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술로 유명한 중국 무당파는 일명 ‘무당13세’ 라고 불리는 검술 체계를 갖고 있다. 김용의 무협소설 의천도룡기에도 나오고, 다른 무협지에서도 수없이 등장하여 우리에게 낯설지 않은 ‘무당 십삼세’는 도대체 어떤것일까? 어떻게 탄생했고, 어떤 원리를 갖고 있는 것일까?
무당십삼세, 또는 무당십삼검 이라는 용어가 등장하는 문헌을 찾아보면 사실상 오리무중이다. 그 어떤 자료에서도 무당십삼세는 등장하지 않는다.
이 단어가 처음으로 보이는 문헌은 1930년에 발간된 황원수著 ‘무당검법대요’ 이다. 1908년에 출간된 ‘검법진전도해’ 에 보면 7검, 13검, 24검 이라는 표현이 등장하지만, 여기서의 13검은 현재 무당파의 13세와는 상당히 다른 개념이다.
황원수가 쓴 ‘무당검법대요’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검법 십삼세 (劍法十三勢)
武當劍法。大別為十三勢。以十三字名之。即抽帶提格。擊刺點崩。攪壓劈截洗。亦似太極拳之掤捋擠按。采挒肘靠。前進後退。左顧右盼。中定也。此外另有舞劍。未有定式。非到劍術純妙不能學習。非口授面傳。不能領會。
무당검법은 기본적으로 13가지 기법으로 되어 있다. 그 13가지 기술의 이름은 ‘추대제격격자점붕교압벽절세(抽帶提格擊刺點崩攪壓劈截洗)’ 이다. 이것은 태극권의 붕랄제안(掤捋擠按), 채열주고(采挒肘靠)와 유사하며, 전진과 후퇴, 좌우를 돌아보는 것, 중심을 잡는것도 포함된다. 그밖에 정해진 형태가 없는 검무(劍舞)의 단계가 있는데, 이는 검술의 순수하고 오묘한 경지에 이르지 않고서는 배우기 어렵고, 대면하여 직접 전하지 않으면 깨달을 수 없다.
여기서 무당13세는 ‘추대제격격자점붕교압벽절세(抽帶提格擊刺點崩攪壓劈截洗)’ 의 13가지 기술 임을 알 수 있다.
‘추대제격격자점붕교압벽절세(抽帶提格擊刺點崩攪壓劈截洗)’ 는 각각 하나의 검술 기술을 의미한다.
이 각각의 기술은 다음과 같이 나누어서 별도로 인식한다.
抽劍, 帶劍, 提劍, 格劍, 擊劍, 刺劍, 點劍, 崩劍, 攪劍, 壓劍, 劈劍, 截劍, 洗劍
이 기술명칭들 중에는 현대의 우슈 검술의 표준 기술명칭과 같은것도 있고, 아닌것도 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검술은 청평검법 이라고 한다.
여기서 방점은 ‘현존’과 ‘오래된’에 있다.
명나라때 척계광 시절에도 검술은 있었지만, 그 검술이 지금 그대로 전해져 내려오지 않는다. 그 기술들이 사람들을 통해서 수백년동안 면면히 전수되었을 것이지만, 그때의 기술과 명칭이 지금까지 똑같이 전수되고 있는것은 아니다.
세월이 지나면서 검술 초식의 이름도 달라졌고, 용법이 달라진 것 들도 적지 않다.
그러다보니 그 창시자와 역사가 명확하고, 창시자 이후부터 지금까지 온전하게 보존되어 전수된 검술은 청평검법이 유일하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중국정부에서는 청평검법을 비물질문화유산으로 삼았다. 한국의 무형문화재와 유사한 제도이다.
무당검법은 역사가 장삼봉에서 시작되었다고 하지만, 그것은 전설일 뿐이다. 장삼봉이 실존인물이 아니었을 것이라는 견해가 이미 정설이 되었고, 장삼봉의 출현도 송나라때부터 원나라와 명나라를 거치며 계속 있었기 때문에, 사실로 보기는 어렵다.
무당파가 검술의 명문이 된 것도 장삼봉이나 무당도관과는 별 관계가 없다. 오히려 무당검술을 매우 근대적인 현상으로 보는것이 올바른 역사인식 일 것이다.
무당검법 십삼세가 처음 보이는 문헌은 황원수가 쓴 ‘무당검법대요’ 이다.
가장 오래된 무당검술 서적은 송유일이 쓴 ‘무당검보’ 인데, 송유일의 제자가 이경림 장군이고, 이경림의 제자가 황원수 이다. 무당검보와 무당검법대요를 비교해 보면, 이경림 대 에서 어떻게 변화했는가를 추론할 수 있다.
송유일의 무당검보에서는 무당 13세가 나오지 않으며, 무당 4세가 등장하고 있다.
무당검술의 시작은 일명 ‘모검4세(母劍4勢)’로 불리는 4가지 기술이다.
격법, 자법, 격법, 세법, 이렇게 4가지로 이루어진 무당검술의 모검 4세는, 각각 세분화 되어 나뉘어진다.
10대전인 이경림이 9대전인 송유일에게서 무당검술 6로를 배울 때는, 모검 4세만이 존재하였다. 무당의 모검4세(母劍4勢)는 무당산 도관에서 나온것이 아니라, 중국 북방에 흘러다니던 북파검술에 ‘무당’ 이라는 이름을 갖다 붙인것이다.
1대 창시자 장송계부터 8대 전인이라는 장야학(張野鶴)까지는 그 어떤 기록도 자료도 남아 있지 않다. 심지어 무당검술이라 불렸는지 아닌지도 명확하지 않다. 이 모든 역사와 자료는 9대전인 송유일부터 시작된 것이다. 극한의 가정을 한다면, 어쩌면 유명하지 않은 북파검술에 무당검술 이라는 명칭을 붙인 사람이 이경림 이었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고 추측된다.
9대전인 송유일이 무당검보를 저술한 연도는 민국11년이니, 서기 1922년이다. 이미 이경림이 활발하게 활동하던 시기이고, 11대 전인 황원수가 무당검법대요를 저술한 연도는 1930년이다.
송유일이 무당검보를 저술한 후에 이경림을 만난것이 아니며, 오히려 이경림이 무당검술을 다 배운후에 송유일이 책을 저술한다. 즉 송유일이 책을 쓸 때 이경림이 같이 있었다는 의미이다. 왜냐하면 송유일은 이경림 장군 휘하 부대의 부하 군인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송유일 무당검보의 족보기록을 믿기 어려운 이유이다.
이경림은 모검4세와 타 유파의 기술들을 비교하고 기술을 해체하여 다시 재조합 하는 과정을 통해, 13가지 검술 기술을 엄선했다. 즉 무당13세는 이경림이 만든 것이다. 이 부분은 이천기 노사가 책에서 이미 서술한 바 있다.
이제 무당모검 4세가 왜 무당13세로 변화하였는가 하는 이유가 중요한데, 여기에는 몇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검술의 정순한 기술만을 엄선하여, 정통 검술 기법을 정립하겠다는 것 이다.
그동안 검술에는 도법이 섞여 있었으며, 이경림은 검법안에 도법이 섞여 들어서 혼용되는 상황을 참지 못했다. 이경림은 검술에 있어서는 원칙론자여서 검술은 검술만의 독특한 기법으로 구성되어야 한다는 결벽증이 있었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된 동기도 이경림이 희대의 검술 덕후 였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서 무당 모검4세에서 ‘格, 擊, 洗’와 劈, 截 의 자세는 매우 흡사해 보인다.
원래 무당검술에 있던 기술은 아니지만, ‘감(砍)’ 이라는 기술이 있다.
벽검(劈劍)의 변화수 중에서 사벽(斜劈)이라는 기법이 있다. 비스듬하게 베는것은 ‘사벽(斜劈)’, 수직으로 베는것은 ‘직벽(直劈)’, 가로로 베는것은 ‘횡벽(橫劈)’ 이라고 한다.
격(格)은 막는 동작이니 제외하고, 사격(斜擊), 사세(斜洗), 사벽(斜劈), 외감(外砍), 내감(內砍)은 외형상 거의 똑같이 보인다. 격(擊)은 치는 동작이니 백번 양보해서 제외한다고 해도, 벽검(劈)과 감검(砍)이 남는다.
결론만 말하자면, 벽검(劈)과 감검(砍)은 다른것이다. 사벽(斜劈)도 사선으로 베는 것이고, 감검도 사선으로 베지만, 그 기법은 확연히 다르다. 검술을 정식으로 배워보지 못한 사람들은 사벽(斜劈)과 외감(外砍), 내감(內砍)은 두가지 다 사선으로 베는 동작 인 듯 인식하기 쉽다.
무당13세가 새로이 정립될때, 추검(抽)은 들어왔지만, 감검(砍)은 제외되었다. 이경림은 감검(砍)이 무당13세에 들어오는 것을 견디지 못했던 모양이다.
추검(抽)은 본래 무당검술이 아니었으며, 청평검술쪽에서 가져온 기법으로 보인다. 청평검술에서는 오래전부터 추검(抽)이 중요한 기술로 이어져 왔기 때문이다.
무당검술이 새로이 태어나던 천진과, 청평검술의 고향 창주는 붙어 있다. 서울 주변에 일산 분당 구리 등등의 위성도시가 있듯이, 창주(창저우)는 천진의 위성도시로 자리잡아 왔다. 청나라때부터 창주에서 천진으로 일하러 갔고, 지금도 버스로 20분거리에 있는 동일 생활권이다.
천진에서 검술이 활발히 연구될때 무당검과 청평검의 활동구역은 완전히 중첩되어 동일했으며, 서로 기술을 주고 받고 배웠던 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다.
둘째, 검술만의 정순한 기술로 무당검술을 만들게 된 동기는 이데올로기적인 부분이 있다. 당시 중국무술은 중화민족주의를 등에 업고 매우 국수적인 것 이었다. 산동국술관, 상해국술관의 탄생 자체가 국수주의에 근거한 것 이었다는 것을 잊으면 안된다.
무술은 실용적 기예 일 뿐 아니라, 민족주의를 지탱해 주는 이데올로기의 중요한 도구 였었기 때문이다. 이경림이 중국 검술만의 기술로 무당검술을 구성하려 했던것에는 이런 동기가 작용했다.
이경림이 무당검술을 펼치던 1928년 당시에 천진에는 이미 일본 검술가들이 들어와서 일본검술 도장을 열고 있던 상황이었다. 무당검술 11대 전인이자 이경림의 제자인 황원수는 본래 일본검술의 고수였다. 황원수는 자신의 책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내가 젊었던 시절에는 시(詩)와 문학을 공부하였는데, 성숙하면서 무술에 푹 빠지게 되었다. 나는 가방을 싸서 짊어지고 무술관으로 갔고, 검술 훈련에 매진하였다. 그러나 이 과정에 좋은 지도자가 별로 없었으므로, 마츠시마 료키치(松島良吉) 라는 일본인 검술 실력자를 택하였다. 나는 그에게서 때리고 찌르고 자르고 흘리는 법을 배우면서, 나의 실력에 자부심을 갖게 되었다.
그후 일본으로 가서 고쿠라 출신의 노부타케 라는 선생의 문하로 입문하였는데, 그의 검술은 매우 정교하고 독특하였다. 그를 독선생으로 모시고 지도를 받았지만, 곧 중국으로 돌아와야 했기 때문에 끝까지 수업을 마치지 못하였다.
이 즈음해서 나는 일본인들이 우리의 자산을 가져다가 자신들의 것인 양 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중국에 검술을 가르치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스스로 실력을 향상시킬 수 없으니, 우리가 책망받을 일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
최근에는 이 광활한 중국땅에 검술의 대가들이 모두 사라진 것 같았다. 나는 이 사실을 인정할 수 없었으며, 검술의 고수를 찾을 것이라는 믿음을 고수하면서 10여년이 흘렀다. 이땅에서 진정한 검술 고수를 만나기를 희망하였지만, 만족한 만한 수준의 고수는 매우 드물었고 검술관련 서적들은 보기 힘들었으므로, 마침내 모든 희망을 포기하기에 이르렀다.
1927년 초, 전국규모의 무술대회가 있을 것이라는 발표가 있었고, 하북성의 이경림 장군이 중앙국술관(中央國術館)으로 초청되었다. 이경림 장군의 놀라운 검술을 보기 위해 베이징과 상하이 사람들까지 몰려들었다. 1928년 가을, 중국무술대회가 절강성에서 개최되면서 이경림 장군은 경기 주심으로 임명되었고, 나는 관객들을 모으기 위한 작업을 그와 함께 했는데, 나는 그가 중국 검술의 원류와 발전과정에 대해 설명하는 것과, 검술을 직접 볼 수 있었다.
이 모든것은 내가 진정으로 보고 싶었던 것 이었고 10여년 이상 찾아다닌 것 들 이었다. 나는 몹시 기뻤고 새로운 희망이 생겼으며, 나의 검술이 얼마나 조잡한가를 깨닫고, 그 이후로 이경림 장군 문하에서 배우고 있다. 그의 검술은 너무나 깊고 세련되어 필설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이며, 그 어떤 비유도 부족하다.
– 1930년, 황원수
이 글에서도 볼 수 있듯이, 1920년대에 중국 상황도 제대로 된 검술가를 보기 힘들었다는 것이며, 그래서 중국땅에서도 일본검도가 득세하고 있는 상황이었고, 중국의 문화를 드높이기 위해 중국인들이 노력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국수주의가 태동될 수 밖에 없는 정치적 상황이었던 것이다.
애석하게도 마츠시마 료키치(松島良吉)와 고쿠라 출신의 노부타케 라는 일본인 검도 사범은 현재 확인이 되지 않는다. 고쿠라는 큐슈 후쿠오카에서 시모노세키 넘어가기 전에 세또 내해에 면해있는 키타큐슈의 바닷가 도시인데, 바로 이 앞바다 해협에 미야모토무사시와 사사키고지로가 대결한 간류도(巌流島)가 있다.
자료를 찾아보면 마츠시마 료키치(松島良吉)가 중국 천진에서 검도를 가르쳤다는 기록이 일부 존재한다고 하며, 마츠시마 료키치(松島良吉)가 정치 활동에 참여했다는 내용도 언급되고 있다.
황원수의 스승인 마츠시마 료키치(松島良吉)가 정치에 관여했다는 것이 이상하지 않은 이유는, 당시에 무당검술에 참여한 전수자들의 상당수가 정치에 몸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경림은 북양군벌의 장군이므로 정치와 무관할 수 없는 인물이고, 이경림의 대표적 제자인 맹효봉은 천진의 정치인 이었다. 황원수도 정치에 몸 담았고, 나중에 순양검을 창시한 곽기봉도 정치인이었으며, 1951년부터는 홍콩에서 활동하게 된다.
중국의 정치인들이 무술에 관심을 두고, 무술을 정치의 도구로 활용했다는 것이 1920-30년대 중국의 상황이다.
이경림에게서 무당13검을 배운 제자들은 상당히 많다.
11대 제자들은 맹효봉, 곽기봉, 황원수, 이천기, 곽고일(곽옥걸), 주성덕, 한경당, 김일명, 진미명 등등이 대표적이다.
나중에 곽고일(곽옥걸), 주성덕은 요녕성에서 도교 도사로 출가하게 되며, 무당산으로 흘러들어가서 무당산 검술의 시조가 된다. 곽고일(곽옥걸), 주성덕의 제자가 종운룡 도장인데, 현재 무당산 도교협회의 회장이고, 무당산 검술에서 가장 최고의 고수로 추앙받고 있다.
한경당, 김일명, 진미명은 중국 무술계에 거대한 족적을 남긴 유명한 사람들이다. 이경림의 무당검에서 갈라져 나가 만들어진 검술들은 다음과 같다.
1) 순양검
순양검술은 오래된 검술이 아니며, 무당검술 11대인 곽기봉이 만든 것이다.
곽기봉 노사가 순양검을 창시했다는 것은 이천기와 마걸의 책 양쪽에 똑같이 적혀 있다.
그리고 무협지에 자주 등장하는 삼재검법과 태극검법은 이경림이 직접 만들었다. 이경림 장군이 양가태극권을 배운후에 소림의 달마검법과 무당검술을 섞어서 만든것이 태극검법이며, 검술 초보자들의 입문을 위해 만든 기초 검술이 삼재검법이다.
무당 13세 검술은 20세기초에 만들어진 것이며, 그 창시자는 무당검법 10대 전인인 이경림 장군이다. 이경림 이후에 무당검법에서 순양검, 삼재검, 태극검 등이 갈라져 나가 발전하였다.
김용의 소설 의천도룡기에는 무당검법 1대인 장송계가 등장하는데, 장송계는 실존인물이지만 의천도룡기는 소설이다. 김용 소설에는 가끔씩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인물들이 등장하곤 한다. 하지만 실제 역사와는 상당히 다르다.
의천도룡기의 도입부는 원나라 말기, 명나라가 건국될 즈음인 명나라 초기가 배경이며, 주 내용이 전개되는 시기는 원나라 말기 토곤 테무르 치하이다. 실존인물인 장송계는 명나라 가정 연간에 태어난 사람이어서, 원명 교체기 시절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의천도룡기에는 등장할 수 없다.
무당13검을 표현할때, 무협지에서 흔히 등장하는 것은 ‘신문13검(神門13劍)’이다. 신문(神門)은 손목 아랫쪽에 있는 신문혈(神門穴)을 가리킨다. 무당검술은 항상 신문혈(神門穴)을 노린다는 것이 무협 세계관에서의 설정이다. 이 역시 사실과 부합하는 부분도 있지만, 대부분 허위사실이다.
무당 모검4세는 신문혈을 노리지 않는다.
그러나 이경림 이후의 무당13세 검술에서는 실제로 신문혈을 노리는데, 이때 사용하는 기술은 추검(抽)이다.
신문혈을 노릴때는 추검(抽)에서도 ‘하추(下抽)’를 쓰고, 손목 윗부분의 태연혈을 노릴때는 상추(上抽)라고 한다. 그러나 추검(抽) 이외의 다른 기술에서는 신문혈을 노리지 않는다.
무당파 검술에 추검(抽)이 들어온 것은 이경림 대 이고, 이 역시 청평검술에서 들어온 것이어서 본래 무당검법이 아니다. 그러니 무당검술이 ‘신문13검(神門13劍)’이라 불린다는 것은 1/13 만큼의 진실 일 뿐이며, 추검(抽)은 본래는 무당의 것이 아니라고 보아야 하니, 사실과 맞지 않는다.
추검(抽)은 상당히 고급 기법이어서, 웬만한 검사는 가능한 기술이 아니다. 고관절 인대와 천골이 충분히 늘어나야 하기 때문에 쉽지 않으며, 이 기법이 체화되면 일본 아이키도에서 말하는 ‘합기’가 가능해진다. 그리고 신음류와 일도류의 극의라고 일컬어지는 대부분의 기술들을 구현할 수 있다. 무당산에서 10년이상 수도한 도사도 가능한 사람이 흔하지 않다.
이렇듯이 거의 대부분의 무협소설에서 무당13세는 오래전부터 존재했던 무공 인 듯 묘사되지만, 전부 다 사실이 아니다. 무당13세가 만들어진 1920년대는 우리의 생각보다 과학기술이 발달하고, 동서양의 교류가 활발했던 시기이다. 태평양 전쟁 당시에 일본군은 세계최초로 항공모함을 만들었고, 무려 25척이나 건조하였다. 잠수함과 전투기를 생산한 것은 물론이다. 중국 동북군벌이었던 장작림 장군 휘하 부대는 최신예 전투기를 수백대 보유하고 있었다.
1920년대는 인터넷과 휴대폰은 없었지만, 전화와 전보가 있었고, 기차와 자동차가 지상을 달리던 시절이다.
이런 시기에 무당13세 검술이 탄생한 것이다. 무당검법 13세는 20세기의 산물이다.
중국에서도 명나라 시절부터 내려오는 전통검술은 존재하지 않으며, 가장 오래된 검술들도 청나라 시절에 시작되었다. 수백 년된 전통 검술은 존재하지 않는것이 오히려 정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