍전(洪傳) 태극 명사 쥐촨더(鞠傳德)를 스승으로 모시고 홍전 태극권(洪傳太極拳)을 익혔다.
2009년 궈청신(郭成新)은 뤼순(旅順) 동방 무도관 부관장 겸 코치를 맡아 엄격하고 진지하게 가르쳤다. 2010년 다롄시(大連市) 무술 경기에서 3명의 제자가 금상을, 5명의 제자가 은상을 받았으며, 궈청신(郭成新) 본인도 다롄시(大連市) 무술협회에서 발급한 우수 코치 증서를 받았다.
자오칭웨이 (趙青偉)
자오칭웨이(趙青偉)는 1972년 다롄(大連)에서 태어났다. 1987년 다롄(大連) 무술 명사 이화궈(李華國) 문하에 들어가 다롄 톈산 무술관의 1기 수련생이었다. 번자권(翻子拳), 도(刀), 검(劍)을 전공했다. 자오칭웨이(趙青偉)는 자질이 좋고 깨달음이 높았으며, 학습에 매우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 무공이 빠르게 향상되었다. 1989년 10월, 다롄시(大連市) “오이삼(五二三)컵” 무술 경기에 참가하여 권술 금메달과 검술 동메달의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1991년 다롄시(大連市) 전통 무술 경기에서는 전통 2류(번자권(翻子拳)) 금상, 여자 도술 금상, 성인 여자부 대련 금상을 다시 획득했다. 1999년 무술 3단으로 승단했고, 2006년 무술 2급 심판으로 승급하여 시(市) 무술 코치를 역임했다. 2006년 무술 4단으로 승급했고, 2009년 5단으로 승급했다. 2010년 랴오닝성(遼寧省) 심사를 거쳐 국가 1급 심판, 1급 코치로 승급했다. 2008년 스승을 도와 무관 코치를 맡았고, 진저우(金州)에서 개최된 랴오닝성(遼寧省) 무술 경기에 참가하여 팀 전체가 금메달 2개, 은메달 4개의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 2011년 10월 미국 뉴욕에서 개최된 제3회 국제 무술 오픈 경기에 참가하여 금메달 2개, 은메달 1개의 우수한 성적을 거두어 무관의 명예를 드높였고, 다롄(大連) 무술계의 명예를 드높였다.
정웨이나 (鄭維娜)
정웨이나(鄭維娜)는 1975년 다롄(大連)에서 태어났다. 열두 살 때 이화궈(李華國)를 스승으로 모시고 다롄 톈산 무술관 설립 시 1기 수련생이었다. 이화궈(李華國) 선생은 개개인의 능력에 맞춰 가르쳤고, 그녀의 키가 크고 다리가 긴 특징을 고려하여 신장(新疆)에서 배워온 벽괘권(劈掛拳)을 그녀에게 가르치기로 결정했다. 스승과 제자의 노력으로 결과는 예상대로였고, 1991년 다롄시(大連市) 무술 경기에 참가하여 벽괘권(劈掛拳) 준우승(그녀와 사저 자오칭웨이(趙青偉) 한 조), 검술 금상, 사저 자오칭웨이(趙青偉)와의 대련에서 금상을 획득했다. 현재 무술 5단, 국가 1급 심판원, 1급 코치이다.
후옌쥔 (胡彥軍)
후옌쥔(胡彥軍)은 1978년 8월 다롄(大連)에서 태어났다. 2004년 다롄 톈산 무술관에 들어가 다롄 자오매화당랑권(子午梅花螳螂拳) 명사 이화궈(李華國)를 스승으로 모시고 자오매화당랑권(子午梅花螳螂拳), 번자권(翻子拳) 등 여러 권법을 배웠다. 학습에 진지하고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 무공이 빠르게 향상되었다. 2007년 다롄(大連) 무술 경기에서 번자권(翻子拳) 동메달을 획득했다. 2008년 제3회 다롄(大連) 무술 축제에서 번자권(翻子拳) 금상, 곤술(棍術) 은상을 획득했다. 2008년 랴오닝성(遼寧省) 진저우(金州)에서 개최된 무술 경기에서 권술 은상, 곤술(棍術) 동상을 획득했다. 2010년 9월, 랴오닝성(遼寧省) 무술 경기에서 곤술(棍術) 금상, 권술 동상을 획득했다. 후옌쥔(胡彥軍)은 현재 무술 초급 3단, 초급 무술 교사이다.
린샤 (林霞)
린샤(林霞)는 1984년 2월 다롄(大連)에서 태어났다. 1995년 다롄시(大連市) 톈산 무술관에 들어가 다롄(大連) 명사 이화궈(李華國)를 스승으로 모시고 자오매화당랑권(子午梅花螳螂拳) 무기(械)를 배웠고, 이(李) 선생의 참된 가르침을 받았다. 2000년 다롄시(大連市) 무술 경기에서 자오매화당랑권(子午梅花螳螂拳) 금상, 곤술(棍術) 금상을 획득했다. 현재 국가 무술 4단, 2급 심판원이다.
후나이탕 (胡乃堂)
후나이탕(胡乃堂)은 1948년 다롄(大連) 스얼거우(寺兒溝)에서 태어났다. 스얼거우(寺兒溝)는 다롄(大連) 동부 무관들의 집결지였고, 보고 들은 바가 많았던 후나이탕(胡乃堂)은 소년 시절부터 무술을 좋아했다. 다롄(大連)의 유명한 용형당랑권(龍形螳螂拳) 종사 톈빙장(田秉江)에게 칠성당랑권(七星螳螂拳)과 용형당랑권(龍形螳螂拳)을 배웠고, 톈(田) 선생 문하에서 수년간 수련하며 붕포(蹦捕), 투타오(偷桃), 헌서(獻書), 및 용형당랑권(龍形螳螂拳) 1로, 2로 등 여러 투로(套路) 및 무기(械)에 정통했다.
후나이탕(胡乃堂)은 학교 졸업 후 다롄(大連) 진저우 방직 공장(金州紡織廠)에 배정되어 근무했으며, 업무 외 시간을 활용하여 수십 명의 제자들을 가르치며 용형당랑권(龍形螳螂拳) 발전을 위해 꾸준히 노력하고 있다. 현재 진저우구(金州區) 무술협회 상무이사이다.
2008년 7월, 랴오닝성(遼寧省) 무술 경기가 진저우(金州)에서 개최되었고, 후나이탕(胡乃堂)은 4명의 제자와 함께 경기에 참가했다. 경기에서 후나이탕(胡乃堂)은 정교한 무공으로 랴오닝성(遼寧省) 전통권 노년부 3류 권종(당랑권조) 금상을 획득했으며, 그의 정교한 기술은 성(省) 전역의 참가 선수들과 전문가들로부터 만장일치 찬사를 받았다. 그와 함께 경기에 참가한 제자들 모두 좋은 성적을 거두어 진저우구(金州區)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현재 후나이탕(胡乃堂)은 은퇴하여 매일 제자들을 데리고 각고의 노력으로 훈련하며 진저우(金州) 무술 발전에 공헌하고 있다.
리옌징(李豔靜)
리옌징(李豔靜)은 1980년 7월에 태어났고, 본적은 산둥성(山東省) 옌타이시(煙台市)이며, 1993년에 13세의 나이로 리화궈(李華國) 사범을 스승으로 모셨으며, 다롄(大連) 천산무관(天山武館) 설립 당시의 첫 번째 수련생이었다. 리화궈(李華國) 사범은 자질에 따라 가르쳤는데, 그녀의 키가 크고 다리가 긴 특징에 따라, 리(李) 사범은 신장(新疆)에서 배워 온 벽괘권(劈掛拳)을 그녀에게 가르치기로 결정했고, 사제 간의 노력으로 예상대로 1991년 다롄시(大連市) 무술 대회에 참가하여 벽괘권(劈掛拳) 준우승(그녀는 사저 자오칭웨이(趙青偉)와 한 조였음), 검술 금메달을 획득했고, 사저 자오칭웨이(趙青偉)와의 대련(對練)에서도 금메달을 획득했다. 현재는 무술 5단, 국가 1급 심판원, 1급 코치이다.
후옌쥔(胡彥軍)
후옌쥔(胡彥軍)은 1978년 8월 다롄(大連)에서 태어났다. 2004년에 다롄(大連) 천산무관(天山武館)에 입문하여, 다롄(大連) 자오매화당랑권(子午梅花螳螂拳) 명사 리화궈(李華國) 사범을 스승으로 모시고, 자오매화당랑권(子午梅花螳螂拳), 번자권(翻子拳) 등 여러 권술을 배웠다. 성실하고 열심히 배웠으며, 무공 실력이 빠르게 향상되었다. 2007년 다롄(大連) 무술 대회에서 번자권(翻子拳) 동메달을 획득했다. 2008년 제3회 다롄(大連) 무술 축제에서는 번자권(翻子拳) 금메달, 곤술(棍術) 은메달을 획득했다. 2008년 랴오닝성(遼寧省)이 진저우(金州)에서 개최한 무술 대회에서 권술 은메달, 곤술(棍術) 동메달을 획득했다. 2010년 9월, 랴오닝성(遼寧省) 무술 대회에서 곤술(棍術) 금메달, 권술 동메달을 획득했다. 후옌쥔(胡彥軍)은 현재 무술 초급 3단, 초급 무술 교사이다.
림샤(林霞)
림샤(林霞)는 1984년 2월 다롄(大連)에서 태어났고, 1995년 다롄시(大連市) 천산무관(天山武館)에 입문하여, 다롄(大連) 명사 리화궈(李華國) 사범에게 사사하고 자오매화당랑권(子午梅花螳螂拳) 권술 및 기계를 배웠으며, 리(李) 선생의 진전(真傳)을 얻었다. 2000년 다롄시(大連市) 무술 대회에서 자오매화당랑권(子午梅花螳螂拳) 금상, 곤술(棍術) 금상을 수상했다. 현재는 국가 무술 4단, 2급 심판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