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괘장을 배우고 무공을 완성한, 한모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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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괘장을 배우고 무공을 완성한, 한모협

한모협(韩慕侠, 1877-1947) 중국 천진 진남구 대한장에서 태어났다. 형의권과 팔괘장 대가이다. 청나라 말기 10대 무술가로 선정이 되었는데 청말 가장 유명한 무술가인 것은 맞다.

사부 복이 있어서 장점괴, 응문천 등 9명의 스승을 따라 무예를 익혔다. 저우언라이가 난카이 학교(南开学校)에 다니는 기간에 그에게 무술을 배웠다. 저우언라이의 스승이라고는 하지만 1947년에 죽어 제자 덕은 전혀 보지 못하고 가난 속에서 사망하였다.

생애

한모협, 본명은 한금용(韩金镛)이다. 모협은 그의 아홉 번째 스승이 지어준 이름이다. 

1877년, 한모협은 천진시 진남구 대한장의 빈농가정에서 태어났으며 온 가족이 농사 잡일을 하며 해를 보냈다. 우연한 기회에 부자 두 사람은 직예 염무 총관 해창무(海彰武)의 집에 하인으로 고용돼 그들 집의 호원 표사 주빈의(周斌义)를 시중들었다.

주빈의는 소림문 출신으로 칼과 검의 단병기를 잘 다루고 거문고와 바둑, 서화를 잘하여 의리가 호탕하고 협사의 풍모가 있었다. 당시 한모협은 나이는 비록 어리지만 근면한 점이 눈에 띄어 주빈의의 제자가 된다. 이때부터 한모협은 주 사부를 모시면서 집안 잡일을 하고 무술을 배우고 글을 배웠다. 주표사의 지도로 한모협의 문무는 빠르게 성장했다.

펄떡잉어형을 겁주다.

해창무가 직예총독에서 염무총관으로 위임된 이후 주위의 염패들은 모두 가만히 있지 않으려 했고, 암투는 다반사가 되었다. (옛날 소금은 중국에서 전매사업이라 소금 상인은 대대로 큰 부자였는데 염패(盐霸)란 소금상인 카르텔을 말하는 듯)

한번은 “랑리교浪里蛟”라는 별명을 가진 소금패가 있었는데 세력이 작지 않고 집에 적지 않은 표사들이 있었다. 이 사람은 해창무가 염무 총관으로 위촉된 것에 불복하여 발해만의 소금 상권을 쟁탈하기 위해 해창무의 봉관을 축하한다는 명분으로 연회에 초대하여 양보를 강요하려고 했다. 

주표사와 상의하여 한모협이 동행하기로 결정하자 주표사는 “그의 기민함과 무공은 상대방을 제압하고 당신의 안전을 확보하기에 충분하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해창무는 이 말을 듣고 마음속에 의심이 있었다. 주표사는 한모협에게 구리막대기인 동진척铜镇尺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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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기로 쓸만한 동진척

연회에서 술이 세 번 돌고, 요리가 다섯 가지 나오자 “랑리교”가 지껄였다. “해 노형은 이미 관직에 임명되었으니 우리 형제들과 이익을 시시콜콜 따질 수 없는 셈이지? 그 소금 일은 양보하라고.” 말하면서 “두루마기에서 지가 쓴 계약서에 서명하기를 강요했다. 

해창무가 승낙하지 않자 쌍방은 서로 끊임없이 다투었다. 갑자기 한 사나이가 손에 칼을 들고 문을 부수고 들어가 곧장 해창무로 달려오자 실내 공기가 갑자기 긴장되기 시작했다. 해창무는 잠시 어찌할 바를 몰랐다. 당황하여 마음이 어수선했다. 위급한 시각에 한모협은 침착하고 태연자약하게 허리에서 동진척을 꺼내 랑리교의 허리에 대고 그 사나이를 향해 큰 소리로 소리로 외쳤다. “네가 한 걸음 더 가까이 가면 나는 결국 너희 집 주인의 생명을 취하겠다! 너희들도 감히 움직이지 마라!” 

한모협은 또 “랑리교”에게 따지기 시작했다. “일이 있으면 차분히 상의하면 될 일인데, 하필 간계를 부리고, 음모를 꾸며 사람을 해칠 필요가 있느냐! 소금 일에는 법도가 있어. 너는 사람을 너무 업신여겨서는 안 돼. 빨리 내 사장님을 무사히 데려다 주라고! 나를 화나게 하지 마라, 그렇지 않으면……”라고 말하면서 손에 든 동진척을 “랑리교”의 허리에 세게 비비자 이미 간담이 서늘해진 “잉어형”은 급히 그 사나이를 내보내고 매우 공손하게 해창무를 배웅하였다.

‘섬전수’를 만나다.

한모협이 염패 “랑리교”를 좌절시키고 해창무를 호송하여 안전하게 집으로 돌아간 후 해창무와 주표사의 찬사를 받았다. 주표사는 한모협이 확실히 무술 인재라는 것을 보고 그를 무림의 대가인 장점괴에게 추천했다.

장점괴(1867-1940), 자는 조동이다. 하북성 하간현 출신이다. 어려서부터 무예를 익히고 소림권을 배운 뒤 류기란에게 형의권을, 동해천에게 팔괘장을 배워 뜻을 얻었다. 풍국장의 수하에서 경비를 맡았을 때 풍국장을 암살하려는 자객을 신속히 격파하고 풍의 생명을 보호하였는데 풍은 친필로 “섬전수”라는 편액을 써서 장점괴에게 증정하였다. 한모협은 그의 문하에 배사한 후, 마치 물고기가 물을 만난 것처럼 무공의 진보가 매우 빨라졌다. 이 기간에 장점괴는 또 주동적으로 한모협에게 5명의 스승을 소개해 무술을 배우도록 했다. 청 광서32년(1906년), 한모협은 스승 장점괴의 격려 하에 무림을 주유하게 된다.

팔괘장까지 배우다.

한모협은 스승의 권유로 홀로 남하하여 명산대천을 널리 유람하고 명가의 고수를 방문하였다.사천 성도 신도현에서 한 무인은은 자기가 평생 얻은 몇 가지 요결을 한모협에게 마음껏 전수하였다. 한모협은 여덟 번째 사부로 그를 모시고 『권경총가拳经总歌』 의 모든 수수께끼를 풀었다. 권경총가는 하남성 진가구에서 전해지는 권법서이다. 

그후 한모협은 팔괘장 대사 응문천(应文天)을 방문하여 그를 스승으로 모시고 팔괘장의 비밀을 다 얻었다. 스승은 모협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응문천은 광화파 팔괘장(广华派八卦掌)의 전설 속 인물인데, 그의 정체를 확인할 방법이 없기 때문에 본인의 존재 여부는 여전히 논란의 여지가 있다. 

여전히 전설에 따르면 그는 한모협의 스승으로 한모협에게 반팔괘장(反八卦掌)을 가르쳤고, 한모협은 아홉 명의 스승에게 배사했지만 응문천이 최고라고 여겨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광화파 팔괘장은 동해천이 주유시 강서성 광화산의 도사 화징하에게 팔괘장을 배웠다고 주장하는 유파이다. 화징하의 기존 제자로 도사인 송익인(宋益仁)과 응문천(應文天)이 있었는데 동해천이 속가제자로 나중에 들어와서 팔괘장을 배웠다는 밑밥을 깔고 있다.

무관을 열다.

한모협은 천진으로 돌아왔을 때 나이는 35세였다. 그는 장점괴, 사백 이존의와 무림의 선후배를 만났다. 모두의 재촉으로 한모협은 장수여张秀茹와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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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모협은 스승 장점괴의 동의를 얻어 1912년, 천진 하북구 우위로에 “무술관”을 설립하고 신체튼튼과 중화진흥을 취지로 무료로 제자를 양성했다. 한모협은 박식하고 견문이 넓고 또 9명의 명사를 거치면서 융합된 무술로 구습을 혁신하여 형의, 팔괘 등을 한데 섞었다. 또 남북 팔괘장을 하나로 융합하여 관통하고 독보적인 기예로 명성이 날로 높아진다. 북경과 천진 및 동북의 여러 성에서 경쟁적으로 초빙하여 바쁜 사람이 되었다. 한동안 한모협의 무술관은 사람들의 왕래가 끊이지 않았다.

1916년, 천진 남개학교는 국술과목을 증설하고 한모협을 무술감독으로 초빙했다. 저우언라이는 이때 한모협에게 무술을 배웠다. 

한모협에게는 일남일녀가 있다. 이들은 1948년 초에 중국인민해방군에 참가한 바있고 6.25 한국전쟁에 중공군으로 참가하였다고 한다. 

1927년, 모든 것을 잘 망치는 장학량은 한모협의 무명을 듣고 그를 천진시 무술단 교관으로 임명하여 대도를 책임지고 교수하게 함으로써 “대도대”를 창설하였다. 

1931년, 일본군은 9.18사변을 일으켜 중국을 침략하였다. 이때 장점괴는 무관을 폐쇄하고 가족과 화를 피하기로 결정하였고 한모협을 찾아가 군벌들을 멀리하여 살신의 화를 면할 것을 권고했다. 스승이 자기의 안위에 관심을 갖는 것을 보고 한모협은 매우 감동하였다. 이곳을 떠나 전화를 피하기 위해 한모협은 지붕에서 뛰어내려 왼팔과 사타구니를 부러뜨리고, 뼈를 붙일 때 왼팔을 비틀어 꺾는 고육책을 떠올렸다. 이렇게 외부인이 보기에 그는 이미 불구가 되어 더 이상 무술을 가르칠 수 없게 되었다. 시인 백석의 말년처럼 전쟁과 이데올로기는 사람을 망치고 병들게 한다. 

한모협은 그렇게 무관을 닫고, 무림을 떠났으며 이때부터 담배 노점을 차리고 침을 놓으며 생계를 유지했고, 생활은 다시 궁지에 몰렸다. 1947년 한모협은 이질에 걸려 치료할 돈이 없어 70세를 일기로 불행히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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