곤오검법의 기원과 진실: 대만에서 부활한 20세기 검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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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오검법의 기원과 진실: 대만에서 부활한 20세기 검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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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검술중에 곤오검법(昆吾劍法)이 있다.

흔히 중국 4대 검술이라고도 일컬어 진다며 종종 블로그에 등장하곤 하는데, 이런 표현은 대만쪽에서 만든 것이다. 중국 본토에서는 4대 검술이라는 표현이 없다.

대한민국 5대 짬뽕, 3대 짜장, 이런 표현들은 국가공인 이거나 정설이 아니고, 대개 일부 유튜버들이 방송에서 언급한 것이 검증되지 않은채 전국적으로 퍼져 나간 것과 흡사하다.

곤오검법은 대만 무단쪽에서 무술을 배운 무술인들 중심으로 많이 확산되었다.

중국 본토에 곤오검술이 없지는 않지만, 다른 검술들이 워낙 많아서 상대적으로 세력이 좀 약한 편이다.

곤오검술이 대만에서 성행하게 된 이유는, 대만 무단의 대종사인 유운초 노사의 공덕이다. 중국 산동성 창저우에서 출생한 유운초 노사는 본래 장군가의 아들로 태어나서 어려서부터 명사들에게 무술을 사사했고, 이서문의 제자가 되었으며, 나중에 섬서성의 황푸군관학교를 졸업하고 장교가 되어 중화민국의 특수부대를 지휘하고, 각종 암살과 특수작전에 직접 투입되었다. 암호명은 천(天) 이었으며, 스파이 코드명은 장강1호(長江一號) 였다는 말이 있다. 중국 백과사전에 실려있는 사실이다.

유운초(劉雲樵, 1909년 ~ 1992년 1월 24일)는 자(字)는 소진(笑塵)이며, 허베이성 창저우시 지베이터우촌(河北省 沧州 集北头村) 출신으로 중화민국 군인이자 무술가였으며, 중화민국 육군 상교(上校, 대령)로 예편했다.

8살때 장군이었던 부친이 이서문을 집에 초청하여 무술을 배우게 했고, 이서문의 막내 제자가 되었다.

1931년, 이서문이 이경림(李景林)의 초청을 받아 산동 국술관 총교습을 맡게 되었을때, 유운초는 이서문을 따라 천진으로 갔으며, 이경림이 독살되어 죽을때까지 산동 국술관에 함께 있었다. 이때 무당검, 청평검, 곤오검을 두루 배웠다고 한다.

유운초는 주로 천진에서 활동했는데, 이서문의 제자중의 한명인 장양오(張驤伍)에게서 곤오검법을 배웠으며, 장양오는 이서문의 지도하에 곤오검법 2로를 만든다. 장양오는 민국시절 당시에 육군 장군이었다.

당시 상황을 묘사한 백과사전 기록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李书文在黄县居住时,张骧伍曾经表演昆吾剑法,请李书文指正,编成昆吾剑二路套招。刘云樵跟着张骧伍,学会了杨家太极拳、武当剑术、青萍剑法以及昆吾剑法。1931年底,李景林过世,李书文让刘云樵跟着张骧伍,自己继续云游。刘云樵在张骧伍处待了两年多的时间,期间曾经从当地螳螂拳名家丁子成习六合螳螂拳。1933年,在宫宝田前来张骧伍处作客时,刘亦向宫宝田学习八卦掌。根据刘云樵本人说法,亦曾正式拜师入门.

이서문이 황현에 거주할 때, 장양오는 일찍이 곤오검법을 시연하고 이서문에게 지도를 청하여 곤오검 2로 초식을 편찬하였다. 유운초는 장양오를 따라 양가 태극권, 무당검술, 청평검법 및 곤오검법을 배웠다. 1931년 말, 이경림이 사망하자, 이서문은 유운초에게 장양오를 따르도록 하고 자신은 계속 운유하였다. 유운초는 장양오의 곁에서 2년여의 시간을 보냈는데, 그 기간 동안 현지 당랑권 명가인 정자성에게 육합당랑권을 배우기도 하였다. 1933년, 궁보전이 장양오의 거처에 방문했을 때, 유운초 또한 궁보전에게 팔괘장을 배웠다. 유운초 본인의 말에 따르면, 또한 정식으로 사부로 모시고 입문하였다고 한다.

유운초의 본명은 유상양(劉祥揚)이며, 주로 운초(雲樵)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이는 본명이 아닌 호(號) 또는 무술계에서 사용된 이름이다.

유운초(劉雲樵)의 본명이 유상양(劉祥揚) 이며, 운초(雲樵)는 무술계에서 불리워진 무명(武名) 이었다는 것이 이 글에서 중요하니 기억해 두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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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오검보, 이릉소 저
곤오검보, 이릉소 저

곤오검법의 탄생

출판된 서적의 숫자로 검술의 보급 확산세를 추정한다는 것은 정확하지 않지만, 책이 많이 나왔다는 것은 해당 무술의 수련자가 많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증명하는 척도가 될 수 있다. 중국에 태극권 수련자가 수억명에 달하게 되니, 태극권 서적도 수천권이 출판되어 있는것을 보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곤오검에 대한 서적은 약 3-4가지 밖에 없다. 더구나 중국본토에서는 2차대전 종전이후에 곤오검 서적이 나온것을 보기 어려우며, 대만 무단에서 교재 성격으로 출간한 곤오검 책이 있을 뿐이다.

강용초의 책은 민국18년에 출간되는데, 서기로는 1929년이다. 이릉소의 책은 민국23년이니 서기 1934년이 된다.

대만에서는 유운초 노사가 곤오검 책을 낸 적이 있었으며, 그 이후에 무단에서 곤오검 속집을 여러차례 출간한다. 이런 정황을 볼 때, 곤오검법의 보급과 확산은 쉽지 않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특히 대륙 중국에서의 세력은 확실히 적은 편이다.

곤오검법

곤오검 책 들에 실려있는 역사로 곤오검의 역사를 짚어보면, 두가지 사실로 요약될 수 있다.

  1. 청평검에서 근대에 갈라져 나왔다.

  2. 곤오검 1로는 팔괘검술의 보법이 들어갔다

  3. 곤오검 2로는 유운초의 스승인 장양오가 만들었다.

안 믿길지 모르지만, 문헌기록으로 보면 이 3가지 중요한 사실에 직면한다.

첫째, 곤오검의 문헌상 역사는 다음과 같다.

이 책은 내가 전에 쓴 청평검과 마찬가지로 도가의 반원규 선생께서 창안하신 것이다.

곤오검은 청평검(青萍劍)과 표리(表裏)를 이루어 이름을 얻었다고 전해지는데, 강서(江西) 용호산(龍虎山)에 옛날 수도하는 선비가 있어 호를 원규(元圭)라 하였다. 그가 주천(周天)의 이치를 바탕으로 창평검술(蒼萍劍術)을 만들었는데, 무릇 삼백육십사 가지의 흐름이 있으며, 이름은 같지 않으나 변화의 오묘함은 하나와 같다. 청평검술의 계책은 팔팔 육십사(八八六十四) 가지이다.

이 검법은 반(潘)도사가 산동(山東) 기수(沂水)의 맹교화(孟敎華)에게 전하고, 맹교화는 풍(豐, 풍희탕)에게 전하였다. 양체원(楊棣園)에서 하북(河北) 염산(鹽山)의 가운학(賈云鶴)에게 전하고, 유문석(劉文石)은 여러 차례 이우삼(李雨三)과 연계하여 양민산(楊岷山)에게 전하였으니, 이로써 이 술의 상전(相傳)의 근원이 되었다.

곤오검과 청평검은 근원이 같다. 청평검 동작은 모두 364수로 대주천을 이룬다. 곤오는 모두 64수로 팔괘를 이룬다. 이 기술은 보법을 중시한다. 청평검에 없는 보법을 곤오는 모두 포함하고 있어서, 청평검을 조절하는 역할을 한다.

– 강용초 (사진곤오검)

강용초는 당대의 무술인이자 인텔리 였다. 강용초의 책 들을 읽어보면, 지금 보아도 문장이 유려하고 책의 구성이 효율적이어서, 그가 머리속에 근육만 든 무술인이 아니라 문무겸전의 지식인 임을 알게 된다.

강용초가 쓴 곤오검의 역사는 청평검의 역사와 100% 일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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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평검의 계보도에 보면, 위에 강용초가 서술한 인물들이 순서대로 정확하게 나오는 것을 알 수 있다. 반원규 도사가 청평검을 창시하고, 맹교화 풍희탕 양체원을 거쳐서 가운학으로 이어지면서 가씨청평검으로 분파된다.

비선검협이라는 무림의 칭호를 들었던 가운학의 제자가 조카인 류문석인데, 류문석은 마진상에게 가씨청평검을 전수한다.

여기서 마진상 이라는 인물이 중요하다.

청평검술 7대 전인인 마진상의 본래 이름은 유진상이며, 6대전인 유문석의 제자이고, 그는 군인 신분으로 창저우 서쪽에 있던 군마참(軍馬站)에서 지휘관을 했다. 말을 관리하는 군부대의 장교였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를 ‘마진상’ 이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어느날 그는 남방에서 온 어떤 부부와 검술을 겨루었는데, 줄줄이 참패한 후에 그 부부의 검술을 연구하여 곤오검을 창시하였다고 한다.

마진상(유진상)은 실존인물이며, 역사에서도 검색이 가능하다.

마진상(유진상)은 무공이 뛰어나고, 검법이 정교했으며, 청나라 광서제 시기에 상서 이음치의 강남 도학을 호위했다.청평검법만은 적수가 없었다고 하며, 만년에 고향에 돌아와 평생 얻은 것을 사제 가요정과 교류하며 연마하여 8가지 검법을 엄선했다. 또한 청평검술에 대한 심층적인 분석을 통해 이 8가지 검법을 주로 6초 검에 추가했다. 이때 청평검술은 원래 365초식에서 창주 가문의 6초 373초식으로 발전했으며, 그 기술 내용이 더욱 풍부해졌다고 기록에 적혀 있다.

마진상이 호위했다는 ‘상서 이음치’ 역시 역사에 기록이 있다.

이음치로 표기된 사람의 본명은 이전림(李殿林)이며, 1844年-1917年까지 살았다. 그의 자(字)가 음치(荫墀)였으며, 산서성 대동 출신의 청말의 정치인이다.

이전림은 청나라 동치 10년(1871년)에 진사에 합격하여 한림원 庶吉士가 되었고, 散館 후에는 編修를 역임하였다. 광서 11년 8월 1일(1885년 9월 9일) 광서 학정으로 부임하였다. 이후 郵傳部尚書, 正黃旗漢軍都統, 禮部尚書, 吏部尚書, 協辦大學士 등의 요직을 거쳤다. 저서로는 《銓政管見》, 《雲中草堂詩文集》, 《江左校士錄》 등을 저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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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림(이음치)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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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림(이음치) 친필 휘호

책의 내용만으로 보자면, 마진상이 상서 이음치를 호위하여 강남도학을 하며 전설적인 무림행을 한 것 같지만, 사실은 이전림이 우전부상서(郵傳部尚書)와 예부상서( 禮部尚書)를 할때 경호원으로 따라간 것이다.

상서 이음치의 ‘강남 도학’은 무림행이 아니고, 당시에 상서 이음치가 강남에서 한 일은 과거시험의 시험문제 배송과 시험 관리감독 이었다. 요샛말로 하자면 국가고시 시험 볼 때 시험장 총감독을 했다는 얘기다. 마진상이 거창하게 칼싸움을 하거나 지역 마적단 토벌 등등을 했던 것은 아닌것 같다.

재미있는 것은 마진상, 즉 유진상의 자(字)는 운초(雲樵)이다.

유진상(마진상)도 유운초이고, 대만의 대종사 유상양도 유운초다. 비슷한 시기에 유운초가 두명 이었던 것이다. 한자까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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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운초 노사의 곤오검보 휘
대만의 유운초 노사의 어릴적 자(字)는 소진(笑塵)이며, ‘운초(雲樵)’는 부모님에게서 받은 이름이 아니어서, 아마도 성인이 된 후에 무림에서 지은 이름으로 추측된다.

유운초 노사가 어째서 무명을 ‘운초(雲樵)’라고 지었는가는 이제 알 수가 없지만, 곤오검 1대로 추정되는 마진상(유진상)에 대한 존경심이 있었을 수도 있다고 생각된다. 유운초 노사는 마진상(유진상)과 생존시기와 활동지역이 중첩되는 시절이 있으며, 어쩌면 창저우와 천진에서 만나보았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청평검 7대 전인 유진상(마진상)도 민국시대까지 생존하였고, 대만 유운초 노사는 1909년생이어서 민국1년에 3살 이었으며, 유운초 노사가 이서문을 따라 천진에 가서 이경림을 만날 당시에 청년 유운초는 23살 이었다.

곤오검법은 20세기초에 시작된 검술이며, 대만 유운초 노사의 스승인 장양오에 의해 곤오검2로가 만들어 졌고, 유운초 노사가 타이완 섬으로 이동하면서 대만에서 성행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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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용초 곤오검법 일부

렇다면 곤오검술의 특징은?

강용초와 이릉소가 책에 적어놓은 대로, 곤오검술은 청평검술에서 갈라져 나왔으며 ‘표리 관계’를 이루고 있고, 보법이 화려하다는 것이다.

이 서술은 매우 중요하다.

청평검술은 365수 6로로 이루어져 있는데, 검술에 맹점, 즉 취약점이 하나 있다. 곤오검법은 그 취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만들어진 검술이다. 즉, 청평검법을 잡을 목적으로 창시된 후대의 프로젝트 검술 인 셈이다.

강용초 노사는 이미 책에서 이렇게 정확하게 써 놓았다.

이 기술은 보법을 중시한다. 청평검에 없는 보법을 곤오는 모두 포함하고 있어서, 청평검을 조절하는 역할을 한다. – 강용초

위에서 보듯이 ‘보법’에 방점이 찍혀 있다.

그래서 곤오검법은 보법 수련방법에 그 핵심이 있으며, 보법 훈련이 충분히 되지 않은 곤오검법은 곤오검법의 위력을 발휘할 수 없다.

곤오검법은 당시 천진에서 접할 수 있었던 다른 검술에서 보법을 차용한 것으로 보이는데, 구체적으로 팔괘검술의 보법이 흘러들어간 흔적이 명확히 보인다. 청평검술을 잡으려면 팔괘보를 이용해야 하기 때문이다.

무당검술에서도 무당검의 특징을 ‘태극요, 팔괘보, 형의경, 무당신’이라고 명시해 놓았으며, 당시에 너도 나도 팔괘검술의 보법을 가져간 것을 보면, 검술 격검에서 팔괘의 보법은 상당히 쓸모가 있었다. 팔괘검술에서 사용하는 기초 보법은 일본 신음류에서도 일부 보인다. 일본에서도 이런 보법은 독자적으로 발전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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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30년대에 중국 하북성 무술계는, 국수주의와 자강 운동과 맞물려서 무술의 용광로였던 시절이다. 하북성 천진을 중심으로 북파의 갖가지 무술들이 모여서 새롭게 발전하였다.

곤오검술은 청평검술을 기반으로, 팔괘검술의 보법이 조합된 20세기의 검술이다.

대만 무단에서의 곤오검술의 수련에서는 심도있고 난이도 높은 보법 수련들이 포함되어 있다. 장양오 노사가 신창 이서문의 지도하에 만든 검술이니, 그 가치는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다.

무술이 옛날 것 이라고 해서 무조건 좋은것은 아니다. 현대에 잘 만들어진 검술이 고대검술보다 훌륭한 것이 많이 있다. 곤오검술이 바로 그 실례이다.

하지만 곤오검술이 세상 최고의 무적 검술이라는 이야기는 절대 아니다. 곤오검술도 헛점이 없는것은 아니며, 취약점을 파고들어 공략하면 반드시 깨진다. 검객 개인의 숙달과 실력이 중요할 뿐, 어떤 검술이 다른 검술보다 월등하다는 식의 인식은 옳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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