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무술의 본진, 고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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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무술의 본진, 고무도

고무도(古武道)는 일반적으로 일본의 메이지 유신(明治維新) 이전에 성립된 무예, 즉 무사 계층을 중심으로 발전하여 기술화되고 체계화된 전통 무술을 총칭한다. 주로 무로마치 시대(室町時代) 이후 검술, 유술, 창술, 궁술, 포술 등이 다양한 유파로 기술화되고 체계화된 것을 가리키며 일부는 고대나 중세 전기에 기원을 둔다고 전해지는 유파도 포함한다. ‘무도(武道)’라는 총칭이 확립된 메이지 시대(明治時代) 이후, 현대 무도와 명확히 구분하기 위해 ‘고무도’라는 명칭이 사용되기 시작했다. 이는 맨손 또는 둔기, 날붙이, 화기 등의 무기 사용법이나 수영, 승마 등 전투 관련 기술을 체계화한 일본 전통 기술의 총칭이며, 일본 전통 예능의 하나로도 간주된다. 일본 무술, 고류 무술, 고무술도 거의 같은 의미로 사용되며, 무예, 무술, 병법 등의 유의어가 있다. 현대 무도가 그 반의어이다.

현대 무도가 주로 심신 단련을 목적으로 하며 스포츠적 경기 시합을 중시하여 기술 체계를 구축한 것(예: 유도(柔道), 검도(剣道))과 달리, 고무도는 기본적으로 시합의 승패를 목적으로 하지 않았으며(유파에 따라 타류 시합을 금지하기도 했다), 결투, 호신 또는 전투에서 임무를 완수하기 위한 심신 단련이 본래 목적이었다. 이 때문에 현대 무도에서는 위험하다는 이유로 제외된 기법이나 각종 숨겨진 무기, 약 처방, 주술 등이 유파에 따라 포함되기도 한다.

스모(相撲)는 현대 무도의 하나로 분류되지만, 에도 시대(江戸時代) 이전의 스모가 고무도에 포함되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다만 무가 스모(武家相撲)는 스모 중에서도 고무도의 정의에 가장 부합하는 형태라고 할 수 있다.

류큐 고무술(琉球古武術)이나 가라테(空手)는 고무도로 분류되거나 고무도 단체에 소속되기도 하지만, 이는 중국 무술의 영향을 크게 받은 류큐 왕국(琉球王国) 고유의 무술로서 일본 본토의 것과는 다른 기술 체계를 가지고 있어 본 항목에서 정의하는 고무도와는 별개로 간주된다.

1. 정의 및 특징

고무도는 전투 기술이라는 명분 아래 일종의 교양, 학문, 예능으로서 그 가치를 인정받아 왔으며, 무가 문화(武家文化)의 담당자로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신토(神道), 불교 등의 종교관이 무기(武技)의 근간인 생체 역학과 융합되어, 무사의 생활 규범인 ‘부시도(武士道)’의 핵심을 지탱했다.

이상을 고전적인 형태(形, 카타)에서 찾고 이를 중시하며 보수하는 자세를 ‘아(雅, 우아함)’, 고전적인 형태에 얽매이지 않고 새로운 형태를 창조하는 자세를 ‘속(俗, 세속적임)’이라고 한다면, 고무도는 고전 문예나 노가쿠(能楽)의 영향을 받아 전투라는 극단적인 ‘속’을 벗어나 ‘아’의 성격이 부여되었으며, ‘도(道)’로서의 문화적 가치를 발견하게 되었다.

입문 시의 혈판(血判)이나 기청문(起請文) 등에서 나타나듯이, 고무도는 엄격하고 격식 높은 폐쇄적, 배타적인 양상을 띠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단순히 무사가 번교(藩校) 등에서 배우는 의무 교육의 일환이거나, 농민이나 조닌(町人)이 여가에 즐기는 레크리에이션(금지령이 내려진 적도 있음)으로서, 현대의 학교 체육이나 취미와 같이 문턱이 낮은 일면도 있었다.

무사의 주요 기예는 시대에 따라 변화했다. 원거리 전술인 궁술(弓術)에서 시작하여, 백병전술인 나기나타술(薙刀術), 창술(槍術), 검술(剣術) 순으로 그 중요도가 변해갔다. 고무도의 정의가 시작되는 무로마치 시대(室町時代) 이후로는 병법삼대원류(兵法三大源流)를 비롯한 검술이 주요 기예가 되어갔다.

2. 역사

  • 고대: 야요이 시대(弥生時代)의 갑옷, 검, 창, 화살촉, 활, 하니와(埴輪) 등의 출토품이나, 고사기(古事記), 일본서기(日本書紀) 등 일본 신화에 무기 관련 기술이 있는 것으로 보아 어떤 형태의 무술이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되나 상세한 내용은 불명확하다. 고분 시대(古墳時代)의 하니와 괘갑무인(挂甲武人)은 갑옷을 입고 활과 태도(太刀)를 장비하고 있으며, 태도는 왼쪽 허리에 차고 있다.

    • 에미시(蝦夷)의 무술: 기록에 따르면, 에미시는 수렵으로 익힌 기마 사격(騎射)을 주로 사용했고 와라비테토(蕨手刀)와 같은 도검류도 사용했으므로 이를 다루는 무술도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상세 내용은 불명이다. 기마 사격은 이후 포로(俘囚)를 통해 와진에게 전해져 무사에 의해 전투 기술로 발전했다고 한다.

    • 스마히(捔力): 일본서기(日本書紀)에는 다이마노케하야(当麻蹴速)와 노미노스쿠네(野見宿禰)가 스마히(角力, 씨름)로 승부한 기록이 있다. 발차기 기술을 주고받다가 스쿠네가 쓰러진 케하야의 허리를 밟아 부러뜨려 죽였다는 내용으로, 이 스마히가 스모(相撲)의 기원이라는 설이 있다. 이는 현대 스모와는 규칙이 다른 형태였다. 덴지 천황(天智天皇) 7년(서기 668년) 가을 7월 기록에는 “오미노쿠니(近江國)에서 무(武)를 강론했다”는 내용이 있다.

    • 궁술의 사상적 배경: 고사기(古事記) 등의 사상적, 문화적 관점에서 보면, 활과 화살은 위엄을 나타내는 중요한 상징이었다. 이러한 고대 일본의 활과 화살에 대한 위엄 사상과, 중국의 “활쏘기로 군자(君子)의 다툼을 삼는다”는 사례(射礼) 사상이 결합하여 조정 행사로서 ‘사례(射礼)’ 의식이 탄생했다. 이후 무가 시대에는 활과 화살을 통한 예(礼) 사상이 생겨나 일본 고유의 무가 사상과 결합하게 된다.

  • 중세: 귀족 지배가 끝나고 무사가 새롭게 대두했다. 활은 전투의 주역이자 중세 전반에 걸친 무사의 상징이었으나, 시대가 흐름에 따라 백병전의 비중이 증가하며 주요 무기도 태도(太刀, 노다치(野太刀)), 나기나타(薙刀), 그리고 창(槍)으로 변화해갔다.

    • 일상적 폭력성: 전투나 항쟁 외에도 일상적으로 살인이 발생했다고 전해진다. 무사나 귀족을 포함한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사소한 계기로 격분하여 무기를 들고 친구나 부하를 포함한 사람들을 살상했다.

    • 헤이안 시대(平安時代): 와묘루이주쇼(和名類聚抄)에는 ‘고부시우치(古布志宇知)’라는 무술 이름이 보인다. 이 시대에는 일기토(一騎討ち)가 기본이었으며, 기마 사격으로 화살을 주고받는 ‘야이쿠사(矢戦)’로 시작하여 화살이 떨어지면 접근하여 태도나 나기나타 등의 무기로 싸우는 마상전(馬上戦)으로 전환되었다. 마지막으로 상대의 목을 베기 위해 말에서 내려 싸우는 ‘가치이쿠사(歩戦)’로 승패를 결정했다. 따라서 모든 거리에서 싸우는 기술이 필요했다.

    • 가마쿠라 시대(鎌倉時代): 무사의 도(道), 즉 무예(武芸)는 궁술과 마술(馬術)을 기본으로 하는 ‘궁마의 도(弓馬の道)’로 여겨졌고, 기사삼물(騎射三物)과 같은 단련법도 고안되었다. 이 시대에도 전투는 기마 사격으로 시작했지만, 겐코(元寇)를 그린 그림에는 기병을 밀집시켜 집단으로 돌격하는 모습도 있어 집단전도 고려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소가 형제의 복수(曽我兄弟の仇討ち)로 유명한 소가모노가타리(曽我物語) 등에는 현대 스모와 다른 무예로서의 스모가 무사들에 의해 행해졌다는 기록이 있다. 이 무가 스모(武家相撲)는 후에 쇠퇴하여, 스모 전서(相撲伝書)나 에도 시대 초기의 세키구치류 유술(関口流柔術) 전서 등에서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 무로마치 시대(室町時代) · 센고쿠 시대(戦国時代): 이른바 병법삼대원류(兵法三大源流)인 가게류(陰流), 신토류(神道流), 넨류(念流)가 발생했다. 특히 신토류의 시조인 이이자사 이에나오(飯篠家直)는 이전까지 정해진 형(形)이 없었던 일본 무예계에 형의 원형을 창조한 인물로 ‘일본 병법 중흥의 조(祖)’로 여겨진다. 이들의 영향을 받아 신카게류(新陰流), 신토류(新当流), 잇토류(一刀流), 주조류(中条流) 등이 파생되어 검의 길이 급속도로 확산되었다. 유술(柔術) 계열 무술로는 다케우치류(竹内流)가 성립되었다. 다른 무예 분야에서도 노(能)나 우타(歌)처럼 기예로 간주되어 이론의 확립과 심화가 이루어졌다. 무예를 전문으로 하는 병법가(兵法家)의 길을 걷는 사람들이 나타났고, 무사 수행(武者修行)이 성행했다. 이들 중에는 자신의 유파를 쇼군이나 다이묘 앞에서 선보이는(上覧) 경우도 있었다.

  • 근세 (에도 시대(江戸時代)): 다양한 무술 유파는 센고쿠 시대(戦国時代)에 형성된 것보다 오히려 전란이 잦아든 에도 시대에 발전한 경우가 많다. 막번 체제(幕藩体制) 하에서 각 번(藩)은 무술 지도역(指南役)을 두거나 특정 유파를 어류의(御流儀) 또는 오토메류(御留流)로 지정하기도 했다.

    • 무술의 도(道)화: 에도 막부(江戸幕府) 성립으로 내전이 종식되고 평화로운 시대가 도래하면서(초기에는 전란기의 기풍이 남아 있었음), 전투 기술은 부시도(武士道)의 이념이나 젠슈(禅宗)·밋쿄(密教) 사상과 밀접하게 연결되었다 (예: 검선일치(剣禅一致)). 무술은 사람을 해치는 ‘술(術)’이 아닌 인격 형성을 위한 ‘도(道)’로 본격적으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문(文)과 무(武) 양면이 융합되면서 ‘무도(武道)’의 기본 개념이 확립되었고, 고무도는 이상적인 무사상(武士像) 형성 수단으로 연구되고 습득되었다. 유파의 세분화와 예도화(芸道化)가 더욱 두드러졌으며, 기존의 살벌했던 무골(武骨) 유파에도 예법(礼法)이 적극적으로 도입되고 동작이 세련되어지는 등 양식화가 진행되었다.

    • 타류 시합 금지와 형식주의: 그러나 각 유파는 상호 교류를 시도하지 않고 오히려 타류 시합(他流試合)을 엄격히 금지하며 봉쇄적, 배타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 폐해로 지나친 형식주의에 빠져 일부에서는 화법화(華法化, 화려함만 추구하는 경향)가 나타나기도 했다. 이러한 흐름을 끊기 위해 18세기 중반에 등장한 것이 검술에서의 우치코미 연습(打ち込み稽古, 타격 연습)이었다. 이 방향성은 다른 무예(유술이나 창술에서의 난토리(乱取り)·지게이코(地稽古) 도입 등)에도 파급되어 이론 및 기술 연구의 기운이 높아졌다.

    • 간세이 개혁(寛政の改革)의 영향: 마쓰다이라 사다노부(松平定信)의 간세이 개혁은 이러한 기운을 크게 신장시켰다. 에도 시내의 문무(文武) 사범들에게 서상(書上, 조사 보고서) 제출을 명하고, 내용이 의심스럽거나 기술이 미숙한 자에게는 지도를 금지했으며, 여러 무사들의 무예 상람(武芸上覧, 시연 행사)을 부활시켰다.

    • 무술의 대중화와 통제: 한편 무술은 무사 외의 계층에게도 개방되어 조닌(町人)이나 농민에게 여가의 즐거움이 되기도 했으며, 도시와 농촌 지역에서 널리 행해졌다. 그러나 이에 대해 막부는 간토 단속 출역(関東取締出役)을 설치한 1805년(분카(文化) 2년)에 농민 간의 무예 수련을 금지하는 명령을 내렸다.

    • 막말(幕末)의 변화: 19세기에 외국 선박의 접근이 잦아지면서 무예 교육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번(藩)에서 운영하는 무예 연습장·연무장을 설치하는 곳이 증가했으며, 전국적으로 무사 수행(武者修行), 타류 시합, 무술 유학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각지의 사범 이름을 정리한 서적이 발간되기도 했다. 다양한 유파 간 교류가 이루어지면서 검술, 창술, 유술 등에서 우치코미 연습이 주가 되고 형(形) 연습이 부가 되는 경향이 나타났으며, 연습 도구나 시합 방법이 공통화되어 갔다. 막말 지사(志士) 다수가 에도의 유명 도장(에도 삼대 도장 등)에서 배우며 전국적인 인맥을 형성한 예에서 알 수 있듯이, 무술 도장은 학문소(学問所)처럼 일종의 살롱 역할을 하기도 했다.

    • 유파의 증가: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도 다른 예능 분야와 마찬가지로 무예 분야에서도 “실력, 지위, 명성이 있는 유파만이 살아남는다”는 식의 경쟁 원리는 작동하지 않았고, 나무가지처럼 유파는 계속 증가하여 막말까지 수백(혹은 천) 개를 넘었다고 전해진다.

  • 근현대 (메이지(明治)·다이쇼(大正) 시대):

    • 메이지 유신(明治維新) 이후의 쇠퇴: 메이지 유신 후 문명개화 속에서 무술은 시대에 뒤떨어진 것으로 여겨져 쇠퇴했다. 무술가들은 격검 흥행(撃剣興行) 등의 볼거리 공연을 통해 무술을 진흥시키려 했고, 반란을 일으키는 자들도 있었다고 한다. 1877년(메이지 10년) 세이난 전쟁(西南戦争)에서 경시청(警視庁) 발도대(抜刀隊)가 검술을 사용하여 백병전에서 우위를 점한 영향으로, 이후 경찰에 무술 지도 담당(武術世話掛)이 창설되어 무술이 절멸 위기에서 벗어났다고 한다. 초기 프랑스식 검술을 채택했던 육군도 후에 일본식 군도술(軍刀術), 총검술(銃剣術)을 제정했다. 그러나 병기와 전술의 발달로 인해 고무도의 실전적 역할은 점차 사라져 갔다.

    • 현대 무도의 탄생: 1882년(메이지 15년), 가노 지고로(嘉納治五郎)는 새롭게 유도(柔道)를 창시했다. 교육자였던 가노의 사상은 이후 무도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1895년(메이지 28년)에는 각종 무도의 총본산 역할을 할 대일본무덕회(大日本武徳会)가 설립되어 일본 무도계를 통괄하게 되었다. 많은 지방 유파들이 다이닛폰부토쿠카이에 가입하여 검도(剣道)나 유도(柔道)를 받아들이면서, 고유의 형(形), 구전(口伝), 규율 등의 전승이 점차 사라져 갔다.

    • ‘무술(武術)’에서 ‘무도(武道)’로: 다이쇼(大正) 3년(1914년), 경시총감 니시쿠보 히로미치(西久保弘道)는 경찰 훈련소 강연 ‘무도 강화(武道講話)’에서 무술의 명칭을 ‘술(術)’이 아닌 ‘도(道)’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이유는 ‘술’이라는 명칭은 기술 향상에만 치중하고 예의(礼儀)를 불필요하게 여길 수 있으며, ‘무(武)’는 기술만이 아니라는 관념을 명확히 하기 위함이었다. 다이쇼 8년(1919년) 1월 29일, 니시쿠보는 다이닛폰부토쿠카이 부회장 겸 무술전문학교 교장이 되어 명칭 변경을 주장했고, 같은 해 5월 15일 상임위원회에서 무술전문학교를 무도전문학교(武道専門学校)로 변경하는 것을 승인했다. 8월 1일에는 문부성(文部省)의 인가를 받았다. 이후 부토쿠카이 각 지부에서 ‘무도’ 명칭을 사용하게 되었다. 후쿠시마 대학(福島大学)의 나카무라 타미오(中村民雄) 교수나 쓰쿠바 대학(筑波大学)의 와타나베 이치로(渡辺一郎) 명예교수 등의 연구에 따르면, 이는 무술 흥행 등으로 타락했다고 여겨진 기존 무술과 구별하고, 교육적으로 유용한 진지한 수행이라는 의미에서 ‘무도’라는 명칭을 사용하게 된 것이라고 한다.

  • 쇼와 시대(昭和時代): 제2차 세계 대전(태평양 전쟁)으로 인해 많은 유파에서 계승자가 전사하는 등의 이유로 실전(失伝, 전승이 끊김)되었다고 한다. 또한 1945년(쇼와 20년) 일본의 항복 후, 연합군 최고사령관 총사령부(GHQ)의 지령으로 다이닛폰부토쿠카이는 해산되었고, 무도의 조직적 활동은 금지되었다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체결 후인 1953년에 재건됨). 이로 인해 검도가 시나이 경기(撓競技)로 이름을 바꾸는 등, 무도는 전투 기술 색채를 없앤 스포츠로서 부흥을 꾀하게 되었다.

  • 현대:

    • 계승과 변화: 현대에 전승되는 고무도는 옛 형태를 지키면서도 시대에 맞게 변화하는 경우가 많다. 일부는 현대 무도화되기도 했지만, 여전히 다양한 형태로 계승되고 있다. 일본 고무도 협회(日本古武道協会)나 일본 고무도 진흥회(日本古武道振興会)를 비롯한 많은 단체들이 고무도의 보존과 진흥에 힘쓰고 있으며, 도도부현(都道府県)이나 시정촌(市町村)의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유파도 적지 않다.

    • 재조명과 관심 증가: 최근 인바운드 관광 증가 등으로 자국 문화 재조명 움직임이 나타나고 정보 기술 발달과 맞물려 고무도의 인지도가 점차 회복되고 있다. 국내외의 관심도 높아져 수천 명 규모의 문인을 보유하거나 해외에 여러 수련장을 둔 유파도 적지 않다. 또한 무술 연구가 고노 요시노리(甲野善紀) 등에 의해 고무도의 고식적인 신체 운용을 개호(介護) 현장이나 현대 스포츠에 응용하려는 시도가 주목받고 있다.

    • 계승의 어려움과 과제: 그러나 여전히 일자상전(一子相伝)과 같이 소규모로 전승되는 유파는 도장을 크게 열지 않고 일족 내에서만 전승해왔기 때문에, 시대 상황 변화 속에서 다음 세대 계승자가 없으면 쉽게 단절될 수 있다. 유파를 홍보하지 않으므로, 극단적인 예로는 친족 장례식에 참석해서야 비로소 “일족에 어떤 무술이 있었고, 고인은 그 계승자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전승 방법과 관련된 문제나 형해화(形骸化)도 우려된다.

    • 오해와 왜곡: 최근에는 검무(剣舞)와의 혼동이나, 만화, 애니메이션, 게임 등 일부 서브컬처에서 보이는 왜곡된 일본 문화상, 액션 연출(殺陣, 타테)의 영향 등으로, 보여주기에 특화된 전혀 다른 기술이나 창작 무술(심지어 날조된 유파)이 “본래의 고무도”로 젊은이나 외국인에게 오해받는 사례가 있어 그 혼란도 우려된다. 1990년대 이후 오컬트 붐이나 서브컬처(오타쿠 문화) 융성의 영향으로 고무도 역시 중국 무술처럼 공상적, 초자연적인 방향으로 기울어 그러한 취향을 가진 이들에게 문호를 넓힌 측면도 있다.

3. 고무도에서의 형(形)

고무도에서는 형 연습(形稽古, 카타게이코)을 기본으로 삼는다. 오랜 역사 속에서 생사의 경계를 넘어 수행해 온 선인들의 ‘기술의 집적’, ‘마음의 집적’인 형을 반복하여 수련함으로써 심신 단련을 목표로 한다.

형은 유행이나 세태, 개성이나 욕망을 초월한 무색무취의 문화적 소산이며, 수백 년 혹은 수천 년에 걸쳐 변화 없이 계승될 수 있는 비물질적인 기억 매체이다. 물리적 열화나 기능적 열화(진부화)가 존재하지 않기에, “옛것(古)을 생각(稽)한다”는 의미의 ‘게이코(稽古, 연습)’를 가능하게 한다.

  • 형의 의미와 취지: 형의 취지는 “옛사람의 동작을 가르치는 것은 그 길(道筋)을 알게 하려 함이다. 그러므로 그 동작은 쉽고 간단하며 그 안에 지극한 이치(至理)를 포함하고 있다.” (네코노묘주쓰(猫之妙術), 1727년)라고 기록된 것처럼, 운동 기술을 정형화함으로써 합리적이고 낭비 없이 확실한 전수를 가능하게 하는 데 있다. 형 연습에는 ‘수피리(守破離)’ 또는 ‘진행초(真行草)’의 이념이 있으며, 그 종착점인 ‘리(離)’ 또는 ‘초(草)’를 통해 새로운 유파의 발생이나 정신성으로의 이행을 촉진한다. 고무도에서는 초전(初伝)에서 시작하여 극의 비전(極意秘伝)에 이르는 과정에서 형의 모습은 표면적인 영역(表)에서 심오한 영역(奥)으로 나아간다. 더 나아가 ‘기술(わざ)’이 무(無)로 화하여 초월되고 정신의 영역에 이르는 것을 궁극적인 목표로 삼는다는 점을 각 유파의 목록(目録)이나 병법서(兵法書) 등의 전서(伝書)가 시사하고 있다 (선불교의 영향이 큼). ‘기술’ 수련에서 시작하여 ‘기술’을 내면화하고 무(無)의 경지로 나아가는 과정에서, 무(無)를 지향하는 성향과 ‘기술’을 익히는 내면성이 합치되는 특징이 나타난다. 즉, 형에 부수적으로 도리(道理)와 이합(理合い, 이치)을 추구하는 심적 요소가 육성되어, ‘기술’ 위에 품위와 인격을 갖추는 길이 된다.

    • 평화기의 형의 의미: 평화로운 에도 시대에는 경솔함이나 혈기에 치우치는 것이 자신뿐 아니라 가문이나 번(藩)을 파멸시킬 수 있었기에, 오히려 기(気)를 가라앉히는 것이 중시되었다. 무사에게 중요한 것은 ‘조용한 강인함(閑かな強み)’을 갖추는 것이라는 부시도(武士道)의 변화 속에서, 형의 의미로서 기의 진정, 침착 냉정함이라는 요소가 요구되는 측면이 있었다.

    • 형의 구성과 내적 변화: 초전(初伝)의 형은 유파의 기본을 습득하기 위해 단순하면서도 변화가 풍부하게 짜여 있고, 중전(中伝)의 형에 이르면 격렬함과 복잡성이 증가하며, 극의(極意)나 비전(秘伝)과 같은 오의(奥)의 형에 이르면 다시 정적인 요소가 강해지는 유파가 많다. 이는 아래에서 설명할 ‘억제의 미적 규범’과 통하는 관념이다. 또한 초전은 ‘표면(表)’인 동시에 ‘오의(奥義)’라고도 말한다. 이는 하나의 형 자체가 표면적인 영역에서 심오한 영역으로 내적으로 변화함을 의미하며, 중전 이후를 초전의 응용 및 발전으로 보고, 표면의 형을 천변만화(千変万化)시키기 위한 길로 설정하기 때문이다 (좁은 의미의 ‘수파리(守破離)’). 실제로 초전 안에 극의의 한 수가 포함된 유파는 적지 않다.

    • 형의 이론성: 형을 실전의 모의 상황으로 간주할 경우, 앞서 언급했듯이 초심부터 오의(극의 비전)까지 이어지는 단계적 구성 자체가 비현실적이며, 실전에서의 복합적인, 형 이외의 움직임이나 변화에 대응하기 어렵다는 단점이 드러나 형해(形骸) 그 자체가 될 수 있다. 그러나 형은 다양한 실전적 투쟁 형태 속에서 점차 합리화되고 정형화된 것이므로, 본래 실전에서 사용되어야 할 형이 초심부터 오의까지 단계적·계층적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비현실성 자체가 형의 이론성을 증명하는 것으로 간주해야 한다.

    • 형은 ‘이론’: 즉 형은 암묵지(경험지, 신체지)가 극한까지 형식지화된 ‘이론’으로서 존재하며, 다시 말해 형으로 상정된 상황이 아무리 불합리하더라도 그 안에서 요구되는 몸놀림(体捌き)이나 기술에는 조금의 불합리성도 허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 형의 예술성: 고전 무예의 형은 일종의 예술 작품에 해당하며, 작품 내용에는 정신적 측면으로 뒷받침된 형이 나타난다. 형의 구조는 개별적으로 연마된 동작이나 기법(기능미)과 형 전체의 리듬(양식미)이 그 ‘아름다움’을 표면화한다. 동작과 기법에는 ‘무상(無常, 찰나의 미)’, ‘아(雅, 우아함)’, ‘유현(幽玄)’, ‘시부미(渋み, 수수함)’, ‘와비사비(侘び寂び)’, ‘여정잔심(余情残心)’ 등 신토(神道)나 젠(禅) 사상의 영향을 받은 일본 특유의 미의식이 섞여 있으며, 유파명, 유파가(流儀歌), 형의 이름에까지 이러한 미의식이 엿보인다.

    • 리듬과 억제의 미학: 리듬은 박자, 조자, 강약, 완급(서파급(序破急)), 또는 간합(間合い, 마아이)을 의미하는데, 고무도에서는 “형을 습득할 때 부분적인 반복 연습을 선호하지 않는다”고 할 정도로 그 개념이 중요하다 (단, ‘속도’와는 전혀 다른 개념이다). 이는 기능을 형식 안에 숨겨, 무심한 듯한 움직임 속에 무한한 힘을 감추면서도 소박함과 고요함을 추구하는 ‘억제의 미적 규범’이 작용한 결과이다 (젠(禅)의 영향이 큼). 각 전개 속에서 불필요한 움직임이 제거되고 여백으로서의 공간인 간합(間合い)이 나타난다. 이는 수묵화에서 본질을 극도로 추구한 결과로서의 여백과 같으며, 이를 통해 본질만이 상징적으로 두드러진다(본질미). ‘기술(わざ)’이 숙달됨에 따라 현상으로 나타나는 운동은 외견상 깔끔하고 간결해져야 한다는, 간결함에서 ‘미’를 찾는 일본인의 미의식이 작용하고 있다.

    • 무예 고유의 미학: 이처럼 강함이나 임팩트 같은 ‘양적’ 요소보다는, 운동의 간결성, 극도(極め)·예리함(冴え), 흐르는 듯한 운동의 유동성과 같은 ‘질적’ 요소, 즉 문예나 노가쿠(能楽)에서 형성된 ‘억제의 미적 규범’을 무예 안에 받아들여 문화적 가치를 창조했다. 그러나 무예의 발생원은 어디까지나 전투 기술이고 대인성(対人性)이 기본이므로, 고무도의 형은 단지 움직임이 세련되고 아름답다는 ‘억제의 미적 규범’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특징을 지닌다. 형을 보는 제3자(관조자)보다 먼저 싸우는 상대에게 ‘기술이 통하는 것(わざが利く)’이 중요하다. 즉, ‘정(静)에서 동(動)’으로의 전환으로서 ‘기세(勢い)’ 있는 폭발적인 에너지 발산, 그리고 ‘기술(わざ)’의 ‘뻗어나감(のび)’에서 ‘예리함(冴え)’으로의 운동 현현, ‘기술’의 종결 시에는 다음 국면에 대비하기 위해 다시 ‘동(動)에서 정(静)’으로 복귀할 필요가 있다. 관조자 입장에서 보면, 이 ‘정에서 동’으로의 폭발적 전환과 동(動) 중의 ‘뻗어나감’, 그리고 종국에서의 ‘예리함’에서 ‘극도(極め)’로의 ‘정(静)’으로의 전환과 ‘수렴’. 그 사이에 두드러지는 ‘기술’의 날카로움과 역동성이 무예에서의 형의 아름다움으로 연출된다.

    • 기술의 경사성 억제: 또한 ‘억제의 미적 규범’은 목적에 부합하고 효율적이며 경제적인 방향으로 기울어가는 본래의 ‘기술의 경사성’이라는 성질조차 억제하는 경향이 있다. 즉,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기면 된다”는 목적과 그 목적에 대한 효율성을 희생하면서까지 “훌륭하고 아름답게 이기는 것”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며, 이는 현대 무도의 시합에서의 ‘한판(一本)’ 개념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 형 계승의 과제: 고무도의 형 연습은 형의 습득 자체가 수행의 최종 목적이 아니다. 그것을 어떻게 응용하여 실전에서 활용할지가 문제이다. 형 연습에서 가장 우려되는 점은 “후세에 동작(所作)에만 치중하여, 이러쿵저러쿵 여러 가지 기교(わざ)를 만들어내고 기교를 극한까지 연마하며 옛사람을 부족하다 여기고 재주를 부리다 보면, 결국 동작 겨루기가 되어버려 기교가 다하여 어찌할 수 없게 된다.” (네코노묘주쓰(猫之妙術), 1727년)는 기록처럼, 수행 본래의 의미를 잃고 동작에 집착하여 형의 내용이 사라지는 ‘형해화’이다.

    • 우치코미/란도리 도입과 변화: 이러한 형해화 우려를 해소하기 위해 에도 시대 중기에 검술, 유술, 창술 등에서 우치코미 연습(打ち込み稽古)이나 난토리(乱取り, 지게이코(地稽古))가 도입되었다. 이를 통해 형으로 이합(理合)을 배우고, 시합으로 기술(技前)을 연마하는 역할 분담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후 이러한 시합 형식이 매우 성행하면서 형 연습을 소홀히 하는 유파가 나타나는 등 본말이 전도되는 사태가 발생하기도 했다. 이러한 수행 방법 변화에 대해서는 당시 잇토류(一刀流) 내에서 그 득실이 논의되기도 했다.

    • 현대 무도와의 분리: 이후 서양 스포츠가 도입되면서 이러한 시합 형식은 현대 무도로서 새로운 지위를 획득하고 경기화의 길을 걸었다. 현재는 일부 유파를 제외하고 시합 형식은 고무도와 거의 분리되었다고 볼 수 있다.

4. 전승 방법

  • 전통적 전승 체계:

    면허 제도: 고무도의 다수는 기술 진보 단계나 인격을 평가하여 각종 허가(許し)를 발행했다. 예를 들어 텐넨리신류(天然理心流) 검술에서는 먼저 키리가미 면허(切紙免許), 다음으로 모쿠로쿠(目録), 주코쿠이(中極意), 멘쿄(免許), 시난멘쿄(指南免許) 순서였으며, 각 단계에서 형의 목록, 유파의 비결, 유파의 유래 등이 적힌 전서(伝書)가 수여되었다. 시난멘쿄를 얻은 자는 독립하여 새로운 스승이 될 수 있었다.

    • 입문 의식과 서약: 많은 유파에서는 입문 시 입문 의식을 거행하고, 유파의 규율이 적힌 서사(誓詞)에 혈판(血判)을 찍었다 (기청문(起請文)). 서사의 내용은 많은 유파에서 공통적으로, 면허를 얻기 전까지는 부모 형제에게도 유파 내용을 가르치지 않으며, 허가 없이 지도하지 않고, 타류 비판을 하지 않으며, 천하의 정치를 지킨다는 등의 내용이었다. 마지막에는 이상의 맹세를 어기면 신벌(神罰)이 내릴 것이라고 적혀 있었다.

    • 개인 지도: 현대 무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구령에 의한 집단 지도는 이루어지지 않았고, 주로 개인 지도 방식이었다.

  • 현대의 변화: 현재는 옛 방식 그대로의 전수 형식을 고수하는 유파는 줄어들었으며, 현대 무도적인 단급위제(段級位制)나 집단 지도 방법을 도입한 유파도 존재한다. 또한 본래 문외불출(門外不出)이라 해도 현대 사회에서 유파 내용을 숨길 필요성이 낮아짐에 따라, 유파 홍보나 기술 연구 추진 등의 목적으로 서적이나 영상 등을 통해 내용이나 이합(理合い)을 상세히 공개하는 유파도 적지 않다. 따라서 특정 유파에 정식으로 입문하지 않고(스승을 두지 않고) 개인적으로 유파를 배우는 것은, 멋대로 유파의 직전(直伝)을 자칭하거나 타인을 지도하지 않는다는 조건 하에 용인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형의 퍼블릭 도메인화 경향은 메이지 초기 경시류(警視流)가 제정될 무렵부터 나타났다.

  • 소케(宗家)·이에모토(家元) 제도:

    • 제도의 확산: 기본적으로 고무도 지도자 한 명이 일자상전(一子相伝)하는 경우는 드물었고, 많은 사범(師範)을 육성하는 경우가 많았다 (단, 특정 단계 이상은 일족이나 가까운 자에게만 전하는 경우도 있었다). 지도 허가를 받으면 자유롭게 제자를 받아 가르칠 수 있는 유파, 면허는 발행해도 되지만 스승의 허가를 받아야 하는 유파 등 다양했다. 실제로는 현대와 달리 전국적인 조직 구성이 어려워, 에도에서 배운 자가 특별한 지도 허가 없이 고향에서 지도한 사례도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류 △파’처럼 동일 유파 내에 많은 분파가 생겨났다. 메이지 유신 이후, 특히 전후(戰後)에는 교통과 통신의 발달, 그리고 많은 유파의 쇠퇴로 동류다파(同流多派) 현상이 줄어들면서 고무도계에서도 소케(宗家) 또는 이에모토(家元) 제도가 확산되어 전국적인 조직이 만들어지는 사례가 나타나고 있다. 이 제도의 보급으로 많은 유파에서는 하나의 유파·계통당 하나의 단체를 두고 전국에 지부를 두는 방식을 채택하여, 소케에 의한 사전(師伝)·직전(直伝)을 바탕으로 작법이나 기술의 통일화를 꾀하고 있다. 일본 고무도 협회(日本古武道協会)에서는 고무도 보존·발전에 공헌한 소케나 그에 준하는 사범대(師範代)에게 고무도 공로자 표창을 수여하는 등, 고무도에서도 소케는 해당 유파의 역사성과 정통성을 담보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단, 속된 권위주의에 빠져 형해화가 진행될 위험성도 있다).

    • 제도의 문제점: 그러나 한편으로는 유파 본가(本家)의 동의 없이 일방적으로 소케를 자칭하거나, 소속 유파의 허가 없이 분파하여 새로운 단체를 창설하는 경우, 정식으로 면허를 받지 못했거나 제명·파문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멋대로 유파를 자칭하는 등의 문제도 많이 발생하고 있다. 심지어 유파 이름으로 법인을 등기하거나 상표권을 취득하여 유파 이름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는 자도 있다. 이들 중에는 기술 수준의 현저한 저하가 드러나거나, 역으로 다른 계통을 비판하는 일이 공공연하게 이루어지기도 한다. 특히 거합술(居合術)의 에이신류(英信流) 계통에서는 쇼와 시대(昭和時代)에 일부에서 계승 분쟁이 발생하고 거합도(居合道)의 탄생으로 사태가 복잡해지면서 이러한 경향이 두드러지고 있다.

    • 대응책: 이러한 문제를 방지하기 위해 새로운 제도를 도입하는 예도 있다. 예를 들어 덴신쇼덴카토리신토류(天真正伝香取神道流) (본부 계통)에서는 “허가 없이 카토리신토류를 자칭하며 도장을 열고 단위나 면허·두루마리를 발행하는 사례가 끊이지 않고, 카토리신토류의 형과 비슷하지만 다른 것을 가르치기 때문에, 기술 수준을 명확히 하고 정확한 형을 전승하기 위한 일환”으로 헤이세이(平成) 29년(2017년)에 ‘심사 제도’를 도입했다.

5. 타 무술 및 스포츠와의 차이

  • 다른 무술과의 비교:

    • 기원과 영향: 일본 고무도 안에 중국 무술의 요소를 지적하는 연구도 있지만, 그 영향은 일부이며 기본적으로는 일본 국내의 풍토와 시대 상황 속에서 형성된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 신체 운용: 대표적인 특징으로 동작이 골반 (동양 의학의 단덴(丹田)) 중심으로 발생한다는 점이 있다. 이는 일본에 국한되지 않고 서양 외 지역의 전통 무용·무술에서 비교적 많이 보이는 특징이지만, 그중에서도 일본의 경우는 특히 두드러진다(보법(歩法)에서 명확함). 체축(體軸) 방향의 중심 위치가 매우 낮다. “과거 일본 무술에는 현대 운동 이론에서 다루지 않았던 신체 조작이나 심리 조작에 의한 신체 기법이 전해지고 있다”며 고무도의 동작이나 기법이 연구되기도 하며, 고노 요시노리(甲野善紀)가 그 대표적인 인물이다. 고노는 고무도 신체 조작의 특징을 “꼬지 않고, 꿈틀거리지 않고, 모으지 않는다(그리고 버티지 않고, 차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고 지적한다 (단, 고노에 따르면 “정확히 말하면 꼬지 않으려 하고, 꿈틀거리지 않으려 하고, 모으는 동작(タメ)을 적게 하려는 것이지, 전혀 꼬거나 꿈틀거리지 않는 것은 아니다”라고도 한다).

    • 무기술 중심: 무기 사용을 기본으로 한다는 점도 큰 특징이다. 이는 일본의 예로부터 무기에 대한 높은 경외심, 무기 제조 기술·단야 기술의 발달, 무사의 패도(佩刀) 문화 등으로 인해 무기에 대한 신뢰도가 높았던 것과 크게 관련된다. 그러나 일본 무기는 살상력과 방어력이 높은 반면 비교적 무겁고, 일본인은 본래 체격이 왜소한 편이다. 때문에 최소한의 힘으로 효율적으로 몸을 움직이고, 무기를 다루며, 상대를 무너뜨리는 것에 수련의 중점을 둔다.

    • 움직임의 특징: 신체 중심이 낮은 것과 더불어, 부드럽게 뛰어오르거나 가벼운 스텝을 밟는 등의 동작은 기본적으로 보이지 않으며, 무기를 전 방향으로 빠르게 휘두르는 화려한 움직임도 적다. 발차기 기술도 적은 경향이 있다. 궁술의 좌사(座射), 거합술의 좌기(座業), 유술의 좌포(座捕り) 등은 손발의 움직임을 제한함으로써 최소한의 힘으로 신체를 움직이는 법을 배우는 일본 고유의 수련 방법이다. 이러한 신체 조작은 가벼운 무기를 다루는 봉술(棒術, 장술(杖術)) 등에도 파생되어, 거의 같은 무기를 사용하는 다른 나라 봉술의 대부분과 움직임이 질적으로 다르다. 이는 앞에서 언급한 ‘억제의 미적 규범’과 통하는, 일견 수수해 보일 수 있는 소박하고 고요한 움직임이다. (단, 고무도 성립 이전(남북조 시대 이전)의 백병전에서는 기술보다 민첩성이 떨어지는 고식 갑옷을 입고 긴 무기를 휘두를 수 있는 체력과 근력이 우선시되었으며, 이는 기본적으로 고무도와 상반되는 발상이었다. 그러나 지겐류(示現流)나 야쿠마루 지겐류(薬丸自顕流) 등으로 대표되는 일부 유파에서는 오히려 이러한 발상에서 찾아낸 궁극의 형을 전승하고 있다.)

    • 맨손 기술 (유술): 맨손 공격은 무기 사용을 전제로, 무기를 버리거나 와키자시(脇差) 등을 든 전투 종반 상태, 즉 지근거리에서 접근하여 상대의 몸을 잡는 등 이른바 ‘멱살잡이(取っ組み合い)’를 상정한다. 때문에 도수(徒手) 무술에서는 타격(当身)보다 던지기(投げ)나 무너뜨리기(崩し)가 많이 포함되어 있으며, 이것이 ‘유(柔)’술이라 불리게 된 유래이기도 하다. 이 때문에 낙법(受身)은 도수 격투에서 신체적 손상을 줄이기 위한 중요한 기법이 된다.

    • 높은 격식: 기사(騎士)와 서양 검술의 관계처럼, 그 전승을 주로 담당한 것이 지배 계급인 무사였기 때문에 격식이 비교적 높았다는 점도 고무도의 특색이다. 고무도가 쇼군(将軍) 가문이나 다이묘(大名) 가문에서 ‘어류의(御流儀)’로서 학습되었고, ‘무예 상람(武芸上覧)’이라는 하타모토(旗本)가 번주(藩主)에게 무술 시연을 하는 문화가 존재했던 것은 그 격식 높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검도가 나카노 야소하치(中野八十二)는 검술에서 현대 검도로의 변화에 대해, “검도라는 것은 아시다시피 무사 계급이 성행하던 봉건 시대에 자라난 것으로, 그것이 점차 발전하여 민주적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아직 그런 분위기가 다 빠지지 않은 곳이 많다. ‘나는 검도를 하고 있다, 나는 다른 사람보다 좋은 것을 하고 있다’는 귀족적이거나 무사적인 기분이 상당히 남아 있었다고 생각합니다”라고 술회했다.

    • 정확한 전승 계통: 전승 계통(伝系)이 정확하다는 점도 특징적이다. 물론 유파의 시조(流祖)를 전설적인 유명 인물에게 가탁하거나, 창시자가 불명이거나 그 존재를 증명할 수 없는 경우도 고무도에 예외는 아니다. 그러나 현재 전해지는 고무도 유파의 대부분은 적어도 에도 시대까지 그 전승 계통을 정확히 추적할 수 있으며, 이는 세계 각국의 전통 무술 중에서도 드문 사례이다. 주로 무사에 의해 전승이 이루어졌다는 점, 전서(伝書, 목록(目録)) 수여 관습, 근세 당시 높은 식자율 등이 그 이유로 생각된다. 일본 무술사 연구가 와타니 기요시(綿谷雪)는 1969년에 ‘무예 유파 대사전(武芸流派大事典)’을 출판하여 역사 기록으로 남은 수백 개의 고무도 유파를 체계적으로 정리했는데, 이는 전승이 전반적으로 정확하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작업이었다고 할 수 있다.

    • 예법 중시: 예법(礼法)을 중시하는 경향은 일본 문화 전반에 걸쳐 나타나는 특징이다. 특히 고무도의 예법은 많은 유파에서 형(形) 안에 포함되어 기법과 마찬가지로 연마·습득·계승된다는 점이 특징적이며, 이는 신불(神仏, 선인 포함)이나 무기에 대한 예를 포함하는 의식적 측면이 강하다.

    • 전통 예능과의 공통점: 전반적으로 노가쿠(能楽), 가부키(歌舞伎), 니혼부요(日本舞踊) 등 전통 예능과 공통된 동작이 많이 보이는데, 이는 일본인 고유의 신체적 특징, 신체 조작, 미적 감각, 종교관, 또는 상호 교류 때문이라고도 한다. (단, 일본인의 신체적 특징으로 ‘골반 후방 경사’가 거론되며 발뒤꿈치 중심, 고양이 등 자세 경향이 있다고 하지만, 현대에 전해지는 고무도나 전통 예능에서는 ‘골반 후방 경사’는 일반적으로 선호되지 않는 자세이므로, 이러한 예도(芸道)의 신체 조작을 과거 일상 동작의 연장선으로 간주해서는 안 된다는 의견도 있다.)

  • 스포츠와의 차이:

    • 경기성 지양: 서양 스포츠와의 형식적인 차이로는, 앞에서 언급했듯이 경기를 본래 목적으로 하지 않는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이 점에 대해서는 예로부터 찬반양론이 있었다. 고무도의 형 연습 중심의 자유도·응용성이 부족한 수련 형식은 형해화되기 쉽고, 사용자에 따라서는 쓸모없는 것이 될 위험이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타인과 우열을 겨루는 것을 수련의 본지로 삼지 않았기 때문에 예술 분야나 종교 관념과 밀접하게 연결되고 세련되어 ‘무예(武芸)’, ‘무도(武道)’라 칭송받을 정도로 그 가치를 높였다고도 할 수 있다.

    • 경기 형식의 수련: 물론 고무도에는 기사삼물(騎射三物), 통시야(通し矢), 타류 시합(他流試合), 죽도 연습(竹刀稽古), 난토리(乱取り) 등 예로부터 경기 형식의 수련 방법도 존재했지만, 어디까지나 경기와는 무관한 형 연습을 전제로 한 수련이었다. 다만 죽도 연습이나 난토리는 처음에는 형 연습의 보완적 역할이었으나 후에 주객이 전도되어 현대 무도로 이행해 간 것은 앞서述べた通りである.

    • 현대 무도의 스포츠화: 현대 무도는 점차 각종 종목이 올림픽 경기에 추가되는 등 경기 편중 경향으로 본격적인 스포츠화가 거론되고 있다. 형 연습은 여전히 많은 종목에서 기초가 되고 있지만, 그마저도 경기 안에 포함되어(연무(演武) 시합) 그 편중성을 엿볼 수 있다. 단, 다이닛폰부토쿠카이(大日本武徳会) 시대의 무도는 지도자들이 모두 고무도 여러 유파를 수련했기 때문에 아직 경기화에 대해 부정적인 의견이 대다수였으며, 유파라는 개념이 사라졌다고는 해도 고무도와의 차이는 그다지 크지 않았다.

  • 최초의 고무도 영상: 뤼미에르(Lumière)사에서 이나바타 가쓰타로(稲畑勝太郎)가 데려온 촬영 기사 콘스탄 지렐(Constant Girel)은 1897년, 교토시(京都市) 오카자키(岡崎)의 박람회관 앞에서 당시 전승자가 잇토류(一刀流) (오노하 잇토류(小野派一刀流)라는 정보도 있으나 동작은 호쿠신 잇토류(北辰一刀流)에 가까움)의 형을 시연하는 모습을 영상으로 기록했다. 이는 일본 무술을 담은 가장 오래된 영상 중 하나이며, 교토를 촬영한 가장 오래된 영상이기도 하다 (저작권은 소멸되어 YouTube 등에서 시청 가능).

7. 무예십팔반(武芸十八般)

전에서 싸우기 위한 기예를 무예(武芸)라 불렀으며, 이것이 기초가 되어 유술, 검술 등이 생겨났다.

‘무예십팔반(武芸十八般)’은 원래 에도 시대 초기에 중국에서 전래된 말(십팔반병기(十八般兵器))에서 유래했지만, 근세 일본에서 무문(武門)에 사는 자가 습득해야 할 것으로 여겨진 18가지 무술 기예의 총칭이다. 이 18가지 기예의 내용은 시대나 집단에 따라 다르지만, 대체로 아래의 18가지 분류로 정리된다. 어느 경우든 궁도(弓道)가 필두 무도이다. 무사의 세계에서 ‘궁마의 도(弓馬の道)’가 무도 자체를 나타내는 말인 것처럼, ‘무사의 혼’이라 불리는 도검 이상으로 활과 말은 상위에 있으며 무도에서 중시된다. 또한 센고쿠 시대의 전란기에는 칼보다 창이 실전에서 우위에 있었으므로 상위에 있다. 1번부터 4번까지는 거의 고정되어 있으나, 일본 영법(日本泳法) 이하의 순서는 입장에 따라 차이가 있을 수 있다.

  1. 궁술(弓術)·반궁술(半弓術)

  2. 마술(馬術)·기마술(騎馬術)·군마술(軍馬術)

  3. 창술(槍術)

  4. 검술(剣術)

  5. 수술(水術) (영법술(泳法術))·수수술(泅水術)·수련(水練)·답수술(踏水術)·유영술(游泳術)

  6. 거합술(居合術)·발도술(抜刀術)

  7. 단도술(短刀術)·소구소쿠(小具足)·와키자시(脇差)·소태도술(小太刀術)

  8. 십수술(十手術)·철선술(鉄扇術)·철편술(鉄鞭術)

  9. 치기리키술(銑鋧術/契木術)

  10. 함침술(含針術)·취시술(吹矢術) (침 뱉기, 바람총)

  11. 나기나타술(薙刀術)·나가마키술(長巻術)

  12. 포술(砲術)·봉화시술(棒火矢術) (화포, 화전(火箭) 발사 기술)

  13. 포수술(捕手術)·포승술(捕縄術) (체포술, 포박술)

  14. 유술(柔術)·와술(和術)·권법(拳法)·체술(体術)·조토(組討)·합기(合気)

  15. 장술(杖術)·봉술(棒術)

  16. 쇄겸술(鎖鎌術)·치기리키술(契木術)·분동쇄(分銅鎖) (사슬낫, 쇠도리깨, 쇄분동)

  17. 모지리술(錑術) (가시 달린 무기 사용술)

  18. 은형술(隠形術) (시노비(しのび)) (은신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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