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해천 선사는 가경(嘉慶) 2년(1797년) 10월 13일 하북성 문안현의 이십오리 주가오(朱家塢)온의 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광서8년(1882년) 10월 15일, 별다른 병 없이 정좌한 채로 서거했다고 한다.
선사의 사후에 문하생들이 유지를 모아 광서 9년 2월 북경 동직문외(東直問外) 동북 3리에 묘지를 정해 안장했다. 세상 사람들은 이것은 「동공묘」라고 칭하였다. 매년 청명절(4월 5일 혹은 4일) 전에는 참배객들이 줄을 서서 북경 교외의 명소가 되었다.
문인 등은 동해천 선사의 위업을 찬양하여 석비를 세웠다. 이 공동묘도 문화대혁명때 생각 없는 사람들에 의해 파괴되었다. 이것을 걱정한 팔괘장 연구회장 故이자명 선생을 비롯한 25인이 발기를 하여 팔괘장 문인 400여명의 협력을 얻어 1980년 8월 2일 북경시 서교(西郊)의 만안공동묘지로 이장하였다.
동해천 선사의 선조는 명나라 초기에 산서성 홍동현에서 하북성 고성현에 이주하였다. 그 후, 명나라의 영락 연간에 동씨 일가의 한 부족이 하북성 개구촌으로 이사하였으며 몇 세대가 거친 후에는 자아가구와 문안현 무관촌으로 진출하였다. 문안현은매년 홍수에 시달렸기 때문에 지대가 높은 주가오촌으로 옮겨 지금까지 21대에 이르고 있다.
선사의 조부 동계덕(董繼德)에게는 동수업(董守業)과 동수신(董守信) 아들 둘이 있었는데, 동수업에게는 동계괴(董繼魁), 동명괴(董明魁, 즉 동해천), 동무괴(董武魁) 세아들이 있었다. 동수업은 농사일을 하는 동시에 근처의 자제들에게 학문을 가르칠 서당을 열었는데, 일설에 따르면 동수업은 「少林의 기술이 극에 달했다」고 말해질 정도로 문무를 겸비한 사람이었다.
옛날 동명괴, 즉 동해천 선사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말이 적으며 예의가 발랐다. 4살 때부터 문자를 배워 6살 때는 천 여자를 알았다고 한다. 낮에는 글을 배우고 밤에는 무술을 수양하여 겨울이나 여름이나 십년을 하루같이 조금도 쉬지 않고 노력을 하였다. 선사는 체격이 크고 힘이 세서 사지의 발육도 보통 사람들과 달랐으며 양팔을 늘어뜨리면 무릎의 밑까지 미쳤다고 한다.
선사는 젊은 시절의 일을 문인들에게 말하지 않았으며 문헌도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확실하지 않지만 남쪽으로 여행 갔던 것은 분명하다. 주가오촌의 진옥주(陣玉珠) 노인의 회고에 따르면 「나의 조부 진국균의 이야기로는 가경 15년 대홍수 때 농작물의 수획이 전무하자 동해천의 집은 빈곤해서 생활이 힘들었다. 그러나 동해천은 무술에만 몰두하여 생활에 신경을 쓰지 않자 모친은 불평을 털어놓았고. 그것을 모면하기 위해, 그리고 전부터 생각하던 무술의 수련을 위해 동해천은 집을 떠나 남쪽으로 갔다고 한다」
동해천은 하늘밖에 하늘이 또 있음을 알아 각지의 명사를 찾아 사방을 주유하여 자신의 무공의 완성을 기하였다. 일반적인 설에 따르면 무술이 번성한 남쪽 안휘성의 구화산에 갔는데 그 곳에서 이인(異人)인 화징하(華撜霞)를 만났다고 한다. 일설에는 운반도인(澐盤道人)이라고도 한다.
이 화징하 밑에서 해천은 8년 동안 공부를 하게 된다. 화징하는 「나의 도(道)는 팔전장(八轉掌)으로 제를 삼고 권계(권법과 무기법)로 용을 삼아 연습하고 익히는데 공이 지극한 조화에 이르면 천하의 적이 없으며 개인적으로는 몸을 양생시킨다」는 오의를 전하고 해천을 속세로 내보냈다. 또한 사숙인 곽원제(郭元濟) 에게 전수받아 심기가 더욱 깊어지고 무예는 대성하였다. 이것이 팔괘장의 기원이다.
전설에 따르면 지금도 구화산에는 150여세의 노도사가 살고 있어 오랜 세월동안 마을에는 내려오지 않았다고 한다. 만약 그를 만나 도를 전수받으려면 산봉우리를 넘고 암벽을 타고 가야 한다. 그는 산나물과 버섯 등을 주로 먹고 산다. 산 위에는 맑은 샘물이 흐르는 완벽한 선경이다. 방문객이 있더라도 소개하는 사람이 없으면 문을 닫고 만나지 않는다고 한다. 해천이 산상에서 수행할 때 있었던 소나무는 지금도 푸르러 하늘 높이 무성하다는 것이다.
윤복의 저서,「동해천」에 의하면 이남유의 기간은 1851년부터 1861년까지이며 아마 남방에서 일어난 태평천국의 난과 비슷한 시기이다. 또한 강과무(康戈武)는 남방의 팔괘장 성지를 고증하는 가운데, 남방의 도교에는 「轉天尊」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것은 도교의 단련법으로 원주상을 걷는 것이라고 한다. 강과무는 동해천 선사가 이가남유(離家南遊)의 초기에 하북성 웅현 관구초에 있는 선조가 살던 곳으로 가서 번자권을 배웠으며 이후 남방으로 가 전천존(轉天尊)의 「주권운동(走圈運動)」을 집어넣었으며 팔괘의 역학을 배우고 깨달은 바가 있어 창시한 것이 지금의 팔괘장이라고 고찰하고 있다.
동선사는 무공을 이뤄 하산한 후에는 남북을 왕래하며 무술을 연마하였으며 정의를 위해 활동한 일들이 각지에 위명을 남겼다. 어느 날, 소주에 갔었는데 소주는 창랑정과 사자림, 한산사 등이 유명한 명승고적이 많은 장소이다. 동선사는 명승지를 주유하며 구경하고 있엇다. 마침 이때 소주의 지사가 악명이 높아서 백성들의 재산을 빼앗고 남자들을 구타하고 여자에게는 폭행을 가하는 등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이것을 들은 동선사는 정의감과 의협심에 불타 야밤중에 지사의 집에 몰래 잠입하여 지사를 죽이고 억류된 여자들을 구해내었다고 한다. 정부의 관리를 살해했기 때문에 선사는 전국에 지명수배되어 관에 쫓기 몸이 되었다 동선사는 이예 이름을 숨기고 하남성으로 달아나 은신하였다. 이때 농민 반란군과 연계가 되어 함풍제의 살해 청부를 받았다고 한다.
일설에 의하면 태평천국의 지도자 홍수전과 동선사의 사숙 광원제와는 친분이 있어 곽이 동선사를 추천했다고 한다. 태평천국의 난은 남방에서 일어나고 북방에서는 염군(捻軍) 의 란(1855∼1868)이 있었기 때문에 동선사는 염군에 참가하여 싸웠으며 밀명을 받아 궁중으로 잠입, 환관으로 가장하여 기회를 노렸다고 전해지고 있다.
동선사는 북경에 들어가서 연줄을 찾아 사왕부(四王府)의 소태감이 되었다. 소태감(小太監)은 환관중 가장 낮은 지위로 동선사는 청소와 세탁, 차심부름 등의 잡역을 하고 있었다. 그 후 어떤 연유인가 숙왕부(肅王府)로 자리를 옮겼다. 그때는 태평천국의 난도, 염군의 난도 실패하였을 시기였다. 동선사는 자신을 운명에 맡긴 체 인고의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동선사는 숭광부에서 승진하여 태감이 되었다. 하지만 왕부에서는 그의 존재를 모르고 있었다. 무술을 모르는 척 가장하였기 때문이다. 왕부의 사람들은 동선사의 무술의 깊이와 당대의 기협인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숙친왕은 청나라 왕족의 일원으로 교재가 많아 친구들이 많았다. 어느날 숙왕은 친구들을 많이 초청하여 연회를 개최하였다.
「우리 왕부의 수문장인 사회회(沙回回)를 소개합니다. 그는 당대 최고의 무술가입니다. 지금 그가 무술을 표연하겠으니 감상하시길 바랍니다」
사회회는 제자도 많았으며 무술도 훌륭했지만 성격이 좋지 않았다. 먼저 수제자 등에 명해 표현을 시켰으며 자신은 마지막으로 나왔다. 사회회는 자신 있게 연무하였으며 하면 할수록 광적인 상태가 되어 관중들에게 불쾌한 느낌을 안게 하였다. 그것을 보고 있던 숙왕은 동해천에게 차를 가져오라고 시켰다. 그런데 차를 가지고 가자 손님들이 너무 많아 혼잡한 탓에 숙왕 앞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그러나 하인에게 주인의 명령은 절대적이다. 마음을 정한 동해천은 한손에는 차, 한 손에는 쟁반을 들고 대천의 옥상을 넘어 숙왕 앞에 내려섰다. (이 이야기는 동해천 선사에 관한 글에는 반드시 나오는 유명한 에피소드)
숙왕은 이것을 보고 무척 놀라
「자네, 무술을 배웠는가?」
고 물었다.
「조금 했습니다만」
선사가 겸허하게 대답하자 사회회의 연무에 싫증을 느끼고 있던 숙왕은 선사에게 연무할 것을 명했다.
선사는 전장(轉掌)부터 시작하여 용이 가는 듯, 매가 나르는 듯, 원숭이 뛰는 듯이 변화가 만발하여 하늘을 나는 것처럼 몸이 가벼웠다. 관중은 모두 숨을 죽이고 지켜보고 잇었다. 끝나자마자 우레와 같은 박수가 건물을 흔들었다. 초대객들은 「이것이 진짜 무술이다. 현대의 명인이다」고 입을 모아 칭찬했다.
이일 이 후, 숙왕은 사회회에게는 별도의 임무를 맡기고 선사를 경비대장에 임명하였다. 사회회 부부는 내심 불만스러웠지만 내색할 수가 없었다. 마음속으로 나쁜 계획을 세운 사회회 부부는 선사에게 가르침을 받고 싶다고 청하였고, 선사는 고사하였지만 재차 청하자 수년간 친절히 지도해 주었다. 그러나 사회회 부부는 언젠가 방심한 틈을 타서 선사를 암살하려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어느 날 밤 사회회 부부는 선사가 잠이 든 틈을 타서 각각 남북의 창문으로부터 동시에 침입하였다. 두 사람의 손에 들고 있던 것은 화약이 붙은 창이었다. 화약의 불로 방은 타버렸다. 선사가 이미 죽었을 것이라고 생각한 두 사람은 안으로 들어가 선사를 찾아보았지만 시체는 고사하고 그 모습조차 보이지 않았다. 두 사람은 크게 당황하여 멀리 도망쳐 버렸다. 숙왕은 이 소식을 듣고 「어떻게 된건가」고 묻자, 「사회회 부부가 화창으로 나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들은 여기서 도망가도 어디서던가 나쁜 짓을 하여 형벌을 받게 될 터이니 굳이 쫓아가지 않았습니다」
후에 들려온 소식으로는 사회회 부부는 동북지방에서 도망가 살인과 방화를 일삼다 지명수배되어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두사람은 대담하게도 북겨에 다시 들어와서 활동을 하자 선사의 고제들인 윤복과 마유기가 체포하여 형부에 넘겼다. 사회회 부부는 선무문 밖 시장통에서 사형에 처해졌으니 선사가 예언한대로 되었다.
동선사는 문하생들을 엄하게 지도 하였다. 배우러 오는 사람들에게는 「좌전우선(左轉右旋)」을 기본으로 한 보환식을 가르쳤다. 오래 수련하여 재능을 인정받은 사람들에게는 「나와 너희들이 배우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문하생들은 「팔괘입니다」고 이궁동성으로 대답했다고 한다.
범위를 넓히면 주역의 팔괘이론이다. 또 이 괘는 「구괘(拘掛)」의 「괘(掛)」이다. 잡고 건다는 의미로 괘(掛)는 팔괘의 괘(卦)에 손수변(手)이 분은 것이다. 손으로 행하는 팔괘가 되는 것이다.
선사가 무술을 가르칠 때는 지극히 엄하였지만 그 이외의 때에는 항상 웃는 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어느 날, 문인들이 모여 연습을 한 뒤 담소를 나누던 중 기분이 좋았던지 선사가 「지금 불을 끌 테니 모두 나를 잡아 보아라. 운이 좋아 잡은 사람에게는 상금을 주겠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문인들이 모두 좋다며 게임이 시작되었다.
불이 꺼지고 캄캄한 방안에서 선사를 찾기 시작했다. 모두 웃으면서 선사를 찾았지만 선사는 어디에도 없었다. 30분 정도 경과하여 불을 켜보았지만 선사는 역시 없었다. 그 때 천장에서 커다란 웃음소리가 났다. 선사는 손가락으로 천장의 모서리를 잡고 발은 천장에 붙이고 있었던 것이다.
어느 날 밤 선사의 침실창문을 두드리는 사람이 있었다. 집밖으로 나가보니 사람 그림자가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그 사람이 서문성(西問城) 위로 가는 것을 따라가 후승문(後勝問)에서 겨우 따라잡을 수 있었다. 그러자 얼굴을 가린 것을 벗고 「젊은 친구가 다리를 잘 단련했군. 나는 철괴도인(鐵拐道人)이다」「사숙, 안녕하십니까」
선사는 반가운 나머지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었다. 철괴도인은 「볼 일이 있어 가봐야겠다. 연습을 게을리 하지 말거라. 그럼 다시 만나자」며 어둠속으로 사라지는 것이었다.
하루는 왕부의 일로 북경 교외로 나갔을 때였다.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도적들이 사는 마을을 지나치게 되었다. 그러자 도적들이 하나 둘씩 나타나서 가는 길을 막아서는 것이었다. 그때 선사는 양손에 계조예(鷄爪銳)라는 무기를 가지고 있었다.
「무슨 일인가」「네 목을 원한다」고 도적의 두목이 말하자 「길을 비키지 않으면 네 목을 치겠다」고 선사가 대답하였다. 도적 두 명이 「말이 많군」이라고 말하며 동시에 칼을 가지고 달려들기 시작했다. 선사의 계조예가 번쩍이자 두 사람은 땅바닥에 쓰러졌다. 주변에 있던 다른 도적들은 함성을 지르며 일제히 칼과 창을 휘두르며 공격을 하였다. 가운데 둘러싸여 있던 선사는 천화타류(穿花打柳)의 수법으로 십여 명의 적을 순식간에 제압하였다. 게다가 도망가는 적을 마을까지 쫓아가서 남은 십여 명의 도적을 토벌하여 도적들을 일망타진하였다.
선사의 문하생중에는 탄자(彈子, 암기의 일종, 새총과 비슷)를 잘 쏘는 사람이 있었다. 이것은 옛날에 아이들이 가지고 놀던 도구였는데 진흙이나 쇠로 만든 구슬을 탄자로 쏘아서 적을 명중시키는 무기였다.
선사가 제자들과 함께 담소하던 중 「이 붕에 탄자를 잘 쏘는 사람이 있는가?」하고 말하자 마침 탄자를 잘 다루는 한 사람이 「날고 있는 제비를 맞추면 백발백중입니다」「사람에게 쏘아본 적은 있는가?」「사람에게 쏜 적은 없습니다」「그럼 나를 한번 쏴보지」그래서 그 남자는 선사의 윗머리를 겨냥하여 쏘았다. 선사는 날아온 탄자(彈子)를 손가락 두 개로 잡아채어 도리어 그 남자에게 던지는 것이었다. 탄자는 상대의 이마에 맞아 작은 혹을 만들었다. 앉아있던 제자들은 크게 웃었다.
사람들이 옛날 무술의 명인이 날아오는 표창과 화살을 손으로 잡는다는 것은 소설에서나 나옴직한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실제로 목격을 하자 놀랄 수밖에 없었다.
동해천 선사는 기억력이 뛰어났다고 한다. 이자명 선생의 의하면, 「내가 동선사에게 입문을 하고 난후 출신지를 물어보았다. 하북성 기현(冀縣)에 있는 혁가총(赫家塚)이라고 대답하자 선사는 그곳에 한 번 가본 적이 있다며 그곳에는 커다란 무덤이 몇 개 있고 그 앞에는 작은 움막이 있으며 무덤 위에도 움막이 있다고 말씀하시며, 그 동네에는 진봉의(秦鳳儀)라는 탄퇴의 명인이 있었는데 무슨 연유인가 문인들은 하나도 없었다고 하셨는데 그 기억하신 바가 모두 맞아 깜짝 놀랐다」고 양진포 선생이 회고하셨다고 한다.
동선사의 무술의 깊이는 매우 깊어 신출귀몰하였으며 그 변화는 신묘하여 보통사람의 상상을 넘어섰다. 권법은 도에 맞았으며 무술의 이치는 무한한 가능성을 보여주어 지극한 경지에 다다랐다.
동선사의 무명이 높아지자 그 무덕에 흠모하여 입문하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대부분의 깊은 수련을 거친 이미 일문의 대가라 할만한 사람들이었다. 선사는 이 사람들에게 지금까지 수련해온 무술들을 지켜보며 교정해 주었으며 주권(走圈)을 도는 법을 전수하셨다. 무술의 이치에 맞지 않는 부분을 수정시켰으며 정확하게 하도록 지도하였고 전장(轉掌)의 원리와 무술의 용법을 가르쳐서 무술의 진리를 자득하도록 하였다. 그래서 선사 밑에서 배운 동문제자들의 투로가 차이가 나는 것이다. 선사는 입문 전에 탄퇴를 수행한 사람에게는 발차기가 많은 것을, 지당권을 한 사람에게는 지상에서 구르면서 공격하는 기술들을 지도했다. 동해천 선사는 1882년 10월 25일 8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문화대혁명이 10여년이 지난 1982년, 황폐화한 동선사의 무덤을 이자명, 배석영, 사국정 등의 제자들이 모여 발기를 하여 1982년 북경교외의 만안공원에 묘역을 조성하였으며 이후 저명 팔괘권사들이 안장되어 팔괘장 수련자들의 성지가 되고 있다.
이 전후에 ‘동해천은 팔괘장의 창시자인가?’ 와 ‘동해천은 팔괘장의 시조가 아니다’ 는 논문이 무술잡지에 발표되기 시작했다. 이것은 「음양팔반장(陰陽八盤掌)」을 하는 사람들이 낸 소문이다. 이것은 북경팔괘장연구회의 간부인 강과무, 조대원, 저국용씨 등이 현지 조사를 통해 거짓임이 드러났으며 강과무씨는 ‘팔괘장 원류의 연구’ 라는 장편의 논문을 발표하여 이 논쟁에 쐐기를 박았다. 팔괘장은 처음에 단순히 ‘전장(轉掌)이라고 불렸으나 후에 주역의 이론을 첨가하여 팔괘장이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