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극권 八極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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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극권 八極拳

팔극권(八極拳)은 단타 권술의 일종이다. 어떤 사람들은 “팔극권”이 척계광(戚繼光)의 《기효신서(紀效新書)》에서 말하는 “파권(巴拳)”이라고 여기는데, 이는 이 권법이 엄지손가락과 집게손가락만 굽히고 나머지 세 손가락은 반쯤 쥐고 있어 주먹 모양이 가래와 같아서 그렇게 불린다고 한다. 명나라 말기 청나라 초기에 팔괘(八極)로 이름을 바꾸었는데, 팔극은 팔방으로 끝없이 멀다는 의미로, 수련자가 무술을 연마할 때 완벽을 추구하여 궁극에 도달해야 함을 강조한다. 또한 “사방팔방으로 뻗어 나가는” “십자勁(十字勁)”을 이 권법의 주요 힘쓰는 법으로 삼는다.

《창현지(滄縣志)》에 따르면, 근대 팔극권은 청나라 강희(康熙) 연간 사람 오종(吳鍾)에게서 전해졌으며, 처음에는 하북성(河北省) 창주(滄州) 맹촌(孟村)에서 성행했다. 오종은 한 떠돌이 도인에게서 배웠다고 한다.

최근에 발견된 자료에 따르면 오종은 본래 산동성(山東省) 해풍(海豐) 사람(현재 산동성 경운현(慶雲縣))이며, 화명(化名) “나피사(懶披裟)”를 쓴 승려에게 전수받았고, 승려의 본명은 장사성(張四成, 1646-1727년)이었다. 장사성의 스승은 맹촌 사람 정발상(丁發祥, 1615-1694년)이었고, 전설에 따르면 정발상은 운유 도인 황절도장에게 배웠다고 한다. 오종은 스승의 부탁에 따라 이 권법을 창주 맹촌에 전했을 뿐이라고 한다.

팔극권의 손 모양은 주먹을 주로 사용하며, 기본 수법에는 들어올리기(挑), 꽂기(插), 내지르기(沖), 꿰뚫기(貫), 내리치기(砸), 밀기(推), 비틀기(刁), 비비기(搓), 깎기(削), 막기(架), 가로막기(崖) 등이 있다. 보법은 마보, 궁보, 병보를 주로 사용한다.

보법은 민첩한 발걸음과 발을 굴리는 동작을 중시한다. 이 권법은 어깨, 등, 팔꿈치, 엉덩이로 부딪히고 기대는 동작이 많아, 몸을 바싹 붙여서 맹렬하게 공격하고, 짧은 거리에서 공격하는 기술 특징을 잘 보여준다. 자세는 가슴을 오므리고 등을 펴고, 어깨를 내리고 팔꿈치를 늘어뜨리는 것을 요구한다. 힘은 가라앉히는 힘, 십자勁, 부딪히는 힘을 주로 사용하고, 힘을 쓸 때는 기운으로 힘을 내고 소리로 기세를 돕는다. 소리는 주로 “흥(哼)”과 “하(哈)” 두 가지를 낸다. 팔극권의 기본 연습에는 발을 내리찍는 동작과 마보 버티기, “감고 붙이고 부딪히고 기대기” 훈련으로 단타 체력을 단련하고, “육대개(六大開)”와 “팔대초(八大招)”를 기술의 핵심으로 삼는다. “육대개”는 상대방의 방어 자세를 여는 6가지 방법으로, 머리로 받기, 끌어안기, 어깨로 짊어지기, 들어올리기, 엉덩이로 치기, 휘감아 돌리기 6가지 기술이다.

“팔대초”는 눈으로 세 군데를 보고 손을 쓰는 것, 맹호경파산, 영문이불첨, 영풍조양, 황응쌍창조, 패왕경절강, 좌우경개문, 입지통대포 8가지 초식을 가리킨다. 또한 팔극 대련(단독 또는 대련 가능), 팔극신가, 강공팔극, 팔극쌍궤, 팔진권과 십이조육주두 등의 권법 초식이 있다.

왕중천
청나라 광서 연간에 왕중천은 친척 형인 왕중산이 북경에서 곤술로 제자를 가르치는 것을 도왔다. 왕중천은 오호금양곤(즉, 팔곤두)에 능통하여 북경 구문에서 몽둥이로 적수가 없었고, 후에 표사로 일했다.

강호에서는 “신곤(神棍)” 왕중천이라 칭송했으며, 팔극권이 북경에서 자리를 잡은 데에는 왕중천의 공이 컸다. 이서문은 스승에게서 배운 후 북경으로 가서 사형과 합류했고, 형제는 북경에서 명성을 떨쳤다. 두 사람의 명망이 높아지면서 모두 청나라 군대의 무술 교관으로 초빙되었다. 이서문은 천진 소참 원세개 북양 신군 훈련소에서 무술 교관으로 초빙되었고, 그 후로 군대와 인연을 맺어 평생 대부분을 군대에서 장군의 교관으로 지냈다. 이서문은 천진에서 여러 무술 고수들과 수많은 권법과 창술 대련을 벌여 모두 승리하여 강호에서 “신창(神槍) 이”라고 불렸다. 팔극권이 천진에서 자리를 잡은 데에는 “신창” 이서문의 공이 컸다.

장경성, 왕중천, 이서문이 “중화무사회”에서 명성을 얻다
청나라 선통 2년(1910년), 동맹회 회원 엽운표, 마봉도(장경성 제자)는 천진에서 “중화무사회”를 조직하여 무림 사람들을 단결시켜 청나라 통치에 반대했다. 무청의 “코 이” 이서동 선생의 지지를 얻었다. 이서동은 인격이 고매하고 무공이 정통했으며 무림계에서 덕망이 높았다. 이서동, 이존의, 이서문은 모두 천진에 와서 무사회를 설립했다. “코 이” 이서동은 “신창” 장경성과 의형제를 맺었다. 이로 인해 장경성은 직접 제자인 왕중천, 이서문과 재전 제자인 장덕충, 최장우, 장자림, 곽전각, 고희신 등을 이끌고 천진에 와서 무사회 교관으로 일했다. 3대째에 이르러 무사회를 놀라게 하는 무예를 선보이며 천진에서 명성을 떨쳤다.

이서문, 곽전각
1907년 이후, 허란주(許蘭洲)는 청나라 군대 표통으로 제제합이(齊齊哈爾) 일대에 주둔했으며, 그의 부하 관대 임국동, 방대 진부귀는 모두 무예를 매우 좋아하여 세 사람은 의형제를 맺었다.

허란주는 민국 성립 전에 협통으로 승진했고, 1914년에는 흑룡강 육군 중장 사단장으로 승진했으며, 당시 봉천 27사단장 장작림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1916년 흑룡강성 방판으로 임명되었고, 1917년 정치 투쟁에서 실패하여 봉천으로 도망쳐 장작림에게 의탁했다. 1920년에는 동삼성 순열사서 참모장으로 임명되었고, 이후에는 토비 총사령관 등으로 임명되었으며, 1924년 말 봉군이 입관할 때까지 직책을 유지했다. 이서문은 천하를 유람하며 북양군에서 교관으로 일했지만, 허란주와 가장 뜻이 통했다.

1907년에서 1917년까지 이서문은 제자 곽전각을 데리고 허란주 부대에서 무술 교관으로 일했으며, 이서문은 허란주 장군의 장남 허가복, 차남 허가록의 가정교사이기도 했다. 허 장군의 아들들과 이서문의 양아들 이악당, 무술 제자 손자 유기서가 함께 무술을 지도했다. 1917-1924년 이서문과 곽전각은 여전히 허란주 장군의 초빙으로 봉천 봉군에서 무술 교관으로 일했고, 해군 사령관 심홍렬, 소장 여단장 장양무 등에게서도 교관으로 초빙되었다.

1920년 이후 이서문의 사제인 장옥형은 제자인 위홍은, 위홍빈, 동의청, 동혜정, 유한주를 이서문에게 보내 심도 있게 수련하게 했다. 곽전각의 제자인 고향정, 곽경운, 유지명, 변정걸 등도 봉천 허란주 부대에 갔고, 원래 있던 허가복, 허가록, 이악당, 유기서와 함께 한 그룹을 이루었다.

신권 왕석경
왕석경(王錫慶, 1889-1962)은 “신권(神拳)”이라는 칭호를 얻었고, 라전 이씨 팔극의 중요한 전승자이기도 했다. 왕석경은 어릴 때부터 무술을 좋아했으며, 먼저 이대충의 제자 두봉원을 스승으로 모셨고, 두봉원은 왕석경이 열심히 수련하는 것을 보고 정성을 다해 가르쳤다.

왕석경은 기본기가 매우 탄탄하여 팔극 자세를 7년 동안 연습한 후에 다른 권법, 무기, 육개, 팔초 등을 배우기 시작했다. 후에 두봉원의 소개로 다시 이귀장을 스승으로 모셨고, 그의 무예는 더욱 발전하여 완벽해졌다. 왕석경은 무술에 거의 미쳐 있었으며, 수련을 시작하면 밥 먹는 것과 잠자는 것조차 잊을 정도였다.

그래서 농사를 짓는 밭이 황폐해지고, 기르던 가축이 굶어 죽기도 했으며, “무술” 이야기만 나오면 해야 할 일을 잊어버렸다. 라전에 무술을 배우러 18리 길을 오갈 때도 권법을 연습하며 걸어 다녔으니, 그의 수련의 깊이를 상상할 수 있다. 그는 무술을 수련할 때 실용성을 중시하고 허황된 것을 반대했으며, 그의 유명한 말은 “나는 네가 아무리 유명하든, 황제의 둘째 할아버지라도 우리는 한 번 겨뤄봐야 한다”, “차라리 맞아서 죽을지언정 남에게 위협당해 죽지는 않겠다”였다.

왕석경의 아들 왕금정, 왕금강, 왕금성, 왕금무, 왕금화는 모두 아버지에게 무술을 배웠다. 왕금정은 당산 국술관에서 가르쳤으며, 왕금강도 무예가 매우 뛰어났고, 왕금성은 북경에서 유명한 무술 코치였으며, 왕금무는 현재 마을에서 팔극 무술 단체를 운영하고 있으며, 왕금화의 아들은 최근 북경대학 국제 무술 포럼에 참가하기도 했다. 왕석경의 전수자로는 이귀항, 이찬주, 황수령 등 20여 명이 더 있다.

한화신, 마봉도, 마영도가 심양에서 무술을 전수하고 교류하다
민국 초기에 마봉도는 심양에서 혁명 활동을 했다. 1915년 사형 한화신(혜경)과 동생 마영도를 심양으로 초대했다. 한화신은 고등 순경 학교 무술 교관으로 일했다. 마봉도 등은 심양에서 팔극권과 벽괘장을 전수하는 동시에 “관동삼로(關東三老)”라고 불리던 학명구, 호봉삼, 정동각과 의형제를 맺고, 서로 무술 비법을 교환하여 무림에서 아름다운 일화가 되었다. 이렇게 세 형제는 뛰어난 무술과 넓은 도량을 바탕으로 순식간에 심양에서 명성을 떨쳤다.

곽전각이 마지막 황제의 무술 교사가 되다
1924년 말 봉군이 입관하면서 이경림 장군이 직례 독판이 되었고, 이서문, 곽전각 등을 군 장교 교관으로 초빙하고 곽경운을 자신의 제자로 삼았다. 이렇게 이서문과 곽전각은 허란주 장군 저택과 이경림 장군 행렬에 머물렀다. 곽전각도 “신창”의 무예가 있었는데, 창으로 파리를 찔러도 벽에 흔적이 남지 않았다고 한다. 곽전각은 선도 고진인의 종남산 대가 태극권, 용형직팔괘, 도쌍구, 팔괘검, 니구공, 장판공, 붕궁공 등을 받아들여 팔극권 공법을 더욱 발전시켰다.

1927년 허란주, 상연영의 추천으로 마지막 황제 부의의 무술 교사로 초빙되었다. 일본 무사들이 불만을 품고 시합을 요구하자 곽전각은 제자 곽경운을 데리고 장원에 가서 일본 무사를 이겼다. 이에 부의는 곽전각을 자신의 무술 교사로 초빙했고, 곽경운, 고향정, 변정걸, 유지명, 유기서, 유금산, 위홍빈, 변정빈, 이자곤 등을 호위 무사로 임명했다. 허란주 장군이 하북 국술관을 세운 후 곽전각을 초빙하여 천진 35국술관을 설립했으며 장소는 하서구였다. 곽전각은 매주 일요일마다 차를 타고 와서 가르쳤고, 평소에는 제자 유자명이 스승을 대신하여 가르쳤다. 곽전각이 무관을 열고 가르치면서 천진 제자들이 많이 배우러 왔고, 조옥정, 녹문자, 허우성, 손옥룡 등이 명성을 얻었다. 곽전각은 황제의 무술 교사가 되면서 명성이 높아져 여러 문파의 명가들이 많이 찾아왔지만, 곽전각은 한 번도 패배한 적이 없어 천진에서 무예로 명성을 떨쳤다. 이경림 장군이 남경 국술관 부관장으로 임명되자 곽전각의 무예가 뛰어난 것을 알고 곽전각을 소림문 문장으로 초빙했지만, 곽전각은 부의의 무술 교사로 일하고 있어 응하지 않았다.

한화신(혜경), 마영도가 명성을 떨치다
1926년 마봉도와 마영도 형제는 풍옥상, 우우임, 장지강 등 여러 선생들을 따라 서북으로 갔으며, 후에 마봉도는 난주에 머물렀고, 대서북 지방에 팔극권과 벽괘권이 널리 퍼지게 된 데에는 마봉도의 공이 컸다. 1927년 마영도는 장지강 장군을 따라 남경으로 가서 장 장군이 중앙 국술관을 설립하는 것을 도왔고, 한화신은 교수로 초빙되었다. 1928년 첫 번째 국술 시험에서 마영도와 사형 한화신, 그리고 한화신의 제자인 조수덕, 이학의, 조영림이 직접 무대에서 겨뤘으며, 한화신, 마영도, 이학의가 우등으로 이름을 올렸다. 왕중천의 제자인 왕화성, 전장태, 이서문의 제자인 유인호, 맹헌충도 28년 국고에 참가했다. 후에 조수덕, 맹헌충, 위홍빈 등은 국술관 교관으로 초빙되었다. 조수덕, 조영림은 황포 군관학교 국술 교관으로 일했다. 한화신과 마영도는 특별히 국술 시합을 주관했고, 국술관에서 가장 실력 있는 격투 고수이자 중앙 국술관의 기둥이었다. 팔극권이 중앙 국술관 필수 전공 과목으로 지정된 데에는 한화신, 마영도 두 선생의 공이 컸다.

이수삼, 이수운이 당산, 천진에서 무술을 전수하다
1920년 이대충의 증손 이수삼, 이수운은 당산에서 팔식방을 열고 팔극권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20년대 말 당산 국술관을 정식으로 설립하여 팔극권을 널리 전파했다. 이수삼은 “신창”이라는 명성을 얻었으며, 이씨 가문의 정통 기술을 이어받아 무예가 뛰어나고 정통했다. 후에 천진 양행 국술관에서 교관으로 일했고, 천진에서 명성을 떨쳤다.

마봉도가 난주에서 무술을 전수하다
마봉도는 객지인 난주에서 그동안 배운 고전 무예를 다듬어 승화시켜 벽괘, 팔극권, 착각, 번자, 통비 등 여러 권법의 정수를 모은 “마씨통비” 무술 체계를 만들었다. 마봉도에게는 네 아들 마영달, 마현달, 마영달, 마명달이 있었는데, 모두 아버지의 무술 전통과 인격 전통을 이어받아 현대 무림에서 활약하고 있다. 그들은 전력을 다해 외치고 고전 전통 무술 문화를 지키고 있으며, 동시에 현대 관변의 “체조 무술”과 민간 무술의 신비화 현상에 대해 심도 있게 비판하여 근본을 바로잡는 역할을 하고 있다.

허가복, 허가록이 북경과 천진에서 무술을 전수하다
20년대 말 허란주 장군은 화북 국술관을 설립했고, 허가복, 허가록, 이악당, 유기서가 교관으로 일했으며, 이서문이 고문으로 있었다. 제자들은 모두 허가복을 스승으로 모셨다. 하북 국술관은 수많은 수련생을 양성했으며, 그중 허가복의 제자 중에는 포유성, 장세충, 오옥곤, 왕소선이 가장 유명하여 “사대금강”이라고 불렸다.

이악당이 장사, 소양에서 무술을 전수하다
이악당은 신창 이서문의 양아들로, 1922년 봉천 기병대 교관으로 임명되었고, 25년에는 이경림 장군 군대 교관으로 일했으며, 27년에는 사형 위홍은, 제자 조카 유자명과 함께 해군 사령관 심홍렬의 기함 교관으로 일했다. 29년 이후에는 하북 국술관, 산동 국술관 교관으로 일했다. 1931년에는 만뢰성, 고여장 등과 함께 호남성 주석 하건의 초청을 받아 호남 국술관 주임 교관으로 임명되었다. 신중국 성립 후 “역사 문제”로 소양에 거주하면서 정골 추나사로 생계를 이어갔다. 아들 이지성, 제자 등민, 손소안, 유철청 등이 그의 무술을 전수받았다.

곽전각, 곽경운 숙질이 동북 지역에서 무술을 전수하다
1931년 부의가 장춘에 가서 만주국을 세우자 곽전각과 여러 제자들이 함께 갔다. 부의는 곽전각을 계속해서 자신의 무술 교사로 임명했으며, 곽경운(조카이자 양자), 고향정 등이 어전 시위로 일했다. 곽씨 사제는 만주국에 있는 동안 일본 가라테, 유도, 검도 고수, 몽골 씨름 고수와 수많은 대련을 벌여 모두 승리했다. 곽전각은 장춘에서 제자를 가르치기 시작했으며, 곡일심, 이위주, 뇌진강, 곽청봉(아들) 이수남, 진금재, 윤경화, 송벽산, 왕옥호 등의 제자를 두었다. 후에 곽경운은 계속해서 널리 보급했다. 40년대 후반에 진금재와 윤경화가 심양에서 팔극권을 전파하여 큰 규모를 이루었다. 신중국 성립 후, 장춘시의 팔극권은 곽경운과 진금재 두 사람이 중심이 되었다. 곽전각이 팔극권을 널리 전파하여 중국 무술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곽씨 숙질의 공이 매우 컸다.

한화신(혜경), 이학의, 한결천 사제가 산동 지난, 조장, 청주, 패, 팽부에서 무술을 전수하다
한화신은 20년대 조장 중흥 탄광에서 광산 경비대 대장으로 일하면서 이학의, 조영림 등을 제자로 두었다. 한화신의 아들 결천은 어릴 때부터 아버지와 사백 장옥형, 이서문에게서 무술을 배웠으며, 후에 아버지를 따라 산동성 조장 탄광에서 일했다. 한화신, 한결천, 이학의는 조장 지역에서 팔극권을 전파하여 일정한 규모를 형성했다. 한결천의 딸 한진각(봉각)은 아버지의 기술을 이어받아 70년대 창주 대회에서 여러 차례 1위를 차지했으며, 조장 지역에 팔극권을 널리 퍼뜨렸다. 이학의의 아들 이도헌은 조장, 팽부 지역에서 팔극권을 널리 전파했으며, 그의 제자들이 팽부 일대에 많다.

위홍은, 위홍빈이 진황도에서 무술을 전수하다
위씨 형제는 라전 마을 사람으로, 어릴 때 장옥형, 한화신(혜경), 이서문을 스승으로 모시고 팔극권을 수련했다. 20년대에는 이서문, 곽전각을 따라 심양, 경진, 산동 등지를 유람했다. 위홍은은 청도 민국 해군 교관으로 일했고, 1929년 위홍빈은 남경 중앙 국술관 교관으로 초빙되었다. 항일 전쟁 발발 후 위씨 형제는 진황도에 머물렀다. 위씨 형제의 전수자 중 유명한 사람은 왕무림, 이은의, 경학삼, 주경곤, 이신오, 위구성, 위구여 등이다. 위홍빈 선생은 신중국 성립 후 진황도시 무협회 부주석으로 일했다.

장자정이 천진에서 무술을 전수하다
장자정은 어릴 때 장옥형, 한화신(혜경), 이서문을 스승으로 모시고 팔극권을 수련했다. 천진에서 제자를 길렀는데 왕서방, 진흥태, 이위진, 엽연방, 왕홍청 등의 제자가 있으며, 큰 영향을 끼쳤다. 조수덕, 한결천, 동이문, 맹헌충, 변정걸, 왕무림, 곽청봉이 창주 동남 지역에서 무술을 전수하다

조수덕, 한결천, 동의청, 동이문은 한화신, 장옥형, 이서문 세 스승의 제자이고, 맹헌충은 이서문의 제자(사위)이며, 변정걸, 곽청봉은 곽전각의 제자이자 아들이다. 조수덕, 맹헌충은 중앙 국술관 교관으로 일했고, 조수덕은 황포 군관 학교 국술 교관으로 일했으며, 한결천, 동이문은 훈련소의 국술 교관으로 일했으며, 변정걸은 봉군 교관, 부의 호위 무사로 일했으며, 곽청봉은 국군 연대장, 기술 교관으로 일했다. 모두 “역사 문제”가 있어 “4류 분자”로 분류되었다. 그들은 민족 국술의 전승을 끊이지 않게 하기 위해 고압적인 상황에서도 제자를 길러냈다. 조수덕은 최성언, 곽금동, 곽금찬, 왕해의, 조몽림, 조몽신, 이국신, 곽진성 등을 전했으며, 맹헌충은 아들에게 전했으며, 한결천은 한진각, 한진강, 한진덕을 전했으며, 동이문은 양흥진, 장지환, 양도성, 이은상 등을 전했으며, 변정걸은 가금림, 곽수신, 장은영, 장청영, 주보량 등을 전했으며, 곽청봉은 아들 곽수신 제자 이경환 등을 전했다.

이찬신, 이양신 형제가 제남과 천진에서 무술을 전수하다
(1) 이찬신(1911-1995)은 이귀장, 이만성 부자에게 무술을 배웠다. 17세 때 염산 무술 대회에서 1등을 차지했고, 1935년에는 동북군 일부의 국술 교관으로 일했다. 항일 전쟁이 발발한 후 지난에 무관을 열고 제자를 길렀으며, 국술사를 설립했다. 53년부터 여러 차례 전국 대회에 참가하여 금상을 받았다. 이찬신은 지난에서 무협회 부주석으로 일했으며, 그의 제자로는 을립청, 손원충, 송학은, 전연빈, 아들 이안협 등이 있다. 이를 통해 라전 “이씨 가문” 팔극권이 지난에서 널리 전파되었다.

(2) 이양신(1917-1989)은 이귀장, 이만성 부자에게 무술을 배웠다. 1950년 천진에 정착했다. 홍기 무술 학교, 천진 대학, 남개 대학 무술팀에서 가르쳤다. 1953년 천진 무술 대회에서 1등을 차지했으며, 1956년 북경 무술 대회에서 우수상을 받았고, 1979년 남녕 무술 참관회에서 1등상을 받았다. 이양신은 천진 무술 협회 위원, 팔극권 연구회 회장, 하동구 무술관 관장을 역임했다. 아들 이연협, 이검협이 아버지의 무술을 전수했다.

유운초, 이원지가 대만에서 무술을 전수하다
유운초는 창주 집북두 사람으로, 그의 집안은 “장원부”, “장군부”라고 불렸으며, 남피의 장지완, 장지동의 집안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창주에는 “남피장, 북두유”라는 말이 있다. 유운초는 8세 때 아버지가 위대한 명성을 가진 이서문을 가정교사로 초빙하여 10여 년 동안 엄격하게 훈련받았으며, “소패왕”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유운초는 많은 제자를 두었는데, 양기자, 서기, 소욱창, 황의남, 곽소파, 김립언, 유대신 등이 있다.(대만) 이원지는 창주 사람으로, 육합, 연청 명가 동충의의 사위이다. 중앙 국술관에서 한화신, 마영도에게서 라전 팔극권을 배웠으며, 이원지는 그것이 평생 최고의 수확이라고 자부했다. 이원지는 졸업 후 국민혁명군 교관으로 임명되어 한화신과 마영도의 팔극권을 군에서 전파했으며, 이를 “저권”이라고 불렀다.

학홍창이 남경 중앙 국술관, 상해에서 무술을 전수하다
학홍창은 원래 아버지에게서 노가 팔극권, 벽괘장, 이랑권을 배웠으며, 1929년 중앙 국술관에 입학하여 부관장 장양무 장군을 스승으로 모시고 “신창” 이서문이 전수하는 팔극권과 벽괘장을 심도 있게 배웠다. 1932년 국술관에 남아 가르쳤고, 1933년 2차 국고에서 학홍창은 무급 링 경기에서 1등을 차지했다. 학홍창은 뛰어난 무술 실력으로 국술관 후기의 기둥이 되었으며, 관장 장지강 장군의 특별한 총애를 받았다. 1946년 국술관 교무처장으로 승진했고, 1948년 국술관이 해산되었다. 장지강 장군을 계속해서 따르다가 장 장군이 사망했다. 상해에서 30년 동안 은거하며 아무도 찾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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