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검과 일본도가 퓨전했을 때

일본도와 중국검이 애를 낳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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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검과 일본도가 퓨전했을 때

이 글은 LK Chen’s Woyao Dao. Source: LKChensword.com의 왜요도의 리뷰인데, 이 모조품에 대한 리뷰는 번역에서 제외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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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K Chen의 훌륭한 역사적 복제품 두 개가 들어 있는 소포가 최근에 내 집 앞에 도착했다. 그래서, 나는 무술 연구에서 “지역주의”의 중요성에 대해 생각했다. 16세기와 17세기의 역사적인 중국 무기의 변화에 대해 깊은 이해가 있어야 하지만 아시아 무술의 역사적 논의는 이러한 지역 간 교류에 대해 부정적이다. 아마 특정 무기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무술적 논의에서 이러한 저항이 왜 그렇게 문제가 될 수 있는지를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집에 도착해서 두 개의 도를 보았다. 둘 다 피터 데커의 수집품 중 아주 훌륭한 역사적 복제품이었다. 이것들은 명나라 말기 수십 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하나는 안령도로, 명나라를 정복할 청군의 표준 제식은 깃털펜 형 사브르의 인상적인 예였다. 이 사브르는 유튜브 등 소셜미디어 플랫폼에서 여러 비평과 많은 해설을 받았다.

또 하나는 ‘일본식 패도’ 같은 왜요도(倭腰刀)이다. 이 당시 사람들의 신체적 차이와 복잡한 역사적 유산을 고려할 때 안령도와 왜요도를 비교하는 재미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글래머한 일본도

연성권력(soft power)는 조지프 나이(joseph nye)의 글과 관련이 있는 정치학의 개념이다. 강대국이 부상할 때, 다른 나라들이 성공 요인을 따라하려고 그들의 행정이나 통치 형태를 모방하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다. 예를 들어, 일본인들은 무역과 기술 혁신뿐만 아니라 모방할 수 있는 정치 행정이나 통치 방식을 중국에게 기대했다. 현대인들은 사무라이들의 대부분이 실제로 연구하고 일상 업무에 사용했던 주요 이념이 유교였다는 사실을 잊어버리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소프트 파워는 거의 제로섬 게임이 아니기 때문에 흥미로운 개념이다. 이종문화 혼합의 욕망의 본질은 이것을 가리킨다. 명 왕조는 아시아의 많은 나라가 집중하는 경제적, 이념적 중심지로서 기능하는 경향이 있지만, 그것은 다시 이국적인 상품과 관행에서 문화적 영감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국제교류의 불안정한 영향력을 우려하는 후임 명나라 황제들은 무역을 제한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지만, 사실 중국은 세계적인 무역 네트워크 속에 있었다.

일본의 구리 광석 수출은 중국을 비롯해 아시아 전역에서 동전을 생산하기 위한 자원이었다. 일본은 실제로 자국 경제의 주요 유동성 공급원으로 작용하는 막대한 양의 중국 청동화를 수입했다. 그러나 실제로 여러 세대의 중국 엘리트들의 상상력을 사로잡은 것은 일본의 칼, 그리고 무술 문화였다. 명나라 말기 중국과 일본의 무술 문화 교류는 정치적 경쟁의 더 큰 네트워크에 속했기 때문에 서로의 발전에 정확히 영향을 주었다.

중국과 일본의 무술적 교류는 명나라 시대에 매우 가시적인 정점에 도달한 것은 아마도 우연이 아닐 것이다. 수나라와 당나라에서는 일본인들이 중국으로부터 기본적인 검 제조 기술을 수입해 왔으며, 그 기술은 많은 완성된 무기들은 뚜렷한 지역적 특성을 띠었다.

일본의 봉건주의는 관료적인 중국보다 더 큰 사회적 지위와 부를 군 계급 내에 허용했다. 치안 붕괴가 쟁점이었던 명나라의 특징은 민과 군의 벽을 허물기 시작했다. 점점 중국의 지주들은 그들의 국가와 국가 전체를 보존하기 위해 군사적 문제에 관심을 끌게 되었다. 이 모든 것이 ‘문무겸비’라는 관념의 부활과 사회 전반을 튼튼히 하기 위한 무언가가 필요하다는 총론적 공감대를 끌어냈다. 이러한 분위기를 고려할 때, 명나라 말기에 무술이 인기를 얻고 점점 더 문서화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중국의 전통 담론은 내부는 “문文”으로 다스리며 외부는 “군軍”이 필요한 위험하고 이국적인 땅이었다. 그 패턴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현저하게 고착되었다. 춘추전국시대와 한나라 시절,뛰어난 장수(검술이라는 개념조차)는 문화적으로 이국적인 초나라를 포함한 먼 남쪽에 존재하던 야생적이고 전투적인 문화에서 생겨난 것으로 여겼다. 그러나 일본 왜구의 침략을 받은 명나라 시절, 중국 엘리트들은 일본을 무술 영감의 원천으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명나라 시기의 문서를 보면 민간 수집가나 양반 사이에서 일본 칼의 인기가 높았다는 충분한 증거가 있다. 수십만 개의 칼들이 무역과 조공 등을 통해 정부나 군대로 갈 길을 찾았다. 공식적인 무역 규제로 인해 수입 가능한 검의 수가 제한되었지만 일본 상인들은 수만 개의 칼을 가지고 왔다. 처음에는 화려하게 마무리된 일본식 칼이 사치품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일본 상인들이 그것이 얼마에 팔릴 수 있는지 깨닫자, 수요량의 몇 배를 수입하기 시작했다. 중국 정부는 이들을 만류하기 위해 수입 칼의 값을 깎기 시작했다. 그러나 일본인들은 그들의 이윤을 유지하려고 훨씬 더 많은 수의 더 실용적인 대량 생산 무기를 수출함으로써 대응했다.

무기의 교환은 항상 일방적인 것이 아니었다. 중국 수집가들이 일본 칼에 집착하는 동안 이러한 무역 원정에 동행한 일본 전사들은 중국 창과 봉술을 최대한 익히는 데 관심이 많았다. 일부 학자들은 일본 전장을 지배한 것은 오랫동안 칼이 아닌 창이었음을 지적하고, 무사들은 중국에서 나오는 최신의 훈련 방법을 열심히 연구했다.

이러한 무술 교류의 결과, 일본도의 수요는 무술가와 매니아들에 국한되지 않았다. 수십만 개의 칼이 중국 군인들이 들고 다닐 수 있는 방식으로 더 많이 사용되었고 수도 안팎에서 황실 경비병에게 발급되었을 것이다. 거기서부터 중국의 도검제작자들은 유행을 따르기 시작했다. 중국 정부의 규제는 칼 자체에 관한 것이었고 칼의 스타일에 관해서는 규정이 없었다. 점점 더 많은 검들이 “일본식”으로 주문 제작되었다.

그러한 무기는 전형적으로 다른 중국 검이 당시 일본도와 닮기 시작했다. 이것은 이전에 당나라 도검에서 보았지만 중국 무기에서는 드물었던 단면을 오각형의 모양으로 만드는 것을 의미했다. 일본 도검제작자들은 이 기본적인 모양을 그들의 검에 힘과 강도를 부여하는 강력한 수단으로 발전시켰다. 하지만 이 칼들은 일반적으로 중국의 패도처럼 편수 방식이었다. 그것은 부 무장이나 방패와 함께 사용되었을 것이다.

다른 점도 있있다. 중국인들은 단조 기술이 부족한 경향이 있었다. 보통 칼은 강도와 경도를 맞추기 위해 고탄소강과 저탄소강을 혼합하여 사용했지만, 그들은 다르게 사용하였다. 일본에서는 저탄소강을 고탄소강에 붙이는 접쇠칼이 생산되었다. 이를 통해 칼날은 부드럽지만 칼등 쪽은 단단하였다. 반면 중국 도검제작자들은 고탄소강을 중앙에 놓고 위아래에 저탄소강을 붙였다. 두 전략의 실제 효과는 비슷했지만 중국 칼날은 고탄소강이 속에 있어 일본도 식의 하몬(칼날 무늬)가 개발되지 않았다.

중국 남부의 왜구 침략으로 도검 무역의 조건이 바뀌기 시작했다. 일본도는 여전히 인기있었지만 명나라군이 접전 끝에 연달아 패하게 만든 원인을 척계광 장군 등은 일본 무기의 우수성으로 꼽았다.

현실적으로 칼의 문제는 아니었다. 왜구들도 포르투갈에서 수입한 화기로 무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을 상징한 것은 일본도의 우월성이었고 지방 지휘관들은 우수한 무기로 무장할 필요가 있다고 재빨리 판단했다. 이런 식으로 일본도의 영향을 받아 만든 칼을 척가도(戚家刀)라고 부른다.

왜요도
왜요도
왜요도
칼날의 단면과 단조방식은 일본도의 영향을 받았지만 전체적인 칼의 곡률은 명나라의 도검과 같다. 일본도와 중국검의 혼종.

실제 사건을 세밀하게 살펴보면 ‘일본도’를 든 ‘왜구’의 대부분은 명나라가 중국과 일본, 동남아시아를 잇는 삼각무역의 붕괴로 생계가 위태로워졌던 선원, 상인, 지역민이라는 사실을 금방 알 수 있다. 마찬가지로, 일본 정치가들이 중국 경제에 대한 중국의 청동화의 중요한 중요성과 발생할 정치적 경제적 위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 채, 수십만 개의 칼을 중국에 수출하고, 그 다음에 왜구의 난동을 부리게 했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명나라 말기 왜구의 침략은 국가적이라기보다는 복잡한 지역적 사건이었을 것이다.

무술 연구는 너무 완고한 국가적인 분류와 틀 속에서 진행하기 때문에 명 말의 무술 교류에 대한 실상을 온전히 파악할 수 없다. 왜요도는 일본과 중국의 수백 년 동안의 상업적, 문화적, 그리고 무술적 교류로 생긴 것이다. 이 교류를 명 말의 왜구에만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지만, 수나라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이 교류의 대부분은 전적으로 평화롭고 다양한 형태의 경제적, 문화적, 정치적 욕망으로 동기가 부여되었다. 언뜻 보기에 아주 달라 보이는 두 가지 무기인 일본도와 명나라 시기 패도도 갑자기 나온 것이 아니다. 일본도와 왜요도 중 하나만 이해한다면 나머지는 저절로 알 수 있다.

왜요도는 무술가들에게 몇 가지 흥미로운 질문들을 제시한다. 보통 중국무술가들이 선호하는 19세기 후반의 우미도보다 길고 무겁다. 이 검으로 연무를 할 수는 있지만 적합하지 않을 것이다. 무술 연습에 필요한 역사적 무기를 찾고 있다면, 더 짧고 넓은 칼날을 가진 안령도가 알맞을 것이다.

wodao and shield 2

wo dao and shield 1

이 검의 길이를 보면 방패와 함께 사용했을 것이다. 고문서를 보면 왼손을 방패들 들고 왼발이 앞에 나가 있고 칼을 든 오른손이 뒤로 간다. 따라서 편수검이지만 길이가 길고 무거운 것이다.

한 손에 방패, 한 손의 칼은 명나라의 기본적인 무기 제식인데 양손검인 일본도가 중국식 편수검으로 바뀔 때 많은 시행착오가 있었을 것이다.

출처Kung Fu T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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