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경유刘敬儒는 북경의 대표적인 팔괘장 권사이다. 허베이성 가오양현 출신, 중국 무술 9단이며, 제5차 국가급 무형문화유산 프로젝트 팔괘장(八卦掌) 대표 전승인이다. 현재 베이징시 팔괘장 연구회 부회장을 맡고 있다.
그는 1957년에 뤄싱우(骆兴武)를 사사하여 형의권과 정씨 팔괘장을 배웠고, 이후 추즈허(裘稚和), 허중치(何忠祺), 단샹링(单香陵)을 사사하며 팔괘장과 육합당랑권을 익혔다.
1963년 베이징시 무술 대회 팔괘장에서 1위를 차지했으며, 1979년과 1980년 전국 무술 관람 공연 대회에서 각각 팔괘장 금메달을 획득했다. 1980년 베이징 둥청 무술관 창립에 참여하여 10여 년간 가르쳤다. 2000년 이후 프랑스, 이탈리아 등 10여 개국에서 팔괘장을 전수했으며, 《팔괘장(八卦掌)》, 《팔괘장술진도보(八卦掌述真图谱)》 등의 전문 저서를 출판했다. 전국 팔괘장 통일 편찬 투로(套路, 품새)의 편심을 주도했으며, 좡후이(壮晖), 상위(商钰) 등 다수의 제자를 양성했다.
그의 출판도서 《팔괘장술진도보八卦掌述真图谱》에 수록되어 있는 “나의 무술의 길”을 번역한 것이다.
1936년, 나는 하북성 고양현에서 태어났다. 1946년 우리 가족은 보정에 와서 동가의 현학 골목에 살았다. 골목 맞은편에는 신문사가 하나 있었고, 그 옆에는 무관이 있었던 것이 기억난다. 한 무술 선생님이 계셨는데, 성씨는 모르지만 40여세쯤 되었고 키가 큰 마른 체격이었다. 매일 방과 후면 그분이 아이들에게 무술을 가르치는 것을 보았다. 대인도 있고 어린이도 있었으며, 10여 세 된 아이들도 있었다. 나는 시골에서 갓 왔기 때문에 겁도 많고 수줍어서, 비록 좋아하긴 했지만 다른 사람들과 함께 연습할 용기는 없었다. 그저 옆에서 보기만 했는데, 집안 어른들이 저녁을 먹으러 오라고 찾아올 때까지 몇 번이나 보았는지 모른다. 하지만 이 일은 내게 깊은 인상을 남겼고, 어린 마음에 무술을 배우고 싶은 씨앗을 심어주었다.
1947년, 우리 가족은 북경으로 이사했고 하박창 골목에 살았다. 매일 밤 큰 글자 4행과 작은 글자를 쓰는 것 외에는 몰래 소설을 읽었다.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설악전전(說嶽全傳)》이었다. 책 속의 “악모자자(嶽母刺字)”, “악비배사(嶽飛拜師)”, “력천방우(歷泉訪友)”, “창초소량왕(槍挑小梁王)” 등 많은 흥미진진한 내용이 나를 깊이 매료시키고 내 마음을 움직였다. 나는 악비의 영웅적인 형상에 고무되었고, 그의 충효절의에 대해 무한한 숭배와 경앙을 느꼈다. 이러한 이야기들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에 남아있다.
1951년 나는 11중학교에 입학했고, 그때부터 진정한 무협소설 마니아가 되었다. 장편 기격소설을 가장 좋아했다. 정증인이 쓴 《응조왕》, 궁백우가 쓴 《십이금전표》, 주정목이 쓴 《혈제한광검》, 왕도려가 쓴 《철기은병》, 환주루주가 쓴 《촉산검협전》 등, 수천 권이나 되었다. 부모님의 꾸중과 질책이 두려워 밤에는 몰래 촛불을 켜고 이불 속에서 읽었다. 때로는 이야기에 너무 빠져 밤새도록 읽기도 했다.
내가 다녔던 소학교와 중학교는 천교(天橋)와 가까웠기 때문에 매주 일요일마다 천교에 놀러갔다. 하지만 보삼의 씨름, 장보중의 큰 칼놀이, 대금아와 소금아의 양편(洋片) 상영, 소광자의 청창(清唱), 주국전의 돌깨기 등은 그저 걸음을 멈추지 않고 스쳐 지나갔다. 가장 끌렸던 것은 천교의 삼각시장에 있던 도상구의 평서(評書) 《삼협검》이나 《옹정검협도》였다. 동림로검(童林露劍)을 이야기할 때면 “성은 동이요 이름은 림이요 자는 해천이라… 황포 두루마기에 좌대금을 하고 흰 단추를 달았으며, 발에는 세척신을 신었다. 자주빛이 도는 얼굴에 검고 윤이 나는 큰 변발을 목 뒤로 틀어 올렸다. 항주 무대에서 쌍전분쌍검을 휘둘러 무리들이 ‘팔방을 진동시키는 자주빛 얼굴의 곤륜협객’이라 칭송했다”라는 이야기꾼의 고정된 낭송을 나는 거의 외울 정도였다. 동림의 운명은 내 마음을 꽉 붙들어매어, 매주 일요일이면 꼭 들으러 갔다. 이야기의 후속 내용을 빨리 알고 싶어서 북경시 전역의 각 책대여점을 찾아다니며 《옹정검협도》를 빌려 읽었다. 제40권을 보기 위해 화시(花市), 천교, 동단, 서단, 동사, 서사, 고루, 전문권업장을 뛰어다녔지만 구할 수 없었다. 나중에야 북경에는 제40권이 아예 출판된 적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책 때문에 헛걸음을 많이 했던 것이다.
1954년 내가 좋아하는 농구 운동을 위해 26중학교(문중학교)에 입학했다. 26중의 교내 농구팀은 전시 중학교 농구대회의 챔피언이었다. 문화 수업과 교내 농구팀 시합에 참가하는 것 외에도 여전히 소설에 빠져 있었다. 아쉽게도 더 이상 무협소설은 볼 수 없었다. 1953년 북경시의 모든 책대여점이 갑자기 폐쇄되고 무협소설이 황색서적으로 규정되었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이 나는 《동주열국지》, 《수호》, 《삼국연의》, 《봉신방》, 《서유기》, 그리고 대중마, 대소 톨스토이, 고골, 체호프, 모순, 파금 등이 쓴 각종 명작들을 읽었다. 하지만 악비의 민족적 기개, 특히 동림의 협객적 형상이 때때로 내 머릿속에 떠올라 무술을 배워 국가를 위해 민생을 안정시키겠다는 의지를 북돋워주었다. 협객처럼 정의를 실천하겠다는 큰 뜻은 날로 자라났다.
1957년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나는 8남매 중 장남이었기에, 아버지를 도와 가계를 꾸리기 위해 꿈에도 그리던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내키지 않는 초등학교 교사직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미약한 봉급으로 가계를 보태야 했다. 하지만 새옹지마(塞翁之馬)라고, 화가 복이 될 줄 어찌 알았겠는가! 내가 가르치던 학생 중에 낙연여(駱燕如)라는 학생이 있었는데, 그녀는 유명한 무술가 낙흥무(駱興武) 선생의 딸이었다.
낙 선생은 팔괘장(八卦掌) 대사(大師) 정정화(程廷華) 선생의 유명한 제자 이문표(李文彪)와 형의권(形意拳) 대사(大師) 이존의(李存義)의 유명한 제자 하은광(郝恩光)의 고제(高弟)로, 팔괘장과 형의권 모두에 깊은 조예가 있어 무림(武林)에서 명성이 높았다. 낙 선생은 동북군(東北軍) 오준승(吳峻升)의 부내(府內)에서 교관을 지냈고, 장작림(張作霖) 부내에서 교관을 하던 정정화 선생의 조카 정유공(程有功) 선생과 한 방에서 지내면서 많은 가르침을 받았다. 낙 선생은 동삼성(東三省) 전체에서 명성이 자자했고, 해방 후 북경에서 제자를 가르쳤으며, 문화대혁명 이전에는 북경시 무술운동협회 형의권·팔괘장 조장을 맡기도 했다.
낙 선생은 체구가 크고 우람했으며 눈빛이 빛났고, 팔자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매우 위엄 있고 기개가 넘쳐 사람들에게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기상을 주었다. 만년에는 염소수염을 길러 자애롭고 친근한 모습을 보였다.
나는 낙 선생을 스승으로 모시고 형의권과 팔괘장을 배우게 되어 숙원을 이루었고, 그래서 매우 열심히 연마했다. 거의 매일 퇴근 후에는 선생님 댁에 설치된 《흥무술관(興武術館)》에 가서 수련했다. 술관에 도착하면 첫 번째로 할 일은 비를 들고 마당을 쓰는 것이었다. 쓰레기를 버리고 더러운 물을 버린 다음, 물통을 들고 앞마당의 수도관에 가서 한 통씩 깨끗한 물을 길어와 선생님 댁의 물항아리를 채우고, 모든 잡일을 마친 후에야 수련을 시작했다.
매일 수련할 때는 큰 괴목(槐木) 앞에 서서 9척 장창을 들고 나무를 향해 좌우 손의 난(攔)·나(拿)·찰(紮)를 연습했다. 그런 다음 1미터 길이의 쇠막대를 검으로 삼아 붕(崩)·점(點)을 연습하여 허리·팔·손목의 힘을 기르고, 마지막으로 형의권이나 팔괘장을 연습했다. 묵묵히 연습했고, 선생님이 계시든 안 계시든 한결같았다. 선생님이 기분 좋으실 때는 방에서 나와 한두 번 보시거나 한두 번 지도해 주시면 갑자기 큰 도움을 얻은 느낌이 들었다. 저녁 7시가 지나면 사형(師兄)들이 차례로 도착했고, 그때야 선생님이 설명을 하시거나 시범을 보여주셨다. 우리는 모두 눈을 깜빡이지 않고 바라보며 꽉 기억했다가 집에 돌아가서 시간을 내어 열심히 연습했다.
내가 체계적으로 농구 훈련을 받았기 때문에 무술 동작을 배우는 것이 빠르고 정확했으며, 선생님도 매우 기뻐하셨다. 그때 나는 아직 결혼하지 않았고, 무술을 배우기 위해 30세가 되어서야 결혼했다. 매일 출근만 하면 연습이었기에 다른 사형들보다 진보가 빨라서, 겨우 1년 만에 이미 3년 수련한 일부 사형들을 앞서게 되었다.
내 월급은 매우 적어서 매달 31원밖에 되지 않았다. 그중 20원은 부모님 생활비로 드렸고, 나머지 대부분은 선생님께 효도하는 데 썼다. 결혼할 때까지도 시계를 차본 적이 없었고, 자주 입는 바지는 무릎과 엉덩이에 기운 자국이 있었다. 그때는 출퇴근할 때도 20리(裏)를 걸어 다녔고, 한 달에 3원 하는 버스 월권도 사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 아낀 돈으로 선생님께 효도하려 했다.
선생님은 경극 듣기를 좋아하셔서, 나는 토요일 저녁이면 선생님을 모시고 마연량(馬連良), 담부영(譚富英), 구성용(裘盛戎), 장군추(張君秋) 등의 공연을 들으러 갔다. 선생님이 하북방자(河北梆子)를 좋아하시면 이계운(李桂雲)이나 중국희교(中國戲校)의 어린이 공연을 보러 갔다. 선생님의 신발이 낡으면 서둘러 5원을 들여 내련승(內連升) 신발가게에서 예복용 천으로 만든 천 깔창 신발을 사서 선생님께 드렸다. 선생님 댁의 차가 떨어져 갈 때면 서둘러 장일원(張一元) 차점에 가서 반 근을 사왔다.
선생님은 60여 세에 탈장이 생겨 가지 크기만한 혹이 생겼는데, 자주 내려와서 침대에 누워 꼼짝도 못하고 고통스러워하셨다. 내가 그런 상황을 만나면 급히 뜨거운 수건을 가져와 천천히 밀어 올려드렸다. 때로는 30분이나 걸려 내 팔과 손이 저릴 정도였다. 선생님의 고통을 조금이라도 덜어드릴 수 있다는 것이 나의 가장 큰 기쁨이었다. 탈장이 심해져서 걷기도 힘들어지자 수술을 받으셔야 했다. 선생님은 협화의원에서 수술을 받으셨는데, 수술비가 15원이었다. 나는 25원을 빌려 선생님께 드렸다. 내 이런 모든 행동에 선생님은 매우 감동하셨고, 사모님도 매우 기뻐하셔서 선생님은 나를 특별히 사랑하고 아끼시며 가장 많이 가르쳐 주셨다. 나 또한 매우 기뻐했고, 배우는 것도 가장 빨랐고 연습도 가장 잘 했다.
나는 교사였기에 방학이 있었다. 특히 여름방학은 날도 길고 휴가도 길어서 열심히 수련하기에 가장 좋은 시기였다. 방학이면 매일 아침 6시면 이미 천단공원에 들어가 있었다. 몸을 낮춰 먼저 팔괘장 탕니보(趟泥步)를 연습했다. 보통 북문에서 시작해서 서문을 돌아 기년전(祈年殿) 앞 통로 아래 통로를 지나 칠성석(七星石)으로 돌아와 내 연습 장소에 도착한 다음, 큰 나무를 돌며 원을 그리며 걸으면서 팔괘장 수법을 연습했다. 8시가 넘으면 옷을 바로 입고 공원 여러 팔괘장 연습하는 곳을 돌아다녔다. 곽고민(郭古民) 선생이 큰 나무숲에서 제자들을 가르치면 옆에서 듣곤 했다. 정정추(程靜秋)가 직탕산수(直趟散手)를 걷고 있으면(정정추 선생은 이존의의 제자였다), 나도 따라 연습하고, 그다음 덕옥정(德玉亭) 선생과 한무(韓武) 선생이 연습하는 큰 구덩이에 가서 관찰하고 교류했다.
정오에는 잠시 휴식을 취한 후 선생님 댁에 가서 선생님과 함께 “땡! 땡! 땡!” 소리를 내며 달리는 전차를 타고 천단(天壇)에 다시 가서 연습했다. 나는 내 것을 연습하고 선생님은 선생님의 것을 연습하셨으며, 선생님은 연습을 마치신 후에야 나를 지도해 주셨다. 밤 8시가 되면 씻어 놓은 서홍시(西紅柿) 2근을(그때는 5전만 했다) 들고 다시 천단에 와서 각종 산수(散手)나 팔괘도(八卦刀), 팔괘창(八卦槍)을 연습했다. 피곤해지면 공원 긴 의자에 누워 서홍시를 먹으며 별과 달을 보고, 유성이 하늘을 가로지르는 것을 보았다. 10시가 되어서야 집에 돌아가 샤워를 하고 잠을 자며 즐겁고 바쁜 하루를 마무리했다. 그때 나는 오로지 무술 연습에만 전념하여 얼마나 많은 땀을 흘렸는지, 얼마나 많은 신발을 닳게 했는지 모른다. “공이 수고를 저버리지 않는다”는 말처럼 나의 공력은 비약적으로 발전했고, 선생님도 매우 기뻐하시며 자주 나를 데리고 여러 노선배님들 댁을 방문하여 많은 가르침을 얻게 해주셨다.
1963년 북경에서 건국 이래 가장 성대한 “전시 무술 챔피언십”이 동장안가(東長安街) 체육장에서 열렸는데, 관중이 가득 찼다. 시합을 통해 나는 성인부 형의권·팔괘장 부문에서 챔피언을 차지했다. 대회가 끝난 후, 막 설립된 중앙텔레비전방송국에서 우리 각 종목의 챔피언들을 방송국의 방영실로 초청하여 북경시 인민들에게 현장 시범을 보였다. 그 후 1인당 수고비 25원을 받았는데, 나는 매우 기뻐서 곧바로 신교음식점(新僑飯店)의 홍빈루(鴻賓樓)에서 선생님과 마유청(馬有清), 이병자(李秉慈), 낙대성(駱大成)을 초대하여 축하연을 열었다. 이 식사에 15원을 쓰고 남은 돈은 선생님께 용돈으로 드렸다.
그 당시 동단공원에서는 권법을 연습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교류와 절차탁마(切磋琢磨)하기에 좋았다. 그곳에서 나는 많은 무술 선배들을 알게 되었고 많은 무술 친구들도 사귀었는데, 지금까지도 그들의 지도와 가르침을 잊을 수 없다. 후에 나는 천단에서 동단공원으로 옮겨 권법을 연습했다.
겨울에는 왕달삼(王達三) 선생이 태극권을 가르치는 장소에서 연습했다. 매일 아침 6시 30분이면 나는 이미 온몸에 땀이 흐를 정도로 연습하고 있었는데, 이때면 항상 90여 세의 백발이 성성한 한 노파가 매일 와서 “만두가 쪄졌나요?”라고 큰 소리로 외치곤 했다. 왕달삼은 이문표 선생의 제자로, 나의 친사숙(親師叔)이었으며, 그의 창술과 검술이 매우 뛰어났다. 나는 자주 그의 집에 가서 팔면전신창(八面戰身槍), 흑백요자대창(黑白鷂子對槍), 순양검(純陽劍)을 배웠다. 그는 나에게 투로만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직접 나와 함께 대차(對紮)하면서 창과 검의 사용법을 가르쳐 주었다.
산서인(山西人) 전근지(錢謹之) 선생은 대용방(戴龍邦)의 후인 대위(戴魁)의 제자로, 그의 십이형(十二形)이 매우 뛰어났는데, 투로가 복잡할 뿐만 아니라 독특한 면도 있었다. 그는 나와 친분이 두터워 자주 십이형을 나와 전문장(錢文章) 선생에게 아낌없이 전수해 주어 나는 많은 도움을 받았다.
천진인(天津人) 장여림(張如林) 선생은 그의 팔괘장이 고의성파(高義盛派)였고, 그의 형의 십이형이 매우 복잡하면서도 독특한 점이 있었다. 그는 요리를 잘했는데, 자주 나를 위해 요리를 해주었고 이것이 그가 가장 즐거워하는 일이었다. 그는 나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어 내가 고의성 선생의 팔괘장에 대해 일정한 이해와 인식을 갖게 되었다.
정정화(程廷華) 선생의 둘째 아들 정유신(程有信) 선생, 일명 이해(二海)는 퇴직 후 매일 공원에서 팔괘장을 전수했다. 그는 매우 보수적이어서 그의 제자들이 약간의 가르침이라도 얻기가 매우 어려웠지만, 나는 늘 그를 따라다니며 결국 그의 지도를 받을 수 있었고 헛된 노력을 하지 않았다.
정유신 선생의 장소에서 나는 왕영당(王榮堂) 선생을 알게 되었다. 왕영당 선생은 정정화의 제자 양명산(楊明山)의 제자였는데, 나는 자주 그의 집을 방문하여 그에게 수법을 설명해 달라고 청했다. 우리는 자주 지단공원(地壇公園)에 갔고, 거기서 유만창(劉晚蒼) 선생과 오빈지(吳彬芝) 선생을 알게 되었다. 나는 오 선생을 따라 무당검법(武當劍法)과 고의성 선생의 “삼십육로번신(三十六路翻身)”을 배웠다. 유 선생에게는 태극추수(太極推手)를 연습했는데, 그의 제자들과 추수를 하기도 했고 유 선생도 직접 나와 추수를 하면서 나는 또 많은 도움을 받았다.
나는 일요일 오전에 중산공원(中山公園)에 가서 선생님과 권법을 연습한 후, 양우정(楊禹廷) 노선생이 학생들에게 태극권리(太極拳理)를 강의하는 것을 듣거나 사정강(史正剛) 노화상이 이병자(李秉慈), 마유청(馬有清)에게 대비권(大悲拳)을 가르치는 것을 보았다. 또는 당시의 금우헌(今雨軒) 앞에서 유지강(劉志剛) 선생의 무림일사(武林逸事)를 듣거나 그의 제자들이 팔괘장을 연습하는 것을 보았다. 때로는 한기창(韓其昌) 선생도 제자들을 데리고 매화장(梅花樁)을 연습하러 왔다. 이 모든 것이 나의 무술에 대한 인식을 높여주었고 나의 기예 향상에 일정한 도움이 되었다.
나는 자주 천안문의 역사박물관 앞 광장에서 연습했는데, 양우정 선생의 사제(師弟) 조유보(曹幼甫) 선생과 정정화의 제자 유빈(劉斌)의 고족(高足) 왕문규(王文奎) 선생도 거기서 연습했다. 왕문규 선생은 나를 매우 잘 대해주었고, 조금도 보수적이지 않아서 내가 무엇을 배우고 싶으면 그것을 가르쳐 주었다. 예를 들어 팔괘장의 팔형이십사식(八形二十四式), 팔괘연환검(八卦連環劍), 군난도(群攔刀) 등을 가르쳐 주었다. 거기서 나는 또한 자주 조 선생의 제자 서유재(徐裕才), 이진해(李振海) 등과 추수(推手)를 하며 절차탁마하고 교류했는데, 조 선생은 옆에서 보시면서 즐거워하셨다…
어느 날, 내가 동단공원에서 권법을 연습하고 있었다. 막 연습을 마쳤을 때, 키가 큰 사람이 다가왔다. 작은 팔자수염을 기르고 있었으며, 줄무늬 병원복을 입고 지팡이를 들고 있었다. 그는 나에게 “나를 아시나요?”라고 물었다. 나는 당황했는데, 그를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는 급히 “나는 유담봉(劉譚峰)입니다. 기억나시나요?”라고 말했다. 아! 나는 급히 “기억납니다”라고 대답했다. 유 선생은 광동인으로, 중학교 때 광주에서 포광영(鮑光英) 선생에게 탐수당랑권(螳手螂拳)을 배웠고, 항일전쟁 시기에는 동남아시아 지역에서 공산당에 가입하여 항일투쟁을 했으며, 해방 전에는 감옥에도 있었고, 현재는 중련부(中聯部)의 간부였다.
그는 많은 돈을 들여 정유신 선생에게 팔괘장을 배웠지만, 무술계에서 명성이나 이익을 다투지 않고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서 그를 아는 사람이 매우 적었다. 그는 “당신이 시합에 참가했을 때 나는 관람석에 앉아 있었습니다. 연습을 잘 하시더군요. 나는 지금 북경의원에 입원해 있는데, 며칠 후면 퇴원할 것 같습니다. 당신에게 뭔가를 가르쳐주고 싶은데 어떠신가요?”라고 말했다. 나는 이 말을 듣고 매우 기뻐서, 그와 시간과 장소를 정한 후에야 헤어졌다.
겨울에 나는 5시에 일어나 자전거를 타고 15리를 달려 목서지(木樨地)의 중련부 문 앞 작은 숲으로 갔다. 매서운 한기가 뼈를 에는 날씨였다! 유 선생은 두꺼운 외투를 입고 면모자와 장갑, 마스크를 쓰고, 정시에 서둘러서 도착했다. 그는 태극권가(太極拳家) 무운경(武雲卿)과 매우 친밀했고 서로 태극권을 배우고 절차탁마했다. 유 선생은 먼저 나에게 태극을 가르쳤고, 나는 한 달 만에 가가(架子)를 배웠다. 그 후에야 팔대학(八大掌)과 팔팔육십사장(八八六十四掌)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나는 매우 열심히 배웠고 그는 매우 기뻐했다.
어느 날, 그는 한 쌍의 무기를 가져와서 내게 무엇인지 물었다. 나는 한 번 보고 알았다: 이것은 팔괘자오원앙월(八卦子午鴛鴦鉞)이었다. 그는 내가 배우고 싶은지 물었고, 나는 당연히 배우고 싶다고 했다. 그는 나에게 먼저 나무로 한 쌍을 만들어보라고 했고, 만들고 나서 배우라고 했다. 그는 내가 배우고 싶어 안달이 난 것을 몰랐다. 퇴근해서 집에 돌아오자마자 내 침대 판자를 잘라서 줄로 조금씩 갈아가며 한 쌍의 월(鉞)을 만들었다. 다음 날 그의 앞에 가져갔을 때 그는 매우 놀랐다! 어떻게 이렇게 빨리 만들었느냐고! 내가 과정을 설명하자 그는 매우 기뻐하며 바로 전수해 주었다.
나는 매일 이른 새벽에 자전거로 30리가 넘는 거리를 달려가야 했고, 오전 8시에 출근해야 했으니 정말 고된 일이었다. 하지만 나는 고통 속에서도 즐거움을 느꼈고, 마침내 내가 꿈에도 그리던 팔괘장의 독특한 무기인 팔괘자오원앙월(八卦子午鴛鴦鉞)을 배울 수 있게 되었다. 팔괘자오원앙월은 일월호형검(日月弧形劍)이라고도 하며, 정식 명칭은 녹각(鹿角)·어미(魚尾)·사신(蛇身)·웅배(熊背)·봉안(鳳眼), 사첨구십삼봉(四尖九十三鋒), 팔괘자오원앙월이다.
제1세트는 이호금룡(二虎擒龍)이라 하여 8개의 투로(套路)로 나뉘며, 특히 창과 봉을 제압하는 데 전문적이다. 제2세트는 쌍사희봉(雙蛇戲鳳)이라 하여 8개의 투로로 나뉘며, 특히 도와 검을 제압하는 데 전문적이다. 제3세트는 팔문금쇄(八門金鎖)라 하여 8장(掌)에 따라 연습하며, 그 목적은 마음대로 자유자재로 구사하여 성수(成手)를 이루는 것이다.
1979년, 내가 남녕(南寧)의 제1회 전국무술관모교류대회에 참가하기 직전, 유 선생은 나에게 정유신 선생의 팔대당권(八大堂拳) 사진 한 세트를 선물했다. 현재 국내외 잡지나 팔괘장 동문들이 가지고 있는, 면포 솜옷을 입은 정유신의 사진들은 모두 내가 나눠준 권사(拳史) 사진이거나 그것을 복제한 것들이다. 1980년 5월, 내가 산서성 태원(太原)의 제2회 전국무술관모교류대회에 참가하러 갈 때, 유 선생은 요독증으로 북경의원에 입원해 계셨다. 출발하기 전날 밤, 나는 그의 아내와 딸을 대신해 온 밤을 지켰다. 그날 밤, 나는 눈 한번 붙이지 못했다. 유 선생의 가려움을 긁어드렸는데, 온몸이 가려워서 멈추지 않으셨고 피부가 거의 찢어질 정도였지만 여전히 시원하지 않아하셨다. 내 두 팔이 저려왔지만 감히 멈출 수 없었다. 내가 태원에서 다시 팔괘장 금메달을 따고 집에 돌아왔을 때, 책상 위에는 유 선생의 추도회 부고가 놓여 있었다. 나는 무척 비통했다.
내가 선무구(宣武區) 춘수호동(椿樹胡同) 소학교에서 교사로 있을 때, 영백강(寧伯康) 여사는 나의 동료였는데, 이를 통해 왕 선생을 알게 되었다. 왕 선생은 영 선생의 남편으로, 그의 조부는 윤복(尹福)과 막역한 사이였다. 그래서 왕 선생은 윤복의 아들 윤옥장(尹玉璋) 선생에게서 윤씨 팔괘장을 배웠다. 왕 선생은 나와 매우 친했고, 내가 가르칠 만한 인재라고 생각하여 하충기(何忠祺) 선생을 찾아뵙게 해주었다.
하 선생의 아버지는 윤복의 제자 하금괴(何金魁)였고, 하 선생의 어머니는 윤복 선생의 딸 윤금옥(尹金玉)이었다. 하 선생은 어릴 때부터 부모님과 외삼촌 윤옥장, 사숙(師叔) 마귀(馬貴)를 따라 팔괘장을 연습했으니, 가전(家傳)과 사수(師授)를 모두 받은 셈이었다. 윤씨 팔괘장의 진전(眞傳)이자 정종(正宗)으로, 윤씨 팔괘장의 정요(精要)와 신수(神髓)를 깊이 얻었다. 하 선생은 기쁘게 나를 받아주셨고, 그래서 나는 자주 하 선생 댁을 찾아가 선생님의 친자(親自) 지점(指點)과 전수(傳授)를 받는 행운을 얻었다.
안타깝게도 그는 문화대혁명의 박해를 받아 온몸이 병들었고, 많은 투로(套路)를 잊어버렸거나 연습할 수 없게 되어 내가 배운 장식(掌式)이 많지 않았다. 매번 만날 때마다 그는 쉬지 않고 나에게 팔괘장의 수법과 도검의 사용법을 전수해 주었다. 때로는 우리 둘이 젓가락을 들고 방 안에서 비교하며 연습했는데, 덕분에 나는 윤씨 팔괘장의 요점과 문경(門徑)을 엿볼 수 있었다. 내가 정씨 팔괘장과 윤씨 팔괘장을 연습한 것을 통해 동해천(董海川) 팔괘장의 기본적인 면모와 정요(精要)를 깨닫게 되었는데, 이는 하 선생 덕분이었다.
1963년 가을, 기억하기로는 어느 일요일 오전이었다. 나는 연습을 마치고 막 집에 돌아가려고 할 때, 갑자기 40대로 보이는 중년 남성이 동단공원의 서북쪽 모퉁이에서 권법을 연습하는 것을 보았다. 그는 능숙하고 자연스럽게, 원활하게 연습하고 있었는데, 이런 권법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매우 호기심이 생겨서 나는 가까이 다가갔고, 그가 연습을 마치기를 기다렸다가 공손히 물었다: “선생님께서는 어떤 권법을 연습하시는 건가요?” 그가 대답했다: “나선권(螺旋拳)입니다.” 나는 매우 놀라서 “누구에게 배우셨나요?”라고 물었다. 그는 “노유(老裘)”라고 했다. “음! 노유가 누구인가요?” 그가 말했다: “유치화(裘稚和)입니다.” 나는 매우 이상하게 여겼다. 왜냐하면 나는 이분을 알고 있었는데, 그는 매주 일요일마다 중산공원에 와서 내가 권법 연습하는 것을 보곤 했기 때문이다.
그때 마유청 사형은 낙 선생님에게 형의권을 배우고 있었다. 선생님은 돌의자에 앉아서 나와 유청이 한 사람씩 번갈아 연습하는 것을 보고 계셨고, 옆에는 이 유 선생이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때로는 선생님께 담배를 건네주기도 했다. 그는 자신은 연습할 줄 모르고, 특히 보는 것을 좋아한다고 표현했다. 이 중년 남성은 이 말을 듣고 하하하 웃으며 말했다: “저는 자동차7창의 당위서기입니다. 제 이름은 조장청(趙長青)이고, 제가 당신을 속일 리가 있겠습니까?” 나는 말했다: “좋습니다. 토요일 저녁 6시에 선생님 공장에 가서 선생님을 뵙겠습니다. 저를 기다려주시겠습니까?” 그가 말했다: “좋습니다.” 그리고 자동차7창의 위치를 알려주고 헤어졌다.
토요일 오후 4시, 퇴근 후 나는 자전거를 타고 20여 리 떨어진 사하진(沙河鎮)으로 달려갔다. 유 선생님은 문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계셨고, 우리는 만나자마자 하하 웃으며 서로를 반겼다. 그는 한편으로 자신이 왜 연습할 줄 모른다고 했는지 설명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나를 그의 숙소로 안내했다. 숙소에서 나는 그와 장점괴(張占魁) 선생의 합영(合影)을 보았다. 그는 말했다: “이 큰 수염을 기른 분이 장점괴 선생이고, 왼쪽에 서 있는 사람이 조도신(趙道新)이며, 오른쪽이 저입니다.” 또 그는 조도신 선생과 수법을 비교하는 사진을 꺼내며 말했다: “그때 그는 천진의 유명한 대자본가였고, 장점괴 선생과 왕황재(王薌齋) 선생은 모두 그가 부양하고 있었죠. 왕 선생은 매달 그에게서 200원의 은전을 받았습니다. 삼반오반(三反五反) 때 그의 재산은 정부에 의해 모두 몰수되었고, 남은 돈으로 대형 트럭 한 대를 사서 천진과 북경 사이를 운송하다가 공사합영 때 운수7창에 합병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우리는 매주 일요일마다 천단에 가서 권법을 연습했다. 그는 형의권, 팔괘장을 지도하는 것 외에도 자신이 편찬한 《나선권》을 가르쳐 주었다. 당시의 명칭은 《무당삼십육식(武當三十六式)》이었다. 나선권 1세트와 나선권 2세트로 나뉘어 있었다. 매우 배우기 어려웠는데, 모든 장식(掌式)에 나선력(螺旋勁)이 들어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3년이 빠르게 지나갔고, 문화대혁명이 시작되었다. 조장청은 자본주의 길을 걷는 당권파로 낙인찍혔다.
후에 유 선생님은 몇 번 더 오셨고, 북경에 오실 때마다 우리는 함께 시간을 보냈으며, 그의 “나선권”을 배웠다. 나는 또한 두 번 천진에 찾아가 그를 뵈었다. 그는 나를 데리고 조도신 선생을 찾아뵙고 조 선생에게서 권법을 배우게 하려고 했다. 그는 “내가 데리고 간 사람만이 그가 가르쳐주시는 걸 받을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아쉽게도 나는 천진에 거주할 수 없었기에 조 선생을 찾아뵐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조 선생이 직접 쓰신 《심회권(心會拳)》의 전신(前身)인 원고를 나에게 주어 기념하게 했다. 당시의 명칭은 《내공권법(內功拳法)》으로, 총 아홉 단계로 나뉘어 있었다:
1단계: 동정불이(動靜不二), 화광동진(和光同塵)
2단계: 응신포원(凝神抱元), 고본반근(固本盤根)
3단계: 용상학거(龍翔鶴擧), 웅경조신(熊徑鳥伸)
4단계: 곡신개합(曲伸開闔), 침착송정(沈著松靜)
5단계: 종횡순역(縱橫順逆), 출입무간(出入無間)
6단계: 추축영(追逐影), 광약방불(光若仿佛)
7단계: 흡심존신(翕心存神), 병기박정(幷氣搏精)
8단계: 뇌붕전질(雷崩電掣), 골진근등(骨振筋騰)
아쉽게도 나는 이것을 배울 기회가 없었고, 평생의 한이 되었다.
다행히도 나는 단릉(單陵) 선생을 사부로 모시고 《육합당랑권(六合螳螂拳)》을 배울 인연이 있었다. 어느 날 오전, 내가 동단공원에서 연습을 마치고 막 집에 돌아가려 할 때, 갑자기 동단체육장에서 3명이 권법을 연습하는 것을 발견했다. 그때 동단공원에는 아직 북쪽의 큰 산이 없었기에 나는 체육장으로 가서 보았다. 보니 마한청(馬漢清) 선생과 이병자(李秉慈) 선생이 한 노선생과 함께 당랑권을 연습하고 있었다. 노선생은 60여 세로, 키가 크고 마른 체격이었으며, 검은색 중국식 옷을 입고 해방표 고무신을 신고 있었다. 눈빛이 반짝이고 정신이 매우 충만해 보였다. 내가 짐작하기에 단향릉(單香陵) 선생일 것 같아서 공손히 다가가 물었다: “선생님께서는 단 선생님이신가요?” 그는 산동 사투리로 시원스럽게 대답했다: “그렇소, 당신은 누구요?” 내가 말했다: “저는 낙흥무의 제자입니다.” 그가 말했다: “외인이 아니군요. 나는 당신 선생님과 매우 친하니, 돌아가서 물어보면 알 것이오.” 나는 그들이 권법 연습하는 것을 잠시 보다가 그의 거처를 물었고, “오후에 낙 선생님을 모시고 찾아뵙겠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즐겁게 “좋소, 환영하오!”라고 했다. 그래서 그는 나에게 자동차7창의 위치를 일러주었고 우리는 헤어졌다. 오후에 나는 선생을 모시고 그를 찾아뵙고 당랑권을 배우고 싶다고 밝혔는데, 뤄 선생도 흔쾌히 동의했다. 단 선생이 말했다. “좋네, 그대의 제자가 곧 나의 제자이니, 무엇이든 배우고 싶은 대로 배우라.” 이에 나는 단 선생에게 육합당랑권을 배우기 시작했다.
단 선생은 산둥성 황현山東黃縣 출신이었다. 일찍이 산둥성 라이양현 출신 뤼멍차오呂孟超 선생에게 통배권과 창곤술을 배웠는데, 전후 8년에 걸쳤다. 이후 황현 딩쯔청丁自成
선생 댁으로 갔다. 단 선생은 딩 부인과 친인척 관계여서 굳이 사사할 필요 없이 딩 선생에게 육합당랑권을 배웠으며, 자오첸이, 장샹싼, 류윈차오 등과 사형제였다. 단 선생은 무예에 미쳐 철사장, 응조공 등 모든 것을 연마했으며, 벽돌 7장을 쌓아놓고 한 번의 장풍으로 모두 산산조각 냈다. 선생의 육합당랑권은 경지에 달했고, 좌우로 막힘없고, 원활하고 자연스러워 어떻게 공격하든 맞아줄 수밖에 없었다. 그의 창곤술 또한 매우 정교하여 독보적이었다.
1982년 여름방학, 나는 직접 황현을 찾아 그 노인을 찾아뵙고 무릎 꿇고 사사했다.
오전과 오후는 권법 수련 시간이었다. 저녁 식사 후 단 선생은 필자들에게 육합당랑권의 권법 원리와 수법에 대해 설명했다. “당랑권은 ‘일이삼강사유오화(一二三剛四柔五化)’의 경지에 도달해야 하고, 또한 명강, 암강, 명유, 암유의 네 가지 내력(內勁)이 있으며, 수법은 기계 바퀴처럼 활발하고, 몸놀림은 쇠구슬처럼 둥글며, 허리는 차축 같고, 몸은 드릴봉과 같으며, 손을 뻗으면 화살 같고, 번개처럼 빠르게 바늘을 꽂는 듯한 타법을 사용한다……” 그는 지칠 줄 모르고 거침없이 이야기했으며, 때로는 일어서서 직접 동작을 시범하며 설명하기도 했다.
단 선생의 자녀들은 내몽골 바오터우시에 거주했으므로 그는 자주 바오터우와 산둥을 오갔다. 매번 단 선생이 베이징을 지날 때마다 그의 조카집이나 쉬란위안의 집에 머물렀는데, 이때가 바로 필자들이 배움을 얻을 좋은 기회였다. 나는 아침에도 가고, 오후에도 가고, 저녁에도 갔다. 많이 찾아갈수록 필자가 배우는 것도 많았고, 진보도 매우 빨랐다.
지난 40년간 나는 행운처럼 뤄싱우駱興武 선생을 스승으로 모시고 형의권, 정씨 팔괘장을 배웠고, 추즈허 선생을 따라 팔괘장과 나선권을 배웠으며, 허중치 선생에게서 윤씨 팔괘장을 배웠고, 다시 단샹링 선생에게 사사하여 육합당랑권을 배웠다. 동시에 많은 저명한 무술가 청유신, 류탄펑, 왕원쿠이, 왕룽탕 등 선생들의 가르침과 지도를 받았다. 수년간의 각고의 노력과 끊임없는 추구를 거쳐 팔괘장, 형의권, 육합당랑권의 정수를 깊이 터득했다. 무예 수련에 대한 필자의 염원이 마침내 이루어졌으니, 이것이 필자 일생의 가장 큰 행복이었다.
1960년대, 둥창안제東長安街와 베이하이北海 체육장에서는 자주 무술 시연이 있었고, 관중은 열렬히 환호했으며 많은 노선배들이 참가했다. 양위팅楊禹廷, 우투난吳圖南 선생의 태극권, 추이이쓰崔毅士 선생의 추수, 천쯔장陳子江의 용형검, 뤄싱우駱興武 선생의 형의권 또는 팔괘장, 리야오천李堯臣 선생의 포추, 이천기 선생의 무당검, 우빈吳斌 선생의 착각번자 또는 도리가편刀裏加鞭, 장원핑張文平의 간자편杆子鞭 등 모두 기예가 정교하여 보기 드물었다. 이는 필자의 무술 수양 향상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노력은 결코 배신하지 않는다. 1979년 5월, 국가 체육 위원회는 광시성 난닝에서 제1회 전국 무술 시연 교류 대회를 개최했다. 이는 문화대혁명 후 첫 무술 대회였다. 베이징은 수도였으므로 각별히 중시했고, 먼저 각 구와 현에서 대표를 선발한 후 둥창안제 체육장에서 전 시의 최종 선발전을 거쳤다. 경쟁을 거쳐 필자와 자오다위안趙大元은 대표팀에 선발되었다. 이번 시연 교류 대회는 문화대혁명 후 가장 성대하고 대규모의 행사였으며, 문화대혁명 중 비참하게 박해받았으나 여전히 건재한 노무술 선배들도 모두 참가하여 경합했다. 시범 경기를 거쳐 나는 베이징 시민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영광스럽게도 팔괘장 금메달을 획득했다. 1980년 산시성 타이위안시에서 개최된 제2회 전국 무술 시연 교류 대회에서 나는 베이징시 대표팀의 일원으로서 또다시 영광스럽게 금메달을 획득했다. 1981년 선양에서 개최된 제3회 무술 시연 교류 대회에서는 베이징시 체육 위원회 판바오위안範寶元 여사가 필자에게 참가하지 말라고 권유했다. 결과적으로 이번 대회에서 필자의 제자 푸춘메이가 팔괘장 금메달을 획득하여 시에 영광을 안겨주어 필자를 매우 뿌듯하게 했다.
1980년, 베이징시 둥청구 체육 위원회의 지도 아래 탕융장唐永江, 필자, 리빙츠李秉慈, 류훙츠劉鴻池, 마창쉰馬長勳, 왕화王懷 6인이 ‘둥청 무술관東城武術館’을 설립했다. 이는 문혁 후 전국 최초의 무술관이었다. 처음에는 학생 모집에 대한 우려가 있었으나, 뜻밖에도 배우려는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이에 필자들은 많은 반을 조직하고 새로운 코치들을 고용해야 했으며, 전국에 무술 학교를 개설하는 선례를 만들었다. 이후 전국 각지의 무술관과 학교가 죽순처럼 우후죽순처럼 생겨났으니, 필자들이 무술 발전에 일조했다고 할 수 있다.
1981년 나는 베이징 무술팀의 팔괘장 코치로 초빙되어 전문적으로 팔괘장 기술을 전수했다. 이 팀에서 단속적으로 10여 년간 가르치는 동안 필자의 학생 꺼춘옌戈春燕은 전국 무술 대회에서 5차례에 걸쳐 팔괘장 금메달을 획득했으며, 장훙메이張宏梅 및 이후 좡후이壯暉, 상위 또한 전국 팔괘장 금메달을 획득했다.
1981년 베이징시에는 문혁 후 전국 최초의 무술협회가 설립되었고, 나는 위원이었다. 류저劉哲 선생이 회장을, 판바오윈範寶雲 여사가 비서장을 맡았다. 1982년 베이징 무협의 지도 아래 베이징시 팔괘장 연구회가 설립되었으며, 대회에 참가한 팔괘장 동문 100여 명 중 17명을 선출하여 상무위원회를 구성했다. 모두 상원쿠이上文奎 선생을 회장으로 추대했으나 노선생은 매우 겸손하여 어떤 직책도 맡지 않겠다고 했다. 결국 판바오윈 여사가 리쯔밍李子鳴 선생을 회장으로 지정할 수밖에 없었다. 연구 활동의 편의를 위해 판바오윈 여사는 리쯔밍의 제자 자오다위안을 비서장으로, 필자를 부비서장으로 제안했고, 가오원高文, 판쉐즈潘學植도 부비서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리하여 전국 최초의 팔괘장 연구회가 탄생했다.
처음에는 팔괘장 연구회가 일부 활동을 개최하여 매우 활발했으며, 팔괘장 동문과 무술계 인사들의 환영을 받았다. 이후 활동은 줄어들었다. 12년 후 이자명 노사가 사망하여 재선거를 진행했다. 1992년 베이징 무술원이 설립되자, 착각번자 전문가이자 무협 부회장인 류쉐劉學 선생이 필자를 불러 필자와 마촨쉬馬傳旭에게 팔괘장 연구회의 두 번째 재선거를 조직하도록 했고, 이번 재선거에서 나는 부회장으로 선출되었다.
1987년 나는 사형 마유칭馬有清 선생과 협력하여 우의출판사에서 《청씨 팔괘장程氏八卦掌》이라는 책을 출판했으나, 급하게 작성되어 내용이 너무 간략했다. 1994년 11월 베이징 무술원 우빈 선생의 인솔 아래 대표팀이 홍콩에서 ‘국제 무술 시연 대회’에 참가하여 공연했고, 홍콩 동포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홍콩에 있을 때, 당시 중국 무술원 부원장이던 장 선생이 필자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전통 무술 권종 10가지의 정리 작업을 추진하고, 전국 무술 전문가들을 조직하여 전국 통일 투로를 창작하여 보존, 보급, 발전에 용이하게 해야 한다고. 이에 나는 귀국 후 장 선생의 지도 아래 이 작업을 구체적으로 조직했고, 전국 일부 무술 전문가들과 함께 중국 무술 시리즈 규정 투로 《팔괘장》 책의 통합 편집, 심사, 최종 원고 작업을 진행했다. 이 책은 중국 무술 연구원 심사, 베이징 체육대학 출판사 출판으로 국내외에 발행되었으며, 나는 제1 부편집장으로서 팔괘장의 발전에 일조했다. 이 투로는 국내 일부 팔괘장 전문가들이 수많은 노력과 정성을 들여 창작한 것으로, 팔괘장의 정수를 담고 있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팔괘장의 격투 부분이 부족하여 불완전했다. 이후 나는 중앙텔레비전 방송국 등 여러 기관의 초청으로 일부 강연과 교육 영상을 촬영했으나 내용이 너무 적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지금 각종 어려움을 극복하고 전력을 다해 이 책을 저술하여, 많은 노선배님들에게서 온갖 고생 끝에 배운 것들과 지난 40년간의 경험과 소감을 전면적이고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모든 이와 사회에 헌정한다. 이는 팔괘장의 발양광대, 보급 발전을 위해 선후를 잇는 작업을 수행하고, 무술이 세계로 나아가 인류에 복을 가져다주는 데 필자의 마땅한 힘을 기여하고자 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