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내가 연구해 만든 무술이 태극권과 팔괘장의 표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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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 내가 연구해 만든 무술이 태극권과 팔괘장의 표절이다?

연구라는 것은 다른 사람이 끝낸 곳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처음부터 다시 하는 것은 낭비입니다. 고대의 문헌들을 연구하면 무술의 오의가 밝혀질줄 아는데, 현대무술들이 모두 고대의 무술들을 전승한 것이고 태극권 수련자 등 20세기 초반의 무술가들도 똑같이 생각하고 무술을 복원한 것입니다.

옛날에 어느 한의사가 평생의 과업으로 최고의 약을 만들겠다고 결심합니다. 그 약은 만병통치약이라,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좋고 기력을 올려주며 이것만 먹으면 항상 건강하게 살 수 있는 약입니다.

그래서, 생업도 포기하고, 모든 약재를 하나하나 엄선하고 약의 효과를 검증합니다. 인삼…이것은 꼭 들어가야 해. 당귀…이것도 꼭 들어가야지. 감초는 꼭 필요해 이런 식으로 약을 선정해 한약을 만듭니다.

그래서 선정한 약들은 인삼, 백출, 복령, 당귀, 천궁, 숙지황, 작약, 황기 등 이었습니다. 평생을 바쳐 최고의 보약을 만든 것입니다. 하지만 알고보니, 이 약은 ‘십전대보탕’이었고 이미 유명한 처방이었습니다.

십전대보탕 처방

이 우화의 교훈은 선행연구를 먼저 살펴보고, 그 연구를 한 사람들이 왜 그런 연구를 했을까 맥락을 알아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현재 누군가 상대성이론을 발표한들 표절이라고 하겠죠. 선행연구를 찾지 못해 표절연구를 내 놓은 연구자들이 간혹 있으며 이것은 연구자의 불성실함을 나타내는 것으로 아주 좋지 못한 평가를 받게 됩니다.

무술에도 이런 일이 있습니다. 개혁이라는 것은 먼저 한 분야에 대해 깊게 안 다음에 가능한 것인데, 어느 원리를 깨달았다고 그것에 집중하여 자신이 발견한 것처럼 발표하는 것입니다.

일본에 히노 아키라(日野晃)라는 무술가가 있습니다. 료신칸 아이키도를 바탕으로, 무술의 원리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요즘 유행하는 무술피트니스의 선구자입니다. 자세도 좋고, 훌륭한 무술가임에는 틀림없습니다.

 

유튜브에 올라온 동영상 제목만 보면,
* 잠재능력을 발휘하는 메커니즘
* 달인의 합기도 비교
* 손목과 손의 체중이동
* 찌르기
* 달인에게 듣는다. 달인과 접촉한다. 달인에게 배운다. 등의 동영상이 쭉 올라와 있습니다.

자신이 깨달은 무술의 원리를 드러내는 시범을 만들고, 세미나식으로 사람들에게 가르칩니다. 일반인들이 보면 마치 마술과 같은 동작이기 때문에 정말 인생의 오의를 깨달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비전의 기술이라고 생각하고 그 노하우를 배우려고 몰려듭니다.

이것이 끝이 아니라, 한 가지 시범기술을 배우고 이게 다인가? 하고 생각하면 전혀 다른 시범기술을 보이면서 이것도 배워야 한다고 하니까 다시 그 기술을 배웁니다. 한 가지를 배우면 다음 배울 것이 끝도 없이 쌓여가고 배우는 사람들은 자신의 한계를 느끼며 지쳐갑니다.

마술사에게 개별마술의 트릭을 배우는 것은 끝도 없을 것입니다. 트릭을 알고 나면 시시해지는 것이 마술입니다. 하지만 마술사가 되기 위해서는 개별마술의 트릭이 아니라 트릭을 만드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히노 아키라가 잘못된 일을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현대사회에서 충분히 필요하고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지적하는 것은 선행연구를 알고 있냐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150년 전의 사람들도 똑같은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이 비법은 꼭 알아야 해! 이 기술은 너무 중요해하면서 무술의 기술들을 선별하고 이론화합니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태극권입니다.

히노 아키라의 시범기술들과 그가 말하고 싶은 이론들을 쭉 나열해보면 태극권이 되는 것입니다. 다시 히노 아키라의 유튜브 동영상 제목을 나열해 보겠습니다.

1. 잠재능력을 발휘하는 매카니즘 → 전사경을 이용하는 태극권의 기본신체이론
2. 달인의 합기를 비교 → 태극권의 발경론
3. 손목과 손의 체중이동 → 태극권의 투로 연습
4. 찌르기 → 발경 및 발력 연습
5. 달인에게 듣는다. 달인과 접촉한다. 달인에게 배운다. → 태극권의 추수

히노 아키라는 현대격투기가 아닌 무술피트니스를 가르치는 사람입니다. 그가 중요하게 여긴 기술들과 이론들을 쭉 나열하면 태극권이 된다는 것이 참 우습지 않습니까? 태극권에는 더 체계적이고 더 세련된 기술들과 더 많은 자료들이 남아 있습니다. 그러니까 히노 아키라는 새로운 것을 하는 것이 아니라 150년 전에 무술의 피트니스에 대해 고민했던 사람들과 똑 같은 작업을 하는 것입니다.

엄마처럼 살지 않겠다고 다짐했는데, 크고 나니 엄마처럼 살고 있네라는 딜레마처럼 다른 사람이 그 일을 왜 했냐는 맥락을 살펴보는 것이 중요하다.

히노 아키라는 윌리엄 포사이스라는 현대무용의 거장과 협업을 하기도 했습니다. 히노 아키라는 자신이 발레안무가인 윌리엄 포사이스(William Forsythe)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합니다. 한국에도 여러 번 방문한 윌리엄 포사이스는 현대무용을 대표하는 거장입니다.

그가 안무한 무용수들의 동작을 보면 어딘지 질 좋은 팔괘권사들의 움직임을 보는 듯하고 무엇을 주장하는지 금방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전통무술하는 사람들이 춤춘다고 비난받기도 하지만, 춤을 추더라도 저런 몸은 만들고 욕을 먹어야 할 것입니다. 무술하는 사람이 힘이 없거나 못 하면 무용하냐고 하는데, 오히려 무용가들은 엘리트 스포츠 선수같은 신체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포사이스가 주장한 것은 기존의 무용은 선으로 움직였지만 자기는 몸동작을 극단적으로 세분화했다고 합니다. 선으로 움직인다는 것은 몸이 어깨, 흉골, 늑골, 척추, 골반의 세분화된 동작과 인식이 아니라 통으로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포사이스가 말한 무용이론은 몸을 세분화하여 움직여 발끝의 작은 움직임이 손끝까지 전달되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히노 아키라는 이런 이론을 받아들여 무용수들에게 세미나를 개최합니다.
그런데 윌리엄 포사이스의 이론을 무술화하여 움직임을 가르쳐보니, 그것이 팔괘장이 되는 것이 아닙니까! (아이키도와도 비슷하기도 합니다. 이런 부분에서 팔괘장과 아이키도의 유사성이 지적되곤 합니다) 150년 전, 팔괘장의 창시자 동해천도 똑 같은 고민을 했고 그 결과 만든 것이 팔괘장이었던 것이죠.

이 글에서는 전통무술에는 모든 것이 다 있고 우수하다는 것이 말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전통무술과 현대격투기는 상호보완적인 존재이며 목적과 목표가 다르다는 것을 지적한 바가 있습니다.

무술피트니스 쪽에서, 평생을 걸려 연구한 내용들이 태극권과 팔괘장과 결국 같고 지금 고민하고 궁금해 했던 내용들을 옛날 사람들도 똑 같이 고민하고 해결하려고 했던 것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최근의 무술계 동향은 무술의 원리로 신체를 조율하는 법을 가르치는 무술피트니스가 인기를 얻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무술피트니스의 결과는 전통무술을 재발견하고 그 가치를 더 강화하는 방향으로 갈 수 밖에 없습니다.(히노 아키라도 투로와 품새를 만들 수밖에 없다에 한 표겁니다.) 비 효율적인 전통무술을 벗어나서 평생을 걸려 알아낸 무술의 원리들을 가르치려고 보니 태극권 투로가 된다는 것이 얼마나 역설적인가요?

연구라는 것은 다른 사람이 끝낸 곳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처음부터 다시 하는 것은 낭비입니다. 무술 피트니스의 개혁은 태극권과 팔괘장이 멈춘 곳에서 시작해야 하는데, 그것은 먼저 언어의 번역입니다. 전통무술을 배울 때 가장 장애가 되는 것이 언어입니다. 우리나라는 한자문화권이라서 장애가 없을 줄 아는데, 아닙니다.

태극권과 팔괘장의 이론들은 전통중국철학으로 체계화되었는데, 이것들은 현대어가 아니라 지구가 자전하는 것도 몰랐던 사람들이 만들어낸 중세의 언어이고 개념입니다. 스포츠에서 음양이란? 태극이란? 팔괘란? 기(氣)란? 도대체 생리학적으로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까? 비한자권 사람들이나 한자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당대의 언어로, 살아있는 생활언어로 풀어내는 것이 무척 시급합니다.

이런 점에서 아직도 신비적이고 애매한 중국철학의 언어에 기대서 전통무술을 이해하고 가르치려는 일부 시도는 무척 아쉽다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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