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8월 23일, 한국의 이재명 대통령은 일본을 방문하여 이시바 총리와 회담을 하고, 일본 민단 관계자들과 행사를 가졌다. 일본에 거주하는 조선인들은 친북인 조총련과 친한인 민단으로 나뉜다.
일본 민단을 창설하여 초대회장을 지낸 사람은, 최배달의 스승으로 알려져 있는 조영주씨이다.
조영주(曺寧柱, 1908/1913년-1995/1996/2001년)는 한반도 출신의 사상가, 무술가, 종교인이다. 그는 국제공수도연맹 총재이자 극진회관의 창시자인 최영의(大山倍達, 오야마 마스타츠)의 스승 중 한 명으로 잘 알려져 있다. 또한, 재일본대한민국민단(민단) 설립에 깊이 관여했으며, 두 차례에 걸쳐 민단 중앙본부 단장을 역임했고, 일본 민단의 초대회장을 지냈다.
한국인들에게는 최배달의 스승으로 익숙하며, 한국에는 그리 유명하지 않다. 그러나 그는 단순한 무술가가 아니라 많은 활동을 했던 정치가이자 저명인사였다.

1. 초기 생애와 사상적 변천
출생 및 학창 시절 : 경상북도 예천의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나 전통 서당 교육과 공립 보통학교를 다녔다. 어린 시절부터 일본의 통치에 대한 비판적 인식을 갖게 되었고, 1923년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 학살을 목격했다.
독립운동과 마르크스주의 : 경성고등보통학교 재학 중 공산주의 혁명을 통한 조선의 독립을 꿈꾸며 마르크스주의에 경도되었다. 1929년 광주학생운동에 참여하여 동맹 휴교를 선동한 후 학교를 중퇴했다.
일본 유학과 사상적 전환 : 1931년 일본으로 건너가 교토제국대학과 리츠메이칸대학에서 수학했다. 일본 공산당 외곽 단체에서 활동했으나 , 일제의 탄압으로 공산주의 혁명에 한계를 느끼고 ‘사상적 공백’ 상태를 겪었다.
동아연맹운동과 일련교 귀의 : 이후 만주국 건국을 지지한 이시와라 간지(石原莞爾)를 만나 그의 동아연맹운동에 참여하게 된다. 이 운동을 통해 조선 독립을 꾀했다는 혐의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투옥되었고 , 옥중에서 일련교(日蓮教)에 귀의했다. 당시 그는 천황을 중심으로 일본인과 조선인이 평등해지는 이상을 가졌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의 초반 인생은 극단적인 공산주의자로 시작하여, 친일로 변신한다. 일련정종에 귀의한 승려이기도 했으며, 천황을 중심으로 내선일체를 주장하는 일본인 그 자체로 전향하기까지의 삶이 드라마틱하다. 그는 항상 극에서 극으로 이동하였으며, 극좌와 극우를 오고가는 삶을 살았다.
조영주는 한국인이라기 보다는 골수까지 일본인으로 전향하였으므로, 일본인으로 죽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

2. 무도가로서의 삶
무도 입문과 수련 : 일본 유학 시절 역도, 복싱, 유도 등을 배웠고, 리츠메이칸대학에서 가라테를 본격적으로 수련했다. 그는 야마구치 고겐(山口剛玄)과 미야기 초준(宮城長順)에게 고주류(剛柔流) 가라테를 배웠고, 사범대리까지 올랐다. 이 당시에 사동류 가라테에도 입문하여, 사동류 4단을 받았다.
청년시절에 신체 피지컬이 워낙 뛰어났던 탓에, 당시 일본의 공수도계에서는 가히 적수가 없었다고 한다. 권투와 역도, 유도에도 조예가 깊었으므로, 공수도 대련에서는 무적이었다고 전한다. 조영주에게 맞지 않은 공수도가는 없었다는 말까지 있었다.
오키나와 카라테가 일본 본토로 상륙하여 몇가지 새로운 유파를 만들게 되는데,
통상 오키나와 가라테 3대 유파는 1) 상지류(上地流 우에치류), 2) 강유류(剛柔流 고쥬류), 3) 소림류(小林流 쇼린류)로 흔히 말한다.
일본 가라테 4대 유파는 1) 송도관류 松濤館流 쇼토칸류, 2) 강유류 剛柔流 고쥬류, 3) 사동류 糸東流 시토류, 4) 화도류 和道流 와도류로 일컬어지고 있다.
이 중에서 사동류(糸東流)는 오사카 근처에서 자리를 잡고 확산된 가라테 이다. 조영주는 교토의 교토제국대학과 리츠메이칸 대학에서 수학하는데, 두개의 대학 모두 교토에 위치하고 있다. 교토에서 대학을 다녔으니, 가까운 오사카의 사동류를 접하기가 용이했을 것이다.
특히 리츠메이칸(立命館) 대학은 교토에 본부를 두고 있지만, 오사카에도 캠퍼스가 있으며, 간사이 4대 명문대학의 하나이다.
최영의(오야마 마스타츠)와의 인연 : 1939년 부산 강연회에서 최영의를 처음 만나 그의 스승이 되었다. 일본으로 밀항한 최영의에게 가라테를 지도하고 야마나시 항공기술전문학교 입학 보증인이 되어주는 등 그를 적극적으로 도왔다. 최영의가 정신 수양과 무술연마를 위해 산에 들어가 수련하도록 조언한 인물도 조영주로 알려져 있는데, 최배달의 입산수련 기간동안 식사와 생활을 지원한 스승이기도 했다.
그런데 후일 최배달과는 결별에 가까운 관계단절이 일어났고, 최배달과 조영주는 서로 내왕하지 않는 단계까지 이르렀다. 이후에 최배달도 조영주를 언급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명확하게 밝혀진 바가 없다.

대한민국 가라테(태권도) 창립 기여 : 1950년 6.25 전쟁 당시 부산에서 가라테 인사들과 함께 대한공수도협회를 창설하고 초대 회장을 맡았다. 이는 훗날 대한태권도협회의 모태 중 하나가 되었다.
결국 그는 대한민국 태권도의 모체가 된 단체의 초대 회장을 지낸셈이다.
무도가로서의 명성 : 그는 당대의 유도 강자였던 기무라 마사히코(木村政彦)에게 가라테를 지도했으며 , 이시와라 간지의 경호원을 맡기도 했다. 말년에는 전일본공수도연맹 고주카이(剛柔会)의 부이사장을 역임했고 , 범사 9단으로 불렸다.
조선연무관의 활동 : 조영주는 해방 이후에 서울에도 자주 왔으며, 장기 체류를 하였다. 서울 소공동에 있던 조선연무관에서 자주 지도를 하였다. 조선연무관은 일본 유학파 출신인 전상섭 사범이 가라테를 가르치던 곳 이었는데, 조영주는 이곳에서 업저버 스타일로 가라테를 가르쳤다.
조영주는 당시 일본 사동류 가라테 4단 이었고, 강유류의 사범이기도 했다. 조영주가 가르친 카타는 ‘로패형’으로 알려져 있는데, 로패형은 사동류의 대표적인 카타중의 하나이다. 태권도협회의 설립자중의 한명이자 국기원 부원장이었던 지도관의 이종우 사범은, 조영주가 사동류를 가르쳤다고 증언하고 있다. (서완석,이종관,김영선(2021). 『이종우, 현대 태권도의 종합 설계자』. 국기원.)

이때 조영주에 의해 한국에 보급된 사동류의 로패형은 1970년대까지도 태권도 도장에서 수련되었다. 특히 한무관 계열의 도장에서는 로패형이 가장 열심히 수련했던 고단자 카타 였다고 증언한다.
로패, 로하이(Rōhai)는 “백로의 상징” 또는 “백로의 깃발”이라는 뜻으로, 몇몇 가라테 유파에서 수련하는 형(카타)이다. 사동류(시토류, Shitō-ryū)는 이 로하이 형을 배우는 대표적인 유파 중 하나이며, 쇼토칸 가라테에서도 로패1형, 로패2형을 수련하기도 한다. 한자로는 鷺牌(로패)로 쓰며, ‘백로 로(鷺)’ 자 이다.
조영주는 6.25 전쟁 이후에도 한국과 일본을 오고가며 한국 무술계에 깊숙히 관여하였다. 대한태권도협회의 전신인 대한태수도협회가 1965년에 창설될 당시에도 조영주는 이 일에 관여하고 있었다.

3. 재일 한인 사회에서의 활동
민단 창설과 반공 활동 : 해방 후, 공산주의자들이 주도한 재일본조선인연맹(조련)에 참여하지 않고 , 박열 등과 함께 우파 단체인 신조선건설동맹과 재일본대한민국민단을 결성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그는 두 차례(1960~1961, 1976~1979)에 걸쳐 민단 단장을 역임했다.
통일 운동 : 민단 단장 시절, 민단 내에 통일문제연구위원회를 설치하고 조총련과의 대화를 시도하는 등 주체적인 통일 운동을 모색했다. 그러나 그의 통일론은 ‘김일성 도당의 무력 적화 통일에 대항’하는 반공적 입장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조영주는 청년시절에는 공산주의자 였었지만, 극우 파시스트로 전향한 이후에는 철저한 반공노선을 걸었다.
반한 세력 비판 : 박정희 유신 정권 시절, 해외에서 전개되던 한국 민주화 운동에 대해 “김일성의 주구”라고 비판하며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이러한 활동으로 한국 정부로부터 “반한 세력의 파괴 공작을 분쇄했다”는 평가를 받으며 1등급 무궁화장을 수훈하기도 했다.

4. 평가
조영주는 복합적인 평가를 받는 인물이다.
과거 한국의 박정희 정부와 민단 내에서는 반공주의와 평화통일을 위해 헌신한 인물로 높이 평가받았다. 그러나 그의 사상적 여정은 조선 독립운동에서 출발하여 마르크스주의, 동아연맹 사상을 거쳤으며, 일본의 총독 정치를 긍정하는 극도의 친일 발언을 남기기도 했다.
이로 인해 조총련 등 반대 진영으로부터 ‘친일파’, ‘매국노’라는 비판을 받았다. 또한, 민단 내부에서는 그가 “권력에 약하고 관료적”이라는 비판도 제기되었다.

최영의가 어느 시점부터 자신의 이력에서 조영주의 이름을 지운 사실은, 두 사람의 관계가 복잡하게 끝났음을 시사한다. 이처럼 그의 삶은 가라테, 정치, 사상을 넘나드는 광범위한 족적을 남겼으나, 많은 부분이 베일에 싸여 있어 ‘전설적인 인물’로 남아있다.
정치가 조영주는 여러 가지 상이한 평가를 받는 풍운아 였지만, 무도가 조영주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이견이 없다. 청년시절부터 엄청난 수련을 극복해 낸 무도가 였으며, 말년에는 가라테 9단 범사가 되어 인생을 마친다.
한국인으로써는 가장 오랫동안, 가장 높은 경지까지 가라테를 수련한 가라테가(空手家)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의 태권도 성립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던 인물이기도 했다. 어린 최배달이 일본으로 밀항하여 무술에 입문하는 동기를 제공한 사람이며, 최배달의 무도 수련 여정 동안에 직접적인 무술 지도와 입산수련 지원까지 도맡았던 스승이기도 했다.
이제 냉전시대는 종말을 고한지 오래되었고, 공산주의 국가라고 할 만한 나라들도 사실상 없다. 북한이나 중국은 공산주의라기 보다는 일당 독재국가라고 보는것이 옳은 시각 일 것이다. 이미 체제경쟁은 끝난지 오래이다.
한국 무술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조영주에 대한 평가는 한국에서 거의 보이지 않는다.
이데올로기 대립이 사라진 현재, 무도가로써의 조영주에 대한 평가는 다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