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대받는 오키나와 가라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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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대받는 오키나와 가라테

오키나와 가라테의 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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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지류/우에치류의 창시자 우에치 칸몬은 중국 복건성에 10년 넘게 머물며 중국 남권을 배웠으며 현지에서 무술 도장을 개관하기도 했다.

전후 오키나와에서는 전쟁의 후유증도 크고, 도 내의 각 유파, 도장은 개별적으로 활동하여 통일 조직은 존재하지 않았다. 1956년, 상지류上地流, 강유류剛柔流, 소림류小林流, 송림류松林流 4개 유파를 주축으로 오키나와가라테연맹을 결성하였다. 그 다음 전일본 가라테연맹 오키나와 지구 특별본부가 1960년 결성되었다. 1961년에는 고무도 단체를 중심으로 오키나와 고무도연맹이 결성됐다.

현재 오키나와 가라테의 3대 유파는 상지류上地流, 강유류剛柔流, 소림류小林流의 3개이다. 과거의 당수나 나하테, 수리테, 도마리테에서 벗어나 중국무술의 요소가 많이 들어갔으며 현대스포츠 훈련법을 적용하였다. 상지류와 강유류의 창시자는 모두 중국에서 무술 유학을 오래하였으며 중국 현지에서 무술 도장을 열기도 하였다.

지금 오키나와 카라테는 일본 가라테와는 상관없이 독자적인 발전을 하고 있으며 일본 가라테와 동질감이나 소속감은 없는 상태이다.

오키나와 가라테와 일본 가라테계의 갈등

1981년, 오키나와 가라테계에서는 국민체육대회(한국의 전국체전) 참여문제와 전 일본 가라테 연맹 가입(이하 전공련)이 큰 문제로 발전했다. 오키나와의 가라테 단체는 전오키나와가라테연맹과 오키나와현가라테연맹으로 분열되고 전오키나와가라테연맹은 ‘오키나와 전통 가라테를 일본 가라테 연맹의 지배 하에 두는 것은 납득할 수 없다’고 강한 불만을 표명하였으며 오키나와현가라테연맹 측도 ‘전공련 내부에서 오키나와 가라테 발전을 도모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천대받는 오키나와 가라테

전공련에 가맹해 내부를 개혁하겠다는 오키나와현가라테연맹의 의지도 일본 본토측이 무시하면서 불발로 끝났다. 특히 국민체육대회의 가라테 지정형을 당초 전공련은 슈리테 계 4개, 나하테 계 4개로 명칭만 지정하겠다고 오키나와 측에 설명하였지만 실제로는 일본 본토의 가라테 4대 유파의 형이었기 때문에 동일 명칭이라도 오키나와 가라테의 형으로는 경기에 나서지 못했다. 이 사실을 알고 충격을 받은 오키나와현가라테연맹은 전공련에 항의서를 제출했으나 오키나와에게 주도권을 빼앗길 것을 우려한 일본 본토 측이 무시하였다.

이렇게 일본국민체육대회 참가로 오키나와 가라테를 일본 본토로 확산시키려는 오키나와 가라테 측의 구상은 실패하였으며 최근에는 경기 가라테에 몰두한 사람들을 중심으로 일본 본토 측의 형이나 해석이 퍼지고 있다.


일본 위키피디아 가라데 항목을 참조하여 글을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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