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평검은 중국 검술 유파 중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것으로 평가된다. 중국 정부가 비물질문화유산으로 지정한 청평검은 그 명확한 창시자와 역사를 바탕으로 창시 이래 기술이 온전히 보존되어 전수되어 왔음을 자랑한다.
청평검은 도가(道家)의 반원규(潘元圭) 도사가 창안했다고 전해진다. 강서(江西) 용호산(龍虎山)에서 수도하며 주천(周天)의 이치를 바탕으로 창조된 창평검술(蒼萍劍術)은 총 364수로 이루어져 대주천(大周天)을 이룬다고 알려져 있다. 이 364수는 이름은 다르지만 변화의 오묘함이 하나와 같다고 설명된다.
반 도사의 계보는 산동(山東) 기수(沂水)의 맹교화(孟敎華)에게 전수되었으며, 이후 맹교화는 풍희탕(豐希堂)에게, 풍희탕은 양체원(楊棣園)에게, 양체원은 하북(河北) 염산(鹽山)의 가운학(賈云鶴)에게 검술을 전했다. 가운학에 이르러 청평검은 가씨청평검(賈氏青萍劍)으로 분파되었다. ‘비선검협(飛仙劍俠)’이라는 칭호를 얻었던 가운학의 조카인 유문석(劉文石)이 가씨청평검을 전수받았고, 유문석은 이를 마진상(馬進相)에게 전하게 된다. 마진상은 청평검술의 7대 전인으로, 그의 본명은 유진상(劉祥揚)이며 자는 운초(雲樵)이다. 그는 창주(滄州) 서쪽의 군마참(軍馬站) 지휘관을 역임하여 ‘마진상’으로 불렸다. 마진상은 청나라 광서제 시기에 상서 이음치(李殿林)의 강남 도학(과거 시험 관리 감독)을 호위했던 실존 인물로, 뛰어난 무공과 정교한 검법을 가졌다. 마진상은 남방에서 온 부부와의 검술 대결에서 참패한 후 그들의 검술을 연구하여 곤오검(昆吾劍)을 창시했다고 전해진다. 만년에 고향으로 돌아와 사제 가요정(賈耀庭)과 교류하며 평생 터득한 무술을 연마하여 8가지 검법을 엄선했다. 이때 청평검술은 원래 365초식에서 창주 가문의 6초가 추가되어 373초식으로 발전하며 기술 내용이 더욱 풍부해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청평검과 곤오검의 ‘표리 관계’ 및 무당검술과의 상호 영향
청평검술에서 갈라져 나온 곤오검법은 청평검술과 ‘표리(表裏) 관계’를 이룬다고 설명된다. 총 64수로 팔괘(八卦)를 이루는 곤오검법은 특히 보법(步法)을 중시한다. 강용초(康戈武)의 『사진곤오검(写真昆吾剑)』에서는 곤오검법이 “청평검에 없는 보법을 모두 포함하고 있어서, 청평검을 조절하는 역할을 한다”고 명확히 기술하고 있다. 이는 곤오검법이 청평검술의 취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만들어졌음을 시사하며, 곤오검법의 보법은 당시 천진에서 접할 수 있었던 팔괘검술의 보법을 차용한 흔적이 뚜렷하다.
청평검법과 무당검법 또한 밀접한 연관성을 가진다. 청평검술의 본고장인 창주(滄州)와 무당검술이 발전한 천진(天津)은 지리적으로 가까워, 서로 기술을 교류하고 배웠던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무당13세(武當十三勢)의 추검(抽劍) 기법은 본래 청평검술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청평검술에서는 오래전부터 추검(抽劍)이 중요한 기술로 이어져 왔기 때문이다. 무당검술이 ‘신문13검(神門13劍)’이라 불리는 것 역시 주로 추검(抽劍) 기술에서 기인하는데, 이는 청평검술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아 본래 무당검법의 고유 기술이 아닐 수 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조선 중기의 무예서인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의 예도(銳刀)에 나오는 격법(擊法), 격법(格法), 자법(刺法), 세법(洗法) 등의 기본 기술이 19세기 무당검술의 모검4세(母劍4勢)와 동일하다는 점은 간접적으로 청평검과의 연결성을 시사한다. 무당검술의 9대 전인 송유일이 저술한 『무당검보』에는 무당 13세가 아닌 무당 4세만이 등장하며, 이는 격법, 자법, 격법, 세법 네 가지 기술로 이루어져 있다.
청평검의 비전(秘傳)과 내부 전수 방식
현재 전수되는 청평검보는 ‘양곤산-노가판본(杨昆山–卢家版本)’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양씨 청평검문의 정통 계보는 책을 출판한 적이 없으며, 내부 문서와 자료만 존재한다고 한다. 흥미로운 점은 양씨 청평검이 대외 시범 동작과 제자들에게 가르치는 실제 기술이 다른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천변괘월(天邊掛月)’ 기술의 손바닥 방향은 외부에 공개된 것과 내부 전수 방식이 다르며, 이는 실전에서의 취약점과 관련이 있다고 알려져 있다. 이러한 ‘외부 공개 기술’과 ‘내부 전수 기술’의 차이는 무당검법에서도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는 문파의 비전(秘傳)을 보호하고, 단순히 책이나 영상만으로 학습한 사람들을 식별하기 위한 목적이 있다고 설명된다. 유명 문파들은 외부 공개 자료를 일부러 왜곡하여 내놓기도 하는데, 이는 책이나 영상을 보고 훈련한 사람을 가려내기 위함이며, 실제 적전 제자들끼리 동작만 보고도 서로 식별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이러한 전수 방식은 무술의 정통성과 실전성을 보존하려는 깊은 의도를 담고 있다.
청평검, 유구한 역사 속 현재적 가치
청평검은 그 유구한 역사와 명확한 계보를 통해 중국 무술의 살아있는 증거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창시자 반원규 도사로부터 시작되어 맹교화, 풍희탕, 양체원, 가운학, 유문석, 마진상으로 이어지는 전승 과정은 청평검의 정통성을 확고히 한다. 특히 마진상 대에 이르러 곤오검의 창시와 초식의 확장이 이루어졌고, 이는 청평검술의 발전과 심화를 보여주는 중요한 대목이다.
곤오검법과의 ‘표리 관계’는 청평검이 단순한 기술의 나열이 아닌, 약점을 보완하고 진화를 거듭해온 실전 무술임을 입증한다. 또한 무당검술과의 상호 작용은 중국 무술 유파 간의 활발한 교류와 기술 습득의 중요성을 보여준다. 특히 무당검술의 핵심 기술인 추검(抽劍)이 청평검술에서 유래했다는 주장은 각 문파의 독자성만큼이나 상호 영향 관계가 깊었음을 시사한다.
오늘날 청평검은 ‘외부 공개 기술’과 ‘내부 전수 기술’의 차이를 통해 문파의 비전을 보호하려는 전통적인 무술 전승 방식을 고수하고 있다. 이는 무술이 단순히 동작을 익히는 것을 넘어, 스승과 제자 간의 깊은 신뢰와 비의를 통해 전수되는 살아있는 문화임을 일깨운다. 청평검은 단순한 검술을 넘어 중국 무술 문화의 깊이와 다양성을 보여주는 중요한 유산으로 평가받는다.